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책은 무조건 즐겁게 읽어라”(1)


낮에 (점심이 아니라) 아침을 먹고서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나서는 참에 문 우편함에 인쇄 우편물이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북매거진 <텍스트>(23)였다. 지난 22호부터 20일 간행 체제로 바뀌고서 두번째로 나온 것인데(22호에 나는 체홉론을 기고한바 있다), 표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실용적이었지만, 책과 시대란 가볍지 않은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다. 제목의 인용구는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에 대한 서평의 제목이기도 한데, <텍스트>의 표지에는 그의 글이 조금 더 인용돼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온 책읽기란 대개는 순응하고 따르는 책읽기라기보다는,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책읽기였다. 즉 이제껏 우리가 책을 읽어온 것은, 마치 세상과 등지듯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과 대립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때론 우리가 현실 도피자처럼 여겨지고 현실마저 우리가 탐닉하는 독서의 매력에 가려져 아득해질지언정, 어디까지나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도망자,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탈주자인 것이다.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이다.(<소설처럼>, 103-4)
두 개의 인용구를 종합하면,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다. 도망치면서 저항하는 것인지, 저항하면서 도망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도망치고 한없이 저항한다. 아니, 도망치기 위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페나크에 따르면) 그것이 책읽기의 의의이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다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도, 저항하지도 못한 것이 된다(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물론 애초에 그럴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


'즐거운 책읽기와 관련하여 나에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책이 두 권 있다. 그건 김현의 평론집 <책읽기의 괴로움>(민음사)과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이다. 기억에 <책읽기의 괴로움>은 최인훈의 <회색인>에 대한 평문의 제목을 표제로 한 책이었다. 나는 김현 전집으로 다른 책과 묶여서 나온 <책읽기의 괴로움>도 갖고 있지만, 내가 더 아끼는 건 민음사판의 초판본이다. <분석과 해석> 이전에 나온 것이니까 아마도 80년대 초반에 나왔을 법한데, 내가 중학교 때부터 문학평론집을 읽은 건 아니므로 내가 이 책을 구한 건 당연히 훨씬 나중이다(물론 책은 이미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다 읽은 뒤이다). 
절판됐던 그 책을 구한 건 아마도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90년대 초반에 새로 개장한 영풍문고에서였다. 아마 재고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책이 나온 듯한데, 나는 한 권 남아 있던 이 책을 집어들고서 쾌재를 부른 적이 있다(요컨대, 이런 게 책 구하기의 즐거움이다). 그게, 마지막 한 권이었는지는 어떻게 아느냐고? 그걸 확인해보려고, 책을 사고 며칠 안 돼서 서점에 또 가봤기 때문이다(더는 진열돼 있지 않았다). 해서, 한동안 내가 가장 즐겨 들르던 서점이 영풍문고였고, 영풍문고는 내게 <책읽기의 괴로움>으로 각인돼 있다. 사실, (내 기억에) 김현이 말한 책읽기의 괴로움은 책을 통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세상 읽기의 괴로움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는 즐거운 책읽기를 괴롭게 만드는 건 세상인 셈. 하지만, 책읽기의 즐거움은 그런 괴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도록 하는 즐거움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쾌락원칙을 넘어선다. , 책읽기의 즐거움은 쾌락이 아니라 향락이다.   


바르트의 책 <텍스트의 즐거움>은 우리말로 두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데(나에겐 이 두 번역본과 영역본이 있다), 읽은 만한 건 김희영 교수가 옮긴 동문선본이다(연대출판부본은 책읽기의 괴로움을 강요하는 번역이다). 바르트의 책들은 우리말 전집이 기획/출간되고 있을 정도이니까 우리에게 친숙한 편이지만, 아쉽게도 그의 유미적인/유희적인 문체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사랑의 단상>이나 <카메라 루시다> 정도가 예외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말로 번역된 바르트의 책들은 대부분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카메라 루시다>, <밝은 방>만 아직 보지 못했다). 더 번역된 건 두툼한 선집 외에 <S/Z> 정도. 그 중에서 내가 산 건 아직까지는 <기호의 제국> 한 권뿐인데, 그건 내가 영역본을 따로 갖고 있지 않아서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을 읽기 위해서 먼저 읽어야 하는 것은 <저자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From Work to Text)>라는 바르트의 두 짧은 평문이다(동문선본에 같이 번역돼 있을 듯하다). 어떤 책을 작품(Work)으로 간주하는 건 간단히 말해서, 그걸 산출한 주인 혹은 아버지로서의 저자를 상정하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작품 읽기의 목적으로 삼는 태도이다(따라서 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태도이다). 반면에 어떤 책을 텍스트(Text)로 간주하는 건(교재란 의미의 텍스트가 아니다), 더 이상 그런 의미작용의 중심으로서의 저자를 고려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래서, 저자의 죽음이다(이건 반형이상학적이며 탕아적인 태도이다). 바르트는 작품의 은유로 유기체를 드는 반면에 텍스트의 은유로는 을 든다. 하나는 채워져 있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다. 그래서, 작품은 독자가 읽어내는 것이지만, 텍스트는 독자가 채워넣는 것이 된다. 해서, (바르트의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작품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에 대응한다면, 텍스트는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에 대응한다.  


나는 러시아 문학 이전에 문학이 전공이다 보니까 문학이론/비평 또한 관심에서 제쳐놓을 수가 없()는데(해서 문학이론서들을 지겨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그런데, 이론이라는 게 말 그대로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공부하기엔 좋은 동네인 셈), 이른바 이론 20세기 후반 인문학의 주도적인 담론이었다. 그 기폭제가 (프랑스) 구조주의였다면(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구조주의는 현실구조로 대체/환원했다) 문학비평에서 구조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바르트의 위치는 간과될 수 없다(물론 그는 <텍스트의 즐거움>(1973)을 경계로 포스트 구조주의로 넘어간다).


특이한 건 그가 주로 아카데미즘의 바깥에서 활동했다는 것.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기호체계의 사상을 가르치는 교수로 취임하는 것이 1977년이니까 1953 <글쓰기의 영도>(이 또한 우리말 번역이 있는데, 번역의 0쯤으로 불릴 만하다)데뷔한 지 22년이 지나서야 그는 변변한 직업을 갖게 된다(이전에 그가 몸담았던 연구소 등에서의 지위나 보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는 것은 불과 몇 년 후이다(내 기억에는 1980년이고 그의 유작이 <밝은 방>이다).     


아마도 그런 전기적 이력이 보다 본격적인 구조주의 비평가라는 제라르 주네트보다 바르트에게 더 친밀감을 갖게 하는 듯하다(나는 두툼한 영어판 바르트 전기도 갖고 있으며, 1/3쯤 읽었더랬다). 그건 불문학자 김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프랑스비평사: 현대편>(문학과지성사)에서 주네트 대신에 바르트에게 한 장을 할애한다(곽광수 교수 같은 이는 바르트를 딜레탕트 비평가, 재치 있는 비평가 정도로 평가절하한다). 참고로, 김현이 재구성한 프랑스 현대비평은 <사르트르-바슐라르-바르트-블랑쇼> 4각형으로 이루어지는바, 이들의 키워드를 차례대로 나열하면 <참여-상상력-언어-죽음>이다(나는 문학을 구성하는 네 원소가 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라고 생각하는바, 사랑과 상상력, 가난과 참여를 등가화시키면, 두 사각형은 동일한 매트릭스의 변주가 된다). 


