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계시지요내일이면 저희를 두고 가신 12년째 되는 날입니다. 12년이라는 시간은 헛헛한 시간이었습니다삶의 조각들이 구멍  풍선처럼 떠다니다 소리 없이 시들어간 시간이었다고 할까요남은 자의 이면에서 풍화되길 거부하는 굳건한 그리움은 침묵만 끓게 하였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흩뿌려진 초록빛에 감화되지 못하고 만선의 깃발을 올리지 못한 낡은 고깃배의 어깨를닮아가며 바닥만 들여다보았습니다조그맣게 펄떡인 생에 대한 의지로 고개 들었을  플라타너스가누런 잎사귀를 떨구고 있었으니그렇게 반쪽의 시간을 살았습니다제가 아버지를 이해함에  박자가늦어  반쪽이었듯이 말입니다.

저는 언제나  박자가 늦었습니다엇박자가 아님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늦은  박자와 엇박자는 동어라는 생각이 듭니다어쩌면 영원히 닿지 못할 공간을 만드는 늦은  박자가  무서운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려운 말과 사실을 깨달을 무렵 아버지의 시간이 멈추었습니다.

아버지의 시간이 멈춘  흐른 12년과 해마다 잃어버렸던 6개월의 시간이 얽혀 아버지와  사이에 심연으로 존재했던 불가해한 공간이 좁혀지고 있습니다어느 소설가는 닿을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르겠다선언했지만  닿고자 하고 닿고야 마는 것을 사랑이라 부르려 합니다아버지께 닿고자 함을 어찌 사랑이라 부르지 않을  있을까요?

아버지.

조선소 노동자로  앞에 겸손하고 순간에 치열했던 아버지를 존경합니다아버지와  사이에 변방의메아리처럼 남은 미극의 불가해도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틈이 사라질 때면 제가 미처 깨닫지 못한아버지의 힘겨움과 권태허무외로움까지 이해할  있겠지요?

폐염전에  적이 있습니다수많은 소금 알갱이들이 여물던 염전에 풀들만 무성하고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서글펐습니다폐염전에서 5월의 초록빛으로 소금 알갱이가 여물고  내가 진동하길 바라는마음으로 아버지께 닿고자 합니다.

사랑합니다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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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저마다의 향기가 있다면 나의 뇌리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향기는 아버지의 향기다냄새라 말하는 것이  어울리는 그것은 부연이 필요 없는 아버지 자체이다 벌어진 어깨와 쩌렁쩌렁한 목소리호탕한 웃음소리 때로는 한없이 여리셨던 마음.

오늘 아침 출근길에 아버지가 몸담았던 회사 앞을 지나다  냄새를 맡았다들큼한 페인트 냄새였다여태껏 모를  없었을 텐데  냄새가 새롭게 느껴진   새삼스러움의 크기만큼 내가 아버지의 냄새를잊었기 때문일 것이다아버지의 작업복에선 바닷바람과 페인트 냄새가 나곤 했었는데 이제는  작업복을  수도 느낄 수도 없으니 무뎌짐과의 싸움은 점점 패색이 짙어지고 있다.
 

# 말린 수건  장과 달걀 프라이 

아버지는 28  울산에 오셨다그리곤  세월 모두를 조선소에서 보내셨다조선소 깊은 도크에 거만하게 들어앉은 배에게 아버지는 넘치도록 부지런한 친구였다아침 6시면 집을 나섰고  순간부터 오직 친구만을 위했다천직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그건 무난한 핑계였고정든 친구를 떠날  없어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세월 속에 아버지의 젊음이 고스란히 녹은 것이다.

조선소  위에서 청춘을 보낸 것이 후회되지는 않으셨는지 겨울의 매서운 바닷바람과 한여름 철판 더위가 버겁지는 않으셨는지 지금은 누구도   없지만 분명한  아버지가  시간을 지나왔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르바이트할  경험한 조선소의 겨울바람은 매섭고 짐승 같은 바람이었는데 바람을 안고 일했던 아버지의 작업복에선 시원한 바람 냄새가 났다공포감마저 느껴지던 한겨울의 바닷바람이 어떻게가을바람의 향취를 가질  있었는지 아이러니하지만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다그건 아버지의 따뜻함 때문이었다고아버지의 온기가 오롯이 작업복에 스몄기 때문이라고아버지는 따뜻한 분이셨다

아버지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셨다여름에는 땀을 훔칠 수건이 필수여서 어머니는  말린 수건  장을 아침마다 아버지께 건네셨고아버지가 돌려주는 저녁의 수건은 더없이 축축했었다퇴근길 벌겋게달아오른 얼굴을 마주하면 아버지의 하루가 눈앞에 그려지고 붉음의 강도에 따라 그날의 더위가  머릿속 한구석에 정확히 각인되었다.

