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당신은…… 두 개의 세계를 사는 한 여자를 본다. 경계 없이 순간을 넘나드는 두 세계. 미친년과 아가야. 그 두 세계의 종말은 누군가의 죽음이다. 그러니 여자는 부단히 살아낼 수밖에 없다. 어느 세계에 속하든.


당신의 할머니가 두툼한 조기와 색색의 나물이 차려진 밥상 앞에서 허공에 숟가락을 던진다. 미친년. 그악스럽게 뱉는 외마디가 당신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불렀는교? 미친년 여기 왔니더. 이런 꼴사나운 대답도 마찬가지다. 집안이 온통 익숙해지지 않을 것들로 채워진다. 점점 더 낯설어진다. 낯설지 않은 것은 여자가 차려 내는 밥상밖에 없다. 특별할 것 없는 그 밥상.


할머니는 불려온 여자에게 아무 말이 없다. 그라지 말고 좀 드이소. 여자는 숟가락에 밥과 조기 살을 얹어 할머니의 입 앞에 가져간다. 고등어는 저녁 찬으로 올릴게예. 그거 다- 어머니 드이시소. 지는 비린내 나서 안 묵을랍니더. 여자는 당신을 보며 샐쭉 웃는다. 당신도 따라 웃는다.


할머니는 조기를 손으로 뜯으며 밥 한 공기를 다 비운다. 숭늉을 찾는다. 여자가 부엌에서 희멀건 숭늉을 내어온다. 숭늉을 마신 할머니가 별안간 1년 전 죽은 아들을 찾는다. 재현이는 아직 안 왔나? 내만 밥 묵어 되겠나? 올 수 없는 당신의 아버지를 찾는다. 재현이 1년 전에 죽었다 아닌교…… 이제 그만 찾으이소. 당신은 여자의 이 대답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다.


할머니는 처음 듣는 비보에 통곡한다. 가슴을 친다. 땅을 친다. 어쩌다 내보다 먼저 갔을꼬. 내가 먼저 가야제. 당신의 가슴이 조금 저민다. 여자는 말없이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향한다. 할머니가 여자의 뒤통수에 대고 말한다. 이 죽일 년. 니가 우리 재현이 죽였제? 내 아들 죽인 년. 여자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조기 살이 어지러운 밥상만을 행주로 조용히 훔칠 뿐이다.


할머니는 통곡에 지쳐 그 자리에 잠든다. 이불 가져다 드려라. 여자가 당신에게 말한다. 할머니가 곱게 코를 곤다. 여자는 할머니의 손을 살포시 잡고 말한다. 어무이요, 식이 아빠 먼저 갔니더. 불효자 찾지 말고 우리 하고 같이 잘 사입시더. 여자는 손을 한번, 두 번, 세 번…… 쓰다듬는다. 여자의 손 위에 당신 손을 겹친다. 니, 시장 가서 고등어 좀 사 오니라. 내는 욕조 청소 좀 해야겠다. 여자는 당신에게 할머니 손을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하나의 세계가 막을 내린다.


당신의 할머니가 잠에서 깨어 여자를 찾는다. 아가야, 아가야.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던 여자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어디 갔더노? 할머니는 조금 목이 멘다. 일어나셨는교? 죽일 년이라 카더만 지금은 아닌교? 여자가 농을 던진다. 할머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뭔 그런 망측한 소리를 하노?”라며 여자를 나무란다. 여자는 장난스레 입을 삐죽이다 싱긋 웃는다. 아입니더, 지는 어무이가 경로당에서 그케 자랑하던 맏며느리 맞지요? 그렇지요? 죽일 년은 없니더. 없어져 버렸니더.


좁디좁은 욕조에 물 채워지는 소리가 거실을 울린다. 여자는 할머니를 욕조에 누이고 거품 가득한 손으로 몸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화장실 가득 손 주이소, 팔 올리이소, 같은 소리가 메아리 친다. 효부를 봤더만, 아들내미 없어도 이래 호강하네. 할머니가 합죽한 입으로 말한다. 어무이가 경로당에 자랑한 만큼은 해야 안 되겠는교? 이런 호강 받을라꼬 맏며느리 자랑하고 다니셨지예? 여자가 할머니를 무심히 타박한다. 등을 미는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어무이, 식이 아버지랑 지랑 결혼시킬라꼬 보름 넘도록 매일같이 우리 집에 오셔가, 밥 얻어 자시고 가신 건 기억나시는교? 부자집이라캐서 덜렁 시집왔더니만, 지 팔자 이래 됐다 아입니꺼. 어무이가 책임지이소. 어무이는 그때 그 정성으로 효부 얻었다 아입니꺼. 지가 밑지는 장사했지예. 안 그러십니꺼?”


