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이것을 바란다. 꿇으라면 꿇는 존재가 있는 세계. 압도적인 우위로 인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경험. 모두가 이것을 바라니까 이것은 필요해. 모두에게.


황정은 - ‘복경, <아무도 아닌> 201

  

과연 그럴까?” 의심하다가도 결국엔 과연……해버리는 말들이 있다. 무섭고 인정하기 싫은, 인정하는 순간 인간으로서 비참해지는. 만약, 정말, 그렇다면 차악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자, 자, 이제 이 소설의 주인공 김 씨 아저씨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

그녀가 경비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안에서는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낯이 익은 한 사내가 열이 오른 얼굴로 “택배 관리를 이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소리치고 있었고, 그는 “거, 참, 젊은 사람이…….”라 옹알거리며 경비실 바닥의 흐릿한 껌 자국만을 발로 문지르고 있었다. 사내는 줄곧 시선을 피하며 엉뚱한 말만 쏟아내는 그에게 바짝 약이 올라 보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사내는 머쓱한 듯 “내일 자치회에 징계 요청하겠습니다.” 라 말하고 그녀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뒤 조용히 경비실을 빠져나갔다. 사각 링 코너에 몰린 아웃복서 같았던 그에게 그녀의 등장은 구원과도 같았다.


“김 씨 뭔 일이야? 저 점잖은 양반이 목소리를 다 높이고.”

“별일 아니야. 택배가 하나 없어졌는데, 정 씨가 멍청하게 재활용하는 곳에 내다 버렸나봐.”


그는 몇 시간 전, 경비실을 굴려 다니던 가벼운 빈 박스를 재활용 수거차에 실어 보낸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 박스가 택배였는지 확실치도 않을뿐더러, 정 씨가 평소 택배 관리에 소홀했던 점을 생각하며 정 씨의 이름을 들먹였다. 예순다섯 동갑내기 그녀에게 그는 직업정신이 투철한 ‘프로’이고 싶었다.


“나, 바깥양반 밥 좀 차려주고 올 테니 카운터 좀 봐줘.”

“응. 헌데 언제까지 그리 데리고 살 거야? 요양원에라도…….”

“김 씨! 그런 소리 말아. 요양원은 뭔 요양원이야!”


오피스텔 1층 편의점 주인인 그녀는 몇 해 전 중풍으로 쓰러진 남편 밥을 차려야 한다며 종종 그에게 편의점 카운터를 부탁했다. 경비실 문지방이 닳도록 배달되는 택배 때문에 자리를 비우기 쉽진 않았지만,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남편 병시중을 몇 년째 들고 있는 그녀가 딱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오피스텔로 이사 오던 날, 일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등진 아내의 유언을 따르리라 굳게 다짐했었다.


‘나 떠나면 다시 좋은 사람 만나요. 평생 홀아비 냄새 풀풀 풍기며 살지 말고.’


이삿짐도 혼자 날랐던 그녀에게 남편이 있음을 안 그는 적잖이 실망했었다. 그래도 포기하진 않았다. 오히려 중풍으로 방에만 누워 있는 그녀의 남편과는 한번 겨뤄볼 만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다고 얼굴 한번 못 본 그녀의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가 평생 품고, 지켜온 신조는 ‘남자의 의리!’였는데, 그 의리가 그를 자꾸만 괴롭혔다. 아, 지난한 운명이여.


그가 의리 때문에 주야장천 편의점 카운터만 봐주고 있을 때, 상습적인 택배 분실로 입주민에게 원성이 자자한 3살 아래 정 씨는 “누님! 누님!”을 입에 달며 편의점을 들락거렸다. 정 씨가 그녀에게 사르르 눈웃음치는 걸 볼 때면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그는 처음부터 정 씨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 씨는 양옆으로 팽팽히 당겨져 쭉 찢어진 눈으로 경비실 앞을 지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곤 했었다. 그리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형님, 어찌 저리 고울까요?”


그는 늘 궁금했다. 도대체 왜, 정 씨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걸까. 정 씨는 키가 컸어도 거꾸정했고, 길게 기른 한쪽 머리카락을 반대편으로 넘겨 정수리의 썰렁함을 가리고 있었으며, 졸린 듯 한 눈은 관음증 환자의 눈을 연상케 했다. 그 속의 눈빛은 젊은 아가씨들이 봤다면 급히 옷매무새를 추릴 눈빛이었다. 농담을 잘하긴 했지만, 떠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친구 중 한명은 홍삼 엑기스와 야관문 환을 택배로 몰래 보내왔고, 그녀와 함께 자주 편의점을 지키던 후배는 ‘같은 처지에 외로움이나 달래요.’라고 노골적인 메시지를 보냈다가 단칼에 거절당해 눈물짓기도 했었다. 그가 보기에는 이상하고 이해 못할 일들이었다. 영등포 카바레를 휩쓸었던 젊은 시절 ‘가락’이 남아서인가, 생각도 해봤지만 손 한번 잡아줬다 한 들 그렇게 푹 빠질 수 있을까 싶었다.