어쨌든 <책읽기의 괴로움> <텍스트의 즐거움>, 두 권의 책이 생각난다는 얘기이다. 물론 텍스트가 그러하듯이 모든 생각에는 꼬리가 있다(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김현의 유작은 사후에 출간된 일기 <행복한 책읽기>인데, (내 기억에) 생전에 제목을 정해두었다는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책읽기의 괴로움>이었을 것이다(돌이켜 보건대, 그의 죽음은 90년대 한국문학의 최대 손실이다. 비평가와 불문학자로서 그의 열정업적을 넘어설 만한 이는 아직 없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건 한편으로 고인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행복한 책읽기 10년 정도만 더 연장됐어도, 우리는 (그는 4년에 한번 꼴로 책을 냈으므로) 최소한 두 권의 문학비평집과 (그가 <프랑스비평사>에서 포부를 밝힌바) 리쾨르와 데리다 등의 연구서를 더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현재까지 우리말로 씌어진 리쾨르, 데리다 단독 연구서는 각각 한 권씩이다. 아마도 일본의 1/10 정도 수준이지 않을까 싶다. 학문어로서의 한국어는 아직도 한참 가난하다).


주인/아버지로서의 저자의 죽음을 선언한 바르트였지만, 사실 그에겐 아버지가 없었다(일찍 여읜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그에겐 내내 어머니밖에 없었으며(<밝은 방>은 그 어머니의 죽음에 바쳐진 책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교통사고이긴 했지만) 그는 얼마 더 살지 못했다(참고로 그는 동성연애자였다). 유복자 혹은 아비 없는 자식이란 점에서 바르트는 한 세대 선배인 사르트르를 따르고 있다(프랑스의 20세기 지성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들은 사르트르-바르트-데리다이다. 데리다의 죽음으로 이들은 모두 고인이 됐다. 1980년부터 2004년까지이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나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79년 박정희의 죽음이 아니라 80년 사르트르의 죽음이었다. 나는 신문지상에 보도된 그의 죽음에 매료됐고, (정치가가 아닌) 작가의 길을 선망하게 된다(그 길이 이 길이었다니!).


고등학교 때부터 사르트르의 소설들을 읽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책들을 모두 읽은 건 아니다(나는 <존재와 무>도 아직 읽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나온 사르트르에 대한 책들은 거의 다 읽었다. 얼마 전에는 헌책방에서 러시아어로 된 사르트르 연구서를 샀는데(333쪽이고 1,600) 레오니드 안드레예프란 저자의 이름은 낯설지만, 1994년에 나온 이 책이 러시아에서 나온 최초의 사르트르 연구서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레이몽 아롱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좌파였던 사르트르 세대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과거 소련체제, 그리고 소련의 작가들과 가졌던 친분을 고려하면(이들의 서신교환도 두툼한 책 한 권 분량이다), 90년대에 들어서야 그의 연구서가 나왔다는 점은 다소 의외이다(소련에서는 부르주아 철학도 열심히 연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1994년에 책이 나온 건 1964년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거부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올해는 그의 노벨상 수상/거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어제 날짜 <니자비씨마야>엑스 리브리스의 표제기사가 그걸 상기시켜주었는데, 러시아(소련)에 사르트르가 제일 처음 소개된 것이 바로 그 해 1964년이고, <노브이 미르>란 잡지(1962년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발표됐던 잡지) <>이 번역/소개됐다(그의 자서전 <>읽기쓰기 두 대목으로 구성돼 있다). 계기는 물론 그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상은 거부한다.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를 인용한 러시아 필자는 이것이 진정한 철학적 행위라고 평한다. 그는 사르트르를 무척 좋아한다고 하니까, 반어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나부터도) 흔히 나는 노벨상을 거부한다란 그의 선언을 사르트르 철학(=자유의 철학)의 상징적인 제스처로 이해해왔는데, 알고 보면 그건 절반의 이해였던 셈이다. 거기에 덧붙여져야 할 것은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다.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같은 구호가 아주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가?(, 실존주의는 마음이 약하고, 돈에 약하다!) 그리고,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가 왜 프롤레타리아 철학이 아니라 부르주아 철학인가가 명료해지지 않는가? 더불어, 우리는 사르트르를 더 좋아하게 되지 않는가?..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 사르트르는 <> <구토> 등이 포함된 작품집과 <보들레르>, <상상적인 것>(그의 초기 상상력 연구서) 등이다(<존재와 무>는 너무 고가여서 사지 못하더라도 전쟁일기 <이상한 전쟁의 기록>이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은 형편을 봐서 구할 생각이다. 어린시절 영웅에 대한 예의로서). <상상적인 것>은 그가 후설의 영향하에 쓴 것으로 흔히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연구와 비교된다(김현의 연구가 있다). 더불어, 얇은 분량의 <보들레르>는 그의 실존적 정신분석이란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적용된 사례이다. <상상적인 것>은 우리말 번역이 없지만,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는 오래 전에 번역/출간돼 있다(아마 절판됐을 것이다). 나는 지난 달에 2권짜리 보들레르 선집도 구했기 때문에(1권은 시집이고, 2권은 산문집이다) 이젠 좀 읽어보는 일만이 남았다(보들레르를 읽는 건 나의 오랜 숙제 중의 하나이다. 그가 현대시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영어와 러시아어로(들뢰즈가 인용한 프루스트의 말을 빌면, 훌륭한 작품은 모두 외국어로 씌어져 있다니까 읽는 것도 외국어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어 사르트르는 제법 풍족한 편이다. 작품도 <자유의 길>을 포함해 대부분 번역돼 있고(그의 일기와 플로베르론인 <집안의 백치>, 철학서인 <변증법적 이성비판> 정도를 제외하면) 정명환, 박이문, 박정자 선생들의 소개도 충실하고 수준도 높다. 사실 다른 작가/철학자들의 경우도 이런 정도의 소개 수준만 되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이에 견줄 만한 작가는 김화영 교수의 카뮈 정도이다). 사르트르의 전기로는 코헨-솔랄의 3권짜리 전기 <사르트르>가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바, 규모에 맞게 충실하면서도 재미있다. 


실존주의 세대(4-50년대)와 구조주의 세대(60년대)를 대표하는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각각 타동사자동사로서의 문학을 주창한 걸로 흔히 비교되는데(하지만 사르트르 자신도 시는 앙가주망(=참여)에서 제외시켰다), 폴 존슨이 쓴 <지식인들>을 보면, 딱히 그렇게 대조적인 것만도 아니다(지식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는 그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브레히트 비판이다). 그는 사르트르를 모피를 뒤집어쓴 잉크라고 불르는데, 하여간에 이 인간은 평생 끊임없이 뭔가를 써댄 것이었다(그렇게 써대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으니 할말은 없지만).


, 그에게서 글쓰기의 발화주체는 타동사적 주체였지만(사르트르의 글쓰기 주어로서의 ), 발화행위주체인 사르트르 자신은 자동사적 주체였던 것이다(쉽게 얘기하면, 앙가주망(=타동사)을 주창하는 글들을 그는 자동사적으로 썼다). 그러니, 사르트르의 참여란 것은 좀 의심스러운 것일까? 거꾸로인 것 같다. 그는 모든 지식인의 참여가 갖는 자동사적 성격(자위행위적 성격)을 상기시켜주는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앙가주망은 진짜 앙가주망이다(오히려 우리가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런 자위행위적 성격을 부인/배제하는 앙가주망이 아닐까?).


