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정해진 지루한 회의였다. 영어에 한 맺혀 두 딸과 부인을 몽땅 캐나다로 보내버린 기러기 아빠 김 부장이 회의를 소집한 속셈은 뻔했다. 무의미한 말들이 오가는 회의에 모두가 지쳐갈 즈음, 결론 없이 서둘러 회의를 끝내며 다들 고생했는데 맥주나 한잔할까?”라는 말로 자칭, 소소한 저녁 식사를 제안할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일 년 중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지 아닌가. 막막한 동지의 밤을 어떻게 견딜까 궁리하다 퇴근 시간 무렵 업무를 정리하는 직원들의 움직임에 몸이 달고 애가 타 필요치도 않은 회의를 즉흥적으로 소집했음이 분명했다.


역시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김 부장은 회의실 벽걸이 시계를 곁눈질하고는 ,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날도 추운데 뜨끈한 사케 한 잔 어때?”라는 말을 흘렸다. 예상은 했었지만 미처 마음의 준비까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자신 앞에 놓인 업무용 다이어리로 시선을 옮겼다. 새벽녘 내린 서리처럼 회의실 곳곳에 내려앉은 어색한 정적은 생각보다 오래됐다. 숨 막힘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건 내년 차장 진급을 앞둔 박 과장이었다.


오늘같이 추운 날 노글노글 몸 녹이기에 사케가 딱이죠. 최 대리 좋지?”


어떤 징후도 예고도 없이 박 과장 입에 의해 호출된 난, 다이어리에 의미 없이 그리고 있던 하트를 번개 모양으로 가르며 라고 대답했다. ‘수제 맥줏집 사장님과의 로맨스는 끝났나? 오늘은 웬일로 사케. 내가, 오늘, 비싼 사케 먹어서 법인카드 한도 끝내 버린다. 두고 봐라.’ 같은 오기가 발동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벗어진 이마의 빛이 흐려지는 김 부장이 법인카드 한도가 복원되길 기다리며 7평 원룸에서 벌일 사투가 코끝을 찡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이 두렵기는 한가 보네. 사케로 장기전 준비하는 걸 보면.’


김 부장을 향한 비아냥과 동정의 코웃음을 조심스럽게 날리고 자리에 돌아오니 모니터 한가운데 하트 모양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1850. 윤민기 씨 전화. 다시 전화 준다고 함.

 

윤민기? 휘갈기듯 써진 포스트잇의 글자들을 잔뜩 힘주어 쏘아보아도 이름과 얼굴이 연결되지 않았다. 분홍색 하트가 여러 겹으로 보이고 시야가 흐려질 뿐이었다. 윤민기, 윤민기, 윤민기. 비 오는 날 홀로 염불하는 스님처럼 아무리 이름을 중얼거려 보아도 잘 떠오르지 않던 얼굴이 하트와 연결되자 죽비로 머리를 맞은 듯 번쩍, 떠올랐다. , 민기. 군을 제대하고 대학 시절 내내 함께 지낸 룸메이트였다. 대학 4년 동안 학교에 지불한 돈이라고는 건강검진비밖에 없는 장학생에다 아마추어 합창단 지휘자에게 사랑받았던 테너 독주자. 한때 합창단 반주자 선배를 두고 경쟁했던 연적이기도 했다.


김 부장이 저녁을 함께할 동지들을 향해 달뜬 말투로 업무 마감을 종용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업무 마감으로 분주한 사무실을 청량하게 울린 전화에 김 부장은 고개 쑥 빼고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이 자식 안 죽고 살아 있었네. 잘 지냈냐?”

그냥 그랬지, . 너는? 아니다. 만나서 이야기하자. 부탁할 일도 좀 있고. 바쁘냐?”

거절할 수 없는 묘한 말이었다.

오늘?”

. 나 지금 너희 회사 앞이야.”


통화를 엿듣고 있을 김 부장의 동의를 얻기 위해 수화기를 다른 쪽 귀로 옮기며 김 부장 자리를 쳐다보았다. 김 부장은 고개를 숙이고 한쪽 다리를 떨고 있었다.


큰일 있는 건 아니지?”

큰일은 아니고…….”


민기는 비밀을 입 밖에 처음 내는 사람처럼 끝을 길게 늘이다 말을 이었다.


나 이혼했다.”

? 이혼?”


나의 격양된 목소리에 김 부장은 -” 하고 작은 탄식을 뱉으며 떨던 다리의 속도를 차츰 늦추었다.


*

“5년 만에 나타나서 이상한 소리나 하고. 누구였냐? ? 혜지 선배?”

그런 거 아니야, 인마.”

그럼 뭔데? 서로 죽고 못 살던 사람들이.”


민기는 우시장에 다다른 소처럼 우울과 체념의 눈빛으로 날 바라보다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두 달 전쯤이었나. 평소와 다름없이 퇴근해 집에 갔는데 혜지가 퉁퉁 부은 눈으로 그러더라. 나에게 할 말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다고. 그게 끝이야.”

……

당황스러웠지, 화도 나고. 그런데, 그게, …… 이해되지 않으니까 오히려 쉽더라. 거부할 수 없었어. 홀린 것처럼.”


민기는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터져버린 감정을 단속하는 몸짓 같았다. 나는 별안간 재채기하는 낙타를 생각했다. 재채기, 낙타의 재채기, 재채기하는 낙타.


빈 소주잔을 빙그르르 돌리던 민기는 깨물었던 파리한 입술을 풀며 말했다.


“10년 전 오늘, 우리 뭐 했는지 기억나냐?”

“10년 전? 글쎄…….”

우리 홍콩에 있었어. 동지. 내 생일 핑계 삼아 혜지랑 셋이서 여행 갔었는데 기억 안 나?”

, 홍콩…….”


잠자던 기억들이 유성처럼 쏟아졌다.


둘이 홍콩 좀 가자. 그 성당에 가보고 싶거든.”


5년 만에 나타난 친구의 부탁치고는 싱거운 부탁이었다. 입에서 픽-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 가자. -마거릿 성당 가서 유덕화 흉내도 내고 양조위처럼 에스컬레이터도 타고. 오리엔탈호텔 가서 장국영 따라 하지는 마라.”

알잖아, 난 그럴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거.”


*


만취한 민기를 택시 태워 보내고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회사 앞을 하릴없이 서성이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 동지의 동지들이여. 동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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