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릴 적 집안 대대로 내려온 족보의 맨 뒷장을 찢어내 연을 만들었다. 남이라 해도 좋을 사람들의 이름과 관직이 적혀 있는 페이지였다. 그는 그 종이 묶음이 별것 아니라 생각했다. 물론 연을 만든 사실이 아버지에게 발각되었을 때 그의 이름은 종이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


 

연은 적합함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너무도 잘 날았다. 멀리…… 아주 멀리…….


 

그가 집으로 돌아온 시각은 이른 아침이었다. 현관을 들어서는 그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한참을 방에 누워 있던 그는 오전반 수업을 마치고 온 아들에게 서커스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아들은 근래 거리에 나붙은 포스터를 보고 서커스가 보고 싶다, 했었다. 그건 순전히 포스터 구석에 박혀 있는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그 사진은 왼쪽 엉덩이 중앙에 다리 하나가 더 뻗어 있는 소의 사진이었다. 여러 기괴한 동물들의 사진이 있었지만 덩그렇게 다리 하나를 더 달고 있는 소의 사진은 유독 아들의 눈길을 끌었다. 사진 속의 소는 비정상이었다. 그 비정상에 아들은 마음이 끌렸다. 겁이 난다거나 징그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신선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뜬금없이 서커스를 보러 가자 말하는 그에게 아내가 말했다.


그런 거 봐서 뭐가 좋다고…… 왜 데려가려고요?”


흐린 눈으로 아내를 쳐다보던 그가 대답했다.


보고 싶다잖아.”


그는 회사에서 흰색 안전모를 집어던지고 퇴근했다. 아침에 출근한 작업반장이 철야 작업 속도가 더디다며 도크 안 배 주위를 오리걸음 시켰을 때 그는 서커스를 보리라 마음먹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다섯 번째 다리를 허공에 뻗고 서 있을 소가 생각났고 아들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오리걸음에 쑤셔오는 다리 때문이 아니라 아들의 얼굴이 생각나 안전모를 쥔 손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도크 바닥을 방향성 없이 굴러다니는 안전모를 보며 이제 그와 가족들의 인생이 어디로 방향을 틀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서커스가, 정확히 말하자면 소의 다섯 번째 다리가 보고 싶어졌다.

 


그와 아들이 원형 서커스 천막이 처져 있던 해수욕장 근처 공터에 도착했을 때 천막은 걷히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오랫동안 주변을 기웃거려보아도 끝내 소는 보이지 않았다. 서커스 천막 꼭대기의 붉은 깃발만이 잔잔한 해풍에 나부꼈다.


공터를 배회하던 그가 아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소는 없는가 보구나.”

, 아버지.”


그와 아들은 바람에 날리는 꼭대기의 깃발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아들에게 말했다.


시골집에 할아버지 뵈러 갈까?”

, 아버지.”


그는 아들을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우고 자신의 몸을 꽉 껴안으라 당부한 뒤 오토바이를 시골집으로 몰았다. 한 시간 넘게 달려간 시골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당 한편에서 백구만이 바닥에 배를 대고 숨죽이고 있었다. 그를 본 백구는 펄쩍펄쩍 뛰다 목줄에 목이 걸려 컥컥거렸다.


백구가 아프겠구나. 목줄을 풀어줘라. 너무 짧구나.”

, 아버지.”


목줄이 풀린 백구는 앞발을 그의 허리춤에 올리고 얼굴을 비볐다. 앞발 양옆으로 손을 넣어 백구를 안고 눈을 맞춘 그가 아들에게 말했다.


백구는 이름이 없구나.”

백구가 이름이잖아요. 백구.”


백구가 마당을 벗어나 추수가 끝나 휑한 논으로 달려 나갔다. 벌판 한가운데 선 백구는 시골집을 바라봤다.


백구가 답답했었나 보다.”

그랬었나 봐요.”

왜 저렇게 짧은 줄에 묶어둘까?”

도망갈까 봐 그렇겠죠.”

긴 줄에 묶어둬도 도망가지 않을 텐데…… 도망가더라도 돌아오지 않을까?”


한자리에 서 있던 백구가 속력을 높여 시골집으로 뛰어오는 것이 낮은 담 너머로 보였다. 그가 백구를 향해 달렸다. 아들도 백구야, 하며 따라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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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거실로 모여들었다. 4명이 전부였지만 긴장감만큼은 김일과 안토니오-이노키가 벌이는 세기의 대결을 보기 위해 이장 집에 모인 시골 마을과 다르지 않았다. 철야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서야 퇴근한 아버지는 잠에 취한 상태로 거실 중앙에 누워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들어가 잠이나 자이소. 어머니가 채근했지만 아버지는 대꾸 없이 눈만 가만히 끔벅였다. 아버지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던 어머니도 전투를 준비하는 행주산성의 아녀자처럼 삶은 달걀과 수박 화채를 들고 와 아버지의 머리맡에 자리를 잡았다. 뭐하노, 빨리 온나, 시작한다. 난 어린 마음에 긴장감을 못 이기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초등학생 동생을 급하게 불렀다


일요일 오전 10. 우리 가족은 들키면 남사스러울지 모를 긴장감을 서로 감추며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작한다. 잘하자.”