미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사르트르인바(문체의 기원이란 제목인가로 책이 나와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형식>(<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로 번역됨)에서도 (여느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사르트르를 중요하게 다룬다. 하지만, 제임슨을 필두로 한 미국의 강단 좌파들의 정치적 행위(사르트르와 비교해 보더라도) 대학 등의 지식인 사회에만 한정된 것이다. , 그들의 참여는 의미론적으론 타동사이지만, 화용론적으론 자동사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물며 대부분의 미국 학문은 기능주의적이지 않은가? (직접적인 경험담은 아니지만) 철학이 그렇고, 심리학이 그렇다. 분업화된 분석철학은 철학의 자기소외를 자기존립의 당위적인 조건으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자폐적이며, 자아(에고) 심리학은 사회에 대한 (병리적) 개인의 적응을 중심적인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정작 사회의 병리성 자체는 사고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직면한다. 가령, 소비자심리학이나 유권자심리학이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가령, 분석철학이나 자아심리학은 파농의 탈식민주의를 문제로서 사유할 수 있는가?(최근 파농의 <대지의 저주 받은 사람들>(그린비)이 번역돼 나온 걸로 돼 있다. 기억에, 재번역이다.)      


이런 생각은 얼마전 미 대선 결과에 대한 김우창 교수의 시론(時論)을 읽고서 든 것인데, 정작 9.11 테러사건이 발생한 맨하탄 지역에서 부시의 지지율이 20% 미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케리가 패배한 것은 도시 지역의 진보적 지식인/중산층들과 그와는 전혀 다른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전통적/보수적 시골 사람들이 서로 유리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건 마치 제정 러시아시절, 인텔리겐치아와 민중 간의 유리를 상기시킨다). 아무리 대학은 좌파 혹은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어도 그 영향력은 대학가 주변에 한정돼 있는 것(한국이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80년대 대학가와 지방 소도시의 공기는 너무도 달랐다). 그러니까 미국사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네트워킹이 부족한 고립사회이다(아메리카는 들로 이루어진 대륙이다). 개방된 고립사회(서로 문은 열어두고 있지만, 아무도 왕래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좌파)이론이 첨단을 가고, 좌파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하더라도 그 사회의 보수성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것이다(데리다의 새로운 계몽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건 흔한 말로 시민의식의 강화이면서 시민교양의 확충이며, 그로써 지식인과 대중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지식인이 대중화되고, 대중이 지식인화되어야 한다. 마치 모든 노동자가 예술가이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의 구호처럼, 모든 노동자는 지식인이 될 필요가 있다. 의사나 교수보다 응급차 운전기사가 더 많은 월급을 받았던 과거 소련에서처럼). 그리고 거기에 기본이 되는 것은 기본적인 책들을 읽()는 것이고(가령, 시카고시에서 <앵무새 죽이기>를 단체로 읽듯이), 서로 대화/토론하는 것이다(학교에서 왜 말하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이 생활의 기본이 될 경우에(학교에서 왜 글쓰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민주주의(=존재적 차원) (지젝이 지적하는바) 포퓰리즘(=존재론적 차원)으로 추락하지 않게 될 것이다(이런 경우엔 하이데거가 아니라 레비나스를 따라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이 정도도 너무 거창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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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 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미사일 받아라 끝내는 좋다 원자폭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싸 힘이 센 304호실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한 아름을 골라 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과꽃


한 송이를 꺾어 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


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 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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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미로’서 ‘자아의 지도’ 찾는다


△ (왼쪽으로부터) 신희섭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박사
· 생체과학연구부 책임연구원· 분자생물학적 뇌 연구· <사이언스> 등에 다수 논문 발표
김용석 영산대 교수(철학)
·서양철학, 문화론 연구 ·저서: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미녀와 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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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연구 발자취
  • ① 우주론에서 ‘창조신화’를 만나다
  • ② 자연을 거슬러 자연을 꿈꾸다

  • 인문의 창으로 본 과학의 풍경

    ①신화와 우주론
    ②유전자복제
    ③뇌는 마음을 얼마나 알까
    ④인간, 동물 그리고 진화
    ⑤인간과 로봇, 몸의 철학
    ⑥동양철학의 디지털문명답사
    ⑦수학과 미술의 물음, 아름다움이란
    ⑧우주개척시대, 지구 밖 인간의 존재
    ⑨나노과학과 미시역사의 눈
    ⑩세계와 입자의 근원

    우렁쉥이는 커서 안착하면 뇌 소멸
    인간뇌 복잡성은 인간삶 암시
    마약도 순교도 뇌 즐거움 때문

    “인간 삶에서 뇌가 모든 것이라는 입장이신가요?”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만난 신희섭 박사는 담담히 되물었다.

    인문학자인 내가 뇌에 대한 과학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했을 때, 마음이 뇌이고 뇌가 곧 마음이라는 것이 오늘날 뇌과학의 근본 입장이 아닌가 하고 물었을 때, 그리고 우리말의 ‘마음’(心)은 심장을 떠올리지만 서양말 ‘마인드’는 사유의 의미를 어원에 담아 뇌를 떠올리게 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되물었던 것이다.

    우리의 만남은 실험실 방문에 앞서 대화로 시작되었다. 나는 대화가 잘 되리라고 직감했다. 과학자인 그는 오히려 과학주의적이고 ‘뇌 환원주의’적일 수 있는 내 말에 일단 제동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는 우선 뇌 없이도 생명은 있다는 것으로 뇌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시작했다. 예를 들면, 해면동물은 신경 없이 세포가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체를 이룬다. 이런 생물은 간단하지만 편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신경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는 동물은 뇌가 필요 없다(식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우렁쉥이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유생 때에만 뇌를 갖고 있다. 다 자라면 한 곳에 들러붙어 바닷물에 있는 미립자를 먹이로 걸러 먹으며 살아간다. 따라서 더 이상 필요 없는 뇌는 소멸한다.

    인간처럼 운동뿐만 아니라 상호관계, 판단, 의사결정 등을 위해서는 당연히 더 복잡한 뇌가 필요하다. 따라서 삶은 복잡하지만 덜 편할 수 있다. 덜 편한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일지도 모른다. 신 박사의 과학적 설명에 자연스레 인간과 인생을 보는 지혜가 스며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가 불교의 참선에 관심 있다는 건 아마 ‘부동의 편안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결국 뇌를 가상적으로 작동 없는 상태로 둔다는 뜻이 아닐까. 이는 또한 ‘부동을 즐기는 존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연관되지 않을까.

    “뇌 없이도 생명은 있다”


    △ 철학자 김용석 교수와 뇌신경과학자 신희섭 박사가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안 신 박사의 실험실에서 두툼한 인간 뇌지도 책을 보면서 뇌와 마음에 관한 철학과 과학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그러고 보면 진화의 역사에서 뇌가 주인공이 된 건 얼마 안 된다. 물론 이러한 진화에는 ‘창발적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포유류의 출현에서 이런 진화 과정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창발성은 진화의 각 단계가 여러 요인의 단순한 총화가 아니라 그로부터 새로운 성질이 출현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창발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뇌는 몸에 대해 ‘기댐’과 ‘끌어안음’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체로서 뇌는 몸에 의존적이지만 몸 전체를 ‘공존의 상황’으로 끌어안아 유지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상과학의 수준에서 말하면, 뇌는 몸을 옮겨다니며 새로운 존재 방식을 찾고 몸을 통제할 수도 있지만, 몸 없이는 지나가는 강아지에게도 꼼짝없이 먹힐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명의 종결을 뇌사로 규정하는 데에 물음표를 찍을 수도 있다. 반면 간이나 심장을 이식받으면 동일한 사람일 테지만 뇌를 이식받는다면 다른 사람이라는 가설적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뇌 이식이 얼마나 가능할지는 물음표이다.

