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제대로 지젝거리기 입문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
토니 마이어스 지음, 박정수 옮김 / 앨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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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유령이 우리의 인문학 동네를 떠돌고 있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무관심에서부터 이웃집 닭한테 잡아먹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조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절대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그 유령의 이름이다. 그 유령은 이미 지난 2003년 가을에 우리 곁을 다녀가기도 했는바 어느새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 ‘지젝거리는’ 이들이 그들이다. 최근에 급기야는 ‘지젝거리는’ 이들을 위한 교본까지 등장했으니,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가 그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이 슬로베니아 출신의 '괴물' 철학자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통해서 영어권 학계/이론계에 등장한 지 불과 15년 만에 '우리 시대의 사상가' 명단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등재시켰고, 저자 마이어스의 주장대로 그의 파괴력/영향력은 갈수록 확고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삐딱하기 보기>(시각과 언어, 1995) 이후에 열댓 권이 넘는 지젝의 책들이 우리말로도 번역/소개되었으니 우리 또한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 책들은 한편으론 “오늘날 활동하는 가장 탁월한 사상가” 지젝의 지적 파워를 확인시켜주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의 말들을 (도대체 알아먹지 못할) 지저귀는 언어로 옮겨놓음으로써 가뜩이나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로 오해받는 지젝에 대한 반발과 미움을 더욱 부채질하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마이어스의 책은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로서 그러한 오해와 미움을 단번에 불식시켜줄 수 있는 책이다. 저자가 한 입 크기로 적당히 썰어놓은 지젝의 아이디어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다 보면 “아하, 그렇구나!”라는 감탄과 함께 결국엔 저자의 이러한 결론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지젝이 라캉으로 ‘되돌아가고’, 라캉이 프로이트로 ‘되돌아간’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젝에게 ‘되돌아갈’ 것이다.”(231쪽)

 

이러한 여정의 안내자로서 저자는, 이미 알려진 바대로 지젝에게 영향을 준 세 사람, 즉 헤겔, 마르크스, 라캉에 대한 예비적인 설명을 앞세운 이후에 다섯 가지의 핵심 이슈로 그의 사상을 갈무리한다. (1)주체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중요한가? (2)탈근대성에서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3)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4)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5)왜 인종주의는 환상인가?

 

이 주제들을 다루는 각 장의 말미에 친절하게 요약돼 있는 내용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지젝에게서 과연 무엇이 새로운가는 잠시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가령, 지젝은 대부분의 현대철학자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근대적 주체로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 그가 말하는 주체(subject)는 ‘자기로의 철회’라는 극단적 상실의 결과로 이르게 되는, 부정성의 텅 빈 지점이고 텅 빈 공간이다. 그리고 이 텅 빈 자리는 주체화(subjectivization)의 과정을 통해서 채워지는바, 주체화란 우리들 자신을 언어 등과 같은 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주체’와 ‘주체화’의 차이이며, 이 차이는 하이데거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견주어 ‘주체론적 차이’라 이름붙일 만한 것이다(지젝의 철학박사학위 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었다). 순수한 부정성으로서의 주체는 아무런 내용물도 갖지 않는 텅 빈 장소이자 공백이지만, 이 공백은 언제나 주체화가 실패하는 지점을 표시한다. 이러한 주체로서의 코기토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지젝은 근대(모던) 주체철학의 계보를 계승한다. 하지만, 그의 주체철학은 탈근대(포스트모던)의 탈-주체철학 이후에, 그것을 비판/극복한 자리에서야 비로소 도래 가능한 철학이다. 그것이 포스트모던 이후, 즉 포스트-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지젝이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서 자리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의를 우리는 그가 다루는 다른 주제들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아직 현재진행형인 지젝의 사상을 안내하는 여정의 끝에서 저자는 지젝의 이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소급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고,“한마디로, 지젝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미래에 ‘존재’하게 될 것이기에 그는 현재 ‘유령’이다.) 그러한 예언을 다만 미래의 것으로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1989/1991년 이후의 탈냉전 시대, 그리고 2001년 9.11 이후에 '가능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지젝의 작업들은 그가 어쩌면 '우리 시대의 헤겔'일지도 모른다는 걸 암시해준다.