아버지는 3.1 운동을 결의하는 독립투사의 얼굴로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잘하자라는 말을 했다. 뭘 뜻하는지 잘 모르더라도 우리는 잘하리라 다짐했다. 그 결의의 일환으로 난 동생의 손을 꾹 잡았다. <우리들의 천국>에서 홍학표가 갑자기 사라진 최진실의 고향 집을 찾아가 오열할 때 이후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리모컨으로 툭툭 텔레비전 소리를 키웠다. 우리 가족이 모든 준비를 끝내자 분홍색 하트가 화면을 가득 채우며 <사랑의 스튜디오>가 시작됐다.


달달한 팝송과 함께 화면을 떠다니던 하트가 사라지고 군 단위 디스코텍에 어울릴 것 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 음악에 맞춰 여자 출연자들이 어깨를 덩실거리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난 그 음악이 테크노가 아님에 안도했다. 여자 출연자들이 공중에 내던지는 어깨가 진심으로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 , 불안정한 어깨 사위.


광대뼈가 툭 불거진 여자 1번 출연자가 덩실거리는 어깨로 안녕하세요. 지긋지긋한 더위와 장마를 잊게 할 시원하고 뽀송뽀송한 여자 1번 김수정입니다. 크리스털 킴으로 기억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걸 보고 있으니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졌다. 처조카임에도 아버지의 집안 자랑 레퍼토리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촌 누나가, 지성인 중의 지성인인 누나가, 삐걱대는 어깨춤과 함께 쌍팔년도 멘트를 하는 건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누나가 누군가. 중고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그것도 약대에 다니는 최고의 지성인 아닌가. 아버지도 대학 진학이 불투명한 내신 11등급의 장손인 나보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한 처조카인 누나를 편애하지 않았던가. 난 맘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후- 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려 보자. 지성인 누나는 다를 것이다. 그렇고말고.


우뚝 솟은 광대뼈와 호피 무늬 블라우스로 센 언니의 전형을 보여준 1, 사랑을 찾으려면 덴탈클리닉에 먼저 가야 할 것 같은 덧니의 2, 죽도 한 그릇 못 먹었는지 연약한 몸을 강조하며 강수지 코스프레에 여념이 없던 3번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누나의 차례가 되었다. 난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갑자기 고요해진 거실에는 숨소리만 얕게 흘렀다.


누나가 서서히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덩실덩실, 더덩실. 평생 한 번도 흔든 적 없는 어깨가 확실했다. 누나야, 국악 한마당이 아니라고, , 정말. 이런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누나의 삐걱거리는 어깨를 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 , 춤은 거기서 거기지, 고급스러운 멘트만 나와 준다면 실패한 건 아니지, 라는 생각으로 난 슬며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 누나의 멘트를 듣고 깊이 깨달았다. 세상일은 맘 같지 않다는 것을.


통통 튀는 발랄함으로 스튜디오를 휘어잡을 여자 4번 차연해입니다. 친구 같은 애인이 필요하신가요? 그렇다면 절 선택해주세요. 이름은 연해지만 사랑만은 절대 연하지 않습니다.”


누나의 멘트가 끝났을 때도 거실은 여전히 고요했다. 나는 낯이 좀 뜨거워져 수박 화채를 입안 한가득 넣었다. 얼음을 빠드득 깨물어보아도 달아오른 얼굴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뭐, 내 낯 뜨거움이 문제인가, 중요한 건 남자 출연자들이고 그들의 화살표지, 라는 생각으로 쳐졌던 호흡을 되돌렸다.


오뚝한 콧날과 심야 라디오 DJ처럼 잘 자요한마디면 모두를 잠재울 것 같은 누나의 목소리를 생각하니 승산은 꽤 커 보였다. 물론 3번 강수지가 맘에 걸리기는 했다. 그래도 3번 강수지가 <보랏빛 향기>의 강수지는 아니지 않은가.


오늘 게임 끝났네. 연해 화살표 4개 다 받을 끼다. 두고 봐라. 장담한다.”


