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작년 봄에 연락이 끊어진 두 사람이 생각나서 편지를 보냈다. 그동안 일상에 쫓기듯 살아서 항상 그들을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가끔 그들을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비록 장소는 틀리지만 두 사람 모두 외국에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내가 댄스스포츠를 배우면서 친하게 된 디자이너 아저씨인데, 처음 만났을 때가 지금도 생각난다. 까맣고 깡마른 얼굴이 마치 동남아 사람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는데, 아니나다를까 아저씨는 인도네시아에서 몇년 파견근무를 하신 경력이 있고 그래서 인도네시아어라곤 전혀 모르는 내 귀에도 그럴싸할 만큼 유창하게 인도네시아어를 구사하셨다. 그리고 나이차에 상관없이 그 분은 그 당시 내가 유일하게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아저씨가 인도네시아에 계시는 동안, 아주머니께서 일을 내셔서(무슨 일인지는 대충 눈치챌 수 있을게다) 두 분은 헤어지셨다. 아저씨껜 스무살 남짓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운명인지 그 딸의 이름이 내 이름과 같았다. 아마 그래서 아저씨도 처음부터 내 이름을 쉽게 기억하셨을 게다.
아저씨와 한 친구와 나는 삼총사처럼 붙어다녔다. 우린 댄스스포츠 배운 것을 실전으로 옮긴답시고 신림동에 있는 <한국관>이란 관광나이트에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난 그 당시 유행하던 테크노 음악보다 시대에 뒤떨어진 디스코 음악을 더 좋아했는데, 그런 내 취향에 '평일'의 <한국관>은 그럭저럭 맞는 곳이었다. 같이 수업을 들었던 부부등 나보다 나이가 두배는 족히 많을 분들과 정말 즐겁게 놀았다. 그 곳에서 난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 축에 속했고(그때가 27살쯤 되었을 때니 다른 데선 결코 아니지만) 난 경제적인 부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대신 분위기를 띄우는 것 하나만은 꽤 열심히 몰두했다. 그땐 정말 사는 게 재밌었다.
아저씨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분이셨다. 아주머니와 헤어진 후 아저씨의 유일한 낙은 외동딸과 춤이었다. 그리고 굳이 하나 더 꼽자면 우리와의 우정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우리 나름의 일이 있듯이 아저씨의 외동딸도 머리가 굵어지는 만큼 아버지와는 점점 멀어져갔고, 아주머니와의 일로 여자에 대해선 나름대로 정이 떨어져버린 아저씨는 어느날 문득 인도네시아행을 결정하셨다. 언제나 이별은 힘들지만, 이곳에 이미 마음 둘 곳을 잃어버린 아저씨를 붙잡을 순 없었다. 인도네시아에 가신 후에도 아저씨의 핸폰은 꺼져 있을 망정 번호는 그대로 살아있었고 난 가끔 아저씨가 생각날 때면 음성을 남겨서 이런저런 소식을 알려드리곤 했다. 아저씨도 일년에 몇 번씩은 전화를 해서 음성을 들려주셨고 일년에 한두 번은 들어오셔서 얼굴을 보여주시곤 하셨다. 그럼 난 아빠에게 응석부리는 딸처럼 아저씨에게 이런저런 수다보따리를 풀어놓느라 정신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마 2004년 2월쯤이었을 것이다. 난 불현듯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2003년 12월쯤 아저씨를 뵙고 받아놓은 핸폰으로 전화를 했다. 영어회화에 몹시 서툰 내 귀에도 분명히 들리는 그 말은, 결번이란 뜻의 영어였다. 이상한 불안감에 땀이 삐질삐질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난 아저씨가 가르쳐주신 다른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젊은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인도네시아말이었다. 짧고 서툰 영어로 '영어를 할 줄 아세요?'라고 물었지만, 되돌아오는 답은 여전히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인도네시아말이었다. 궁리 끝에 난 아저씨의 이름 석자를 댔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아, 라고 하면서 뭔가 아는 듯이 빠르게 역시 인도네시아말을 내뱉었다. 그 여자는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난 그 여자가 하는 말을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몇 번의 통화를 시도한 후에, 결국 난 포기하고 아저씨가 가르쳐주신 메일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건강하시냐고, 살아계시면 한 마디만 말씀해달라는 그 간절한 어조의 편지에 대한 답은, 없었다...
다른 한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6년전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인터넷이 대중적이고 저렴하게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던, 자주 끊어지거나 아예 접속이 되지 않기 일쑤였던 전화모뎀을 통해 유니텔 상에서 대화를 주고 받다가 친해진 친구였다.
그때 난 채팅이란 걸 처음으로 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채팅방의 분위기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지금처럼 야하고 불순한 목적이 아니라 그냥 심심해서, 단순히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채팅을 하는 분위기가 강했었다. 처음으로 중독성 강한 무언가에 접하는 순진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난 곧 밤을 새워서 채팅을 할 정도로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영화부터 만화, 사랑 등(그때나 지금이나 책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정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두 남자를 알게 되었고, 마침 두 사람이 사는 곳이 내 고향과 비슷해서 내가 부모님을 뵈러 내려가는 날에 맞추어 두 사람을 만났다. 역시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만, 외모만 제외하면 꽤 괜찮다고 생각되는 두 사람과 난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만난 인연이 길게 이어지기가 좀 힘들 수도 있지만, 우린 꽤 길게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 중 한 친구와는 지금도 가끔 전화를 해서 서로 갈구곤 하는데, 내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다른 한 친구는 2년쯤 전에 공부해서 한의사가 되겠다고 뉴질랜드로 유학을 갔다. 혹자는 한의사가 되는 공부를 중국도, 우리나라도 아닌 뉴질랜드에서 하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뉴질랜드의 한의학대학은 졸업하기는 힘들어도 들어가기는 여기보다 좀더 쉽다고 했다.
그 친구도 떠났다. 거제도의 삼성중공업이란 나름대로 탄탄한 직장을 박차고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나는 친구를 위해 내가 한 일은,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말리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고 바람을 집어넣고 부추기는 일이었다. 그 친구가 보낸 편지의 내용으로 살펴보건대, 아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는 먼 타국에서 넉넉치 못한 돈으로 공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 친구는 영어에 약했다. 여기서 준비하는 시간이 적었던 터라 미리 영어를 충분히 공부해가지 못했던 친구는 대화도 통하지 않고 공부하기도 쉽지 않은 상태에서 그곳 분위기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했던 것 같다. 중간중간 보내온 편지에서는 그의 외로움과 암울함이 그대로 묻어났었다.
답답했다. 갈 때는 잘 가라고 응원까지 해서 보냈건만 막상 그 곳에서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고 있으려니, 내가 괜히 부추긴 것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더랬다. 그 친구의 어둡고 암담한 현실과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보이는 마지막 편지 이후 그의 연락이 끊어졌다.
아저씨와 친구의 연락이 끊어진 것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도통 연락이 되지 않는 아저씨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나는 문득 친구에게 생각이 미쳤고, 그 후로 친구에게 몇번 메일을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리고...
한동안 나도 사는 게 바빠서 자주 그들을 생각하진 못했지만, 가끔 그들 생각을 하면 아련한 슬픔같은 감정으로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진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
설사 우리가 평생을 만나지 못할만큼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아니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들이 먼 타국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길 진심으로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