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비평도 '말'입니다
이명원님은 다른 문학비평가나 예비 문학인들이 쉽사리 건드리지 못한 중요한 문제를 차근차근 살피면서 건드립니다. 아무리 이름나고 훌륭한 스승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잘못된 길로 갈 수 있고, '아차' 싶게 길을 잘못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제자로서 더욱 날카롭고 차분하게 비판하고, 함께 나은 길을 가도록 힘써야 좋다고 봅니다.
제자된 도리는 스승이 하는 말이나 일을 무턱대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스승에게 배운 대로 옳은 길을 가면서, 외려 스승을 가르치고 비판할 수도 있어야 제자된 도리라고 생각해요.
이명원님은 제자된 사람으로 스승을 비판해야 옳음을 보여준 좋은 보기를 남겼다고 봅니다. 지금도 부지런히 자기 길을 갈고 닦으면서 문학비평으로 우리 문화와 문학을 북돋우는 일을 잘하고 있고요. 다만 한 가지, 문학비평과 문학이 '말'로 이루어진 예술임을 생각할 때 아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말'을 다룬 예술을 '말'로 비평하는 이명원님 글은 지나치게 어렵거나 얄궂은 대목이 많습니다. 국어사전에서도 찾을 길 없는 '알기 어려운 조합 한자말'도 쓰고, 당신의 스승이 쓴 문제 많은 일본투 한자말과 일본 말법, 어설픈 서양 말법이 두루뭉술하게 섞여 있습니다.
'말'은 문학을 낳는 사람뿐 아니라 문학을 비평하는 사람도 잘 다뤄야 좋습니다. 자기 말투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쓰는 말투가 이 땅(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비평가로 보아 알맞고 바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는 한편, 지식인만 알 수 있어서 지식인 비평가끼리만 주고받고 생각을 나누는 '말'이 아니라,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을 이야기하기는 일을 즐기는 보통사람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말'로 써야 좋습니다.
<2> 어떤 말이 '쉽게 못 쓴 말'인가 하면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새움(2004)>라는 책을 부지런히 읽고 있습니다. 짤막하게 쓴 글이 퍽 감칠맛있게 읽히기도 하지만, 곳곳에 끼어든 얄궂은 말 탓에 읽다가 때때로 걸립니다. 웬만하면 그냥 마음 안 쓰고 읽지만, 너무도 이상야릇한 말이 많기 때문에 책에 수없이 '낙서'를 했습니다. 제가 이명원 님 책을 읽으면서 했던 낙서를 차근차근 옮겨 보겠습니다.
(1) 외국의 경우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 외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 외국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 다른 나라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 ......
'경우(境遇)'는 "어떤 형편이나 사정"을 뜻하는 말로도 씁니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는'이라 할 때는 군말이 되곤 합니다. 그냥 '외국은'이라고 쓸 때가 더 낫습니다.
┌(2) 만 19세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해서 │=> 만 19살에 아쿠타가와상을 받아서 └ ......
'상을 수상(受賞)한다'고 썼는데, '수상'이란 말이 "상을 받다"를 뜻합니다. 물론 앞에 상 이름이 있으니 뒤에 '수상한다'라 쓸 수 있겠지만, "상을 주다"도 '수상(授賞)'이고 "상을 받다"도 '수상(受賞)'입니다. 그러니 '수상'이란 말을 쓰지 말고 "상을 받다-상을 주다"로 써야 알맞습니다.
┌(3) 일단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법하다 │=> 어쨌든 독자들이 재미있어 할 법하다 │=> 한번쯤 독자들이 눈길을 둘 만하다 └ ......
'흥미(興味)'는 '있는' 것이지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나 '눈길'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재미가 있거나 느끼'거나 '눈길을 두거나 돌리는' 겁니다. '가지다'란 말을 아무 곳에나 함부로 쓰는 말버릇은 서양말을 잘못 옮기면서 퍼졌지 싶습니다. '모임을 가지다'라고도 쓰는데, '모임을 하다'나 '모임을 열다'라고 써야 알맞습니다.