졸음에 겨운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거실의 적막을 깼다. 어쩌자고 아버지는 저렇게 장담을 하실까. “3번 강수지가 맘에 걸리지 않으십니까?” 말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내가 내신 11등급을 유지하면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핵심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집안 자랑의 큰 축인 누나의 남자는 보통 남자로 안 된다는 생각에 난 매형을 뽑는다는 각오로 남자 출연자 면면을 살폈다. 내 팔이 아무리 안으로 굽었다 한들 남자 출연자들 모두 매형이 되기에 부족해 보였다. 다른 회 차 남자들은 괜찮던데 이번 남자들은 왜 다 이 모양이고, 라는 생각에 기분이 상하려던 찰나, 그때까지 묵묵히 지켜만 보던 어머니가 입을 뗐다.


“2번 남자 괜찮네.”


2번 남자는 키만 멀대같이 크고 삐쩍 말라 김밥에서 당근을 빼고 먹을 것 같은 남자였다. 폭탄처럼 거실을 울린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눈을 한번 흘겼다. 질투의 눈빛은 아니었다. 그건, 아버지가 젊은 날의 영광을 생각하며 내가 저 2번 남자보다 낫지 않나.’라고 동의를 구하는 눈빛이었다. 절절히 동의를 구했던 눈빛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흘린 어머니의 냉소로 어떤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고 급히 일단락되었다. 어머니의 날카로운 웃음에 아버지는 괜히 정수리만 긁적였다. 아버지는 기가 죽은 것 같았다. 정보석의 열혈 팬이었던 어머니가 아버지께 냉소를 보내는 건 이해가 되는 바였다. 아버지는 진한 쌍꺼풀과 깊은 눈을 가졌지만, 결코 정보석 풍의 얼굴이 아니었고, 그 순간, 거실 바닥에 사각 팬츠 차림으로 누워 한 손으로 배를 두드리며 삶은 달걀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른자가 목에 걸려 컥컥거리기까지 했다.


시작과 함께 모두의 가슴을 졸이게 한, 냉소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 출연자 소개가 끝나고 방청객들의 기계적인 환호 속에서 사회자인 임성훈과 박미선이 무대로 나왔다. 대한민국 처녀, 총각들을 책임진다는 사명감 때문에 어깨가 무겁다는 너스레를 떨며 곧 출연자들과 짧은 인터뷰를 했다. 3번 강수지와의 인터뷰였다. 분명 인터뷰를 했을진대 통편집된 여자 1번 호피와 2번 덧니를 생각하니 일순 마음이 짠했다. 그 마음도 잠시, 3번 강수지의 인터뷰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3번 이은지 씨는 보기에 매우 약해 보여요. 자신을 보호해 줄 남자를 좋아하실 것 같은데. 그런가요?”

, 맞습니다. 제가 몸도 약하고 마음도 여린 편이라 저를 잘 돌봐 줄 수 있는 아빠 같은 남자가 좋습니다.”


3번 강수지의 답변이 끝남과 동시에 카메라는 4명의 남자를 한꺼번에 비추었다. 남자들 모두 자신이 심신이라도 되는 듯, 당장에라도 손가락을 허공에 찌르며 <욕심쟁이>를 부를 것 같은 얼굴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자들의 미소를 보니 불안한 맘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누나야, 정신 똑바로 차려라, 쉽지 않겠다.


그리고 이 사람들아. 강수지랑 심신이랑 헤어진 거 모르시나? 심신 미소는 이제 안 통한다는 거 진정 모르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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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하든지 해야지. 이렇게 못 살겠어!”


성한 씨가 현관에서 신발을 벗기도 전에 아내는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30년 경력의 무당도 발을 밸 작두같이 시퍼렇게 날 선 아내의 목소리에 성한 씨는 몸을 움찔거렸다. 사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하고 집안을 살펴보니 쌍둥이들이 거실 구석에서 벽을 보고 서 있었다.


애들은 뛰지 아랫집에서는 올라오지. 이놈의 빌라는 어떻게 지었길래…….”


늘 아랫집의 야박함을 입에 올리던 아내가 갑자기 지은 지 30년 넘은 빌라 이야기를 꺼내자 성한 씨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1년 전, 고등학교 동창 말을 믿고 아내 몰래 담보대출까지 받아 투자한 주식이 휴지 조각이 되는 바람에 지금의 집으로 이사 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최근 6개월 동안 성한 씨는 조선 시대 궁중의 말단 내시처럼 발소리도 못 내는 신세였다. 그러고 보면 층간 소음 문제에서 성한 씨는 무죄에 가까웠다. 원죄를 따진다면 모를까.


성한 씨가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 아이들과 장난치는 아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집안은 다시 평화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평화로운 분위기를 틈타 당신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이네. 나이가 무색한 방부제 미모야.” 같은 말로 환심이나 사볼까 싶어 성한 씨는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뜬 마음이 문제였는지, 순수하지 못한 마음이 문제였는지, 눈웃음을 치며 아내에게 다가가던 성한 씨는 쌍둥이들이 거실 바닥에 어질러 놓은 레고 블록을 밟고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드러누운 성한 씨를 본 아내는 일절의 놀람도 없이 구겨진 인상으로 또 올라오겠네.”라 말했다. 그런 아내에게 섭섭한 마음이 영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한 씨 또한 척추를 타고 전해지는 통증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천둥처럼 거실을 울린 소리에 심장이 쪼그라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딩동.


