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 네루다 시집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민음사 / 1989년 1월
평점 :
절판


'詩가, 나를 찾아왔어'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밤의 가지에서,/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또는 혼자 돌아오는 길에/얼굴 없이 있는 나를/그건 건드리더군.'(네루다의 '詩')

인터넷의 드넓은 세계를 방랑하다가, 우연히 만난 詩. 그 감동적인 詩가 나를 파블로 네루다를 알게 했다. 네루다는 내가 처음으로 접하는 남미의 시인…, 아니 처음으로 접하는 남미의 문학이다. 며칠 밤 동안 조금씩 아껴서 읽은 그의 시는 낭만의 열정이 있고, 또 다듬어지지 않은 원시적 감수성과 환상이 살아있으며, 민중적이다.

이 책은 시선집이라 그의 시적인 세계의 변모를 조금씩 느낄 수 있는데, 그의 초기 시는 젊은이다운 연시이다. 19세에 펴낸 그 연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젊은 시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영사 자리를 주는 남미 정부들의 전통으로 그를 외교관이 되게 한다. 그의 연시들은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한 여자의 육체')나 '가는 인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건 그렇지만, 허나 나는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던가./내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가서 닿을 바람을 찾기도 했다.'('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라는 멋진 구절들을 품고 있다.

한편, 한용운적인, 즉 여성적인 울림의 연시만을 머리 속에 담고 있던 내게서 네루다의 '사방에서 나는 네 안개의 허리를 보고,/네 침묵은 내 애타는 시간을 괴롭힌다./내 키스는 닻을 내리고, 내 젖은 욕망은/투명한 돌의 팔이 있는 네 속에 둥지를 튼다.'('아 소나무숲의 광활함')와 같은 거칠은 남성적 애욕을 담은 연시는 새로움이었다. 개인적으로 초기의 연시들과 '시인', '詩'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참고로, 시집 뒤의 대담과 정현종 시인의 해설도 유익한 글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상력과 인간 / 시인을 찾아서 김현 문학전집 3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2월
평점 :
품절


한국 문학비평의 정점, 김현의 전집 중 세 번째 권이다. 이 책의 편집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 '김현 전집 제 3권은, 그의 초기 시론·시인론 들을 모은 두 권의 저서, <상상력과 인간>(일지사, 1973, 국판, 305면)과 <시인을 찾아서>(민음사, 1975, 신4·6판, 153면)로 엮어진다.'

김현을 읽고 싶다는 욕구는 그가 쓴 어떤 텍스트의 일부를 보고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를 우상에서 크게는 거의 신화적 존재로 보는 그의 제자와 후학들의 고백에서부터이다. 김현, 김현, 김현. 이 이름을 나는 그의 텍스트에서가 아닌 다른 텍스트에서 무수히 보고 또 봐야했다. 개인적으로 문체란 것이 실재하는 것임(!)을 알게 한 고종석의 글들에서 그의 문체와 사고의 메아리를 처음으로 들었으며, 다른 비평가들의 평문에서도 그의 위상은 전설 그 자체였다.

그러나 역시 모든 신화적인 이름들은 실제로 체험되거나 직접 맨 눈으로 바라보는 기회가 별로 없다. 풍문에서 시작되어 풍문에서 끝나는 것이다. '고전이란 이름만 무성하고 실제로는 잘 읽지 않는 것'이란 말처럼, 김현이란 한국 문학비평의 우상적 존재를 나는 풍문으로만 접해 왔었다. 이제, 그를 만난 것이다.

많은 평론집을 읽어보지 못해서 내 평론에 대한 측량술을 불신할 수밖에 없지만, 이 평론집에 나타난 그의 면모는 크게 보아 이렇지 않을까. 일단, 불문학도로서의 자의식.

'유럽 문학, 특히 내가 도취되어 있었던 프랑스 문학을 나는 나의 정신의 선험적 상태로 받아들였고, 그 상태 속에서 모든 것은 피어나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다닌 몇 해 동안도 그러한 정신 태도의 연장이었다. 학교에서 나는 보들레르와 랭보, 말라르메와 브르통, 그리고 프루스트와 쥘리앙 그린 들을 읽었고 그들의 정신 세계를 나는 나의 내부에서 거의 선험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라 프랑스 문학을 피부로 느낀다고 믿은 정신의 불구자였다. 정신의 불구자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16쪽)