“맞다, 그 말 맞다. 재현이가 그 놈아가 얼마나 속을 썩였는데. 그래도 덕분에 니 얻었으니 된 기다…… 그럼 된 기다. 맞다, 맞다.”


당신은 또 다른 세계를 살아 내는 한 여자를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상을 뒤지다 우연히 펼쳐본 여권의 만기가 지나 있었다. 이등병의 전역 일처럼 아득했던 만기일은 한 줌의 기억도 없는 어느 하루가 되어 있었다. 정처 없는 발길에도 당당히 내 존재를 증명해 주던 여권이 결정적 하루를 지나 종잇조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 역시 유효기간이 끝나버린, 증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인가. 이 생각과 함께 급하게 찍느라 심하게 짝눈인 여권 사진을 보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정상 눈을 가진 존재가 되고 싶었다.


날깃날깃한 양복을 걸쳐 입고 급하게 나섰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사진관, 사진관이라, 사진관이라는 곳이 원래 있기나 했었나? 스마트폰으로 ‘문래동 사진’을 검색해 봤지만 역시나 사진관은 검색되지 않았다. 문래동 맛집의 음식 사진이 주르륵 뜰 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래동 포토’로 검색하니 멀지 않은 곳에 스튜디오 하나가 검색되었다. 날마다 기계음이 끊이지 않는 준 공업 지역에 스튜디오라…… 미심쩍은 마음이 꼬리를 물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가보는 수밖에. 수많은 진실은 의심과 함께 농담이 되어버리곤 하니까, 말이다.


예상과 같았다고 할까? 문래동의 수많은 공업사 속에서 스튜디오 찾기는 모스크바 길거리에서 푸틴을 만나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아무 소득 없이 헤매다 보니 슬슬 네이버가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스튜디오가 망한 것일까, 아님, 난 지금 속고 있는 것일까.


‘쉽지 않은 일이구나, 정상 눈을 가지는 것은…….’


절반의 포기 상태로 “아, 아.”라는 한탄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거짓말처럼 ‘행복 스튜디오’라는 작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스튜디오가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건물 2층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행복 스튜디오 가는 길’이라 써진 아크릴판에 커다란 화살표가 왼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두 번의 좌회전과 한 번의 우회전 끝에 겨우 스튜디오 앞에 다다랐다. 흰색 페인트를 성의 없이 칠한 것이 분명한 나무문에 손바닥 2개 크기의 문패가 붙어 있었다.


‘행복을 찾으세요. 행복 스튜디오’


똑똑. 똑똑. 몇 번이나 조심스레 노크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어 신경질을 고스란히 담아 문을 두어 번 걷어찼을 때 안에서 응답이 왔다.


“누구세요?”


자다 일어난 것이 분명한 부스스한 목소리였다. 땀방울들이 뭉쳐 이마에서 눈썹으로 흘러내렸다.


“……네, 여권 사진 좀 찍으려고요.”


딸각 하고 문이 열렸다. 적당히 앳되어 보이는 거구의 남자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아, 네…… 여권 사진 찍으시려고요? 그런데…… 우선 들어오세요.”


남자는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 내가 한 말을 일정 부분 반복하며 문을 활짝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7~8평 남짓한 사무실 한 가운데 원형 탁자가 놓여 있었고 구석에는 철제 책상이 덩그러니 박혀 있었다. 한쪽 벽을 꽉 채운 책장에는 일본 만화만이 가득 꽂혀 있어 얼핏 보면 만화방의 풍경 같기도 했다. 사진 관련 책도 있기는 했지만 <4계절 사진 여행>, <DSLR 잘 찍는 법>, <폰카로 작품 사진을 찍자> 같은 종류의 책 들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을 때 남자는 허우적대는 손짓으로 의자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가 조심스레 한쪽 엉덩이를 의자에 걸치자 남자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여권 사진 찍으시려고요?”

“네, 여권 사진요.”


나의 짧은 대답에 남자는 한 층 더 자신감을 잃은 듯 보였다.


“혹시 급하신 건가요? 지금 사장님이 출장 나가 계셔서요.”

“아니요, 급한 건 아닌데…….”


내가 말끝을 흐리자 남자는 조금 자신감을 회복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하. 다행이네요. 사장님께 전화 한번 해 볼게요. 오실 때 됐거든요. 가까운 곳이라 금방 오실 수 있을 거 에요.”