“202호인데요.”


아랫집 남자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난 몰라 당신이 나가봐. 애나, 어른이나, 어휴…….”


아내가 짜증을 섞어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성한 씨는 미간을 좁히고 문밖에 서 있을 남자를 상상하며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말이라도 해볼까 하다 곧 맘을 정리했다.


앞으로 5. 대출금 갚기 전까지 이사는 어렵다. 쌍둥이들은 이제 5살이다. 참자. 참자.’


성한 씨는 공들여 꾸민 웃는 얼굴로 문을 열었다. 육중한 스모 선수 체형의 남자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발이 자석처럼 바닥에 달라붙고 얼굴 근육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성한 씨는 웃음을 잃어선 안 된다, 절대 잃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 다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애들이 좀…….”


성한 씨가 힘들여 남자와 눈을 맞추고 괜스레 애들을 들먹이는 순간 남자는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낯이 좀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6개월 동안 죽어 사느라 인사도 못 했는데……. 거대한 몸에 축져진 뱃살, 윤기 없는 곱슬머리, 인중에서 약간 벗어나 찍힌 콩 반쪽만 한 점, 모기 목소리까지 생각을 더듬었을 때 성한 씨는 숨이 턱 막혔다. 맙소사!

 

*


성한 씨는 파라다이스 모텔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보았다.


파라다이스는 서울의 여러 모텔을 전전한 끝에 찾은 보물 같은 곳이었다. 회사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골목 깊숙한 곳에 자리해 비교적 마음 편히 드나들 수 있었다.


지난주 수요일, 늘 그렇듯 좌우를 살피고 땅을 보며 모텔 입구로 들어선 성한 씨는 급하게 뛰어오던 건장한 체구의 남자와 몸이 휙 돌아가도록 어깨를 부딪쳤다. 남자는 성한 씨의 눈을 보지 못하고 이마를 땅에 찧을 듯한 몸짓으로 연신 죄송하다 말했다.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성한 씨도 남자를 쳐다볼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대답만 할 뿐이었다.


남자는 바닥에 떨어뜨린 가방을 주워들고 꾸벅 인사한 뒤 서둘러 입구를 빠져나갔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남자를 곁눈질하며 걸음을 옮기던 성한 씨의 발에 휴대전화가 차였다. 성한 씨는 잠시 고민하다 남자를 불렀다.


, 저기요.”

? ……딸꾹.”


남자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딸꾹질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


*

 

그 남자, 아랫집 남자가 분명했다. 모텔 입구에서 마주친 윗집 남자와 아랫집 남자라니. 성한 씨는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같은 생각? 모르지, 몰라……. 유리한 상황인가? 아니야, 딱히……. 여러 생각이 발정 난 말처럼 머릿속에서 날뛰었다. 어떤 것도 확실치 않았다. 두 남자가 모텔에서 마주쳤다는 것과 자칫 공멸할 수 있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딜레마에 빠졌었던 죄수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성한 씨는 창살 사이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외딴섬의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무심코 손으로 훑은 정수리에서 아끼던 머리털이 한 움큼 빠졌을 때 성한 씨는 아랫집 남자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동네 제과점 파티시에가 추천해 준 고급 케이크를 사 들고 아랫집 문 앞에서 심호흡한 후 벨을 눌렀다. 딩동.


누구세요?”


남자의 얇은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나왔다.


안녕하세요. 302호입니다. 하하하.”


성한 씨는 밝은 목소리에 최대한 웃음을 더해 말했다.


, …… 딸꾹.”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성한 씨는 재빨리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딸꾹질까지. 그 남자였다.


하하하. 이사 와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매번 폐만 끼쳐드린 것 같아서요. 약소하지만 이거라도…….”


성한 씨는 케이크를 건네며 남자의 두 손을 잡았다.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아니, 딸꾹…… 그게…….”

받아주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합니다. 하하하.”


남자는 등 뒤에 버티고 선 아내와 성한 씨를 번갈아 쳐다보다 침을 꼴깍 삼켰다. 목울대가 작게 꿀렁거렸다.


저번과 묘하게 얼굴이 달라.’


남자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볼이 푹 파여 광대뼈가 불거져 있었고 퀭한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반 뼘 내려와 있었다. 얼굴빛이 양생이 덜 된 콘크리트처럼 연한 회색인 것과 왼쪽 눈 주위가 원 모양으로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것도 이전과 달랐다.