언젠가 여름에 달궈진 철판 위에 달걀을 풀면 기다릴  없이 프라이가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어린 아들에게 어마한 더위를 말하려 농담처럼  말이었겠지만 달걀 프라이는 아버지 자신을 가리키는 기막힌 은유법이었고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겨울이었다그렇게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에  박자가 느렸다.
 

#만년필

아버지는 필체가 좋으셨다정연하게 글자가 쓰인 아버지의 사무용 수첩이 미술작품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좋은 필체를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으셨는지 아버지는 만년필을 소중히여기셨다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에게 대학 입학 선물로  비싼 파커 만년필을 선물하신  보면 아버지에게 만년필은 필기도구 이상의 어떤 상징이다

내겐 아버지가 쓰시던 만년필이 있다 쓰지도 나오지도 않는 만년필이지만  양복 안주머니에는 항상  만년필이 꽂혀있다내가  만년필을 꽂고 다니는 것은 엉뚱하게도 그리운 아버지의 필체가 만년필을 통해 나오리라는 바람 때문이다언젠가는 만년필도  주인의 손길을 잊지 못해 필체를 흉내  것이다.
 

#여진과 노영심

  전까지만 해도 음악이라곤 트로트  자락밖에 모르셨던 어머니께서 요즘 음악을 즐겨 들으신다처녀 시절 들었던 양희은의 노래들을 소리 높여 부르기도 하시고 CD플레이어가 없던 차에  오디오까지 다시는  보면 어머니의 음악사랑은 마땅히 인정해 줘야  특별한 것이 되었다월요일  텔레비전채널 선택권은 전적으로 어머니가 행사하셔서 우리 가족은 월요일 밤마다 가요무대를 보고 있다

이런 어머니께 최근 들어 애창곡이 생겼다누구의 노래인지 나와 실랑이를 벌이다가수는 중요치 않다말하며 부르시는 노래는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이다실제로 여진이든 노영심이든 누가 불렀는가는어머니께 중요하지 않다어머니는 감미로운 멜로디나 가수의 젖은 목소리보다  노래의 가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그리움만 쌓이네 힘주어 따라 부르며 그리움을 가슴 한쪽에 차곡히 쌓고 계시는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아버지의 흔적이 바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감정의 무뎌짐이  순간 안타깝다몇몇 사람들은 무뎌짐을 받아들이라 충고하지만 아버지의 흔적을 잃는  내게 잔인한 일임을  알기에 나는 아버지의 냄새만년필어머니의 노랫소리를 새기며 아버지를 그리워할 것이다.

아버지의 흔적이 늘어날수록  가슴은 감당하기 벅찬 기운을 추슬러야 하겠지만 나는  추스르고 이겨내리라 믿는다그것들의 존재가 아버지를  곁에 머물고  쉬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도 그리움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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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날개’를 다시 읽다 보니 잘못 알았고 또, 오독이라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다. 과거의 미숙한 독해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재의 내 심리가 반영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은 주인공 아내의 이름이다. 나는 언급이 없거나, 있다면 당연히 금홍이겠거니 여겼다. 아니었다. 소설에서는 단 한번 아내의 이름이 나온다. 주인공은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 아내의 화장품 냄새를 맡다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은 체취가 전해져 속으로 아내의 이름을 불러본다. ‘연심이!’ 하고...... 


오독이라 생각한 부분은 소설의 말미다. 소설 말미에 주인공은 혼란 속에서 날개를 갈구하며 날고자 한다. 난 지금까지 그 공간이 옥상이라는 이유로 주인공의 투신을 상상했었다.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는 마지막 구절과 날개로 상징되는 현실 탈출 의지는 자연스럽게 투신으로 연결되었었다.


그런데…… 잠깐만…… …… 이상하네……’


소설 어디에도 투신하는 주인공은 없었다. 날고자 하는 사내만 있었다아내와 자신이 숙명적으로 절름발이라 생각하면서도 각자의 행동에 논리가 필요하거나 굳이 변할 필요는 없다 말하고,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며 세상을 걸어가면 된다는 사내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는 말은 현실의 무참함을 환상으로 접한 뒤 뱉는 의지로 말로 들렸다.


더불어 주인공이 묘사하는 정오에서 니체 말을 떠올렸다.


