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서 집으로 가는 길은 몸은 무겁지만 마음은 가벼운 길이다. 백운역에서 걸어서 7분 거리에 있는 우리집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크게 보자면 기찻길(전철)을 따라 부평공원쪽에서 돌아들어가는 길, 상권이 형성된 큰 길을 따라 가는 길.

예전엔 아침에는 부평공원쪽 길을, 어두운 밤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큰 길을 따라 걸었다. 지금은 큰 길을 따라가다가 샛길로 접어들어 조금 어두운 골목길로 간다. 처음엔 그 길이 어둑어둑해서 겁이 났었는데, 지금은 12시 넘어 들어가도 그 길로 간다. 조금 무섭긴 하지만 우리집까지 가는 제일 가까운 길이다.

백운역에서 우리집으로 가는 길목에는 토스트가게가 두 곳이 있다. 그중 역에 가까운 곳에 있는 토스트가게의 이름은 <토스트가 맛있는 집>이다. 하얀 바탕에 빨갛고 노랗고 푸른 과일이나 채소의 그림이 어우러져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집이다. 이 토스트가게의 남다른 점은 주인들(아마도 동업자 관계가 아닐까 싶다)이 전혀 장사에 어울릴 것 같지 않게 고운 미모와 감각이 돋보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인테리어와 주인이 닮았다. 아침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문을 열어놓는데, 내가 보기엔 아침보다도 오히려 저녁즈음에 손님이 더 많은 것 같다. 난 가끔 저녁을 먹지 않았거나 하기 싫을 때 퇴근하는 길에 토스트를 사 들고 가는데, 이 집엔 주인장 혼자서 그 모든 일을 다 하다보니 손님이 좀 많을 때는 마음이 급한 듯 서두르는 손길이 좀 서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퇴근길에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급할 것도 없어서 느긋한 마음으로 주인장이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면 은근히 재미있다. 토스트는 맛있다. 그중에서도 '스페셜'과 '피자'를 즐겨먹는다. 사실 나는 토스트맛이 거기서 거긴 것 같다. 물론 포장마차에서 파는 천원짜리 토스트와는 다르지만.(그 토스트보단 좀더 웰빙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 토스트가게을 지나면 우측으로 책과 비디오를 같이 빌려주는 조그마한 대여점이 있다. 작은 규모인데도 신간이 많은지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사람들이 많아서 난 그곳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지고 그래서 매일 흘끗 쳐다보고는 지나친다.

책비디오 대여점을 지나면 우리집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 또 토스트가게가 하나 있다. 아마도 <토스토피아>인지 뭔지 하는 이름일게다. 거긴 주로 고등학생으로 추정되는 아르바이트생 두 명 정도가 가게를 보고 있다. 토스트가게의 선구자격이라고 생각하는(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이삭토스트>체인 비스무리한 맛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뭐랄까, <토스트가 맛있는 집>은 집에서 만드는 토스트란 분위기가 풍긴다면, 이 가게는 패스트푸드점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소스와 맛도 이삭과 비슷하다. 여기서 내가 즐겨먹는 토스트는 '피자'토스트이다. 난 빵도 '피자'빵을 좋아하고 '피자'도 무척 좋아한다. 이렇듯 내가 '피자'란 글자와 맛에 정신없이 약한 걸 보니 정말 이탈리아를 가야할 운명인가보다. 큭큭

그 토스트가게 바로 옆의 골목으로 들어가면 곧 <영화마을>이란 간판이 보인다. 내가 즐겨가는 책비디오대여점이다. 주인은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아주머니신데, 책을 참 좋아하시는 분이다. 전에 헌책방을 하셨다는 말에 필이 꽂혀서 한시간이 넘도록 책 이야기를 했었다. 비디오테이프는 많지 않고, 낡고 오래된 책들이 많은 반면에 새책은 좀 부실한 듯 하지만, 일단 조용해서 좋다. 그리고 공간이 좁지 않고 널직해서 여유로운 느낌이 든다. 가끔 기분이 울적할 때, 만화책을 읽어줄 필요가 있을 때, 그곳에 들려서 구석구석에 처박혀 있는 낡은 만화책들을 끄집어 내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사는 동네의 길 건너편은 대규모의 현대아파트 단지가 형성되어 있어 모던한 느낌을 주지만, 내가 사는 동네는 빌라들 사이에 낡고 오래된 단층 집들이 많다. 어떤 집은 정말 많이 낡아서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곳도 있다. 간혹 사람이 사는 집지 아닌지 궁금해 하다가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이상하게도 위안이 된다.

집에 가까워지면 하얀 집이 보인다. 처음에 이 집을 봤을 땐 무슨 장난감집처럼 집 같지 않게 느껴졌다. 지금은 조금 낫긴 하지만 아직도 그런 느낌은 남아 있어서 가끔 그 집 앞을 지나면 대체 왜 이 집은 사람이 사는 집같지 않고 장난하는 기분이 드는지 생각해본다. 하얀 집은 일단 다른 집에 비해서 평수가 작다. 1층엔 거실과 부엌이 있고 아마 2층엔 방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집이 놓여 있는 장소가 다른 집들 사이도 아니고 빈 공터같은 곳에서 자동차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 집엔 담이 없는데 베란다문같은 홑문이 밖으로 드러나 있어서 밤에 안에서 불을 켜놓으면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꼭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듯 민망해서 보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 집 앞을 지나면 왠지모르게 궁금해져서 고개가 그쪽으로 쏠리고 시선이 꽂힌다.  어젠 한 남자가 천장을 보고 침대 위에 누워있고, 한 여자가 열심히 가슴을 맛사지하듯 주물러주고 있었다. 그 곳에 침대가 있는 줄은 어제 처음 알았다. 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을 일일텐데도 난 괜히 낯뜨거워져서 서둘러 그 앞을 지나왔더랬다.

우리 집 안방(안방은 동생차지) 창문으로 밖을 내려다보면 낡은 집들의 마당이 훤히 보인다. 옥상에는 장독들이 줄지어 자리잡고 있고 햇볕 좋은 날은 커다란 이불같은 것이 빨랫줄에 널려있는 모습이 참 정겹게 느껴진다. 예전에 내가 살았던 집도 마당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좁고 길다란 옥상 한쪽 구석에는 장독들이, 중간엔 빨랫줄이 무거운 이불들을 매달고 늘어져 있었다. 엄마가 빨래 좀 걷어오너라,고 말씀하시면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옥상에 올라가지 않으려고 투덜대곤 했었지만, 지금도 햇볕에 그을리는 게 싫어서 태양을 피해 다니지만, 햇볕 구경하기 힘들만큼 다닥다닥 붙은 대도시의 작은 빌라에 사는 지금은(그래도 지금 사는 집은 햇볕이 잘 드는 편이다, 빨래를 말릴 베란다가 없어서 탈이지만) 오히려 꿈에 나타날 만큼 그 강렬하고 온전한 햇볕 가득한 옥상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지금도 이러할진대, 토탈리콜이란 영화에서처럼 순수하게 햇빛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머나먼 미래에는 어쩌면 한줄기 빛을 차지하기 위해서 피터지는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못해 깜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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