어쩌면 이 남자도…….’

 

*


모텔에서 마주친 두 남자가 마주한 치킨집 황색 등 아래로 침묵과 경계감이 뻐근하게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성한 씨였다.


선생님.”

, 선생님.”


호칭은 어느새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 저기, 그러니까…… 파라다이스는…… ……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 그런 거요?”


두 남자는 모호한 경계의 말들만 주고받았다. 의심하고 상상하는 사이 말들은 허공을 붕붕 떠다녔다. 긴 침묵 끝에 끙, 소리만 내던 성한 씨가 입을 열었다.


제가 사실 1년 전에 사고를 쳐서 집에 오면 찬밥 신세예요. 낙이 없더군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모텔에 갑니다. 오해는 마세요. 2시간 대실 끊어서 영화나 만화책 보며 낄낄거리다 오거든요. 그때도…….”


성한 씨의 말에 남자는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목소리도 한층 커졌다.


, 그러세요? 저는 철야 근무라 말하고 숙박 끊어 밤새 게임하다 오는데. 그 재미 아무도 모르죠. 크크크. 역시 파라다이스가 최고예요. 시설 좋지, 주인 친절하지. 숙박 5번에 대실 1번 무료인 건 알고 계세요? 저 대실 쿠폰 4장 있는데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하하하.”

, 그래요? 하하하.”


두 남자의 무수한 모텔 경험담과 술기운은 그들을 의형제로 만들기 충분했다.


형님도 참 딱하십니다. 어쩌다 그런 일을 벌이셔서…….”

내가 보기엔 동생이 더 딱해. 난 맞고 살지는 않잖아. 그건 그렇고 우리 애들이 너무 뛰지? 미안해, 동생.”

아이고, 아닙니다, 형님. 뛰어야 애들이죠.”


*

 

다음 날 아침, 성한 씨는 아내에게 어제 아랫집 남자 만나서 따끔하게 이야기했어. 이제 그럴 일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아내는 몇 번씩이나 정말?” “진짜야?” 되물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출근길의 지하철은 변함없이 북적였다. 사람들에게 밀리고, 치이고, 끼였다. 그럴 때마다 성한 씨는 파라다이스를 상상했다. 서류 가방 깊숙한 곳, 그곳에, 파라다이스 2시간 체험 쿠폰이 들어 있었다.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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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정해진 지루한 회의였다. 영어에 한 맺혀 두 딸과 부인을 몽땅 캐나다로 보내버린 기러기 아빠 김 부장이 회의를 소집한 속셈은 뻔했다. 무의미한 말들이 오가는 회의에 모두가 지쳐갈 즈음, 결론 없이 서둘러 회의를 끝내며 다들 고생했는데 맥주나 한잔할까?”라는 말로 자칭, 소소한 저녁 식사를 제안할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일 년 중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지 아닌가. 막막한 동지의 밤을 어떻게 견딜까 궁리하다 퇴근 시간 무렵 업무를 정리하는 직원들의 움직임에 몸이 달고 애가 타 필요치도 않은 회의를 즉흥적으로 소집했음이 분명했다.


역시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김 부장은 회의실 벽걸이 시계를 곁눈질하고는 ,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날도 추운데 뜨끈한 사케 한 잔 어때?”라는 말을 흘렸다. 예상은 했었지만 미처 마음의 준비까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자신 앞에 놓인 업무용 다이어리로 시선을 옮겼다. 새벽녘 내린 서리처럼 회의실 곳곳에 내려앉은 어색한 정적은 생각보다 오래됐다. 숨 막힘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건 내년 차장 진급을 앞둔 박 과장이었다.


오늘같이 추운 날 노글노글 몸 녹이기에 사케가 딱이죠. 최 대리 좋지?”


어떤 징후도 예고도 없이 박 과장 입에 의해 호출된 난, 다이어리에 의미 없이 그리고 있던 하트를 번개 모양으로 가르며 라고 대답했다. ‘수제 맥줏집 사장님과의 로맨스는 끝났나? 오늘은 웬일로 사케. 내가, 오늘, 비싼 사케 먹어서 법인카드 한도 끝내 버린다. 두고 봐라.’ 같은 오기가 발동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벗어진 이마의 빛이 흐려지는 김 부장이 법인카드 한도가 복원되길 기다리며 7평 원룸에서 벌일 사투가 코끝을 찡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이 두렵기는 한가 보네. 사케로 장기전 준비하는 걸 보면.’


김 부장을 향한 비아냥과 동정의 코웃음을 조심스럽게 날리고 자리에 돌아오니 모니터 한가운데 하트 모양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1850. 윤민기 씨 전화. 다시 전화 준다고 함.

