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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ㅣ 범우 사르비아 총서 301
이미륵 지음, 전혜린 옮김 / 범우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미륵’이란 이름을 처음 안 것은 전혜린의 에세이집에서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그녀가 이미륵 씨의 무덤에 찾아가 추모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당시 나의 호기심은 이름이 참 특이한 사람이구나, 정도로 그쳤었다. 이십대 초반에 대면했던 전혜린이 너무도 강렬하고 찬란했던 탓에 이미륵이란 작가는 그저 묻혀 버린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찾아 읽은『압록강은 흐른다』는 참 좋은 책이었다. 앞선 시대의 어린이가 놀고, 배우고, 사색하며 성장해가는 풍경이 심상한 듯 솔직한 필치로 잔잔하게 담겨 있었다. 일제 침략과 더불어 신구 문화가 교체되던 혼란한 시기, 아이다운 면모를 잃지 않으면서도 배움에 재능이 있고 자부심 강한 이미륵 소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당시 독일사회에서 큰 호평을 받았는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란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가 보다. 이방인인 그가 우리들에게 외계와의 이해에 있어서는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것을 더욱 더 깊이 파고 또 깊이 실천해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209). 이러한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 당시 독일인들에겐 동양의 소년들이 제기를 차고, 연을 만들고, 서당에 모여 공부를 하고, 베개를 쌓아놓고 꿀을 훔쳐 먹다 들켜 매 맞았던 일 등 유년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특히 그 색다른 체험 안에 녹아있는 정직과 겸손, 가족애와 우애 같은 보편적 가치를 지닌 한국적인 미덕들에 반했으리라 생각된다.
전에 동료 선생님과 담소를 나누다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외국인들은 값비싼 선물보다 깨진 도자기 조각 하나에 더 환호한다고. 일리 있는 말이다. 함께 근무하던 원어민 교사들도 대개는 익숙한 서구식 보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장소와 음식, 물건들을 더 좋아하곤 했다. 특히 대표적 회식 메뉴인 소주와 삼겹살은 연령과 국적을 불문하고 환영 받았다. 그들은 양반다리와 젓가락질을 힘들어하고 마시던 잔을 톡톡 털어 다시 내미는 행동 등을 낯설어하면서도, 동시에 즐기는 모습이었다. 사계절 내내 지나치리만치 수수한 차림의 그들은 미지의 것, 독특한 것을 향한 호기심만큼은 열렬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서구 문화를 대함에 있어 우리가 간과하거나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분명 있는 것 같다.
또한『압록강은 흐른다』는 청소년 권장도서를 넘어 어른들에게도 두루 읽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는 매사 균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자부심과 자애심을 두루 갖춘 부모가 등장한다. “네가 자주 말한 것처럼 시대가 변하였다. 과거는 새 문화에 앞서 갔다. 새 문화는 자주 분수를 모른다. 그러나 네가 그것에서 무엇을 배우려고 하든지 그것이 생소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아야 하며, 또 언제나 온화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144) 소년 이미륵은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무엇보다 그의 부모가 좋은 사람들이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엄격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는 마땅히 추구해야 할 본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요즘처럼 아이들이 막대한 자본으로 양육되는 시대, 올곧게 중심을 지키는 어른의 모습은 더욱 절실해졌다.
내 또래의 어른 중에 015B의 노래 한편 따라 부르지 않고 서른이 된 청춘은 없을 것이다. 세련된 청승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그들은 ‘수필과 자동차’라는 예쁜 제목의 노래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우리가 이젠 없는 건 옛 친구만은 아닐 거야. 더 큰 것을 바래도 많은 꿈마저 잊고 살지. 우리가 여태 잃은 건 작은 것만은 아닐 거야. 세월이 흘러갈수록 소중한 것을 잊고 살잖아. 잊혀져가는 시대의 소중한 보고서이자 사랑스런 일기장인 이 책은, 담담하지만 기품 있는 어조로, 유년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책과 정드는 느낌은 참 오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