    뇌는 ‘따로 또같이’ 인 네트워크
    인간의 주체도 하나이기보다
    견제-균형시스템 자치가 아닐까

    ● 뇌는 여전히 미스터리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매혹적인 탐구 과제이기도 하다. 뇌에 대한 가설이 많은 이유도 이때문이다. 그 가운데 ‘뇌가 뇌 스스로를 위해’ 발달하는 것 아닌가 하는 가설이 있다. 뇌는 쾌감을 느끼며 쾌감을 위한 요구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독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마약에 중독되면 몸은 망가지더라도 뇌는 지속적으로 마약을 요구한다. 이때에 뇌는 몸과 독립적으로 자신의 쾌락을 위해 명령을 내린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성행위를 원하는 것도 뇌가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간이 훌륭한 행위를 하는 것도 ‘뇌의 즐거움’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던가, 몸을 아끼지 않는 순교의 경우가 그렇다. 이런 행동들은 뇌에 보람의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신 박사는 이런 현상들을 “뇌가 보기에 좋았더라”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해학적 기질을 발휘했다. 그건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말을 패러디한 것 아니냐는 내 말에 그는 껄껄 웃었다. 나도 마주보고 웃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종교에 대한 불경의 태도는 아니다. 이는 한 분야의 과학자가 자기 사고의 네트워크를 어떻게 어디까지 펼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 이 무렵에 우리는 하늘의 비유에서 땅의 현실로 내려왔다. 실험실을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뇌의 작용기전에 관한 신경과학 및 유전학 연구를 통해 뇌 기능에 관한 중요한 발견을 계속해 오고 있다. 신경세포 안의 칼슘 농도를 높게 유지하자 쥐의 학습능력과 기억력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밝혀내 이른바 ‘똑똑한 생쥐’를 개발했으며, 티(T)-형 칼슘통로 유전자가 결손된 생쥐의 생리기능 연구를 통해 뇌가 외부의 자극을 능동적으로 선별 조절할 수 있다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실용적 차원에서 간질 치료나 획기적인 진통제 개발의 가능성과 연관돼 있다.

    실험실 한 쪽에는 출입이 통제된 작은 방이 있는데, 그 안에 실험 대상인 생쥐들을 다양하게 분류 보관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인간의 뇌를 이해하는 데 쥐를 통한 연구가 갖는 한계를 짚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뇌가 ‘복잡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연구의 출발점에 두고 있다. 인간 뇌가 복잡 시스템이라는 것은 뇌의 각 부분 세포의 종류와 배열이 다르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주관은 객관, 객관은 주관으로

    이는 간, 신장, 심장 등의 기관과 매우 다른 점이다. 같은 뇌세포라도 그것을 보조하는 교화세포의 구성이 다르다. 이는 뇌가 그 자체로 매우 다양한 영역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이 영역들이 독립체가 아니라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들 사이에 계층이 있다고 추정한다. 그는 뇌가 하나의 슈퍼컴퓨터라는 입장을 비켜가는 듯했다. 오히려 뇌는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영역들의 세밀하면서도 광대한 병렬 네트워크라는 입장인 것 같았다.

    뇌의 각 부분이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영역들이라면 앞서 언급했듯이 뇌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 특정 명령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부분이 견제하고 감시할지 모른다. 따라서 ‘뇌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 몸을 속이고 있구나’ 하는 판단도 가능할 것이다.

    ● 이런 과학적 가설들은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에게 하나의 견고한 주체라는 게 가능할까. 아니면 다양한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 자체를 주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아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복수의 자아가 발현하는 것을 상징하지 않을까.

    뇌 연구는 출발부터 다학제적일 필요가 있다. 모든 학문의 대상은 이미 그 학문을 초월해 있다. 다만 그 학문이 다른 학문 분야들과 엮은 네트워크의 어딘가에 걸려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어디를 추적해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대화의 마무리에 그는 성철스님의 법어집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能隨境滅 境逐能沈 境由能境 能由境能)”. 뇌과학자가 이런 ‘논리의 맴돌이’에서 마음이 갈 길을 찾는 것은 뇌 연구가 결국 인간의 자아 탐구라는, 어렵지만 손을 놓을 수도 없는 과제라는 것을 일러준다.

    김용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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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대 2004-11-24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잘 읽었습니다. 전에 읽었던 '브레인 스토리'의 저자가 뇌는 각 부분들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각 부분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던 게 기억나네요. 재밌는 아이러니는 인간의 뇌는 잘게 나누어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죠. 정작 뇌 자체는 우리의 뇌가 이해하기 벅찰 정도로 복잡한 관계를 통해 작동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거 어디서 퍼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도서관여행자 2004-11-25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뇌가 이해하기 벅찰 정도로 복잡한 뇌라! 재미있네요. 저는 베르나르의 <뇌>를 읽고선 뇌에 관심이 생겼답니다. 자세한 건 잘 모르구요. 참, 그리고 이 기사는 한겨레의 기획특집기사입니다. "인문의 창으로 본 과학의 풍경"이라는 시리즈로 나올텐데, 참 좋은 기사네요. "인간과 로봇, 몸의 철학"도 기대됩니다.
     
     전출처 : 쎈연필 > [퍼온글] 책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박병규 옮김



         인간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들 가운데 가장 놀랄만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책이다. 다른 것들은 신체의 확장이다. 현미경, 망원경은 시각을 확장한 것이며, 전화는 목소리의 확장이고, 칼과 쟁기는 팔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다시 말해, 책은 기억의 확장이며 상상력의 확장이다.

         버나드 쇼우는 희극 「시저와 클레오파트라」에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언급하면서 이 도서관은 인류의 기억이라고 했다. 책이란 바로 이런 것이며, 나아가서는 상상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과거란 일련의 꿈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꿈을 기억해내는 것과 과거를 기억해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책의 기능이다.

         나는 언젠가 책에 관한 역사를 쓰려고 한 적이 있었다. 물리적 관점에서 본 책의 역사가 아니다. 내 관심은 방대한 규모의 장서가의 책 같은 물리적인 책 이 아니라 책에 대한 다양한 평가이다. 이 점에서는 슈펭글러가 나보다 선배이다. 그는 『서구의 몰락』에서 책에 대한 귀중한 고찰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슈펭글러가 말한 것을 바탕으로 삼아 몇 가지 내 견해를 덧붙이기로 한다.

         고대인들은 우리처럼 책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 사람들은 책을 말(口語)의 대용품으로 보았다. 흔히 인용되는, “글은 남고, 말은 날아간다”(Scripta manner verba volat)라는 구절은 말이 덧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글(文語)은 항구적이고 죽은 것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말은 빠르고 가벼운 것, 플라톤의 말처럼 “빠르고 신성한” 것이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말로 가르쳤다.