┌(4)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도 │=> 내 판단으로도 │=> 내 생각으로도 │=> 내가 보기에도 └ ......
'개인적(個人的)'이란 말은 옹글게 군말입니다. 더구나 '내'나 '나'란 말만 써도 넉넉해요. '판단(判斷)'이란 "사물을 느껴서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보기에"라고 짧게 끊어서 써도 알맞습니다.
┌(5)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소설가의 자세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 극단으로 밀어붙인 소설가의 자세가 매우 인상 깊었다(뜻깊었다) │=> 극단으로 밀어붙인 소설가의 자세가 매우 마음에 남았다 └ ......
'극단적'이나 '인상적'이란 말에서 '-적(的)'을 뒤에 붙일 까닭이 없습니다. 때로는 두 말을 더 쉽고 알맞게 쓸 말로 다듬어도 좋습니다.
┌(6) 일본 문학의 몰락을 단적으로 지시하는 현상처럼 느껴진다 │=> 일본 문학의 몰락을 (숨김없이/남김없이/그대로) 지시하는 현상처럼 느낀다 │=> 일본 문학이 (무너지는 것을/보잘것없이 되는 것을) ...... └ ......
문학비평이라고 나온 글을 보면 이런 말을 누구나 흔히 씁니다. 아마도 우리 나라에 문학비평이 처음 들어온 때부터 모두 이런 말을 썼기에 2000년대로 접어든 지금까지도 이런 말이 판을 치지 싶어요. 모두 이런 말로 배우니 이런 말로 문학비평을 배운 분들은 어렵지 않게 느낄 테죠?
하지만 이 말은 지난날에는 죄다 한자로 쓰던 말입니다. 이제는 그저 한글로만 바꿔서 쓸 뿐인데, 2000년대를 사는 우리들이 쓰고 즐기는 문학비평이라면 '글자만 한글로 쓸 것'이 아니라 줄거리와 속살까지 '살갑고 쉬운 우리 말'로 쓸 수 있어야지 싶어요. 하나 더. '느낀다'라고 쓰면 될 것을 왜 '느껴진다'라고 쓰는지요?
┌(7) 등장인물들은 동료들과의 교류가 단절된 단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하이틴이다 │=> 나오는 사람은 둉료들과 교류가 끊어진 채 외롭게 사는 십대이다 │=> 나오는 사람은 동무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혼자 살아가는 십대이다 └ ......
'등장인물들', '동료들'이라고 썼는데, 이렇게 쓸 수도 있습니다만, '등장인물', '동료'처럼 홑수(단수)로 써도 좋습니다. 우리 말은 대체로 홑수로 쓰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나저나 "동료들과의 교류가 단절된 단자적인 삶"이란 무엇일까요? '삶을 살아간다'는 말은 겹말입니다. '삶을 꾸린다'로 쓰거나 '살아간다'나 '산다'로 써야 알맞습니다. '십대'라고 쓰면 될 말을 왜 '하이틴(high teen)'으로 쓰죠? 차라리 '청소년'이라 쓰던지요. '단자적'이란 무슨 말일까요? 이명원 님이 쓴 '단자'란 말은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지 싶습니다. '홀로 있는'을 뜻하는 말 같은데, 이런 말을 함부로 쓰니 문학비평이 어렵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8) 오타쿠적인 집념 │=> 오타쿠 같은 집념 │=> 오타쿠다운 집념 └ ......
'오타쿠'는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모으는 사람들을 가리키던 말인가요? 이런 말을 사람들이 얼마나 널리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 문학을 말하는 자리이니 이런 말을 쓸 수도 있겠지만, '편집광'이나 '수집광' 같은 말을 쓰는 편이 낫지 싶어요. 물론 '수집광'과 '오타쿠'는 다르다고 말하겠죠. 그러면 우리 삶과 문화에 알맞는 '비평 말'을 이명원 님이 만들어야 옳습니다. 비평이란 '비평가가 쓰는 말을 그 비평을 읽는 사람이 알아서 알아들어야 하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오타쿠'란 말 뒤에 '-적'을 왜 붙여야 하는지도 생각해 봅시다.
