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성 씨는 자신의 의무에 최선을 다합니다. 국가나 직장에 대한 의무는 아닙니다. 그 의무는 12 간지를 한 바퀴 돌고도 한 살을 더 더해야 겨우 동갑이 되는 여자 친구를 위해 신조어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뜻을 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물을 탐독하고 적절한 사용을 위해 예문을 만들기도 하는 등 수험생에 버금가는 자세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신조어를 사용해 그녀를 웃게 하는 것이 요즘 태성 씨에게 가장 보람 있는 일입니다. ‘세젤귀*’최애*’, ‘더럽*’ 같은 단어들이 쓰인 편지를 건네면 그녀가 눈에 웃음을 달고 까르르 웃곤 하니 그럴 만도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뼈대만 남은 것 같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 태성 씨에게 그녀가 있어 다행입니다.


건강검진센터에서 대장 내시경을 담당하는 태성 씨는 매일 수많은 엉덩이와 함께합니다. 어쩔 땐 엉덩이들이 자연스레 복숭아로 느껴지니 이제 꽤 친숙해진 것도 같습니다. 그래도 매일같이 복숭아 골 깊숙한 곳에 호스를 넣다 보면 태성 씨의 인생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그것까지는 직업이니까, 먹고살아야 하니까, 견딜 수 있습니다. 힘이 드는 건 따로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오후 검사를 위해 장비들을 점검하고 있을 때,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검사실로 들어왔습니다. 겁에 질린 듯한 얼굴이 검사가 처음인 것 같았습니다. 태성 씨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들어선 자리에서 검사실 내부만 두리번거렸습니다. 검사대에 누우라는 태성 씨의 말에도 대답이 없던 여자는 심호흡을 하고 큰 결심을 한 듯 말했습니다.


저기…… 조금 있다가 검사받으면 안 될까요?”


검사에 겁을 먹거나 은밀한 곳이 드러나는 것을 민망해하는 이들에게 간혹 있는 일이라 별생각은 안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오후, 사무장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태성 씨는 울고 싶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태성 씨. 오해 말고 들었으면 좋겠어. 여러 번 항의, , 아니, 건의가 들어왔었는데…… 태성 씨 상처받을까 봐 말 못 했었어. …… 여성 검진자들이 말하길…… 태성 씨 눈빛이 안 좋대.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수면 마취를 하잖아…… 그러면 그때…… 다른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거지. 그래서…….”


그 일이 있고 난 후 태성 씨는 남자 환자들만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울고 가고 예수님도 두 손 들게 할 고운 심성과는 달리, 양옆으로 쭉 찢어지고 반쯤 감긴 눈과 영양 크림을 발라 놓은 듯 번들거리는 얼굴 때문에 태성 씨는 오해를 받곤 했습니다. 뭐랄까요, 여고생들이 하굣길에 꼭 한 번 만난다는 바바리를 걸친 사나이와 비슷한 인상이라고 할까요.


상황이 이러하니 태성 씨의 기름진 얼굴에도 북북 얼굴을 비비고 오빠, 레알 진심 짱.” “역시 가싶남*이야.”를 입에 달고 사는 애빼시* 그녀의 소중함이 클 수밖에요.


억지스러울지 모르지만 태성 씨가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대장 때문이었습니다.


태성 씨는 언제부턴가 잠자리에 들면 수많은 엉덩이가 복숭아 모양을 하고 눈앞을 둥둥 떠다녀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취하지 않은 날이면 여드름이 듬성듬성 솟은 복숭아가 밤새 태성 씨에게 말을 걸었으니까요. 술을 마시다 이제 어떤 엉덩이도 이겨낼 수 있어, 최면을 걸고 집으로 가던 길에 들른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술 냄새를 풍기며 꼬인 혀로 더듬더듬 주문하는 태성 씨에게도 쿠폰 필요하세요?”라며 톤의 목소리로 친절하게 말하는 그녀가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걸그룹을 보는 삼촌 팬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술에 취해 있는 손님과 아르바이트생의 관계를 대장이, 태성 씨의 예민한 대장이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술을 마시면 어김없이 아랫배가 아파져 오는 태성 씨는 그녀에게 화장실 열쇠를 자주 부탁했습니다. 빈번하게 열쇠를 부탁하는 자신이 하도 민망해 아픈 배를 부여잡고 옆 건물 화장실로 뛰어간 적도 있으니 주문을 제외하곤 저기, 죄송한데요. 화장실 열쇠 좀…….”이 그녀와의 대화 전부였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태성 씨가 화장실 인심 참 야박하네. 세상이 어쩌다…….’라는 생각마저 하던 어느 날, 열쇠를 부탁하는 태성 씨에게 그녀가 큭, 하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대장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


그녀의 말에 태성 씨의 얼굴은 붉어졌지만, 장난기 섞인 그녀의 목소리는 화장실 변기 위에서도 잠을 자려 누웠을 때도 태성 씨의 귓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장이 매개한 더럽*의 시작이었습니다.