         첫 번째 예로 피타고라스를 살펴보자. 우리가 알기로 피타고라스는 일부러 글을 쓰지 않았다. 그가 글을 쓰지 않은 것은 글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피타고라스는 “문자란 그를 죽이는 것이며 영혼(espíritu)은 생명을 불어넣는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는 『성서』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는 글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 학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피타고라스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예컨대, 피타고라스 학파는 영겁회귀라는 믿음 또는 교리를 가르쳤다는 식이다. 이 영겁회귀는 훨씬 후에 니체가 발견하게 된다. 영겁회귀란 순환하는 시간이라는 뜻으로 성 어거틴은 『신국』에서 이를 반박하고 있다. 성 어거스틴의 멋진 비유를 사용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스토아 학파의 순환하는 미로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순환하는 시간이라는 관념은 흄, 블랑키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다루었던 문제이다.

         피타고라스는 의도적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그가 죽은 후에도 제자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기를 바랐다. 여기에서 ―그리스어를 모르기 때문에 라틴어로 얘기하면― “스승이 그렇게 말하셨다”(Magister dixit)라는 구절이 유래한다. 이는 스승이 그렇게 말했으므로 그의 말에 얽매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스승이 제창한 사상에 대해 계속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순환하는 시간이라는 교리를 창시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의 제자들이 이를 가르쳤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피타고라스는 육체적으로는 죽었으나, 그의 제자들은 일종의 ‘윤회’ ―아마도 피타고라스는 이 단어를 좋아할 것이다― 를 통해 그의 사상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말한다고 비난하면 그들은 저 어구, 즉 “스승이 그렇게 말했다”라고 둘러댔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플라톤이 아주 좋은 예이다. 그는 책이란 상(像)과도 같은 것이라고 ―조각이나 그림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했으며, 어떤 사람은 책이 살아 있다고 믿고 있으나 책에게 무엇을 물어보면 아무런 대답도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책이 벙어리가 되지 않도록 플라톤적 대화술을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여러 등장인물이 된다. 그는 소크라테스이고 고르기아스이고 그 밖의 여러 사람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했다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이렇게 하여 아무것도 글로 남기지 않았던 소크라테스는 불멸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 역시 말로 가르친 스승이었다.

         우리가 아는 한 그리스도는 단 한 번, 그것도 이내 지워져버릴 땅바닥에 글을 썼을 뿐이다. 다른 글은 쓰지 않았다. 부처 역시 말로 가르친 스승이었으나 그의 설법은 남아 있다. 성 안셀무스는 “무지한 자의 손에 책을 쥐어주는 것은 어린애의 손에 칼을 쥐어주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책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동양권에서는 책이란 사물의 이치를 밝혀주지 못한다는 관념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책이란 그저 사물의 이치를 깨닫도록 도와줄 뿐이다. 나는 히브리어를 모르지만, 카발라(Cabala)를 조금 공부해 본 적이 있다. 『광휘의 책』과 『창조의 책』을 영어판과 독어판으로 읽었다. 내가 알기로 이 책들은 이해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해석되기 위해, 즉 독자의 사고를 자극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고전시대 사람들은 우리들처럼 책을 존중하지는 않았다. 비록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베개 밑에 『일리아드』와 칼을 넣어두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둘 다 무기였다. 그는 호머를 대단히 존경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 성스러운 작가로 여긴 것은 아니다. 『일리어드』와 『오디세이』는 성전(聖典)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존경받는 책이면서도 공격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시인들을 추방했으나 불경한 사람으로 의심을 받지는 않았다. 책에 대한 고대 사람들의 반감 중에서도 세네카의 경우는 매우 흥미롭다. 『루실리오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는 책 백 권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허영이 많은 사람이라고 비판하는 글이 있다. 책을 백 권이나 읽을 만큼 그렇게 시간이 많은 사람이 있겠느냐고 세네카는 반문한다. 이와 반대로 지금은 장서량이 많은 도서관이 대접을 받는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책에 대한 고대의 개념은 우리와 전혀 다른다. 책은 언제나 말의 대용품이었다. 이윽고 동양에서 전혀 새로운 개념, 고전시대에는 완전히 낯선 개념이 들어왔는데, 그것은 성전(聖典)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서 두 가지 예를 들기로 한다. 먼저, 가장 오래 된 이슬람교도들부터 살펴보자. 이들은 『코란』이 천지창조보다 앞선 것이며, 아랍어보다 앞선 것이라고 생각한다. 『코란』은 하느님의 자비나 정의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지 하느님이 만든 작품이 아니다. 『코란』을 보면, 그 책의 모체(母體)에 대해 아주 신비롭게 얘기한다. 그 책의 모체는 하늘에서 쓰여진 코란본이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코란의 원형쯤 될 것이다. 『코란』 따르면, 그 책 자체는, 즉 하늘에서 쓰여진 책은 하느님의 속성이며, 천지창조 이전의 것이다. 이슬람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시기적으로 우리와 보다 가까운 예로 『성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토라』, 즉 『모세 오경』을 살펴보자. 이 책들은 성령(聖靈)이 구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진기한 일이다. 다시 말해,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저자가 저술한 책들을 단 하나의 정신(espíritu)이 썼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성서』를 보면, 성령은 자신이 원하면 어느곳에서나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문학작품을 합쳐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 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책의 제목이 『토라』(그리스어로는 Biblia, 책이라는 뜻)이다. 이 모든 책들은 단 사람의 저자, 즉 성령이 썼다고 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버나드 쇼우에게 성령이 『성서』를 썼다는 사실을 믿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시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은 모두 성령이 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책이란 저자의 의도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저자의 의도란,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하찮은 것이다. 책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져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돈키호테』는 기사소설에 대한 풍자 이상이다. 우연적인 요소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책이다.

         이제 이러한 관념의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예컨대, 내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자.


    맑은 물 유리 같이 흐르는데,
    나무들 들여다 보고 서 있네.
    서늘한 그림자로 덮인 초원.


    이 세 구절은 각각 11음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것을 성령에 의해 쓰여진 작품과 비교할 수가 있으며, 어떻게 이것을 문학을 만들고 책을 구술한 신성이라는 개념과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성령에 의해 쓰여진 책에는 우연적인 요소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정당화되어야만 하며, 문학도 정당화되어야만 한다. 예컨대, “태초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Bereshit bara elohim)라는 『성서』의 첫 구절은 B로 시작되는데, 이는 축복(Bendecir)이라는 단어의 머릿글자와 일치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성서』에는 우연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절대로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카발라로, 문학에 대한 연구로, 고대인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책의 개념, 즉 신성이 구술한 성전으로 나아가게 된다.

         고대인들은 뮤즈에 대해서 아주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호머는 『일리아드』 첫머리에서 “뮤즈의 여신이여, 아킬레스의 분노를 노래하라”라고 말했다. 여기서 뮤즈는 영감과 같다. 반면에, 성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강력한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하느님이 문학을 낳고, 하느님이 책을 썼다. 그 책에는 우연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성서』 각 절의 철자 수도 음절 수도 우연이 아니며, 우리가 철자로 언어 유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우리가 철자에서 숫자 상징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것이 이미 고려된 것이다.