 

윤민기? 휘갈기듯 써진 포스트잇의 글자들을 잔뜩 힘주어 쏘아보아도 이름과 얼굴이 연결되지 않았다. 분홍색 하트가 여러 겹으로 보이고 시야가 흐려질 뿐이었다. 윤민기, 윤민기, 윤민기. 비 오는 날 홀로 염불하는 스님처럼 아무리 이름을 중얼거려 보아도 잘 떠오르지 않던 얼굴이 하트와 연결되자 죽비로 머리를 맞은 듯 번쩍, 떠올랐다. , 민기. 군을 제대하고 대학 시절 내내 함께 지낸 룸메이트였다. 대학 4년 동안 학교에 지불한 돈이라고는 건강검진비밖에 없는 장학생에다 아마추어 합창단 지휘자에게 사랑받았던 테너 독주자. 한때 합창단 반주자 선배를 두고 경쟁했던 연적이기도 했다.


김 부장이 저녁을 함께할 동지들을 향해 달뜬 말투로 업무 마감을 종용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업무 마감으로 분주한 사무실을 청량하게 울린 전화에 김 부장은 고개 쑥 빼고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이 자식 안 죽고 살아 있었네. 잘 지냈냐?”

그냥 그랬지, . 너는? 아니다. 만나서 이야기하자. 부탁할 일도 좀 있고. 바쁘냐?”

거절할 수 없는 묘한 말이었다.

오늘?”

. 나 지금 너희 회사 앞이야.”


통화를 엿듣고 있을 김 부장의 동의를 얻기 위해 수화기를 다른 쪽 귀로 옮기며 김 부장 자리를 쳐다보았다. 김 부장은 고개를 숙이고 한쪽 다리를 떨고 있었다.


큰일 있는 건 아니지?”

큰일은 아니고…….”


민기는 비밀을 입 밖에 처음 내는 사람처럼 끝을 길게 늘이다 말을 이었다.


나 이혼했다.”

? 이혼?”


나의 격양된 목소리에 김 부장은 -” 하고 작은 탄식을 뱉으며 떨던 다리의 속도를 차츰 늦추었다.


*

“5년 만에 나타나서 이상한 소리나 하고. 누구였냐? ? 혜지 선배?”

그런 거 아니야, 인마.”

그럼 뭔데? 서로 죽고 못 살던 사람들이.”


민기는 우시장에 다다른 소처럼 우울과 체념의 눈빛으로 날 바라보다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두 달 전쯤이었나. 평소와 다름없이 퇴근해 집에 갔는데 혜지가 퉁퉁 부은 눈으로 그러더라. 나에게 할 말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다고. 그게 끝이야.”

……

당황스러웠지, 화도 나고. 그런데, 그게, …… 이해되지 않으니까 오히려 쉽더라. 거부할 수 없었어. 홀린 것처럼.”


민기는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터져버린 감정을 단속하는 몸짓 같았다. 나는 별안간 재채기하는 낙타를 생각했다. 재채기, 낙타의 재채기, 재채기하는 낙타.


빈 소주잔을 빙그르르 돌리던 민기는 깨물었던 파리한 입술을 풀며 말했다.


“10년 전 오늘, 우리 뭐 했는지 기억나냐?”

“10년 전? 글쎄…….”

우리 홍콩에 있었어. 동지. 내 생일 핑계 삼아 혜지랑 셋이서 여행 갔었는데 기억 안 나?”

, 홍콩…….”


잠자던 기억들이 유성처럼 쏟아졌다.


둘이 홍콩 좀 가자. 그 성당에 가보고 싶거든.”


5년 만에 나타난 친구의 부탁치고는 싱거운 부탁이었다. 입에서 픽-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 가자. -마거릿 성당 가서 유덕화 흉내도 내고 양조위처럼 에스컬레이터도 타고. 오리엔탈호텔 가서 장국영 따라 하지는 마라.”

알잖아, 난 그럴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거.”


*


만취한 민기를 택시 태워 보내고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회사 앞을 하릴없이 서성이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 동지의 동지들이여. 동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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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 씨는 자신의 의무에 최선을 다합니다. 국가나 직장에 대한 의무는 아닙니다. 그 의무는 12 간지를 한 바퀴 돌고도 한 살을 더 더해야 겨우 동갑이 되는 여자 친구를 위해 신조어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뜻을 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물을 탐독하고 적절한 사용을 위해 예문을 만들기도 하는 등 수험생에 버금가는 자세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신조어를 사용해 그녀를 웃게 하는 것이 요즘 태성 씨에게 가장 보람 있는 일입니다. ‘세젤귀*’최애*’, ‘더럽*’ 같은 단어들이 쓰인 편지를 건네면 그녀가 눈에 웃음을 달고 까르르 웃곤 하니 그럴 만도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뼈대만 남은 것 같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 태성 씨에게 그녀가 있어 다행입니다.