“형님, 제가 한창때는 손잡고 스텝 한번만 밟아주면 끝이었어요. 그러면 여자들이…….”

“정 씨, 택배 관리나 잘해. 관리소장한테 끝장나기 전에.”


그가 오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할 때 보니 편의점 문에 ‘야간 알바 구함 22시~06시’라 써진 종이가 붙어 있었다.


“야간에 일하는 학생 그만뒀어?”

“학생이 교통사고 나서, 당분간은 내가 봐야 하는구먼.”


밤새 지친 몸을 가누며 멍하니 편의점을 지킬 그녀를 생각하니 그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아, 의리가 대수인가, 저렇게 고생하는데, 고백을 해야 하나, 홀로 고민하고 있을 때 불현듯 야간 근무인 정 씨가 떠올랐다. 순찰을 핑계 삼아 구토 나는 눈웃음을 쳐대며 그녀 홀로 지키는 편의점을 들락날락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정 씨가 들려준 카바레 무용담과 그 안에 살아있던 ‘가락’이 생각나 머리를 가로저었다.


정 씨는 최근 사교춤을 가르쳐 준다며 그녀와 그녀의 지인들을 직원 휴게실로 모았었다. 그가 오피스텔 주변을 청소하며 직원 휴게실을 지날 때 문 밖으로 음악소리와 정 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슬로우, 슬로우, 퀵, 퀵’ ‘여기서는 남자 쪽으로 더 붙고요.’ ‘네네, 그렇죠, 그렇죠.’ 호기심이 동해 직원 휴게실 문을 연 그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장면을 보고 말았다. 그녀가 발그레한 볼로 정 씨의 품에 안겨 사뿐사뿐 스텝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옥자 씨 오라고 하면 안되나? 밤에 혼자 있으면 겁 날 텐데.”


그가 가빠진 호흡을 다듬으며 말했다.


“뭐, 정 씨 야간 근무라서 괜찮을거야. 옥자는 정 씨 근무인 날에는 발걸음 안하네.”

“응? 정 씨는 왜?”

“같이 카운터 보다가 힘들면 휴게실 가서 잠깐 눈 부치려고.”


그의 다리에 힘이 풀리고 등골에 찬 기운이 지나갔다.


“관리소장 알면 난리 날 텐데. 내가 밤에 나올까?”

“정 씨 있는데 뭘. 얼른 집에 가 쉬어.”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머릿속에서 발그스레했던 그녀의 볼이 계속 떠올랐다. 그 장면이 반복될수록 아랫배가 뜨끈해지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그는 서늘한 심장을 움켜쥐며 직원 휴게실에서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다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한숨 잠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주변이 거무튀튀한 눈으로 출근한 그는 제일 먼저 정 씨의 얼굴을 살폈다. 밤새 일한 사람답지 않게 왠지 화색이 도는 것 같았다. 현철의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 봐>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저건 밤새 일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지금이면 눈도 잘 안 떠질 시간인데. 노래라니.’


출근길에 확인한 순찰지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왜 볼펜 색이 다 똑같은 걸까. 필체도 그렇고. 밤새 놀다 한꺼번에 사인 한 게 틀림없다.’


인수인계 대장에 사인하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형님, 형님! 이 형님 왜 이러신데, 넋 나간 사람처럼. 어디 아파요?”

“아, 아니야. 근데 정 씨, 뭔 좋은 일 있어? 이 시간에 노래까지 부르고…….”

“좋은 일이 뭐가 있겠어요? 형님도 홀아비 신세 어떤지 잘 알잖아요. 고요한 내 가슴에 나비처럼 날아와서 사랑을 심어 놓고 나비처럼 날아간 사람…….”


정 씨는 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날아와 사랑을 심어 줬어? 그리고 다시 날아간 거야? 그런 거야?”