 

그리고, 마이어스의 책은 이 ‘또 다른 헤겔’ 입문서로서 현재로선 더없이 유익한 길잡이이다(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제대로 ‘지젝거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의를 책의 제목에 반영하자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보다 더 적절한 것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두려워하랴?"가 될 것이다. 비록 그가 유령이라 한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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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낸시 랭과 탈승화의 예술

 

 

 

요즘 가장 잘 나간다는 '아티스트' 낸시 랭에 대해 몇 자 적는다. 그녀를 만나본 적도, 그녀의 전시회에 가본 적도 없지만, 언젠가 케이블 TV에서 눈에 띄는 (미혼의) '여성 아티스트'로 소개하는 코너를 우연히 본 적은 있다('콘트라 섹슈얼'이란 프로그램). 그리고, 채 몇 달이 되지 않아 (세계를 목표로 한다는) 그녀는 (적어도) '전국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TV광고에 나오는 건 물론 토론프로그램 패널을 거쳐서 케이블채널의 진행자까지 되었다고 하니까 가히 연예인 뺨친다(혹은 예술의 연예화?). 

미술계에 계시는 분들의 말씀으론 작품 또한 최근에 가장 잘, 가장 많이 팔리는 축에 든다고 하니까(한편으론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겠다) 소위 '성공하는 예술가'의 한 전형으로서 손색이 없다. '문화현상으로서의 낸시 랭'에 미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한번쯤 관심을 가져볼 만한 이유이다. 여기서는 몇 개의 인터뷰/기사를 따라가면서 나의 의견을 보태도록 하겠다.    

먼저, "상큼한 매력의 요정 "세상의 권태여, 가라" 기분 좋은 파격과 긴장의 화신, 편견 깬 신세대 행위예술가"란 제하에 막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던 재작년(2004년) 5월 낸시 랭의 퍼포먼스를 취재한 주간한국의 소개기사. 자신을 새로운 '문화상품'으로 전시할 줄 아는 이 '앙큼한' 아티스트에 대한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YOU LOST! 내게 무릎을 꿇어! 나른한 봄날 오후, 식곤증에 시달리는 당신, 방심하다가는 이 앙큼한 고양이에게 당할지도 모른다. 당신 품에 와락 안겨 윤기 나는 하얀 털로 당신의 가슴을 간지럽히는 럭셔리한 고양이가 대뜸 하는 말, YOU LOST! 당신은 아직까지 근엄한 얼굴로 허허, 웃겠지만 이 고양이를 쉽게 보았다간 큰 코를 다칠지도 모른다. 온갖 끼와 잠재된 재주로 당신의 이성을 흔들어 놓을 애교의 메신저! 당신은 곧 그녀가 만드는 폭탄주를 마시고 견고한 이성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둘 것이다. 큐티, 섹시, 키티, 낸시, 구호를 외치는 당신을 발견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것이 낸시랭이다."

"아담한 키에 앳된 얼굴, 틴에이저로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섹시한 몸의 그녀는 이른바 ‘몸짱’, ‘얼짱’, ‘애교짱’이다. 벌써 다섯 번째 개인전을 가질 만큼 자신의 분야에서 신세대 유망주로 떠오른 아티스트다. 20대 후반의 이 행위예술가는 예술가에 대한 편견을 단박에 깨부순다. 타인을 만나자 금세라도 품에 안길 듯 달려와 자신의 소니 소형 캠코더에 인사를 시키는 그녀."(*요컨대, '큐티, 섹시, 키티, 낸시'가 그녀의 컨셉/구호이며, '몸짱' '얼짱' '애교짱'이 무기이다.)

-첫 대면부터가 그녀의 초미니 스커트만큼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거부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 낸시와 함께 있는 공간은 그녀가 만든 ‘이상한 나라’였다. 하늘의 구름이 갑자기 리라빛으로 변하고, 나무들이 춤을 추기도 하는 이 신기한 나라에서 호기심으로 가득찬 얼굴로 캠코더를 보며 인사를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안녕? 낸시! 난 오늘 널 만나러 왔단다. 낸시 랭이란 여자아이가 순진무구 애교 덩어리란 소문을 듣고 왔어. 넌 누구니. 후 아 유?”

-초록의 계절, 푸르른 숲이 주위를 뒤덮어 권태롭기까지 한 계절에 서프라이즈한 퍼포먼스가 있었다. 위엄으로 가득찬 예술의 전당 지붕 아래, ‘SFAF(서울파인 아트 페스티벌) 한국 미술 열흘 장’ 오프닝에서 ‘싱싱 Sing’이란 이름으로 진행된 낸시랭의 세 번째 퍼포먼스. 단발머리 낸시는 까만 선글라스에 발목까지 오는 버버리를 입고 한 손엔 잉글리시 콕스파니엘을 산책시키는 그로테스크한 여자로 분한다. 궁금증과 긴장으로 혼합된 그 순간에 버버리를 벗어 던지는 낸시. 그러자 비키니 차림의 싱싱한 몸이 노출되고, 순간 로비는 해변가로 변한다.