         되풀이 말하지만, 책에 대한 두 번째 위대한 개념은 책이 신의 작품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러한 개념은 책이 말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여겼던 고대인의 생각보다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에 더 가깝다. 그러나 성전이라는 믿음은 이내 퇴조했다. 다른 믿음, 예컨대 한 권의 책이 각국을 대표한다는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우리가 알기로, 회교도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책의 사람들”이라고 했고, 하인리히 하이네(H. Heine)는 책을 조국으로 삼았던 이슬라엘 민족을 가리켜 “성서는 유대인들”이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개념, 즉 각국은 한 권의 책에 의해서, 수많은 책을 쓴 한 사람의 작가에 의해서 대표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각국은 자기 나라의 특성과 너무 동떨어진 사람을 대표자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영국을 대표하는 사람은 사무엘 존슨 박사일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영국은 세익스피어를 든다. 하지만 세익스피어는 영국 작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영국인답지 않은 작가이다. 영국인의 전형적인 특징은 ‘줄잡아 말하기’(understatement), 즉 조금 삼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세익스피어는 비유법을 사용하여 과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이탈리아인이나 유대인이었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다른 예는 독일의 경우이다. 너무도 쉽게 광신적으로 되어버리는 이 나라는 광신적인 사람이 아니라 인내심이 많은 사람, 그리고 조국이라는 개념을 조금도 중요시하지 않았던 사람을 든다. 그는 괴테이다. 괴테가 독일을 대표한다. 프랑스의 경우, 특정 작가를 선택한 적은 없으나 위고(Hugo)를 꼽는 경향이 있다. 물론 나는 위고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지만, 위고는 전형적인 프랑스인이 아니다. 위고는 프랑스에서는 이방인이다. 수식어와 비유법을 사용하는 위고가 프랑스인의 전형은 아니다. 더 흥미로운 예는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로페 데 베가나 칼데론이나 케베도가 대표할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가 스페인를 대표한다. 세르반테스는 종교재판이 열렸던 시대의 사람이지만 종교적 자유를 믿었으며, 스페인인의 장점도 단점도 갖지 않은 사람이다.

         이는 마치 각국이 자기 나라와는 상이한 특성을 사람, 즉 자신들의 결점을 얼마간 해독하고, 완화하고,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을 대표자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 아르헨티나 인들은 사르미엔토의 『파쿤도』가 우리를 대표하는 책이라고 꼽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전쟁의 역사, 칼의 역사를 가진 아르헨티나인들은 탈주병의 일대기를, 다시 말해서 『마르틴 피에로』를 꼽는다. 비록 이 작품이 그런 책으로 꼽힐만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아르헨티나의 역사가 사막을 정복한 도망자에 의해서 대표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사실이 그렇다. 마치 각국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고 있듯이 말이다.

         책에 대해 수많은 작가들이 재치 있는 얘기를 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언급하려고 한다. 첫 째로 언급할 사람은 몽테뉴이다. 그의 수필집에는 책에 관한 글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는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나는 즐겁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몽테뉴는 의무적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책에서 어려운 구절을 발견하면 손에서 책을 놓았다고 한다. 독서란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년 전에 그림이 무엇이냐는 앙케이트가 실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누이동생 노라는 이 질문을 받고 그림이란 색채와 형태를 통해서 즐거움을 주는 예술이라고 대답했다. 나라면 문학 역시 즐거움의 한 형태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가 읽는 책이 어렵다면 그 작가는 실패한 것이다. 따라서 제임스 조이스 같은 작가는 본질적으로 실패한 작가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읽기 어렵기 때문이다.

         책은 읽기 힘들어서는 안 되며, 행복도 노력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나는 몽테뉴가 옳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는 자기 마음에 드는 여러 작가들을 열거한다. 버질을 인용하면서 『에네이다』보다는 『고르기아스』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에네이다』를 더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몽테뉴는 열정적으로 책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는 책이 행복을 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신명나는 즐거움은 아니라고 한다.

         에머슨은 이와 반대이다. 그가 책에 대해 한 말은 어느 사람의 글 못지 않게 훌륭하다. 에머슨은 어느 강연에서 도서관은 일종의 마술상자라고 했다. 이 상자 속에는 인류의 훌륭한 여러 정신이 마술에 걸려 있다. 하지만 그들이 벙어리 상태를 면하려면 우리들의 말이 필요하다. 우리들이 책장을 펼치면 그들은 마술에서 깨어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는 우리가 훌륭한 사람들을 동반자로 삼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들을 찾지 않고 주석이나 비평을 읽으려 들면 그들이 말한 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지난 20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의 문과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참고 문헌은 몇 권만 볼 것이며, 비평은 읽지 말고 직접 작품을 읽으라고 가르쳤다. 그러면 그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항상 즐거움을 맛볼 것이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했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조(語調)이며,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목소리, 우리들 귀에 들리는 작가의 목소리이다.

         나는 삶의 일부를 문학연구와 창작에 바쳐왔지만, 독서는 행복을 얻는 한 방식이며, 이보다 못한 행복은 시를 쓰는 것, 다시 말해서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창작은 우리가 읽었던 것을 망각하고 상기함으로써 생겨나는 혼합물이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만을 읽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책은 행복을 얻는 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에머슨과 몽테뉴는 일치한다. 우리는 문학에서 많은 행복을 느낀다. 나는 읽기보다는 다시 읽기에 치중해왔다. 다시 읽기 위해 읽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읽기보다는 다시 읽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책을 숭배하는 방식이다. 이런 얘기가 여러분에게는 감상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상적인 얘기는 아니다. 나는 여러분 각자가 실현할 수 있는 믿음이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 전체가 아니라 개개인이 그러기를 바란다. 전체는 하나의 추상이며, 개인만이 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장님이 아닌 척, 아직도 책을 사서 서재를 채우고 있다. 일전에 1966년판 브록하우스 백과사전을 선물 받았다. 우리 집에 그 책이 있다고 느낌, 그것은 하나의 행복이었다. 저기에 20여권의 책이 있다는 느낌, 비록 고딕체 글씨를 읽을 수 없고, 거기에 실린 삽화와 지도는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저기에 책이 있으며, 그 책이 나에게 다정스럽게 손짓하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생각하기에 책이란 우리 인간들이 맛볼 수 있는 여러 행복 가운데 하나이다.

         책이 사라질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책과 신문이나 음반 사이에 무슨 차이점이 있느냐고 할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 신문이란 읽고 망각하며, 음반도 마찬가지로 듣고는 망각한다. 그리고 음반은 기계적이라 경박스럽다. 아무튼 책은 읽으면 기억에 남는다.

         『코란』이나 『성서』나 『베다』 ―여기에도 『베다』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쓰여 있다― 와 같이 성전이라는 개념은 옛 것일 수도 있으나, 책은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될 모종의 신성함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펼쳐보면 우리는 미적 체험을 할 수 있다. 책에 가로 누워 있는 단어들은 무엇인가? 저 죽은 기호들은 무엇인가? 결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책을 펼쳐보지 않는다면 책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그저 종이와 가죽으로 된 입방체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책을 읽으면 색다른 무언가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것은 읽을 때마다 매번 달라진다.

         내가 누차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강물이 흘러가기 때문에 두 번 다시는 같은 강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사실은 우리들도 강물 못지 않게 흘러간다는 점이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책은 달라지고 단어들이 함축하고 있는 뜻도 달라진다. 게다가, 책에는 과거가 담겨 있다.

         나는 비평을 폄하하는 얘기를 했는데, 이제 그 말을 취소하려고 한다. 뭐, 취소해서 안될 이유도 없지 않은가. 『햄릿』은 17세기 초에 세익스피어가 생각했던 바로 그 햄릿이 아니다. 햄릿은 코울리지의 햄릿이고, 괴테의 햄릿이며, 브래들리의 햄릿이다. 햄릿은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돈키호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루고네스와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가 읽은 『마르틴 피에로』도 동일하지 않다. 루고네스(Leopold Lugones, 1874~1938)는 아르헨티나의 ‘모데르니스모’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Ezequiel Martínez Estrada, 1895~1964)는 아르헨티나의 영향력 있는 수필가이다. 두 사람 모두 『마르틴 피에로』에 관한 훌륭한 글을 썼다.
    독자들이 책을 풍요롭게 만들어왔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 책이 쓰여진 이래 지금까지 흘러왔던 전시간을 읽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책을 숭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책은 오자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고, 우리는 작가와 견해를 달리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책은 ―미신적인 관점이 아니라 지혜를 얻고 행복을 맛보려는 열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신성한 것, 성스러운 것을 지니고 있다.