건강검진센터에서 대장 내시경을 담당하는 태성 씨는 매일 수많은 엉덩이와 함께합니다. 어쩔 땐 엉덩이들이 자연스레 복숭아로 느껴지니 이제 꽤 친숙해진 것도 같습니다. 그래도 매일같이 복숭아 골 깊숙한 곳에 호스를 넣다 보면 태성 씨의 인생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그것까지는 직업이니까, 먹고살아야 하니까, 견딜 수 있습니다. 힘이 드는 건 따로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오후 검사를 위해 장비들을 점검하고 있을 때,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검사실로 들어왔습니다. 겁에 질린 듯한 얼굴이 검사가 처음인 것 같았습니다. 태성 씨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들어선 자리에서 검사실 내부만 두리번거렸습니다. 검사대에 누우라는 태성 씨의 말에도 대답이 없던 여자는 심호흡을 하고 큰 결심을 한 듯 말했습니다.


저기…… 조금 있다가 검사받으면 안 될까요?”


검사에 겁을 먹거나 은밀한 곳이 드러나는 것을 민망해하는 이들에게 간혹 있는 일이라 별생각은 안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오후, 사무장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태성 씨는 울고 싶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태성 씨. 오해 말고 들었으면 좋겠어. 여러 번 항의, , 아니, 건의가 들어왔었는데…… 태성 씨 상처받을까 봐 말 못 했었어. …… 여성 검진자들이 말하길…… 태성 씨 눈빛이 안 좋대.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수면 마취를 하잖아…… 그러면 그때…… 다른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거지. 그래서…….”


그 일이 있고 난 후 태성 씨는 남자 환자들만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울고 가고 예수님도 두 손 들게 할 고운 심성과는 달리, 양옆으로 쭉 찢어지고 반쯤 감긴 눈과 영양 크림을 발라 놓은 듯 번들거리는 얼굴 때문에 태성 씨는 오해를 받곤 했습니다. 뭐랄까요, 여고생들이 하굣길에 꼭 한 번 만난다는 바바리를 걸친 사나이와 비슷한 인상이라고 할까요.


상황이 이러하니 태성 씨의 기름진 얼굴에도 북북 얼굴을 비비고 오빠, 레알 진심 짱.” “역시 가싶남*이야.”를 입에 달고 사는 애빼시* 그녀의 소중함이 클 수밖에요.


억지스러울지 모르지만 태성 씨가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대장 때문이었습니다.


태성 씨는 언제부턴가 잠자리에 들면 수많은 엉덩이가 복숭아 모양을 하고 눈앞을 둥둥 떠다녀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취하지 않은 날이면 여드름이 듬성듬성 솟은 복숭아가 밤새 태성 씨에게 말을 걸었으니까요. 술을 마시다 이제 어떤 엉덩이도 이겨낼 수 있어, 최면을 걸고 집으로 가던 길에 들른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술 냄새를 풍기며 꼬인 혀로 더듬더듬 주문하는 태성 씨에게도 쿠폰 필요하세요?”라며 톤의 목소리로 친절하게 말하는 그녀가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걸그룹을 보는 삼촌 팬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술에 취해 있는 손님과 아르바이트생의 관계를 대장이, 태성 씨의 예민한 대장이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술을 마시면 어김없이 아랫배가 아파져 오는 태성 씨는 그녀에게 화장실 열쇠를 자주 부탁했습니다. 빈번하게 열쇠를 부탁하는 자신이 하도 민망해 아픈 배를 부여잡고 옆 건물 화장실로 뛰어간 적도 있으니 주문을 제외하곤 저기, 죄송한데요. 화장실 열쇠 좀…….”이 그녀와의 대화 전부였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태성 씨가 화장실 인심 참 야박하네. 세상이 어쩌다…….’라는 생각마저 하던 어느 날, 열쇠를 부탁하는 태성 씨에게 그녀가 큭, 하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대장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


그녀의 말에 태성 씨의 얼굴은 붉어졌지만, 장난기 섞인 그녀의 목소리는 화장실 변기 위에서도 잠을 자려 누웠을 때도 태성 씨의 귓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장이 매개한 더럽*의 시작이었습니다.


태성 씨와 그녀의 더럽*이 시작된 지도 2년이 넘었습니다. 그사이, 그녀의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던 적도 있습니다. 비록 이놈이, 어딜!” 하며 맨발로 뛰어나온 그녀의 아버지께 아버님, 살려주십시오.”라 소리치며 아파트 계단을 부리나케 뛴 기억만 남았지만 말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녀와 나이도 많고 바바리맨 인상을 가진 태성 씨와의 만남은요. 그래도 그녀는 언제나 태성 씨를 응원했습니다.


오빠, 기죽지 마. 복세편살*” “정 안되면 사고라도 치지 뭐. 그러면 아빠도 빼박캔트* 아닐까?”


