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클리오 > 한국 근대에서 독서취미와 문학의 탄생 과정
근대의 책 읽기 - 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
천정환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학위논문을 옮긴 것이라해서 잔뜩 긴장하고 시작한 것이 사실인데, 중간중간 그야말로 전문적인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첨부된 여러가지 사진과 자료들을 보며 즐겁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재치있는 글쓰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숨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저자의 경쾌한 서문에 이어 저자는 근대에 '독자'가 형성되는 과정, 각 시기별 유행했던 책과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변화, 글쓰기와 언어생활, 베스트셀러와 문학, 각 계층별 책 읽기, 책 읽는 방법과 작가와 독자의 커뮤니케이션 등 '책'과 관련된 모든 주제를 한 권의 책에 담아내고 있다.

얼마전 방영했던 드라마 '환생'에서 한 전생은 일제시대, 일장기 말살사건이 등장하는걸보니 1920년대 후반 정도를 배경으로 했다. 주인공 여자가 글을 못 읽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글을 배우려 애쓰는 대목이 다오는데, 나는 그 대목을 보면서 '최근까지도 할머니들 중에는 글 못 읽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저 시대에 저걸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한다는 것이 말이될까.'라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이 책을 보면 실제로 1930년대 한국 여성의 90-95%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하지만, 집에서 '언문'을 깨친 여성은 꽤 있었을 것이며 '배워야한다'는 것이 실력양성론이건 뭐건 여자들의 머릿 속에까지 그 이데올로기와 심리적 강박으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문학과 독서에 관한 책이긴 하지만, 위의 사례와 비슷하게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너무나 피상적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가 강력한 동화정책을 쓰기 이전에는 그래도 한반도 안에서는 모두가 우리말을 더 편해하고 우리말로 글을 쓰고 읽었던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시기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해 심각한 '이중 언어'생활을 지적한다. 고급출판물은 일본어로 출판되고 접했으며, 엘리트 지식인들은 한자를 쓰고 있었으므로 한글 전용에 대해 처음에 익숙해하지 않았고, 겨우 '우리 문학이라면 우리 말로'라는 것이 합의되고 난 다음에도 작가들은 작품 구상을 일본어로 했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또한 춘향전이 가장 많이 읽히고 많은 이본을 만들어낸 시기도 20세기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고정관념과는 너무나 다른 일제 시대의 상들이 펼쳐져 있었다.

독서가 정착되는 과정도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청각문화에서 시각문화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모여 함께 읽는 음독, 윤독에서 도서관에서 조용히 읽는 묵독으로 변해간다는 것은 이전까지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었다. 당연히 책이 나오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혼자 방에서 혹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이여. (그래서 중세수도사들에게는 묵독이 금지되었단다. 혼자 머리속으로 읽으면 '이단'이 탄생한다고 말이다.) 근대적인 책의 역사와 거의 비슷하게 포르노그라피가 요란한 광고로 등장하였고, 글쓰기 문화는 편지를 잘쓰는 능력이 중요시되는 것으로 출발하다시피 했다는 것도 매우 재미있었다.

500여 페이지에 가까운 책이니 독서가 가능한 기본 조건으로서의 문맹 탈출부터 한글 표기법, 책 읽는 방식, 시각적 현대성, 글쓰기와 연애편지, 책 발간 추세와 독서인구, 어린이 책, 이중언어, 대중독자와 엘리트독자, 신문연재소설, 계층별 글 읽기, 정전이 만들어지는 과정, 독자상과 작가상 등 책에 관한 정말로 많은 것을 다루고 있다. 지금도 근대성이 이어지는 시기이니 지금에까지 미칠 수 있는 책과 문학에 대한 통찰 역시 존재한다. 개인적인 관심이 역사라서 책을 통한 일제시대 사람들의 삶에 더 관심을 가졌지만, 문학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시대의 베스트셀러나 책을 대하는 감수성, 문학사, (지금도 그러하듯) 독자를 계몽하려는 경향이 있는 작가들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깊음과 다양성이 좋았으며, 중간중간의 여러 자료와 제공된 팁, 사진들을 보는 재미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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