-베이비 오일을 바르고, 자신의 몸을 훔쳐보는 관객을 향해, 손을 뻗어 ‘오일을 발라 주세요’ 라고 애교를 떨다가, 성큼 다가오지 못하는 관객을 비웃기라고 하듯, 싱싱한 육체를 뽐내며 신문과 잡지로 도배된 기계 앞으로 다가간다. 언뜻 보아 권위와 보수로 똘똘 뭉친 신문과 잡지다. 껍질을 벗겨내듯, 옷을 벗듯, 훌러덩 벗겨내니, 노래방 기계가 나오고, 상큼한 요정처럼 ‘보랏빛 향기’ 를 부른다. 관객은 어느새 그녀에게 동화된다. 그녀의 하이힐과 빨간색 비키니 만큼이나 도발적인 퍼포먼스였다.

-이 여자가 바로 낸시 랭. 미국 국적 취득 전 한국이름은 박혜령. 한국인이면서 미국 국적을 지닌 낸시는 18세까지 이중국적으로 두 가지 삶을 살아왔다. 지금은 누가 보아도 낸시 랭이란 이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여자다. 낸시의 퍼포먼스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3년 베니스의 비엔날레에서 낸시랭은 초대받지 않은 예술가였지만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이라는 주제로 개막식 날 자신이 좋아하는 빨간색 빅토리아 시크릿 란제리에 하이힐을 신고, 얼굴은 가부키를 연상시킬 만큼 허옇게, 어릿광대 마냥 페인팅을 한 채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물론 낑깡 낑깡.(*내가 케이블 TV에서 본 프로그램에서도 이 퍼포먼스는 자세히 소개되었다.)

-낸시가 내는 불협화음은 어릴 적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꿔왔지만 이루지 못했던 꿈에 대한 영원한 동경과 삶과의 갈등을 표현해낸 것이었다. 비엔날레의 주제, ‘꿈과 갈등’과 딱 들어맞았다. 세계 여러 잡지에서는 이 어린 동양 여자아이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낸시의 데뷔작은 평범치 않게,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지나가는 서양인들이 낸시를 보고 하는 말, “You looks sad!"

-예사롭지 않은 낸시가 내뿜는 마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낸시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요기니가 이런 의문을 풀어준다. 요기니는 바로 낸시 랭 자신이다. 천사와 악마의 중간자적 존재로 인간과 신 사이의 영적인 메신저 역할을 하는 요기니에 타부를 개입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요기니를 탄생시켰다. 낸시는 요기니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꿈과 이상, 상처와 극복을 보여준다. 천사와 악마의 모습을 함께 지닌 요기니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여서 어쩐지 슬퍼 보이고 고독해 보이지만, 잠재된 파워와 끈길긴 생명력을 지녀 끊임없이 부활하는 영적인 존재다. “호랑이는 강한 동물이지만,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 고독한 영웅이잖아. 강한 것 같지만 늘 혼자 있는 외로운 동물. 내가 그렇다니까!”

-낯선 이의 팔짱을 쉽게 끼고, 가벼운 스킨 십으로 벽을 허물고, 친근감 있게 말을 트고, 허스키 코맹맹이 소리로 언니, 오빠, 선생님을 부르는 낸시. 버릇없어 보이기보다 타인에게 쉽게 문을 열어 오히려 불안할 정도로 순진해 보인다.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하던 어머니를 둔덕에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로웠던 유년시절, 용돈을 모아 산 천체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하던 낸시는 공상의 나래를 꿈꾸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낸시의 공상은 우주로 뻗어 나갔고, 자연스레 공상 과학 만화의 상상력은 그녀의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예술의 전당 지붕아래서 열리는 다섯 번째 개인전의 타부 요기니 시리즈는 기생의 가채머리를 한 동양 여성의 얼굴에 몸체는 로봇인 여전사가 등장한다. 낸시의 작품속 요기니는 대부분 잔다르크적 이미지의 여전사가 대부분이다. 여전사는 그녀와 닮은 그녀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낸시의 어머니는 낸시가 당신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살기보다 영화관에 가면 중간 줄에 앉은 관객처럼 평범하고 문안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낸시에겐 꿈이 있다. 요기니를 통해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과 이상이다.

-너, 아직도 꿈을 꾸니? 나는 묻는다. 응, 나는 꿈을 자주 꾸어. 하늘을 나는 꿈. 바다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꿈.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새처럼 훨훨 나는 꿈을 꿀 때가 가장 행복해. 마치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 같잖아.

