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거실로 모여들었다. 4명이 전부였지만 긴장감만큼은 김일과 안토니오-이노키가 벌이는 세기의 대결을 보기 위해 이장 집에 모인 시골 마을과 다르지 않았다. 철야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서야 퇴근한 아버지는 잠에 취한 상태로 거실 중앙에 누워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들어가 잠이나 자이소. 어머니가 채근했지만 아버지는 대꾸 없이 눈만 가만히 끔벅였다. 아버지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던 어머니도 전투를 준비하는 행주산성의 아녀자처럼 삶은 달걀과 수박 화채를 들고 와 아버지의 머리맡에 자리를 잡았다. 뭐하노, 빨리 온나, 시작한다. 난 어린 마음에 긴장감을 못 이기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초등학생 동생을 급하게 불렀다


일요일 오전 10. 우리 가족은 들키면 남사스러울지 모를 긴장감을 서로 감추며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작한다. 잘하자.”


아버지는 3.1 운동을 결의하는 독립투사의 얼굴로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잘하자라는 말을 했다. 뭘 뜻하는지 잘 모르더라도 우리는 잘하리라 다짐했다. 그 결의의 일환으로 난 동생의 손을 꾹 잡았다. <우리들의 천국>에서 홍학표가 갑자기 사라진 최진실의 고향 집을 찾아가 오열할 때 이후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리모컨으로 툭툭 텔레비전 소리를 키웠다. 우리 가족이 모든 준비를 끝내자 분홍색 하트가 화면을 가득 채우며 <사랑의 스튜디오>가 시작됐다.


달달한 팝송과 함께 화면을 떠다니던 하트가 사라지고 군 단위 디스코텍에 어울릴 것 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 음악에 맞춰 여자 출연자들이 어깨를 덩실거리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난 그 음악이 테크노가 아님에 안도했다. 여자 출연자들이 공중에 내던지는 어깨가 진심으로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 , 불안정한 어깨 사위.


광대뼈가 툭 불거진 여자 1번 출연자가 덩실거리는 어깨로 안녕하세요. 지긋지긋한 더위와 장마를 잊게 할 시원하고 뽀송뽀송한 여자 1번 김수정입니다. 크리스털 킴으로 기억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걸 보고 있으니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졌다. 처조카임에도 아버지의 집안 자랑 레퍼토리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촌 누나가, 지성인 중의 지성인인 누나가, 삐걱대는 어깨춤과 함께 쌍팔년도 멘트를 하는 건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누나가 누군가. 중고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그것도 약대에 다니는 최고의 지성인 아닌가. 아버지도 대학 진학이 불투명한 내신 11등급의 장손인 나보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한 처조카인 누나를 편애하지 않았던가. 난 맘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후- 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려 보자. 지성인 누나는 다를 것이다. 그렇고말고.


우뚝 솟은 광대뼈와 호피 무늬 블라우스로 센 언니의 전형을 보여준 1, 사랑을 찾으려면 덴탈클리닉에 먼저 가야 할 것 같은 덧니의 2, 죽도 한 그릇 못 먹었는지 연약한 몸을 강조하며 강수지 코스프레에 여념이 없던 3번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누나의 차례가 되었다. 난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갑자기 고요해진 거실에는 숨소리만 얕게 흘렀다.


누나가 서서히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덩실덩실, 더덩실. 평생 한 번도 흔든 적 없는 어깨가 확실했다. 누나야, 국악 한마당이 아니라고, , 정말. 이런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누나의 삐걱거리는 어깨를 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 , 춤은 거기서 거기지, 고급스러운 멘트만 나와 준다면 실패한 건 아니지, 라는 생각으로 난 슬며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 누나의 멘트를 듣고 깊이 깨달았다. 세상일은 맘 같지 않다는 것을.


통통 튀는 발랄함으로 스튜디오를 휘어잡을 여자 4번 차연해입니다. 친구 같은 애인이 필요하신가요? 그렇다면 절 선택해주세요. 이름은 연해지만 사랑만은 절대 연하지 않습니다.”


