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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그럴 때마다 기껏 진심에서 우러나는 동정심밖에 줄 게 없는 내게도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에 미묘한 희열을 느꼈다. ... 새로운 것을 인식할 때마다 흥분하고, 일단 어떤 감정으로 뒤흔들리면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청춘의 특징이다. 이 연민이 나를 즐겁게 할 뿐 아니라 주변까지도 편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내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연민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스스로 인정하자 내 피에 어떤 독소가 침투해서 피를 더욱 뜨겁고 빨갛게, 빠르고 격렬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 p.68
걸출한 이야기꾼이자 사랑의 심리학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 '연민'에서 열정적 연민이 야기하는 재앙을 예의 그 남다른 투시력으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 호프밀러 장교가 빈에서 만난 작가에게 자신의 사연을 고백하는 액자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작가는 이 이야기가 실화임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누군가 직접 뼛속까지 체험하지 않고는 이런 대사와 문장이 나올 수 없으리란 느낌이 들 정도로 작품 속 이야기는 뜨겁고 절절하다. 죽은 역사를 살아있는 소설로 부활시키는 츠바이크의 탁월한 재능을 재차 확인하는 기회였다.
주둔지의 헝가리 귀족에게 초대받는 스물다섯의 청년 호프밀러. 그는 예의상 귀족의 외동딸 에디트에게 춤을 청했다가 갑작스런 그녀의 발작에 그녀가 하반신 마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자신의 실수로 상처받았을 그녀에게 꽃을 보내고 그녀는 화답의 의미로 그를 저택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불구가 된 이후 격리된 환경에서 자라온 에디트에게 호프밀러라는 존재는, 친절하게 대해주는 친구 이상의 의미였다. 처음에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호프밀러는 위의 인용처럼, 봉사한다는 희열 하나로 그녀의 기분전환을 위해 헌신한다.
그녀를 향해 우정이나 남매애 이상의 감정을 품어보지 않았던 호프밀러는 이윽고 그녀가 자신을 상대로 품고 있는 집착에 가까운 정열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그러나 열정적 연민은 열정적 사랑과는 달리 애초에 동등구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므로 좀더 건강하기에 좀더 강자의 위치에 놓인 그가 그녀를 내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마는 것이다. 그녀의 연정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대비하기에 스물다섯의 그는 너무 어렸고, 감정에도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숙지하기엔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였고, 보잘 것 없고 평범했던 자신이 미소나 지껄임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는 허영심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처음에 한두 번 맞으면 통증을 진정시키고 마비시키며 기분을 좋게 만들죠. 그러나 육체나 영혼이나 우리의 기관은 불행하게도 놀라운 적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경이 점점 더 많은 양의 모르핀을 원하듯 감정도 점점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되고 결국에는 당신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입으로 '안됩니다'라고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리고나서 상대가 당신을 이제껏 한 번도 자기에게 도움을 준 적이 없는 사람보다도 더 증오하게 된다 해도 마음쓰지 말아야 하는 그런 순간이 옵니다. 친애하는 소위님, 우리는 연민을 제대로 관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관심보다도 더 나쁜 해를 끼치게 됩니다. - p.222
에디트의 주치의였던 콘도르가 호프밀러에게 경고하는 장면이다. 이에 갈팡질팡하며 초조해하던 호프밀러는 에디트의 아버지인 케케스팔바 노인의 간청과,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연민의 감정으로 그녀와 약혼까지 하게 된다. 그 이후 그녀의 장애가 치료불가능하다는 인식을 하고 정신을 차린 호프밀러는 그녀로부터 도망친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자살로써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하지만 연대장의 제안에 따라 전보명령의 형식을 띠고 야반도주를 하게 된다. 결국 그의 도주는 에디트의 상처를 심화시키고 절망한 그녀는 자살하고 만다. 그 후 호프밀러는 자신의 무책임한 연민과 우유부단함이 자신을 사랑했던 한 여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자책감으로 전쟁 속으로 도주하여 영웅이 된다.
그녀의 의심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녀가 바라는 본질적이고 유일한 것, 즉 그녀의 사랑에 대한 무언가를 내가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갔다. 그녀는 이야기 도중에 자주 (내가 아주 열심히 그녀의 믿음과 다정함을 구걸할 때면)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면 나는 얼른 눈썹으로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내 마음의 밑바닥을 알아보기 위해 관측기구를 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 p.346
일체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완전무결한 애정을 갈구하는 여자와 애정을 열정적 연민으로 대체하고는 눈 감고 야웅하는 식으로 나날의 상황을 견뎌내고 있는 남자. 막대한 재산과 막연한 희망만이 두 사람을 위태롭게 받쳐주고 있을 뿐. 이들의 파국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에디트는 조제처럼 밝고 쿨한 여인도 아닐 뿐더러, 호프밀러는 츠네오가 조제를 업어주듯 그녀를 사랑할 수가 없다. 소설 속 실화는 영화 속 동화보다 훨씬 더 가혹했으니. 그런 면에서 콘도르의 통찰력 넘치는 충고는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보편적 사실이리라.
예전의 나도 한때 주제 넘은 연민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쓸데없는 감정이입에 능한 나는 우울한 가정사와 닭똥 같은 눈물 앞에서 즉시 무장해제 되어버렸고, 연민을 제대로 관리할 줄 몰랐기에 그것을 우정 또는 애정이려니 믿었다. 더 이상 감당하기 부담스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안됩니다'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어서 몇 개월을 더 끌려다녔다. 자갈 하나에도 천둥 같은 파문이 이는 상대의 마음을 다칠까봐 하고 싶은 말은 되도록 참았고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었다. 상황을 알고 있던 지인 중의 하나는 차라리 나를 아프간으로 보내는 게 낫겠다고 꼬집기도 했지만 연민에 중독된 자, 어느새 '안됩니다'라는 말을 잊게 되더라는.
영원한 망각 속에서 구원자로 남았으면 좋았을까. 하지만 상대가 제공하는 연민이라는 모르핀에 중독된 자 역시 '그것으로 족합니다'를 잊게 되더라는. 에너지를 탕진한 채 비에 젖은 낙엽마냥 돌아오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이 든 나는 도망치기로 결심, 결국 도망쳤다. 그 날, 카페에서 나오던 나를 붙잡어 세웠던 동자승처럼 보이던 두 여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내게 가족에게 잘하라는 묘한 충고를 하더라는. 도망칠 계기만 찾고 있던 내게 그들의 충고는 곧장 내 방식으로 풀이 되어 '남에게 쓸데없는 신경 끄고 네 가족에게 더 잘하라'는 전언처럼 들렸다. 이후 한동안은 미안함과 자책감으로 내내 불편했지만 그것이 오래도록 억눌러왔던 도주 욕구를 넘어서진 못했다.
호프밀러와 나의 연민은 끝내 책임질 줄 아는 창조적 연민으로 승화되지 못했다. 그 경지에 이른다면 그것은 위대한 사랑이겠지. 불명확한 감정을 거두어들이기엔 너무 늦었고, 불확실한 희망에 전부를 걸기엔 너무 이기적어서, 모든 것이 뚜렷해질 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두려워서, 결국 인간적 나약함 때문에 천사의 의도를 품고도 악마로 기억되는 것이리라. 양심이 알고 있는 한 그 어떤 죄도 결코 망각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p.434)는 호프밀러의 마지막 말처럼 섣불리 내민 손은 나중에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쥐게 된다. 만약 손을 내밀었다면 목도 함께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