「한 외국 문학도의 고백」이라는 제목의 이 글의 부분에서도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평론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말라르메와 발레리, 랭보와 보들레르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한국 시인들의 뛰어난 가치를 말하지 못한다. 그가 처음으로 완전히 몰입하고 도취하여 읽은 것이 프랑스 시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극단적으로 사랑했던 문학적 연인은 프랑스 시였으므로, 그는 새로운 연인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의 시들을 보고서도 항상 그 예전의 프랑스 시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 평론집이 초기작들을 묶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 이후의 김현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의 분석은 바슐라르의 상상력 이론과 정신분석학에 많이 기대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인의 상상력과 심리의 뿌리를 곱게 어루만지듯 꿰뚫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촘촘한 그물망을 치는 이론이라 할지라도 다채롭게 통통 튀어 다니는 현실세계를 그대로 포착해서 설명해낼 힘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이론과 문학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존재하는 비평은 언제나 실패하는 다리 역할만을 할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시인을 찾아서>의 에세이적인 평문들이 마음에 든다. 김현이 시도한 이 평문의 형식은 수많은 모방을 낳아서 그대로 하나의 평문의 유형이 되었다고 한다.(전에 읽었던 고종석이나 권성우의 시인론이 떠올랐다. 바로 이런 형식이었다. 특히 고종석이 쓴 황지우론은 글의 매듭 부분이 독특한 감성의 여운을 남기는 것인데 김현의 그것과 유사해서 흥임로웠다.) 실제로 시인을 찾아가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살아있는 대화를 잡아낸다. 시인과의 영혼을 다 드러낸 대화가 빼어난 평론의 정의라면, 이런 에세이 비평은 형식까지 평론의 의의에 다가선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198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불쑥 찾아드는 알음과 앓음이 있다. 그 알음과 앓음은 또 때때로 책으로부터 오기도 한다. 내 경우에도 그런 책들이 있었고, 아직까지도 그 책들은 내 사고의 울타리를 치고 있다. 물론 그 이후에 그 책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책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때의 깨어짐보다는 못한 것이었다. 일종의 인식의 전환이랄까, 세계관의 성립이랄까. 심각하게 말하자면 그런 정도이고, 아주 가벼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깊은 감동'이란 단어로 바꿔 말할 수 있겠다. 나의 어느 한 친구에게 그 대단한 책은 바로 <전태일 평전>이란다.

<전태일 평전>은 난해한 현학을 담은 철학서도 아니고, 모호한 개념으로 도배한 이론서도 아니다. 아름다운 수사로 가득찬 시집도 아니고, 즐거운 소설 이야기도 아니다. 저명한 학자가 쓴 정교한 사회과학서도 아니며, 종교의 교리를 담는 신앙서적도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지금껏 나열한 종류들 이상일 것이다. 이 책은 하나의 도화선이었다. 천지간을 울리는 폭음으로 인간을 일깨우는 횃불, 그 횃불로 이어진 도화선.

가난과 착취, 억압에 대항해 자신이 인간이라는 선언을 한, 한 젊은 노동자의 이야기가 <전태일 평전>이다.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는 노동자의 외침이, 그 뜨거운 분신이, 메아리쳐 울렸다. 그래서 전태일 이후의 한국과 그 이전의 한국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전태일이란 청년의 죽음이 있었기에…, 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조영래가 있었기에…, 라는 말도 가능할 것이다.

전태일의 수기 곳곳에서 발견되는 뛰어난 문학성과 성찰은 그가 잘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고 그가 생전에 얼마나 심각한 사유를 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또 조영래의 펜을 더불어 죽은 전태일의 혼령은 새로운 입술을 얻어 한풀이를 한다는 점에서 조영래의 역량도 가히 짐작하게 해준다. 빼어난 영혼을 지닌 - 한 노동자와 한 지식인이 여기 이 책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빈자의 철학인 동시에 인간선언의 철학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뜨겁게도 아픈 흔적을 드러내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실의 시대>는 상당히 대중적인 베스트셀러 소설로 알고 있었다. TV 광고에서 어느 지적인 미녀가 기차 안에서 품위 있는 포즈로 읽던 책이 바로 이 소설이고, 그런 이미지는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 책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을 선사한다. '상실의 시대'라는 멋진 제목과 문학 교과서에서는 접하지 못한 외국 작가라는 그 이국적인 이끌림! 실제로 일본에서는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거리가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그런 이분법적인 구분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수준 높은 문학이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고, 또 대중적인 작품도 독자를 빨아들이는 오락성과 흥미성 안에서 어느 정도의 감동과 철학을 담을 수 있는 그런 문학 창작과 독서의 풍조는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거리가 좁혀질 때에만 가능한 일이리라.) 어쨌든, <상실의 시대>는 일본문학이 본격문학의 질 저하나 수준 낮은 대중문학의 창궐 때문에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거리 차이를 없앤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듯 하다.