내가 그럴 필요까진 없다, 말하기도 전에 남자는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어디냐? 뭐? 왜 그리 늦어. 그렇게 해서 먹고살겠냐?”


나와 이야기할 때와는 달리 자신감 가득하고 우렁찬 목소리에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사장이 제 친구예요. 일 좀 도와주고 있는데 전 풍경사진 전문이라 별 도움이 안 되네요.”

“아, 네…… 그럼 사진은 못 찍을까요?”


남자는 “음…….” 하며 입꼬리를 옆으로 늘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짧게 대답했다.


“제가 한번 해 볼게요.”


이게 뭔가. 10년에 한 번 찍는 사진을 한번 해본다는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는 건가. 심한 짝눈 사진으로 이국의 공무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던가. 또 다른 10년을 위한 사진을……. 머리가 아파졌다.


남자는 고민할 틈도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에 나 있는 문을 연 뒤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문 안쪽에는 조명 장비가 사방에 서 있고, 하얀색 스크린 앞에는 익히 보았던 사진관용 의자가 놓여 있었다. 다른 쪽 벽에는 촬영 소품인 듯 한복, 아동복, 가발, 수갑, 채찍 등이 걸려 있었다.


‘응? 수갑? 채찍? 아, 뭔가 이상해.’


벽에 걸린 도구들을 유심히 살피는 날 보았는지 남자는 조용히 다가와 허리를 잔뜩 숙이고는 사춘기 소녀처럼 귓속말을 했다.


“요즘은 연인끼리 저런 콘셉트로도 많이 찍어요. 크크크.”


남자의 귓속말에 잠잠히 누워있던 팔과 다리의 솜털이 일제히 서는 것 같았다. “네네, 좋다고요. 그런 콘셉트 좋은데요. 왜 귓속말이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남자는 여전히 틈을 주지 않았다. 사방에 어지럽던 조명 높낮이를 조절하고 코드들을 분주히 연결했다. 조명이 어느 정도 정돈되자 흰색 스크린 앞 의자에 앉아 남자를 멀뚱히 보고 있는 내게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테스트로 몇 장만 찍어볼게요.”


찰칵. 조명이 터지지 않았다. 찰칵. 그대로였다. 남자는 좀 당황한 듯 보였다.


“아, 제가 풍경사진 전공이라 조명에 익숙지가 않아서…….”


‘네네, 압니다. 알고 말고요. 좀 전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풍경사진 전공인 거 아니까 얼른 좀 찍어주세요.’


남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 왜 이러지.”라는 말만 하며 조명의 반사판을 하릴없이 쓰다듬었다.


“아!”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친 철학자처럼 큰소리를 내며 스튜디오를 뛰어나갔던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곧 돌아왔다.


“아하하. 제가 두꺼비 집에서 조명 전원을 안 올렸네요. 아하하.”

‘저 웃음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언제…… 아, 맞다. 오타쿠.’


순간 책장 가득 꽂혀있던 일본 만화들이 생각났다. 사무실에 아리코짱이 인쇄된 쿠션이 있었는지 떠올려 봤지만,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손님. 이제 정말 찍겠습니다. 아하하, 긴장 좀 푸세요.”


긴장을 풀어야 할 사람은 남자 같았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이등병의 차렷 자세로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찍겠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퍽.


조명은 제대로 작동했다. “한 번 더 찍겠습니다.” “한 번만 더요.”라고 말하며 몇 번이나 사진을 찍은 후에야 남자는 카메라의 화면을 조용히 내려 보았다. 남자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뭔가 잘못되었음이 틀림없었다.


“아…… 이상하네. 어떡하지…….”


남자는 들릴 듯 말 듯 한 혼잣말을 하다 예의 그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안경에 조명이 반사돼서 한쪽 눈이 계속 하얗게 나오네요. 꼭 애꾸눈 같아요. 아하하.”

‘이 남자, 나하고 뭐 하자는 건가.’

“손님, 죄송한데 안경알 좀 빼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애꾸눈을 만들어 드릴 순 없어서……. 제가 풍경사진이 전공이라 조명 다루는 게 좀 서툴거든요. 아하하.”

“네? 안경알을요?”

“네, 안경알요.”


내가 눈을 찡그리며 난처한 표정을 짓자 남자는 다시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무리한 요구를 드렸죠?”

‘알긴 아는가? 이 사람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 건가?’

“이건 제가 포토샵으로 어떻게 한번 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도 남자는 어떻게 한번 해 보겠다고 했다. 찍히지도 않은 눈을 포토샵으로 어떻게 수정한단 말인가.