“이때 뚜-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니체는 정오를 인간이 가장 자유롭고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순간으로 묘사했다. 태양이 대지의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는 순간, 아무런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는 순간, 이 정오의 순간에 인간은 그림자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소설 속 주인공의 정오는 아내의 자정과 대립한다. 아내는 사내에게 늦은 귀가를 종용하고 사내는 그 기준점을 자정으로 정한다. 사내는 낯선 거리에서 멀미를 느끼지만 자정을 넘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아내의 자정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오의 사내는 달랐다. 현실의 어지러운 모습 속에서도 사내의 겨드랑이는 가려워 왔고 날개를 원했다. 그리고 말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라고. 태양빛이 가장 풍요롭고 그림자 하나 만들지 않는 정오의 순간에 사내는 겨드랑이가 가려워왔던 것이다. 과거 인공의 날개가 돋았었던 겨드랑이가.


……’


삶이 온갖 그림자에 침범 당하고 그 상태에 무뎌진 우리가 정오를 맞이하고 날개를 펼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정오는 고통에 신음하고 체념하며 삶의 중력에 의해 꼼짝달싹 못하는 바로 그 순간일지 모르니까, 말이다. 어쩌면 11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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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해 보면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가 과자 상자를 선물 받는 것이었다. 유행이 지난 과자나 껌, 사탕들이 들어있던 과자 상자를 받는 날을 동생과 나는 손꼽아 기다렸다. 아버지의 월급날이면 어김없이 과자 상자를 몇 통씩 품에 안을 수 있었는데 상자를 안기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두툼한 월급봉투를 작업복 안쪽에 넣은 채로 아버지를 따라 현관문을 들어서던, 내가 삼촌들이라 부르던, 아버지의 아래 직원들이었다.

 

월급날이면 우리 집에는 과자 상자를 든 삼촌들이 우르르 몰려와 판을 벌이곤 했다. 나는 구석방에서 동생과 과자를 오물거리다가 아버지나 삼촌들이 혁아하고 부르면 재빨리 달려나가서 재떨이 비우는 일을 했다. 그 순간 보았던 거실을 가득 채운 뿌연 담배 연기와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삼촌들 앞에 놓인 흰색 월급봉투, 그리고 시커멓고 눈에는 핏대가 올랐었던 삼촌들의 얼굴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폐가 든 월급봉투가 있었고 일에 지친 활황기 조선소 사내들이 할 수 있는 놀이가 월급날 판을 벌이는 것이 유일하던 시절이었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어머니는 삼촌들의 저녁 밥상이나 술상을 봐주었고, 밤이 깊어 삼촌 집에서 전화가 오면 어머니는 삼촌들을 닦달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마도 삼촌들은 어머니께 등을 꽤나 맞았을 것이다. 지금은 잘 상상되지 않는 광경이지만 그 시절의 나에게는 익숙하고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 말했다고 한다.

 

혁이도 중학생이고 공부도 해야 하는데 이제 그만하면 안되겠는교?”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절반쯤 사정하는 말투로 우리 만날 뼈 빠지게 일하다가 이래 하루 노는 게 낙인데 좀 놀면 안 되나? 그라고 애들이 놀고 싶다는데 같이 놀아야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느 순간부터 과자 박스를 받지 못했다. 그건 판이 벌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고등학생이 됐기 때문이었다.

 

삼촌들은 꼭 월급날이 아니라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집으로 무턱대고 찾아와 결혼할 사람을 소개했고 아내가 집을 나갔다며 한참을 울다 돌아가기도 했으며 술에 거나하게 취해 쳐들어와 밤늦도록 주정을 하다 가기도 했다. 삼촌들 아내 중 한 명은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남편이 있는 곳을 안다며 아버지께 동행을 부탁했다. 아버지는 삼촌들에게 큰 형님과 다름없었다. 삼촌은 동행한 아버지께 술집에서 멱살이 잡혀 나왔다고 했었으니까. 삼촌이나 숙모들이 우리 집에 올 때 들고 온 신문지를 둘둘 말은 소고기나 담배 한 보루에 대한 답례를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난 그 관계들을 생각한다. 함께 판을 만들어 어울리고 모든 것을 내보여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스스럼이 없었던 관계. 세련되지 않아 더 깊었던 관계들.

 

그러한 관계가 가능했던 시대의 가치들은 낡았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저의를 애써 파악하지 않아도 되고 그대로의 모습을 상대에게 내보일 수 있었던 그 관계들의 가치만은 낡지도 녹슬지도 않았다 말하고 싶다.

 

향수가 주는 판타지일까? 아니라 믿고 싶다. 아니, 아니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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