누나의 멘트가 끝났을 때도 거실은 여전히 고요했다. 나는 낯이 좀 뜨거워져 수박 화채를 입안 한가득 넣었다. 얼음을 빠드득 깨물어보아도 달아오른 얼굴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뭐, 내 낯 뜨거움이 문제인가, 중요한 건 남자 출연자들이고 그들의 화살표지, 라는 생각으로 쳐졌던 호흡을 되돌렸다.


오뚝한 콧날과 심야 라디오 DJ처럼 잘 자요한마디면 모두를 잠재울 것 같은 누나의 목소리를 생각하니 승산은 꽤 커 보였다. 물론 3번 강수지가 맘에 걸리기는 했다. 그래도 3번 강수지가 <보랏빛 향기>의 강수지는 아니지 않은가.


오늘 게임 끝났네. 연해 화살표 4개 다 받을 끼다. 두고 봐라. 장담한다.”


졸음에 겨운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거실의 적막을 깼다. 어쩌자고 아버지는 저렇게 장담을 하실까. “3번 강수지가 맘에 걸리지 않으십니까?” 말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내가 내신 11등급을 유지하면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핵심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집안 자랑의 큰 축인 누나의 남자는 보통 남자로 안 된다는 생각에 난 매형을 뽑는다는 각오로 남자 출연자 면면을 살폈다. 내 팔이 아무리 안으로 굽었다 한들 남자 출연자들 모두 매형이 되기에 부족해 보였다. 다른 회 차 남자들은 괜찮던데 이번 남자들은 왜 다 이 모양이고, 라는 생각에 기분이 상하려던 찰나, 그때까지 묵묵히 지켜만 보던 어머니가 입을 뗐다.


“2번 남자 괜찮네.”


2번 남자는 키만 멀대같이 크고 삐쩍 말라 김밥에서 당근을 빼고 먹을 것 같은 남자였다. 폭탄처럼 거실을 울린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눈을 한번 흘겼다. 질투의 눈빛은 아니었다. 그건, 아버지가 젊은 날의 영광을 생각하며 내가 저 2번 남자보다 낫지 않나.’라고 동의를 구하는 눈빛이었다. 절절히 동의를 구했던 눈빛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흘린 어머니의 냉소로 어떤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고 급히 일단락되었다. 어머니의 날카로운 웃음에 아버지는 괜히 정수리만 긁적였다. 아버지는 기가 죽은 것 같았다. 정보석의 열혈 팬이었던 어머니가 아버지께 냉소를 보내는 건 이해가 되는 바였다. 아버지는 진한 쌍꺼풀과 깊은 눈을 가졌지만, 결코 정보석 풍의 얼굴이 아니었고, 그 순간, 거실 바닥에 사각 팬츠 차림으로 누워 한 손으로 배를 두드리며 삶은 달걀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른자가 목에 걸려 컥컥거리기까지 했다.


시작과 함께 모두의 가슴을 졸이게 한, 냉소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 출연자 소개가 끝나고 방청객들의 기계적인 환호 속에서 사회자인 임성훈과 박미선이 무대로 나왔다. 대한민국 처녀, 총각들을 책임진다는 사명감 때문에 어깨가 무겁다는 너스레를 떨며 곧 출연자들과 짧은 인터뷰를 했다. 3번 강수지와의 인터뷰였다. 분명 인터뷰를 했을진대 통편집된 여자 1번 호피와 2번 덧니를 생각하니 일순 마음이 짠했다. 그 마음도 잠시, 3번 강수지의 인터뷰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3번 이은지 씨는 보기에 매우 약해 보여요. 자신을 보호해 줄 남자를 좋아하실 것 같은데. 그런가요?”

, 맞습니다. 제가 몸도 약하고 마음도 여린 편이라 저를 잘 돌봐 줄 수 있는 아빠 같은 남자가 좋습니다.”


3번 강수지의 답변이 끝남과 동시에 카메라는 4명의 남자를 한꺼번에 비추었다. 남자들 모두 자신이 심신이라도 되는 듯, 당장에라도 손가락을 허공에 찌르며 <욕심쟁이>를 부를 것 같은 얼굴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자들의 미소를 보니 불안한 맘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누나야, 정신 똑바로 차려라, 쉽지 않겠다.


그리고 이 사람들아. 강수지랑 심신이랑 헤어진 거 모르시나? 심신 미소는 이제 안 통한다는 거 진정 모르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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