촬영을 마쳤을 때 난 반쯤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남자는 포토샵을 하기에 알맞은 눈이 찍힐 때까지 계속해서 사진을 찍어댔다. “이건 눈이 좀 작게 나왔네” “이 눈은 사팔뜨기 될 텐데” 이런 말들과 함께.


촬영을 마치고 나자 남자는 조금씩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더듬더듬 수정 작업을 하던 남자는 다시 흥건한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다시 밀려왔다.


땀을 뻘뻘 흘리던 남자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표정으로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야, 포토샵에서 왼쪽 눈 떼어다가 오른쪽에 붙이려고 하는데, 오려서 붙였는데, 너무 이상해. 잘하는 방법 뭐 없냐? 응, 어, 아, 그러면 돼? 오케이.”

‘지금 내 눈 말씀하신 건가요?’

“그렇게 하니까 검은 눈동자가 너무 가운데로 몰려. 이건 어떡하지? 응, 아…… 오케이.”


통화 말미에 남자가 말한 “오케이.”는 더할 나위 없이 경쾌했다.


줄곧 심각한 표정이던 남자는 몇 번의 통화 끝에 엔터키를 딱 소리가 나도록 누르고 난 후 내게 말했다.


“손님, 다 됐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제가 풍경사진 전공이라…… 죄송합니다. 아하하.”

“아, 네네, 아니에요. 근데 여권 사진 규정에는 맞는 거죠?”

“네? 여권 사진 규정이 따로 있나요?”


대답과 동시에 지은 남자의 표정은 내가 한 말이 금시초문임을 정확히 말하고 있었다.


“제가 알기로는 귀하고 눈썹이 나와야 하고 배경은 흰색이어야 되고, 그런 규정이 있는 거로 아는데요. ……대충 맞는 것 같네요.”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원래 이만 원인데 만 원만 받을게요. 아하하.”

“아니에요. 고생 많으셨는데…….”

“고생은요. 저도 한번 해 본 건데요, 뭘. 제가 풍경사진 전공이라 미숙했던 거 이해해 주세요.”


한쪽 눈만을 사용한 만 원짜리 사진을 들고 구청으로 가고 있을 때 휴대전화에서 남자가 보낸 이메일 알림이 울렸다. 이메일에는 원본 사진 파일이 첨부되어 있고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상원 고객님. 행복 스튜디오입니다. 원본 사진 파일 보내드립니다. 오늘 고생 많으셨죠? 제가 풍경 사진은 기가 막히게 찍는데 스튜디오 사진은 좀 서툴러서요. 그래도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금 심하셨어요. 사진 전공자는 맞으세요? 그냥 아리코짱 좋아하시는 동호인 아니세요? 수갑, 채찍 이런 것들 이용해서 찍으시려면 일본 만화 많이 봐야 하니까요. 큭큭.’


첨부된 사진 파일을 확인하고 이메일을 닫으려 할 때 서명란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풍경사진만을 고집하는 고독한 포토그래퍼 김장연’


허세 가득한 그 서명을 보니 남자의 정체가 참을 수 없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난 미제 사건을 뒤쫓는 사립탐정의 마음으로 구글 검색창에 ‘풍경사진 김장연’을 처넣었다. 놀랍게도 남자의 사진과 기사들이 주르륵 떴다.


‘파격이라는 말이 부족한 작가 - 김장연’

‘세계적인 풍경사진작가 스티브 킴. 그를 만나다.’

‘스티브 킴.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시 말한다.’


머리가 멍했다. 내가 세계적인 작가에게 만 원짜리 여권사진을 찍었단 말인가. 그것도 한쪽 눈만을 이용한 사진을.


하긴…… 간혹 진실은 의심 앞에서 농담이 되곤 하니까. 그런 거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재우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 무언가 오타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건 명백한 오타였다.


이기호 - 행정동」중 , <김 박사는 누구인가?> 39쪽


뒤늦게야 오타를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수많은 검열 속에서도 기어코 살아남은 오타의 끈덕짐에 경의를 표해야 하는 순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도 어떻다고?”

“사랑하죠, 오늘도.”
필용은 태연을 연기하면서도 어떤 기쁨, 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불가해한 기쁨이었다.

김금희 - 「너무 한낮의 연애」 중 , <너무 한낮의 연애> 25쪽


세상의 온갖 떨림과 망설임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당신, 살아있어...” 라는 속삭임같이 무심한 듯 툭, 던져진 어떤 울림. 그 울림이 관통하는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돌이킬 수 없는, 이후의 사람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