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토요일, 세 명의 여인네 길을 나서다.

 

08:17 ~ 10:50  영등포역에서 논산역까지,  기차비 10,300원/1인당
 
 가슴이 설렌다.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옥 대청마루에 앉아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못내 섭섭하다.

12:00~12:25  논산역 시내버스 종점에서 노성읍까지,  830원/1인당(버스표), 
 
 논산역을 나와 오른쪽으로 꺾어 100m쯤 걸어가면, 왼쪽으로 버스종점이 나온다.
 거기서 노성리 가는 버스는 15분에 한대씩 있다는데, 내 눈엔 강경으로 가는 버스만 자주 보인다.
 썬글라스 낀 어느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가 지나가는 아이를 붙든다. 처음엔 그 아이의 아버지인 줄 알았으나, 아이의 서 있는 모양새나 대화의 분위기로 보건대, 아니다. 그 썬글라스 낀 아저씨, 나중에도 얘기하겠으나 재밌는 인물이다.

 시원하다. 에어컨 바람보다 더 상쾌하다. 버스의 창을 한껏 열어젖히고 시골길을 달리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살 것 같다.

 노성읍내에서 내려 위로 100m 정도 올라가면 신호등이 하나 보이고, 길 건너 왼쪽으로 윤증고택 350m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고택으로 가는 길, 논에 모내기가 한창이다.  매끄러운 수면에 비친 풍경이 마치 거울에 비친 듯 아름답다.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앞으로 보이는 건물이 노성향교이고, 그 오른쪽으로 살짝 비껴 윤증고택이 있다.

 고택에 들어서니 사랑채 대청마루에 파평 윤씨 종부되시는 분과 남자 손님 두 분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신다. 종부께선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봤을 때보다 많이 야위셔서 보는 마음이 안타깝다.

 종부께서 윤증고택엔 원래는 솟을대문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요즘엔 매스컴에서 대문이 없는 개방적인 구조라고 한다고 말씀하신다.   어쨌거나 그런 개방적인 구조 탓에 밖에 잠시 외출하여도 집 걱정때문에 오래 나가 있질 못하신다고.   종갓집 대소사에 이런 저런 객들까지, 예전엔 하인들이라도 많았지만 지금은 손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고 하시는 종부님의 그간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게다.

 잠시 대청마루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으려니, 빨간 모자를 쓰신 종손께서 오신다.  남의 집 좋은 구경에 어찌 빈손일 수 있으랴. 그 분께서 농담삼아 텃밭의 잡초를 뽑던지, 뒷산의 솔잎을 따오라고 하신다.

 도시 처녀가 구절초와 잡초 구별하기도 쉽지 않으니, 우린 차에 쓸 솔잎을 따오겠다고 비닐주머니 하나씩 꿰차고 산을 오른다.
 그런데, 이 솔잎을 따는 일도 만만찮다.  우선 솔잎차를 한번도 마셔본 적이 없는 우리들은 어떤 잎을 따야하는지도 모르니 막막하고, 또 소나무야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대체 솔잎의 어떤 부분을 따야하는 건지 알 수 없다.  결국 우린 금방 구별할 수 있을 거라는 종손님의 말씀을 떠올리고는 푸르게 올라오고 있는 어린 솔잎을 조심스레 딴다.

 찐득한 거미줄에 송진에, 게다가 우리 손에 닿는 소나무는 몇 그루 없으니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은은한 솔잎 향기 가득한 곳에서 몸을 움직이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도 있어 평소엔 경험하기 힘든, 좋은 추억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린 솔잎에게 미안해하면서 솎아내다가 차라리 잡초를 뽑는 게 낫겠다며 내려오니, 종손께서는 사랑채 누마루로 올라오라고 하신다.

 큰사랑방보다 조금 높이 들어올린 누마루에서는 우물과 연못과 저 멀리 논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평화롭게 느껴진다.  누마루의 창 턱 높이는 사람 머리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누우면 밖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  또한 그 턱에 팔을 올려 놓으니 그지없이 딱 편할 높이이다.

 큰사랑방과 그 뒤의 골방 사이에 있는 미닫이여닫이문은 독특하다. 미닫이로 열고 그 문틀과 문짝이 맞물린 상태에서 여닫이로 열리는 문이다.   이 문은 안채에서 준비된 음식들을 골방을 통해 큰사랑방으로 쉽게 옮길 수 있게 필요할 때 방 사이의 칸막이를 완전히 열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우리 조상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또한 안채로 들어오는 방문객을 확인하고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아랫부분이 뚫리어 있는 안채중문 앞의 내외벽이나,  빗물의 배수가 잘되도록 곳간과 안채 사이의 기단과 처마의 높이와 폭을 다르게 사선으로 해놓은 것이나,  안채 대청 위의 날렵한 대들보와 널직한 대청의 아름다움과,  며느리가 거처하는 건넌방 뒷쪽에 높이 돋우어져 있는 화단에서 바깥 구경을 하면서 시집살이의 고됨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게 배려한 것 등에서 우리 조상의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생각과 마음씀을 엿볼 수 있다.

 폐가 될까 조심조심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종손께 인사를 드렸다.   올 가을쯤엔 담배와 인삼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의 찻집에서 구절초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을 것이란다.