-긴장이 풀어지는 봄날 오후, 꿈을 현실로 불러들이는 이 여자를 조심하라. 자신의 분신 타부 요기니 시리즈로 낸시가 말하려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혼자놀던 외로운 아이는, 자신의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시켜줄 요기니를 탄생시켰지만, 결국 요기니를 통해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그리고 오늘자(2006. 04. 09) 인터넷판 세계일보의 기사(여타의 많은 기사들도 대동소이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아티스트 낸시 랭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소개하고 대통령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악수를 나누는 사람, 낸시 랭(27·한국명 박혜령). 연예인인지 디자이너인지 사람마다 아리송한 ‘답안’을 내놓는 이 사람, 요즘 TV만 틀면 여기저기 나온다. 초고속통신망 광고에서 머리에 깃털을 달고 고양이 캐릭터와 탭댄스를 추고, 패션브랜드 광고의 지폐뭉치 속에서 웃고 있다. KBS의 ‘파워 인터뷰’에 고정패널로 나와 몇 차례 돌출발언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더니 슬며시 사라졌다. 그러더니 이번엔 케이블 음악채널 M.net에서 지난 3일부터 월∼금요일 오후 6시30분 ‘낸시 랭의 트렌드 리포트 必’에 진행자로 매일 저녁 나오며 카메라 앞에서 퍼포먼스도 하고 토크쇼도 한다. 본인 말대로 “연예인에게 오는 CF, 영화 등의 섭외는 다 들어온다”는 이 사람의 정체는 무얼까.



◆그녀에 대한 오해: 낸시 랭이 광장에 나온 건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거리 퍼포먼스. 초대받지 않은, 가난한 아티스트 낸시 랭은 얼굴에 분칠을 하고 란제리 차림으로 하이힐을 신고 바이올린을 켰다. 이름하여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 : 터부 요기니 시리즈’. 이 파격적인 공연 이후 그는 2000년대 한국 현대 미술계에서 논쟁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하지만 그는 “퍼포먼스를 한 건 단지 돈이 없어서였다”고 설명한다.

-그를 만났을 때 가장 묻고 싶었던 말, 지난해 11월 KBS ‘파워 인터뷰’에 고정 패널로 출연했을 때의 문제의 발언을 되짚었다. 당시 그의 발언, “(천정배) 장관님도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보셨나요?” “저 엘리트 너무 좋아하거든요” 등은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큰 오해를 낳았다. “엘리트는 누구나 되고 싶어하는 거잖아요. 많이 가진 만큼 베풀지 않는 한국 엘리트의 현실이 문제이지, 엘리트가 문제는 아니잖아요? 전 명품도 좋아해요. 루이 뷔통부터 크리스천 디올까지, 좋아하는 순위별로 댈 수도 있죠. 누구나 원하는 걸 제가 굳이 숨기지 않은 게 잘못인가요.” 그녀는 ‘파워 인터뷰’에서도 “패널이 아닌 아티스트 낸시 랭으로 출연한 것뿐”이었다며 얼굴을 붉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지 않으면 불안해해요. 튀어나오면 못박고 싶어하죠.”(*나중에 다시 지적하겠지만, '누구나 원하는 걸 굳이 숨기지 않는 것', 그게 '낸시 랭'표 아트의 핵심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필리핀에서 보낸 국제고등학교 시절 “전략적으로” 변호사를 사서 바꾼 이름이 낸시 랭(본명 박혜령)이다. ‘랭’은 그가 “비주얼과 타이포그래피, 국제성까지 감안해 만들었다”는 성이다.

◆걸어다니는 팝아티스트 낸시 랭: 아티스트 낸시 랭은 요즘 매일 출근을 한다. 매일 그가 아트디렉터로 있는패션브랜드 쌈지에 출근을 하고 M. Net 아이디어 회의와 녹화도 병행한다. 4월 말 출간 준비중인 책과 개인전, 또 최근 쌈지가 후원하는 입주 프로그램 작가로 선정돼 활동도 벌여야 한다. 도대체 언제 그 많은 일들을 수습할까. “꿈 속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그는 침대 머리맡, 화장실, 핸드백 곳곳에 노트를 놓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적어놓는 ‘기록광’이라고 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낸시 랭’ 상표의 옷과 가방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그가 디자인한 핸드백 안쪽엔 ‘메이드 인 차이나’ 대신에 ‘메이드 인 헤븐’이라고 씌어진 상표가 붙어 있다. 드라마 ‘궁’에서 윤은혜가 들었던 알루미늄 하드케이스의 핸드백 ‘매직박스’도 그의 작품. 대중의 기호를 따라가면서 아티스트 고유의 세계를 지키는 일이 가능할까.“국내에서 아티스트가 방송프로그램 진행을 통째로 맡는 건 처음이죠. 팝 아티스트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대중매체를 이용하는 건 자연스런 작업인데도 말이죠. 방송을 통해 트렌드를 만들고 전달하며 재해석하는 아티스트 낸시 랭의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줄 겁니다. ”