         이상으로 오늘 얘기를 마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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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원님, 쉬운 말로 글을 써 봐요 (1)
    [우리 말 살려쓰기 56] 지식인들 잘못된 말버릇 12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최종규(함께살기) 기자   
    <1> 문학비평도 '말'입니다

    이명원님은 다른 문학비평가나 예비 문학인들이 쉽사리 건드리지 못한 중요한 문제를 차근차근 살피면서 건드립니다. 아무리 이름나고 훌륭한 스승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잘못된 길로 갈 수 있고, '아차' 싶게 길을 잘못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제자로서 더욱 날카롭고 차분하게 비판하고, 함께 나은 길을 가도록 힘써야 좋다고 봅니다.

    제자된 도리는 스승이 하는 말이나 일을 무턱대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스승에게 배운 대로 옳은 길을 가면서, 외려 스승을 가르치고 비판할 수도 있어야 제자된 도리라고 생각해요.

    이명원님은 제자된 사람으로 스승을 비판해야 옳음을 보여준 좋은 보기를 남겼다고 봅니다. 지금도 부지런히 자기 길을 갈고 닦으면서 문학비평으로 우리 문화와 문학을 북돋우는 일을 잘하고 있고요. 다만 한 가지, 문학비평과 문학이 '말'로 이루어진 예술임을 생각할 때 아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말'을 다룬 예술을 '말'로 비평하는 이명원님 글은 지나치게 어렵거나 얄궂은 대목이 많습니다. 국어사전에서도 찾을 길 없는 '알기 어려운 조합 한자말'도 쓰고, 당신의 스승이 쓴 문제 많은 일본투 한자말과 일본 말법, 어설픈 서양 말법이 두루뭉술하게 섞여 있습니다.

    '말'은 문학을 낳는 사람뿐 아니라 문학을 비평하는 사람도 잘 다뤄야 좋습니다. 자기 말투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쓰는 말투가 이 땅(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비평가로 보아 알맞고 바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는 한편, 지식인만 알 수 있어서 지식인 비평가끼리만 주고받고 생각을 나누는 '말'이 아니라,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을 이야기하기는 일을 즐기는 보통사람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말'로 써야 좋습니다.

    <2> 어떤 말이 '쉽게 못 쓴 말'인가 하면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새움(2004)>라는 책을 부지런히 읽고 있습니다. 짤막하게 쓴 글이 퍽 감칠맛있게 읽히기도 하지만, 곳곳에 끼어든 얄궂은 말 탓에 읽다가 때때로 걸립니다. 웬만하면 그냥 마음 안 쓰고 읽지만, 너무도 이상야릇한 말이 많기 때문에 책에 수없이 '낙서'를 했습니다. 제가 이명원 님 책을 읽으면서 했던 낙서를 차근차근 옮겨 보겠습니다.

    (1) 외국의 경우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 외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 외국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 다른 나라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 ......


    '경우(境遇)'는 "어떤 형편이나 사정"을 뜻하는 말로도 씁니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는'이라 할 때는 군말이 되곤 합니다. 그냥 '외국은'이라고 쓸 때가 더 낫습니다.

    ┌(2) 만 19세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해서
    │=> 만 19살에 아쿠타가와상을 받아서
    └ ......


    '상을 수상(受賞)한다'고 썼는데, '수상'이란 말이 "상을 받다"를 뜻합니다. 물론 앞에 상 이름이 있으니 뒤에 '수상한다'라 쓸 수 있겠지만, "상을 주다"도 '수상(授賞)'이고 "상을 받다"도 '수상(受賞)'입니다. 그러니 '수상'이란 말을 쓰지 말고 "상을 받다-상을 주다"로 써야 알맞습니다.

    ┌(3) 일단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법하다
    │=> 어쨌든 독자들이 재미있어 할 법하다
    │=> 한번쯤 독자들이 눈길을 둘 만하다
    └ ......


    '흥미(興味)'는 '있는' 것이지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나 '눈길'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재미가 있거나 느끼'거나 '눈길을 두거나 돌리는' 겁니다. '가지다'란 말을 아무 곳에나 함부로 쓰는 말버릇은 서양말을 잘못 옮기면서 퍼졌지 싶습니다. '모임을 가지다'라고도 쓰는데, '모임을 하다'나 '모임을 열다'라고 써야 알맞습니다.

    ┌(4)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도
    │=> 내 판단으로도
    │=> 내 생각으로도
    │=> 내가 보기에도
    └ ......


    '개인적(個人的)'이란 말은 옹글게 군말입니다. 더구나 '내'나 '나'란 말만 써도 넉넉해요. '판단(判斷)'이란 "사물을 느껴서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보기에"라고 짧게 끊어서 써도 알맞습니다.

    ┌(5)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소설가의 자세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 극단으로 밀어붙인 소설가의 자세가 매우 인상 깊었다(뜻깊었다)
    │=> 극단으로 밀어붙인 소설가의 자세가 매우 마음에 남았다
    └ ......


    '극단적'이나 '인상적'이란 말에서 '-적(的)'을 뒤에 붙일 까닭이 없습니다. 때로는 두 말을 더 쉽고 알맞게 쓸 말로 다듬어도 좋습니다.

    ┌(6) 일본 문학의 몰락을 단적으로 지시하는 현상처럼 느껴진다
    │=> 일본 문학의 몰락을 (숨김없이/남김없이/그대로) 지시하는 현상처럼 느낀다
    │=> 일본 문학이 (무너지는 것을/보잘것없이 되는 것을) ......
    └ ......


    문학비평이라고 나온 글을 보면 이런 말을 누구나 흔히 씁니다. 아마도 우리 나라에 문학비평이 처음 들어온 때부터 모두 이런 말을 썼기에 2000년대로 접어든 지금까지도 이런 말이 판을 치지 싶어요. 모두 이런 말로 배우니 이런 말로 문학비평을 배운 분들은 어렵지 않게 느낄 테죠?

    하지만 이 말은 지난날에는 죄다 한자로 쓰던 말입니다. 이제는 그저 한글로만 바꿔서 쓸 뿐인데, 2000년대를 사는 우리들이 쓰고 즐기는 문학비평이라면 '글자만 한글로 쓸 것'이 아니라 줄거리와 속살까지 '살갑고 쉬운 우리 말'로 쓸 수 있어야지 싶어요. 하나 더. '느낀다'라고 쓰면 될 것을 왜 '느껴진다'라고 쓰는지요?

    ┌(7) 등장인물들은 동료들과의 교류가 단절된 단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하이틴이다
    │=> 나오는 사람은 둉료들과 교류가 끊어진 채 외롭게 사는 십대이다
    │=> 나오는 사람은 동무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혼자 살아가는 십대이다
    └ ......