15:15~15:45 노성에서 다시 논산으로, 버스표가 없으면 850원/1인당

16:05~16:15 논산에서 관촉사로, 역시 시내버스요금 830원/1인당,                        관촉사 입장료 1,500원/성인1인당

  관촉사로 가는 버스의 운전기사 아저씨는 재밌는 분이다. 여고생부터 초등학생, 복고풍 장발이 인상적인 젊은 남자에 이르기까지, 차를 몰면서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특이하게도 마이크에 대고 동네방네 크게 인사하는 아저씨는 처음 오는 손님도 자신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으면 버스를 출발시키지 않을 거라고 하신다.    그런 아저씨의 투정(?)이 왠지 밉지 않고 재밌다. ^^

 관촉사 입구에 내리면 낮은 산 중턱에 있는 관촉사가 보인다. 버스정류장 앞에는 좀 알려진 관광지에 가면 어딜 가나 있을, 조금 허름한 식당들이 몇 있다.    일주문은 늘씬하니 꽤 볼만하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 사천왕문을 지나 울창한 숲으로 들어서면 입구와는 다른 느낌이다.   사천왕문을 지나 겹겹의 계단을 오르면 기념품 가게가 있는 강당 앞에 이르게 된다.  강당 아래를 지나면 대웅전인데, 거기를 곧장 올라가지 않고 강당아래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편편한 평지가 나온다.  거기서 내려다보는, 하늘아래 저 멀리 일주문이 보이고 그 뒤로 펼쳐지는 드넓은 논밭등 확트인 풍경이 꽤 괜찮다.

 뒤를 돌아 돌로 된 해탈문 아래에서 그 석문을 통해 설핏 은진미륵을 보고,  겸손한 마음가짐을 일깨우라는 의미가 깃들어져 있는 낮은 높이의 해탈문을 지나 관음전 앞에 서면,  다른 곳과 다르게 이곳의 관음전엔 불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관음전의 정면 중앙의 창을 통해 은진미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런 기법을 건축에서는 '차경'이라고 하는데,  조각작품을 닫집 안에 넣어 사람의 손에 의해 하나의 고정된 장면으로 완성시켜 제시하는 서양의 '장경'과는 달리,  여기에는 주변요소를 포함하는 큰 틀을 제시하는 포괄적이고 은유적이며 간접적인 방식으로 외부의 경치를 빌어 '관음전의 창'이라는 일정한 프레임 안에 경치를 담는 방법으로,  18.2m라는 거대한 불상의 크기가 그 그릇인 건물의 크기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 기막힌 시각조작기법을 이용한 것이다.
  생각해보라. 이 큰 불상을 건물 안에 넣어야 한다고 하면 그 건물이 얼마나 커져야 할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건물의 크기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의 크기인 것이다. 눈높이, 시선각도, 거리에 따라서도, 보이는 불상의 모습은 수시로 바뀐다.

 삼등신의 거대한 은진미륵은 그 크기와는 달리 상당히 귀엽고 친밀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얼굴부분과 손부분의 조각은 조금 세밀하나 하반신의 옷주름등은 단순하고, 상반신과 하반신의 이음새가 매끄럽지 못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위엄있으면서도 친근한 모습이다.

 은진미륵앞 석등의 화사석이 만들어내는 공간 사이로 은진미륵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좀 아쉽다.  자료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탓이다.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16:55~17:05 관촉사에서 논산역으로, 역시 버스표가 없어서 850원/1인당
 
 논산역전 좌측에 있는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사실 맛이 별로 없었다. ^^;    관촉사에서 막걸리라도 한 사발 마시고 싶었는데, 기차 발차까지 시간이 얼마남지 않아 역전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는다.   조금 싱겁긴 하지만, 시장이 반찬이다.  거기에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까지 하나 물고 앉아 있으니 괜스레 행복하다.

16:04~20:43 논산역에서 영등포역으로, 갈때와 똑같이 10,300원/1인당
 
 이제 녹음이 무성한 산과 들이 사뭇 싱그럽다.   벌써 코끝을 스치는 싱그러운 초목의 향기와, 머리카락 휘날리게 씽씽 달리던 버스 창으로 숨막힐 듯 밀려오는 바람의 상쾌발랄함이 그립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 옛것의 아름다움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숨쉬며 삶의 작은 기쁨을 공유하는 이들이 있어서 좋다.

 낯선 이들을 위해 어쩌면 자신들의 사적인 공간을 양보해주신 파평 윤씨 윤증고택의 종손,종부님, 그런 분들이 계셔서 소중한 우리 것들이 지켜지는 것이리라.

 

덧붙이는 글)

    1. 윤증고택에 가려면 가기 전에 미리 예약을 하여 허락을 구해야 한다. 

    2. 서울에서 당일치기가 가능하다.  소풍 가는 기분으로 미리 도시락을 싸가지고 간다면, 차비를 포함한 비용이 도합 3만원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3. 차를 가지고 간다면, 강경포구의 미내다리를 보는 것도 좋겠다. 찾아보면 논산에는 볼거리가 꽤 많다. 개태사, 쌍계사, 계백전적지를 비롯해서 서원, 향교도 여럿 있다.        

    4. 1박 2일의 일정을 생각한다면, 관촉사를 들러 윤증고택을 거쳐, 계룡산의 갑사나 동학사 근처에서 하룻밤 묵는 것도 좋겠다.  아, 대둔산도 들러봄직하다. 좀더 무리한다면 공주나 부여도 가능하다.

    중요한 건, 어딜 가든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 윤증고택과 관촉사를 방문하기 전에 열심히 읽은 책이다.

다른 책이나 자료의 설명에서 반복되는 이야기에 좀 식상한 분이라면, 건축학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이 책을 한번쯤 읽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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