-“낸시 랭은 비즈니스를 예술과 접목시키는 걸 즐기는 사람이”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는 “미술가도 잘 되는 것 보여줘야 다른 분야처럼 관심과 투자를 받을 수 있지 않겠냐”고 한다. 낸시 랭은 오는 6월 대대적으로 자선 기부파티를 벌일 계획도 털어놓는다. 작품 대신 계획서를 받아 13명의 젊은 예술가들을 뽑은 후 그들을 후원해 주겠다는 생각이 낸시 랭답다.

 

 

 



-그가 꿈꾸는 예술가는 피카소, 달리, 앤디 워홀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천재적 재능과 다작을 남겼다는 것. 그리고 부와 명성을 ‘일찍이’ 누렸다는 거죠. 고흐는 싫어요. 우울하고 고통스럽게 살며 명작을 남겼지만, 사후에야 유명해졌잖아요?”

-작품보다 작가가 유명해지는 것에 불만은 없을까. “지난해 말 쌈지에서 낸시 랭 개인 전시회할 때 사람들이 밖에서 줄서서 기다리다 들어왔어요. 쌈지 전시장 개장 이후 그렇게 성황인 건 처음이라 그러던데요.” “나르시시즘이 내 작품 키워드 중 하나”라는 그녀의 무한한 자신감과 솔직함이 부러워졌다.

'우리시대의 팝아티스트' 낸시 랭의 '아트'에 대한 나의 의견은 간단하다. 그녀의 이런저런 '아트'가 보여주는 것은 '탈승화의 예술', 혹은 '예술 이후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예술 이후의 예술' 혹은 '탈역사 시대의 예술'에 대해서는 미국의 철학자/비평가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의 논의를 참조할 수 있는데, 단토의 '예술종말론'의 영감은 낸시 랭의 우상이기도 한,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1964)에서 비롯됐었다. 

 

 

 

 

단토가 워홀의 작품에서 끌어내는 문제의식은 상품으로서의 '브릴로 박스'와 지각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과연 어떻게 (여전히) 예술일 수 있을까였다. 그러니까 예술과 비예술간의 '지각적 식별 불가능성'의 문제가 '예술(시대)의 종언'을 이끌어낸 화두였다(덧붙이자면, 단토에게서 '예술의 종말'은 비극적인 음조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예술 다원주의'의 개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온몸으로 보여주는 낸시 랭의 '아트' 또한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본인 말대로, “연예인에게 오는 CF, 영화 등의 섭외는 다 들어온다"고 할 때, 우리는 겉으로 봐서는 그녀가 아티스트인지 연예인인지 식별하기 어렵다(그녀에겐 매일 출근하는 '직장'도 있다). 즉, 여기서도 '지각적 식별 불가능성'이 개입하는 것.  

 

 

자본주의/대중문화 시대의 아티스트/연예인은 다 같이 대중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각자의 장기와 재능을 상품화함으로써 인기와 부를 획득한다. 애교와 끼가 '예술'인 낸시 랭은 노래와 댄스가 '예술'인 채연, 혹은 연기가 '예술'인 한고은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모두가 팝(pop)에 호소하는, 그럼으로써 한몫잡는 아티스트들 아닌가?(요즘은 '돈벌이'도 아트에 속한다.) 그렇다면, 단토가 앤디 워홀과 더불어 예술(미술)이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낸시 랭과 더불어 예술가의 종말을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예술가의 종말' 이후에도 고흐처럼 "우울하고 고통스럽게 살면서 명작을 남"기는 예술가들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예술가는 '예술가 다원주의' 시대의 한 유형 정도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탈승화의 예술'인가? 프로이트를 참조하자면, 예술은 기본적은 '승화'의 과정이자 결과물이었다. 할 포스터의 정리를 따라가보자: "프로이트는 예술을 승화의 과정이며 본능을 포기하는 협상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예술이 탈승화의 프로젝트라거나 문화가 금지하는 사항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보는 입장을 단호히 거부했다."(<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 31쪽, 번역 일부 수정) 승화(Sublimation)라는 건 리비도의 (비사회적) 욕망을 예술적 창조행위처럼 사회적으로 수용할 만한 양태로 치환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낸시 랭의 기원이라 할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의 퍼포먼스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은 승화의 전형적인 예이다. 다시 옮기면, "개막식 날 자신이 좋아하는 빨간색 빅토리아 시크릿 란제리에 하이힐을 신고, 얼굴은 가부키를 연상시킬 만큼 허옇게, 어릿광대 마냥 페인팅을 한 채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물론 낑깡 낑깡. 낸시가 내는 불협화음은 어릴 적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꿔왔지만 이루지 못했던 꿈에 대한 영원한 동경과 삶과의 갈등을 표현해낸 것이었다. 비엔날레의 주제, ‘꿈과 갈등’과 딱 들어맞았다."