그즈음이었을 겁니다. 태성 씨가 신조어 공부에 열을 올린 것이. 외계어 같던 말을 정확히 이해하니 문맥으로 어림잡던 때와 달리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이제 태성 씨는 말과 글에 신조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그녀에게서 받은 문자메시지를 보니 그동안 신조어 공부를 꾸준히 해 온 자신이 대견하기도 합니다.


오빠, 대박 조짐. 아빠가 오빠 한번 보겠대. 나이 차이 크게 나도 사바사*고 우리 케미갑*이라고 징징거렸더니. ㅇㄱㄹㅇ*

 

태성 씨는 팔꿈치가 닳아 얼굴처럼 번질거리는 양복을 차려입고, 과하다 싶은 과일 바구니를 손에 들고, 좋지 않은 기억은 잊으려 공연히 휘파람을 크게 불며 그녀의 집으로 향합니다.


예전 발도 들이지 못했던 그녀의 집에 도착하여 예비 장인어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니 태성 씨의 어깨가 저절로 좁아집니다. 줄행랑을 치느라 살피지 못했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 건설회사 임원답게 <석양의 무법자>의 클린트-이스트우드 같은 모습입니다. 얼굴 전체에 붉은 기가 돌고 코 부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엄청난 애주가의 이미지도 뿜어냅니다. 심장이 조여 왔지만 아빠가 술로 테스트할 거니까 지면 안 돼. 자리 뜨면 안 되고. 알겠지? 그리고 절대, 네버, 레알, 먼저 뻗지 마. 무조건 버텨야 해.”라고 말한 그녀의 말을 곱씹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태성 씨에게 연신 술을 권합니다. 권하고, 권하고, 권하고. 복숭아들을 잊으려 밤마다 마셔왔던 술이기에 태성 씨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일들이 이 순간을 위해 하늘이 계획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 잔, 두 잔, 석 잔, 넉 잔……. 술기운이 돌자 그녀의 아버지는 태성 씨가 마음에 들어가는 눈치입니다. 예비 장인어른과 딸 도둑 간에 흐르던 팽팽한 긴장감이 흐느적거리기 시작합니다. “허허, 이 친구. 술을 아주 잘 먹는구먼. 갑자기 마음에 들려 하네.”라는 말까지 나왔으니까요. 태성 씨가 결정타를 날리고자 아버님. 젊은 시절에 클린트-이스트우드 닮으셨다는 말씀 많이 듣지 않으셨습니까?” 말하려 하는 순간 그녀의 아버지가 묻습니다.


우리 혜영이가 왜 좋은가?”

세상에 둘도 없는 세젤예*이기 때문입니다.”

?”


태성 씨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에 당황합니다.


그게, 그러니까, 혜영이가 제게 최애*라는 말입니다.”

?”


단 두 번의 답변만으로 훈훈했던 분위기는 오묘해지고 맙니다. 태성 씨의 알아듣지 못할 말에 그녀의 아버지는 언짢아진 기색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잘 견뎌주던 태성 씨의 대장이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합니다. ‘자리를 뜨면 안 된다. 끝이다.’ 생각하고 다짐하며 엉덩이를 힘껏 조여 보지만 한계에 다다랐음을 콧잔등과 인중의 땀방울들이 말해 줍니다. 더 참았다간 큰 불상사가 생길 것 같아 술상이 차려진 거실 중앙에서 여기저기 나 있는 문들을 살핍니다. 곧 아찔한 상황이 닥친 태성 씨는 아버님.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유심히 봐두었던 문으로 뜁니다.


구레나룻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변기에 앉아 있으니 태성 씨는 자신의 예민한 대장이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정작 검사를 받아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대장 내시경 검사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화장실을 나오니 김이 샜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문밖에 서 있습니다. 태성 씨는 아무 말 없이, 공손히, 최대한 공손히 길을 비켜드립니다. 태성 씨를 흘기며 화장실로 들어간 그녀의 아버지 입에서 온 집안을 울리는 우렁찬, 비명 같은 말이 나옵니다.


에에에이잇!”


태성 씨는 이 순간, 남들의 대장만을 보살핀 자신이 한심해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흘러갈지 깜깜하고 궁금합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아주 조금, 억울하기도 합니다.


 

*세젤예 : 세상에서 제일 예쁜

*세젤귀 :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더럽 : the love

*가싶남 : 가지고 싶은 남자

*애빼시 : 애교 빼면 시체

*복세편살 :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빼박캔트 : 빼도 박도 can't

*사바사 : 사람 by 사람 (사람 따라 다르다)

*케미갑 : chemistry+(매우 잘 어울림)

*ㅇㄱㄹㅇ : 이거레알 (이거 진짜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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