“……”


정 씨는 말없이 찢어진 작은 눈만 끔벅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스르고 직원 휴게실에서 경비복으로 갈아입으려 할 때, 휴지통에 버려진 박카스 병이 눈에 들어왔다. 휴지통 안에는 빈 박카스병 2병과 분홍색 립스틱을 닦은 듯 한 크리넥스 휴지가 뭉쳐져 있었다. “아-.” 그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분홍색이었나, 장미색이었나, 아, 아니야, 맨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 옅은 빨간색, 아, 아니, 짙은 분홍색…….’


그가 휴지를 움켜진 손을 부르르 떨며 굳은 얼굴로 경비실을 들어설 때도 정 씨는 여전히 거울을 보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엄지, 엄지 척, 엄지, 엄지 척, 천생연분 내 사랑이에요……”


정 씨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몸이 맘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라고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을 때 관리소장이 경비실 문을 신경질적으로 차며 들어왔다.


“정 씨! 어젯밤에 정문 CCTV 편의점 쪽으로 돌아간 거 확인 못 했어? 죄다 편의점 알바 졸고 있는 것만 찍혔잖아!”


의리의 김 씨, 편의점 그녀 스토킹 대실패!


아, 순옥아.

3

김 씨 아저씨의 이야기가 끝났네요. 아, 애처로운 우리의 김 씨 아저씨…….


그건 그렇고, 순옥이는 누구죠? 김 씨 아저씨가 저토록 애타게 부르는 걸 보면 그녀일 가능성이 높긴 한데…… 아니다, 이 모든 상황이 서러워 먼저 간 아내를 부른 걸까요? ‘그대의 유언을 못 지켜서 미안하오.’ 이런 맘으로. 흠…… 알 수가 없네요.


크리넥스 휴지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에요. 그녀일까요? 아님 옥자 아줌마? 에이 설마. 아하, 홍삼과 야관문환을 보낸 그녀의 친구일 수도 있겠네요. 그러고 보면 정 씨 아저씨의 ‘가락’만은 인정해 줘야겠어요. 아, 잠깐만, 그러면 정 씨 아저씨의 훼이크에 김 씨 아저씨가 당한 건가요? 아, 아니지, 아니야, 그녀일 수도 있으니까. 역시 정 씨 아저씨는 선수네요. 놀던 ‘가락’이 참 무섭네요, 무서워.


알바는 또 왜 갑자기 나타난거죠?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봐.”

“네, 김 씨 아저씨.”

“자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어떻게 된 거야? 빨리 말해줘. 나 지금 너무 힘들어.”

“글쎄요…….”

“이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야? 이렇게 대충 끝낼라고? 나 잠도 제대로 못 자게 만들어 놓고선.”

“죄송해요, 김 씨 아저씨. 그런데요…….”

“그런데, 뭐?”

“순옥이는 누구에요?”

“글세…… 안 가르쳐 줄 거야.”

“……”


 아, 제가 누구냐고요? 저는 이 소설을 쓴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도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떨어져 있는 시간과 거리가 길수록 주고받는 말은 점점 짧아졌다. 할 말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생략과 선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사건이 아니고는 걸러내는 습관이 자라났던 것이다.


윤고은 - 「 P중, <알로하> 187쪽


생략과 선별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는 어둡고 은밀하고 때론 거추장스러운 치부를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다. 딱히 이해를 구하지도 않는다. 나를 드러낼 뿐이다.


굳이 마음을 먹지 않더라도 생략과 선별이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사람이 있다. 관계 속에서 이야기는 뭉텅이로 생략되고 급기야 선별이 필요치 않은 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리곤 그 상태는 습관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김애란 - 「칼자국중, <침이 고인다> 151쪽


누군가를 거둬 먹이는 무게감을 감당하기 위해선 반복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 반복의 무심함 속에서 나는 자랐다. 어머니의 칼과 아버지의 작업복 속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곧이어 내가 살아 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가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그렇게 쉬운 생각을 그동안 왜 한 번도 하지 못한 건지 당혹스러웠다.


김애란 - 「너의 여름은 어떠니」중, <비행운> 44쪽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하며 ‘생각(사유)’의 중요성을 이야기 했다. 악은 우리에게 늘 존재하는 평범한 것이므로 ‘생각(사유)’하지 않을 때 쉽게 발현될 수 있다고.


비록 ‘악’은 아니었을지라도, 지금껏 우리는 누군가를 아프게 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이 거부하고 싶은 진실을 자각하는 것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생각(사유)’의 사후적 버전은 아닐까?


분명, 아팠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지함과 몽매함과 메마름으로 헤아리지 못 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