한 마디로 <상실의 시대>를 말하자면, '허무적 감상주의'이다. 와타나베를 비롯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고독과 허무감, 그리고 슬픔 속으로 밀어버리는 힘은 기즈키의 죽음과 그리고 여러 얽히고 설킨 삶의 상처들이다. 그런 복잡한 상처의 무늬가 이 소설의 처음에서부터 끝까지를 엮어내는 줄기가 된다. 그렇지만 다른 소설들과 색다른 점은 그런 상처들이 소설의 서사성 보다는 소설의 서정성에 기울어 있다. 이 소설에서 '죽음과 상처들'은 이야기의 짜임보다는 이야기의 분위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허무한 어느 청춘의 십대에서 이십대로의 성장과 방황을 다룬 소설이란 점에서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를 언뜻 떠올리게 했는데, 내게 있어서는 장정일의 소설 쪽이 좀더 마음에 든다. 주인공의 방황에 있어서도 아담의 방황이 더욱 흥미로웠고 그것은 아마도, 와타나베보다는 아담이 내게 더 가까웠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두 소설의 주인공 모두 허무하고 고독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소설 안에서의 독서를 예를 들자면, 그들의 독서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담에게 있어서의 독서는 '직업이 아닌 문학은 역겹다'라고 생각했던 장정일의 그것과 닮았고(아니, 바로 그것이고) 그래서 무거운 느낌까지 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와타나베의 독서는 '걸어서 여행하는 것, 수영, 책읽는 것'의 그가 좋아하는 '혼자서 하는 일'의 한 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와타나베의 애독서 리스트는 <위대한 개츠비>나 <켄타우로스>같은 것이고 아담은 신경림이나 김지하, 최승자를 언급하기도 한다. 두 소설 모두 문학, 음악, 영화 등의 많은 작품이 자주 등장하는데, '노르웨이의 숲'같은 음악에 대해서는 무지한 나는 외국곡에 대해서는 한없이 이국적인 분위기만을 느낄 뿐이다. 그러니 책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는데, 한국 문학까지도 말하는 장정일의 소설에 더 친근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말한 나의 외국문학에 대한 무지!)

한편, <상실의 시대>는 주인공이 읽는 문학뿐만 아니라 약간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그려낸 부분 등을 제외한다면 상당한 일본색이 없는 편이다. 그런 무국적의 분위기가 한국인에게도 이 소설을 읽게 하는데 부담감을 줄이고 이국적 매혹을 더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문학에서 전혀 새로운 이국성을 즐기기보다는 나와 조금은 가까운 것들의 거리감을를 확인하기를 즐기는 내게는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직은, 나는 '먼 곳에의 그리움'보다는 내가 밟고 서있는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더 흥미롭다.)

* 아, 그리고 이 소설에서 허무적 감상주의에 버금가는 강한 인상은 세밀한 묘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영웅전설 -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에는 DC 코믹스와 같은 미국 만화제작사의 '슈퍼 영웅'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은 미국의 패권에 대한 은유이다. 그리고, '덤'으로 등장하는, 우리의, 바나나맨! 바나나처럼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슈퍼 영웅의 뒤를 하염없이 따르는, 그렇다, 바로 한국이다.

소설책을 그리 많이 읽지 않는 내게 이 소설책을 집어 들게 한 힘은, 언뜻 보기에 가볍게만 보이는 '슈퍼맨' 등의 대중만화에서 빌려온 캐릭터들을 활용(패러디)한 '풍자' 내지는 '코미디'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문학동네의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까닭이 무엇일까 하는 그 궁금함에 있었다. 세 명의 심사위원인 도정일, 이인성, 남진우는 어떤 까닭으로 이 소설을 높은 값을 쳐준 것일까. (그저 대중이 즐거워할 '팔릴만한 소설'을 꼽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과 함께 대중문화와 문학의 만남은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이뤄질까 하는 호기심이 둘 다 작용 했으리라.)

책의 뒤 표지나 앞날개의 심사평의 일부분은 어차피 광고문이다. 소설책 안에 실린 심사평의 전문에서는 박민규에게 찬사의 박수만을 주지 않는다. 도정일의 심사평 중 '이 작가의 재능은 탁월한 미끄러지기에 있는 듯하다. 판타지인가 싶으면 풍자로 가고, 풍자인가 싶으면 다시 냉소로 간다. 냉소인가 하면 냉소의 건너편에 가서 블랙코미디가 된다. 그 블랙코미디는 또 그리 코미디가 아니다. 이 작가의 탁월한 질주와 미끄럼 타기가 어떤 새로운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줄지 한번 기대해보고자 한다.'라는 말은, 이 소설의 발랄함을 말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불안한 소설의 형상화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 쓰기 전에 시를 썼다는 작가의 이력 때문인지 자주 행 나누기가 발견되는데 이것도 가벼움을 더해주고 있다.

소설 뒤에 실린, 소설가 하성란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슈퍼맨 등의 만화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는 것으로 말한다. 제8회 한겨례문학상을 수상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를 쓰기도 한 그는 삼미슈퍼스타즈의 팬도 아니었으며, 야구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체험이나 관심이 아닌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전략적인 소설 쓰기를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각주들은 이 정보와 지식 들이 자연스레 녹아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특히 아쿠아맨의 츠나미(tsunami ; 지진성 해일)에 대한 지루한 긴 해설은 소격효과로 인한 웃음보다는 정말로 뜬금없음만을 느끼게 한다.

이인성의 말처럼 ''진짜' 문학과 '가짜' 문학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이 소설은 어느 술자리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도식적이고 오래된, 결코 새롭지는 못한, 그러나 정당해 보이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과 평가를 보여주고 있다. 대중문화를 패러디하고 그곳에서 캐릭터를 끌어다 쓰고 있지만 이 소설은 약간의 반성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철학과 오락(유희) 사이에서 긴장하는 예술이 문학이라면, 이 소설은 (풍자의 정치적 비판 기능을 감싸안은 채로) 유희 쪽에 더 기울어져 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