거기서 '영원한 동경과 삶과의 갈등'을 어릿광대의 불협화음 바이얼린 연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승화이다(그러니까 낸시 랭은 적어도 베니스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였다). 혹은 낸시 랭의 이러한 말: "너, 아직도 꿈을 꾸니? 나는 묻는다. 응, 나는 꿈을 자주 꾸어. 하늘을 나는 꿈. 바다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꿈.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새처럼 훨훨 나는 꿈을 꿀 때가 가장 행복해. 마치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 같잖아."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 혹은 현실과 타협해 가는 과정, 그런 게 프로이트가 생각했던 예술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예술을 탈승화의 프로젝트로 보는 입장에 반대했던 것이다. '탈승화(Desublimation)'란 자아의 중개/제약 없이 리비도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낸시는 요기니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꿈과 이상, 상처와 극복을 보여준다"라고 할 때 그 '극복'은 억압되지 않은 리비도의 자기 분출/표현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탈승화는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하던 어머니를 둔덕에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로웠던 유년시절"의 유산이기도 할 것인데, 그녀는 자신의 욕망과 타협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그녀의 '낑깡 낑깡'은 자신의 본모습이 아니라, 한시적인 모습이었을 뿐이겠다).

가령, 이런 기사는 어떠한가? 데일리 서프라이즈(2006. 01. 01): "한국사회에 혜성처럼 등장해 이미 그녀 자신이 하나의 브랜드화 되어버린 아티스트 낸시랭(한국명 박혜령)의 파격 행보는 지금껏 우리 머릿속에 각인돼온 전통적 아티스트의 단상을 지극히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미술 잡지나 공모전, 아트페어가 아닌 <바자>나 <엘르> 같은 패션지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며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던 낸시랭은 누구보다 자신을 드러내기에 주저하지 않는 솔직한 아티스트다."

여기서, 전통적 아티스트에 대한 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그녀가 '예술가 종말' 시대의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며, '솔직한 아티스트'라는 것은 이 '나르시시즘의 예술가', 혹은 '공주병 예술가'가 자신의 욕망과 따로 타협하지 않는 '탈승화의 예술가'라는 걸 암시해준다. 예컨대, 그녀는 명품중독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그대로 퍼포먼스의 주제로 삼는다.

다시 데일리 서프라이즈: "신드롬이라 부를 만한 예외적 상황들을 끌어내며 한 해 동안 대한민국 현대미술계의 이슈 메이커가 되었던 그녀는 자신에 대한 극단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미술계의 핵심부로 다가서고 있다. ‘아이 러브 루이비통’을 외치며 예일 로고를 작품에 등장시키는 철저한 세속성과 싱싱한 육체를 이용한 섹스어필한 퍼포먼스는 이중성을 벗어던진 홑겹의 재현 방식으로 음습하지 않은 경쾌함 마저 전해 준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고립감에 빠져 무게에 짓눌린 현대미술계의 핵심을 어떤 방식으로든 건드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중성을 벗어던진 홑겹의 재현방식'이 암시적으로 뜻하는 것 또한 그녀가 리비도(이드)와 자아 간의 타협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예술가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정확히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녀는 우리시대의 초현실주의 아티스트이다. 혹은 그녀의 예술적 주체는 초현실적 주체이다. 대부분 잔다르크적 이미지의 로봇 여전사인 그녀의 대표 아이템 '타부 요기니'처럼. 나는 그녀의 로봇-요기니가 욕망과 타협할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녀가 대놓고 말하는 자신의 욕망이란 무엇인가? "천재적 재능"을 인정받으면서, "다작"을 통해 "부와 명성을 ‘일찍이’ 누리는 것"이다. 우리시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런 걸 바란다고 해도, 적어도 '현실'에서는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대놓고 돈을 밝히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낸시 랭의 '현실'은 우리의 '초현실'이다(혹은 우리시대는 이미 '탈승화의 시대'인가? 하긴 '부자되세요!'라고 인사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06.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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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계몽기 지식 개념의 수용과 그 변용