┌(9) 딱 하이틴들이 읽기에 걸맞는 수준의 소설이기 때문에 │=> 딱 십대가 읽기에 걸맞는 소설이기 때문에 │=> 딱 청소년이 읽기에 걸맞는 소설이기 때문에 └ ......
여기서도 '하이틴'이란 말이 보이는군요. '걸맞는 수준의 소설'이란 말에서 '수준의'란 말은 군말입니다. 비슷한 군말로 '정도의'가 있습니다. '걸맞는 정도의 소설'이라고도 쓸 수 있을 텐데, '걸맞는'이란 말에 이미 '수준이나 정도'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정도의-수준의'를 붙일 때는 군말이 됩니다.
┌(10) 구직의 어려움을 한탄하는 낙서들이 다수를 이루고 │=> 일자리 얻는 어려움을 한탄하는 낙서가 가장 많고 └ ......
김훈이란 분은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글도 씁니다만, <밥벌이하는 지겨움>이라고 써야 올바릅니다. '구직의 어려움'도 '구직하는 어려움'이라고 써야 올바르겠지만, '구직(求職)'이 아니라 "일자리 얻기(찾기)"입니다. '구직'은 우리 말이 아닌, 순화대상 낱말입니다. '감사의 마음', '경멸의 뜻'처럼 "(무엇)의 (무엇)" 꼴로 쓰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쓰는 말은 거의 모두 일본 말투입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무엇)하는 (무엇)"입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이나 "경멸하는 뜻"으로 써야 알맞아요.
┌(11) 회의로 가득 찬 낙서도 자주 발견된다 │=> 회의로 가득 찬 낙서도 자주 찾을 수 있다 │=> 회의로 가득 찬 낙서도 자주 볼 수 있다 │=> 회의로 가득 찬 낙서도 자주 보인다 └ ......
"찾는 일"이 '발견(發見)'입니다. 이런 자리에선 쉽게 '보인다'라 쓰면 됩니다. 이명원님 글을 죽 살펴보니 입음꼴(수동태)로 쓰는 말이 무척 많아요. 문학비평은 자기 생각을 줏대있게 펼치면서 문학으로 사회와 사람 삶을 읽는 글이라 할 텐데, '입음꼴'로 쓴다는 것은 그다지 알맞아 보이지 않습니다.
┌(12) 소수파의 처지를 면치 못한다 │=> 소수파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 소수파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 ......
'벗어나다'나 '헤어나다'란 우리 말이 있습니다. 외마디로 된 한자말 가운데 하나인 '면(免)'은 우리 말이 아닙니다. 우리 말을 죽이고 괴롭히는 괴물덩어리입니다.
<3> '어려운 말'로 쓰니 안 팔리지 않을까?
문학비평을 다룬 책이 잘 안 팔린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문학도 안 팔리지만, 문학비평은 훨씬 안 팔린다고, 첫판을 다 팔기도 힘들다고 하더군요. 왜 그럴까요? 문학비평은 그다지 읽을 만한 책이 아니기 때문일까요? 문학비평이 비평다움이나 문학다움을 잃었기 때문일까요?
여러 가지 까닭이 있을 줄 압니다. 제가 보기로는, 그 여러 가지 까닭 가운데 한 가지로 '비평이라고 해서 쓴 글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평하는 사람들끼리만 읽을 수 있는 글, 문학비평을 전공하는 학생과 교수만 읽을 수 있는 글, 먹물깨나 든 지식인들이나 읽을 수 있는 글로 써서 책이 안 팔리고 비평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대중적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도 말하더군요. 하지만 '대중적 글쓰기'란 또 무엇입니까? 이 말부터 어렵습니다. '쉽게 글쓰기', '살가운 말로 알맞고 깨끗하고 쉽게 글쓰기'로 나아가야지 싶어요. 문학비평이 주례사 비평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흔한 말로 "그들만의 리그"를 이루며 "문학비평하는 사람들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말"로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쪼록 이명원님 비평을 사람들이 널리 읽고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