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4. 15 ~ 18

강원도 정선군 고한역 앞 벤치에서 바라다보이는 고한은, 자그맣지만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아마도 예전 탄광촌 시절부터 존재해온 듯한, 다 허물어져 가는 시장 건물의 뒷모습은, 묘하게 뭉클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정선역에서 출발해서 증산역에 도착하니, 고한으로 가는 태백행 기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내가 탈 기차는 그렇게 떠났다.  난 그 기차를 잡아주지 못한, 아니 처음부터 놓칠 것이 뻔했던 그 기차를 못타게 만든 화풀이를, 엉뚱하게도 증산역 직원분에게 해버렸다.  그건 내 잘못도, 그분 잘못도 아니었건만.  증산역 앞의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고한행 버스를 기다리다가, 정선에서 관광도우미를 하시는 분을 만났다. 때마침 인연이 되려는 건지, 그 분은 내가 정선에서 정선아리랑 창극을 듣고 탔던, 정선역으로 가는 버스를 맡았던 분이었고, 고한에 사신다고 했다. 그리고 고맙게도 자신이 타고 가는 차로 고한까지 태워다 주셨다. 또 친절하게도 묵을 곳도 가르쳐 주셨다.  비록 고향은 아니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위해 자원봉사 관광도우미로 최선을 다하시는 그 분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난 이번 여행에서 잊을 수 없는 많은 기억들을 가지게 되었다.  영월과 정선을 흐르는 동강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이, 지금까지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이번 여행처럼 좋은 분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고, 이렇게나 가슴이 따뜻해졌던 적은, 전에도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연푸른빛 강물이 감돌아 흐르는 한반도 지형의 선암마을로 들어가는 비포장 도로나, 

한번 맛보고 나면 거기서 영원히 살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고 하는 어라연으로 들어가는 길의 그윽한 아름다움과, 대조적으로 아무도 없는, 이 세상 오로지 나 뿐인 듯한 길 아닌 길을 가는 아슬함.

정선군 예미에서 고성리까지 들어가는 구불구불 길가의 비탈진 밭.

고성리 매표소에서 동강 연포 마을로 굽이굽이 들어가는 길의 감탄스런 아름다움과, 소사마을 앞에서 연포 마을 앞까지,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서릿발같이 장엄하고 준수한 뼝대 앞에서의 그 먹먹함이란.

제장마을을 지나 가수리에 이르기까지, 그 강변의 아름다운 절벽과 하얀 모래, 다 허물어져 가는 폐가.

매미가 휩쓸고 지나간 후 아직 채 회복되지 못한 밭과 길, 곳곳에 널린 검은 비닐마저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가슴에 담고 싶지 않은 것이 없다.

 

마치 내 할머니,할아버지 같이 선한 웃음과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주시던 거운 강변상회 할머니, 할아버지와 개표방송을 보면서 쳤던 3,5,7 고스톱, 하루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터라 몹시 달게 먹었던 그날의 저녁밥과 부침개와 시원한 막걸리 한잔.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난 듯 그렇게 스스럼없이 낯선 여인네의 손을 끌고 들어가시는 어라연 나룻배 아주머니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아침 드라마를 보며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적어도 석 잔은 받아야 한다시는 아저씨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꽤 이른 아침부터 흑염소 국에 말린 밥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울퉁불퉁 산길을 트럭의 뒤에 타고서 얼큰해진 볼을 스치는 상쾌한 바람 맞아가며 내려가는 기분이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물을 만지고, 그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찐득한 몸뚱이를 만지고, 그물을 펴는 법을 배우게 해주신, 다음엔 꼭 고추농사 거들어줄 일꾼들을 데리고 오라며 웃으시던, 어라연 입구에 사시는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매콤 쫄깃한 메기 매운탕 한 그릇.

교통이 여의치 않은 영월과 정선의 곳곳에서 기꺼이 차를 태워주시던 여러 분들-대구에서 온 연인들, 선돌의 음식배달아저씨, 청령포 동강민박 아저씨, 거운리 새동강래프팅아저씨 등등-과 연포민박에서 우연히 만나 하룻밤 지낸 인연으로 연포에서 가수리를 거쳐 정선읍내까지 더듬어 오는 그 아름다운 여행길에 기껍게 자리를 내준 서울 사는 박현미씨 부부.

해발 780m에 있는 여학교보다 아랫쪽에 남학교가 있는 건, 여학생들의 아름다운 종아리 선을 위해서도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게 분명하다면서 즐겁게 조잘대던 고한의 여학생들.   어찌하다보니 고한까지 들어와서 이젠 빼도박도 못하신다는 뭔가 사연있을 법한(?) 무지 싼 분식집 할머니의 푸짐한 인심.

말하지 못한 것이 많다. 말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그 곳의 아름다움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아니, 나의 글재주로는 불가능하다.   직접 가서 봐야만 알 수 있다.

그리고......

난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다시 한번 그들을 떠올리고, 또 한번 내 가슴이 따뜻해지고, 다시 기억 속에 고스란히 잘 갈무리한 후, 내일을 위해 잠들 것이다.

 

-- 동강 가기 전, 품에 안고 즐겨 읽었던 책이다. 

 마치 내가  그 길 위에 서 있는 듯 더듬더듬 그의 책을 다시 읽고 나서,  동강에 가고 싶은 맘이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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