고미숙, 고유경, 권보드래, 길진숙, 김동택, 류준필, 박노자, 박주원, 이진경, 전동현, 정선태, 함동주 (지은이) | 소명출판 ㅣ 2004

근대 계몽기의 근대적 지식과 담론의 형성 과정을 살핀다. 책은 크게 1894년에서 1899년 사이에 간행된 인쇄매체를 텍스트로 하여 이 시기의 지식 담론, 지식 개념의 수용 및 변용을 다루는 내재적 접근과 같은 시기의 일본, 중국과의 비교를 통해 담론의 특수한 양상을 살피고자 하는 외재적 접근 두 측면에서 씌어진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전반부에 실린 논문에서는「독립신문」을 중심으로 「한성순보」,「한성주보, 「매일신문」등 매체와 기타 단행본들을 참조하면서 주요 지식 개념과 담론의 수용과 변용을 고찰한다. '독립', '문명과 야만', '개인과 사회', '인종과 민족', '시간과 공간' 등 핵심적 개념들의 수용과 담론장에서의 변용을 밝힌다.
책의 후반부에 실린 논문에서는 근대 계몽기의 지식 개념의 형성에 대해 비교사적으로 고찰한다. 독일, 일본, 중국의 특수한 양상과 한국의 근대적 지식형성의 양상을 비교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적 특징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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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자일리톨 > 근대화과정에 대한 대단한(!) 도발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 철도로 돌아본 근대의 풍경
박천홍 지음 / 산처럼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철도로 돌아본 근대의 풍경’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이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근대성이라는 것이 내면화되었는지에 관한 연구서다. 이 책은 근대문명 그 자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철도가 우리의 삶에 미친 영향을 당시의 공문서, 신문기사, 문학작품 등의 사료를 통해 분석함으로써 근대민족의식, 제국주의, 공간, 시간, 풍속의 변화를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저자인 박천홍이 제시하는 자료는 책 말미의 참고문헌목록만 보더라도 방대하며, 곳곳의 글의 문맥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인용된 사료는 명쾌하고도 적확하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이 책을 준비했다고 할 정도로, 우리는 책의 곳곳에서 저자의 고민과 고된 작업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상당히 왜곡된 우리 근대화 과정의 문제다. 저자는 근대화과정에서 “서구의 근대화가 자신들의 패권을 지구적으로 관철시키는 과정이었다면, 비서구권에서는 타율적으로 자본주의 세계로 편입되는 고난의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당시의 조선은 서구의 패권주의와 일본제국주의라는 이중적인 억압을 겪어야만 했기에 더욱 고난에 찬 근대화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근대화는 전근대사회의 잔재를 쓸어버리고 근대적 합리성(자본의 증식이라는 절대적인 목적을 위한 합리성)을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정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서구의 경우, 자신들의 전통의 재해석이라는 과거와의 끈을 통해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 반해, 조선의 경우는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전근대사회와의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원인이 되었다.

증기기관이라는 동력은 대량생산을 위한 생산력의 집적(대공장제도)을 가능하게 했으며, 철도는 상품과 원료, 기술을 놀라운 속도로 실어나르며, 전지구를 단일한 시장으로 만들었고 세계를 자본주의적인 분업체계로 재편했다.  이는 구래의 농촌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고, 농촌에서 밀려난 대규모의 인구는 도시빈민으로서 자본주의적 질서를 유지하는 값싼 노동력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는 부르주와지의 주도세력으로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은 가상적 실체인 민족과 근대국민국가의 성립, 국민교육제도와 징병제, 신문, 소설과 같은 서사문학의 유행, 표준시(mean time)제도의 확립, 봉건적 신분제의 철폐, 근대도시의 성립, 박람회 등을 통해 새로운 착취구조를 은폐하고 그들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다시 한번 왜곡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철도노선의 건설을 위해 민중은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고, 민중의 생산물은 철저히 싼 값으로 수탈당해야 했고, 철도건설에서 구도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일본인 주도의 새로운 식민도시를 건설하여 전통사회와의 단절을 의도하였으며, 빈부에 따른 도시공간의 분할이 조선인과 일본인이라는 국적 구분에 의해 다시 한번 분할되는 차별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저자는 근대성에 관한 수많은 문헌을 통해 우리의 근대화 과정의 문제를 치밀하게 논증한다. 근대적 시간을 이야기하기 위해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가 등장하기도 하고, 철도의 삶과 죽음의 갈림길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이인직의 ‘은세계’가 나오기도 하며, 근대의 성격을 논하기 위해 베네딕트 앤더슨, 칼 맑스,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라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 우리의 정체성과 근대와 관련한 새로운 저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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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클리오 > 한국 근대에서 독서취미와 문학의 탄생 과정
근대의 책 읽기 - 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
천정환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학위논문을 옮긴 것이라해서 잔뜩 긴장하고 시작한 것이 사실인데, 중간중간 그야말로 전문적인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첨부된 여러가지 사진과 자료들을 보며 즐겁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재치있는 글쓰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숨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저자의 경쾌한 서문에 이어 저자는 근대에 '독자'가 형성되는 과정, 각 시기별 유행했던 책과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변화, 글쓰기와 언어생활, 베스트셀러와 문학, 각 계층별 책 읽기, 책 읽는 방법과 작가와 독자의 커뮤니케이션 등 '책'과 관련된 모든 주제를 한 권의 책에 담아내고 있다.