태성 씨와 그녀의 더럽*이 시작된 지도 2년이 넘었습니다. 그사이, 그녀의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던 적도 있습니다. 비록 이놈이, 어딜!” 하며 맨발로 뛰어나온 그녀의 아버지께 아버님, 살려주십시오.”라 소리치며 아파트 계단을 부리나케 뛴 기억만 남았지만 말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녀와 나이도 많고 바바리맨 인상을 가진 태성 씨와의 만남은요. 그래도 그녀는 언제나 태성 씨를 응원했습니다.


오빠, 기죽지 마. 복세편살*” “정 안되면 사고라도 치지 뭐. 그러면 아빠도 빼박캔트* 아닐까?”


그즈음이었을 겁니다. 태성 씨가 신조어 공부에 열을 올린 것이. 외계어 같던 말을 정확히 이해하니 문맥으로 어림잡던 때와 달리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이제 태성 씨는 말과 글에 신조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그녀에게서 받은 문자메시지를 보니 그동안 신조어 공부를 꾸준히 해 온 자신이 대견하기도 합니다.


오빠, 대박 조짐. 아빠가 오빠 한번 보겠대. 나이 차이 크게 나도 사바사*고 우리 케미갑*이라고 징징거렸더니. ㅇㄱㄹㅇ*

 

태성 씨는 팔꿈치가 닳아 얼굴처럼 번질거리는 양복을 차려입고, 과하다 싶은 과일 바구니를 손에 들고, 좋지 않은 기억은 잊으려 공연히 휘파람을 크게 불며 그녀의 집으로 향합니다.


예전 발도 들이지 못했던 그녀의 집에 도착하여 예비 장인어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니 태성 씨의 어깨가 저절로 좁아집니다. 줄행랑을 치느라 살피지 못했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 건설회사 임원답게 <석양의 무법자>의 클린트-이스트우드 같은 모습입니다. 얼굴 전체에 붉은 기가 돌고 코 부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엄청난 애주가의 이미지도 뿜어냅니다. 심장이 조여 왔지만 아빠가 술로 테스트할 거니까 지면 안 돼. 자리 뜨면 안 되고. 알겠지? 그리고 절대, 네버, 레알, 먼저 뻗지 마. 무조건 버텨야 해.”라고 말한 그녀의 말을 곱씹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태성 씨에게 연신 술을 권합니다. 권하고, 권하고, 권하고. 복숭아들을 잊으려 밤마다 마셔왔던 술이기에 태성 씨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일들이 이 순간을 위해 하늘이 계획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 잔, 두 잔, 석 잔, 넉 잔……. 술기운이 돌자 그녀의 아버지는 태성 씨가 마음에 들어가는 눈치입니다. 예비 장인어른과 딸 도둑 간에 흐르던 팽팽한 긴장감이 흐느적거리기 시작합니다. “허허, 이 친구. 술을 아주 잘 먹는구먼. 갑자기 마음에 들려 하네.”라는 말까지 나왔으니까요. 태성 씨가 결정타를 날리고자 아버님. 젊은 시절에 클린트-이스트우드 닮으셨다는 말씀 많이 듣지 않으셨습니까?” 말하려 하는 순간 그녀의 아버지가 묻습니다.


우리 혜영이가 왜 좋은가?”

세상에 둘도 없는 세젤예*이기 때문입니다.”

?”


태성 씨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에 당황합니다.


그게, 그러니까, 혜영이가 제게 최애*라는 말입니다.”

?”


단 두 번의 답변만으로 훈훈했던 분위기는 오묘해지고 맙니다. 태성 씨의 알아듣지 못할 말에 그녀의 아버지는 언짢아진 기색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잘 견뎌주던 태성 씨의 대장이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합니다. ‘자리를 뜨면 안 된다. 끝이다.’ 생각하고 다짐하며 엉덩이를 힘껏 조여 보지만 한계에 다다랐음을 콧잔등과 인중의 땀방울들이 말해 줍니다. 더 참았다간 큰 불상사가 생길 것 같아 술상이 차려진 거실 중앙에서 여기저기 나 있는 문들을 살핍니다. 곧 아찔한 상황이 닥친 태성 씨는 아버님.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유심히 봐두었던 문으로 뜁니다.


구레나룻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변기에 앉아 있으니 태성 씨는 자신의 예민한 대장이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정작 검사를 받아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대장 내시경 검사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화장실을 나오니 김이 샜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문밖에 서 있습니다. 태성 씨는 아무 말 없이, 공손히, 최대한 공손히 길을 비켜드립니다. 태성 씨를 흘기며 화장실로 들어간 그녀의 아버지 입에서 온 집안을 울리는 우렁찬, 비명 같은 말이 나옵니다.


에에에이잇!”


태성 씨는 이 순간, 남들의 대장만을 보살핀 자신이 한심해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흘러갈지 깜깜하고 궁금합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아주 조금, 억울하기도 합니다.


 

*세젤예 : 세상에서 제일 예쁜

*세젤귀 :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더럽 : the love

*가싶남 : 가지고 싶은 남자

*애빼시 : 애교 빼면 시체

*복세편살 :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빼박캔트 : 빼도 박도 can't

*사바사 : 사람 by 사람 (사람 따라 다르다)

*케미갑 : chemistry+(매우 잘 어울림)

*ㅇㄱㄹㅇ : 이거레알 (이거 진짜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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