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대학 동기 K가 집에 왔었다. 방학이라고 띵가띵가 쉬고 있는 나와는 달리 고등학교에 있는 그녀는 보충수업을 하느라 내내 바쁜 모양이었다. K는 엄마와 이야길 많이 했다. 요즘 연락하며 지내는 한 남자에 대해 엄마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다 괜찮고 어디 하나 흠잡을만한 데는 없는데 가슴이 뛰질 않노라고. 엄마 말씀, 같이 살 남자는 그저 편한 게 최고다. 그리고 넌 누굴 만나도 가슴이 뛰긴 어려운 사람 아니냐. 쉽게 수긍하며 이놈의 가슴이 당최 뜨뜻해져 본 적이 없고 뜨뜻해질 생각조차 안한다는 K. 왼쪽 가슴 속에 개구리라도 들어앉았는지 시도 때도 없이 두근거려대는 나와는 달리 K는 사실 그랬다. 언제나 차고 도도하고 담대했다.
시내에 나와 엉터리같은 영화를 한 편 보고 커피를 마셨다. 이런저런 이야기 도중, 행사에 쓰라고 보내준 돈의 액수를 후배가 잘못 정산해 올려놓았는데 아직까지 정정을 안해서 좀 창피하다고 하자 K는 아무 말 하지 말고 입금시켰던 영수증 스캔 떠서 보내줘, 라고 말했다. 착오니 실수니 등등의 말을 했더니 돈의 액수가 그대로 제 통장에 찍혔을텐데 무슨 얼어죽을 놈의 착오고 실수냐면서 제발 상대방을 헤아리려고 들지 말고 개싸가지스러운 현상 그 자체에만 주목하라고 일침을 가했다. 돈 떼어먹고도 떼어먹었다고 말하는 놈 못 봤다면서 그것도 이미 졸업한 선배가 보내준 돈을 확인 절차도 없이 그 따위로 처리한다는 것은 문제성이 있다고 했다. 마치 엄마처럼 K는 나를 향해 화를 내고 있었다. 왜 넌 걔를 이해하려고 하니. 이해해주지 마. 사실 그 말은 대학 시절부터 K로부터 즐겨 듣던 말이었다.
K는 나처럼 자잘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객관적일 수 있었고 그런 면에서 의지가 되는 친구였다. 물론 그녀는 나의 어리석었던 연애사를 보고 들으며 이런 말 해서 좀 너에겐 미안하지만 난 그래도 항상 정열적인 네가 부럽다, 라고 말한 적도 있었고 그 말이 어느만치 진심이라는 것도 이해했지만 나는 언제나 눈빛과 태도에서 감히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냉기와 카리스마가 묻어나는 그녀를 닮고 싶었다. 내가 어느 순간 활짝 피었다 시들었다를 반복하는 변덕스런 야생화라면 그녀는 토파즈로 만든 차고 푸르고 단단한 돌꽃 같았다. K는 장난처럼 종종 내가 남자였으면 너를 기꺼이 거둘텐데, 라고 말하곤 했다. 난 진심으로 K처럼 야무지고 단단한 남자가 이렇듯 나약하고 변덕스럽고 다정도 병인 나를 좀 거두어줬으면 했다. 그렇다면 사랑보다 더 질긴 존경심으로 그를 위해 노력할텐데, 생각하곤 했다.
시내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밤, 익숙하지 않은 도로로 접어들자 갑자기 헷갈려하며 불안해하는 날 보며 운전을 하던 K는 알아서 집으로 뫼실테니 걱정 말라며 널 어떡하면 좋으냐, 라고 했더랬다. 나는 어떤 사람이 너무 보고싶어서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걸 참고 있었노라고 고백해 놓은 참이었다. 핼쑥해진 내 모습에 K는 막연히 감을 잡고 있었고 나는 추스릴 새도 없이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버렸다. 바닥을 봐야만 정신이 드는 나이기에, 정신이 들어도 원망의 화살 하나 쏠 줄 모르고 도리어 화살촉을 더 뾰족하게 만들어 스스로의 가슴에 대고 겨냥하는 나란 사람을 알기 때문에, K는 차분한 충고 끝에는 늘 씁쓸한 한 마디를 남기곤 했다. 결국 넌 내가 하라는대로 하지 않으리란 걸 나는 알고 있어.
사주를 봤는데 말이지. 내 사주에는 갈고리가 하나 있대. 결국 무엇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거지. 내게 상처낸 것은 사람이든 무엇이든 갈고리로 잡아당겨서 당한 만큼 갚아주고 넘어가야만 되는 사람 있잖아. 내가 그런 사람이래. 사주에 갈고리가 있다니, 사주로 그런 것까지 읽을 수 있다니 참 재밌어.
그 말 끝에 K의 미소는 의미심장하고도 무서웠다. 가슴에 옹이지는 것이 두려워 결국엔 무엇이든 다 좋았노라, 하고 미화시키고 넘어가야만 편히 숨을 쉬는 나에 비해 갈고리를 지녔다는 K는 강하고 독한 사람이었다. K는 예의 없이 다가왔던 것들은 다시 예의 없이 떠나가기 마련이라며 그런 무례한 것들은 너도 무례하게 대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머리로는 그렇지, 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그래도 난 그 사람이 보고싶다, 고 말하는 내 복잡한 눈빛을 K는 침착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넌 다른 사람들한테는 참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 자신한테도 좋은 사람이 되어봐. 대학 시절 무슨 일인가로 징징거리던 나를 토닥이며 K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도 갈고리를 하나 지녔으면 싶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말하지 않고 네가 그랬단 말이지, 라고 옹이를 품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K는 하나의 경험을 통과하면 열을 배운다. 그녀는 결코 징징대지 않고 받은대로 돌려주거나 스스로를 훌쩍 키워버린다. 돌처럼 딱딱한 심장을 지녔을지 모르지만 오래오래 식지 않는 따듯한 돌이다. 나는 항상 붉은 피로 출렁이지만 곧바로 까맣게 죽어버린다. 그녀는 내 정열이 부럽다 했지만 나는 K가 나보다 훨씬 더 원대한 사랑을 할 것이라는 걸 안다. 아무 때나 심장을 내었다 들였다 하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딱 한 번 그녀의 갈고리로 뜨거운 심장을 끌어내어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날이 올 것 같다. 사랑보다 더 진한 존경심으로 나는 K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