얼마전 방영했던 드라마 '환생'에서 한 전생은 일제시대, 일장기 말살사건이 등장하는걸보니 1920년대 후반 정도를 배경으로 했다. 주인공 여자가 글을 못 읽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글을 배우려 애쓰는 대목이 다오는데, 나는 그 대목을 보면서 '최근까지도 할머니들 중에는 글 못 읽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저 시대에 저걸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한다는 것이 말이될까.'라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이 책을 보면 실제로 1930년대 한국 여성의 90-95%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하지만, 집에서 '언문'을 깨친 여성은 꽤 있었을 것이며 '배워야한다'는 것이 실력양성론이건 뭐건 여자들의 머릿 속에까지 그 이데올로기와 심리적 강박으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문학과 독서에 관한 책이긴 하지만, 위의 사례와 비슷하게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너무나 피상적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가 강력한 동화정책을 쓰기 이전에는 그래도 한반도 안에서는 모두가 우리말을 더 편해하고 우리말로 글을 쓰고 읽었던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시기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해 심각한 '이중 언어'생활을 지적한다. 고급출판물은 일본어로 출판되고 접했으며, 엘리트 지식인들은 한자를 쓰고 있었으므로 한글 전용에 대해 처음에 익숙해하지 않았고, 겨우 '우리 문학이라면 우리 말로'라는 것이 합의되고 난 다음에도 작가들은 작품 구상을 일본어로 했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또한 춘향전이 가장 많이 읽히고 많은 이본을 만들어낸 시기도 20세기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고정관념과는 너무나 다른 일제 시대의 상들이 펼쳐져 있었다.

독서가 정착되는 과정도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청각문화에서 시각문화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모여 함께 읽는 음독, 윤독에서 도서관에서 조용히 읽는 묵독으로 변해간다는 것은 이전까지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었다. 당연히 책이 나오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혼자 방에서 혹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이여. (그래서 중세수도사들에게는 묵독이 금지되었단다. 혼자 머리속으로 읽으면 '이단'이 탄생한다고 말이다.) 근대적인 책의 역사와 거의 비슷하게 포르노그라피가 요란한 광고로 등장하였고, 글쓰기 문화는 편지를 잘쓰는 능력이 중요시되는 것으로 출발하다시피 했다는 것도 매우 재미있었다.

500여 페이지에 가까운 책이니 독서가 가능한 기본 조건으로서의 문맹 탈출부터 한글 표기법, 책 읽는 방식, 시각적 현대성, 글쓰기와 연애편지, 책 발간 추세와 독서인구, 어린이 책, 이중언어, 대중독자와 엘리트독자, 신문연재소설, 계층별 글 읽기, 정전이 만들어지는 과정, 독자상과 작가상 등 책에 관한 정말로 많은 것을 다루고 있다. 지금도 근대성이 이어지는 시기이니 지금에까지 미칠 수 있는 책과 문학에 대한 통찰 역시 존재한다. 개인적인 관심이 역사라서 책을 통한 일제시대 사람들의 삶에 더 관심을 가졌지만, 문학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시대의 베스트셀러나 책을 대하는 감수성, 문학사, (지금도 그러하듯) 독자를 계몽하려는 경향이 있는 작가들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깊음과 다양성이 좋았으며, 중간중간의 여러 자료와 제공된 팁, 사진들을 보는 재미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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