    '등장인물들', '동료들'이라고 썼는데, 이렇게 쓸 수도 있습니다만, '등장인물', '동료'처럼 홑수(단수)로 써도 좋습니다. 우리 말은 대체로 홑수로 쓰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나저나 "동료들과의 교류가 단절된 단자적인 삶"이란 무엇일까요? '삶을 살아간다'는 말은 겹말입니다. '삶을 꾸린다'로 쓰거나 '살아간다'나 '산다'로 써야 알맞습니다. '십대'라고 쓰면 될 말을 왜 '하이틴(high teen)'으로 쓰죠? 차라리 '청소년'이라 쓰던지요. '단자적'이란 무슨 말일까요? 이명원 님이 쓴 '단자'란 말은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지 싶습니다. '홀로 있는'을 뜻하는 말 같은데, 이런 말을 함부로 쓰니 문학비평이 어렵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8) 오타쿠적인 집념
    │=> 오타쿠 같은 집념
    │=> 오타쿠다운 집념
    └ ......


    '오타쿠'는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모으는 사람들을 가리키던 말인가요? 이런 말을 사람들이 얼마나 널리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 문학을 말하는 자리이니 이런 말을 쓸 수도 있겠지만, '편집광'이나 '수집광' 같은 말을 쓰는 편이 낫지 싶어요. 물론 '수집광'과 '오타쿠'는 다르다고 말하겠죠. 그러면 우리 삶과 문화에 알맞는 '비평 말'을 이명원 님이 만들어야 옳습니다. 비평이란 '비평가가 쓰는 말을 그 비평을 읽는 사람이 알아서 알아들어야 하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오타쿠'란 말 뒤에 '-적'을 왜 붙여야 하는지도 생각해 봅시다.

    ┌(9) 딱 하이틴들이 읽기에 걸맞는 수준의 소설이기 때문에
    │=> 딱 십대가 읽기에 걸맞는 소설이기 때문에
    │=> 딱 청소년이 읽기에 걸맞는 소설이기 때문에
    └ ......


    여기서도 '하이틴'이란 말이 보이는군요. '걸맞는 수준의 소설'이란 말에서 '수준의'란 말은 군말입니다. 비슷한 군말로 '정도의'가 있습니다. '걸맞는 정도의 소설'이라고도 쓸 수 있을 텐데, '걸맞는'이란 말에 이미 '수준이나 정도'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정도의-수준의'를 붙일 때는 군말이 됩니다.

    ┌(10) 구직의 어려움을 한탄하는 낙서들이 다수를 이루고
    │=> 일자리 얻는 어려움을 한탄하는 낙서가 가장 많고
    └ ......


    김훈이란 분은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글도 씁니다만, <밥벌이하는 지겨움>이라고 써야 올바릅니다. '구직의 어려움'도 '구직하는 어려움'이라고 써야 올바르겠지만, '구직(求職)'이 아니라 "일자리 얻기(찾기)"입니다. '구직'은 우리 말이 아닌, 순화대상 낱말입니다. '감사의 마음', '경멸의 뜻'처럼 "(무엇)의 (무엇)" 꼴로 쓰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쓰는 말은 거의 모두 일본 말투입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무엇)하는 (무엇)"입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이나 "경멸하는 뜻"으로 써야 알맞아요.

    ┌(11) 회의로 가득 찬 낙서도 자주 발견된다
    │=> 회의로 가득 찬 낙서도 자주 찾을 수 있다
    │=> 회의로 가득 찬 낙서도 자주 볼 수 있다
    │=> 회의로 가득 찬 낙서도 자주 보인다
    └ ......


    "찾는 일"이 '발견(發見)'입니다. 이런 자리에선 쉽게 '보인다'라 쓰면 됩니다. 이명원님 글을 죽 살펴보니 입음꼴(수동태)로 쓰는 말이 무척 많아요. 문학비평은 자기 생각을 줏대있게 펼치면서 문학으로 사회와 사람 삶을 읽는 글이라 할 텐데, '입음꼴'로 쓴다는 것은 그다지 알맞아 보이지 않습니다.

    ┌(12) 소수파의 처지를 면치 못한다
    │=> 소수파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 소수파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 ......


    '벗어나다'나 '헤어나다'란 우리 말이 있습니다. 외마디로 된 한자말 가운데 하나인 '면(免)'은 우리 말이 아닙니다. 우리 말을 죽이고 괴롭히는 괴물덩어리입니다.

    <3> '어려운 말'로 쓰니 안 팔리지 않을까?

    문학비평을 다룬 책이 잘 안 팔린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문학도 안 팔리지만, 문학비평은 훨씬 안 팔린다고, 첫판을 다 팔기도 힘들다고 하더군요. 왜 그럴까요? 문학비평은 그다지 읽을 만한 책이 아니기 때문일까요? 문학비평이 비평다움이나 문학다움을 잃었기 때문일까요?

    여러 가지 까닭이 있을 줄 압니다. 제가 보기로는, 그 여러 가지 까닭 가운데 한 가지로 '비평이라고 해서 쓴 글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평하는 사람들끼리만 읽을 수 있는 글, 문학비평을 전공하는 학생과 교수만 읽을 수 있는 글, 먹물깨나 든 지식인들이나 읽을 수 있는 글로 써서 책이 안 팔리고 비평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대중적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도 말하더군요. 하지만 '대중적 글쓰기'란 또 무엇입니까? 이 말부터 어렵습니다. '쉽게 글쓰기', '살가운 말로 알맞고 깨끗하고 쉽게 글쓰기'로 나아가야지 싶어요. 문학비평이 주례사 비평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흔한 말로 "그들만의 리그"를 이루며 "문학비평하는 사람들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말"로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쪼록 이명원님 비평을 사람들이 널리 읽고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글은 우리 말과 헌책방을 사랑하는 모임인 '함께살기(http://hbooks.cyworld.com)' 게시판에도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2004/11/14 오후 1:19
    ⓒ 2004 OhmyNews
    최종규 기자는 대학교를 그만두고 우리 말-헌책방-책 문화운동을 합니다. 지금은 국어사전 엮는 일을 준비하며, 이오덕 선생님 원고를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1998년에 가장 어린 나이로 한글학회가 주는 한글공로상을 받았고 <모든 책은 헌책이다>란 책을 냈습니다. 개인 누리집 => http://hbooks.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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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쎈연필 2004-11-22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번은 '외국도 예외는 없다', 가 더욱 깔끔한데요. '예외'는 맞다/아니다가 붙기보다는, 있다/없다가 붙어야 하는데. 1번을 읽고 나니 저로선 최종규씨의 글을 더 읽을 수가 없군요.

    도서관여행자 2004-11-23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아서 정확한 문맥은 모르겠는데요. "예외"라는 말은 "예외(이)다 / 예외가 아니다"라고 쓰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혹시, '예외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쓰인다고 해서 "예외가 맞다"라는 어색한 표현이 있으며, 따라서 "예외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어색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인가요?

    쎈연필 2004-11-23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ː외(例外)[―외/―웨][명사] 보통의 예에서 벗어난 일. 일반의 원칙에 해당하지 않는 일.

    ¶예외로 처리하다./예외 없는 법은 없다./이 규정엔 예외가 없다.



    네이버 사전에서 퍼 왔습니다. 아니다의 반대어가 '맞다'라고 말한 건 제가 봐도 어색하지만, 설령 '이다/아니다'의 문제라고 해도, 윗글의 문맥상 '예외'의 뒤에는 '없다'가 더 자연스러운 것 같네요. 님은 그렇게 생각지 않으신다면 할 말 없지만요. 국문학도이신 것 같으니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요^^

    도서관여행자 2004-11-24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국어학 관련 수업은 하나도 듣지 않아서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죠.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