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불치의

ㅡ 함성호


 


입술을

세상이 무너져버릴 키스를

한입 가득히 너의 심장과 피를

흡입해내는 나의 사랑을

용서해줘, 와락, 포옹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너의 몸을

허무를―, 낙엽이 진눈깨비처럼 지는 대낮을

걸어, 무수히 가슴에 상처를

자해하는, 무진 힘겨운 발걸음을

일보 일보 이끌며 가는, 절망의 행보를

아아, 살아 있다는 것을

허나 너의 사랑을

끓는 솥 가운데에 전신을 데인, 火傷을,

나는 문 여닫는 소리에도 온몸이 아픔을

그 아픔을 불치로 알아 살아감을

너는 모를……

그 바다에 뿌린 눈물을

양식으로, 그물에 담아올리는 사랑을

넘쳐오는 파도를

산산조각내는, 나의 고독을

땅거미로 번져가는, 너의 웃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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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별

ㅡ 송찬호



목이 말라 잠을 깬 새벽 두 시의 산격동은

온통 사막이다

끝간 데 없이 길게길게 누워 있는 모래언덕들

얼마나 잠이 깊었으면 이렇게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이 되었을까


물을 찾아헤매다 문득 흐르는 별 하나를 만났다

젊어서 일찍 집을 떠났다가

길 없는 길에서 홀연히 마주치는 나그네 별!


목마른 자만이 물을 찾아나선다

그리하여 오래 걸은 자만이 사막 속 샘이 있는 곳을 안다


어서 지친 몸을 일으켜 약속의 땅에 가 닿았으면

그 땅에 이르러 약속의 밥을 지어먹고 새날을 맞이했으면


이루어지지 않은 꿈들이 쌓여

메마른 모래언덕을 이루었어도

밤마다 방향도 없이 사막을 건널 수 있는 것은

샘이 있는 곳으로

별이 끌어 주기 때문이다


별은 가도

별빛은 남아 오래오래 빛나리라


……멀리서 빛나는 저 목마름

나도 나그네가 되어 나그네 별과 함께

새벽 두 시의 산격사막*을 정처없이 헤맸다





*산격사막 : 대구시 북구 산격동 지역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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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기형도 시에 대한 편집증적, 분열증적 읽기

필요 때문에 파일들을 뒤적이다가 오래전에 써둔 글을 발견했다. 기억에 99년 12월말쯤 한 독서강좌에서 강의안으로 사용한 것인데(<기형도 전집>이 나온 걸 빌미로 하게 된 강의였다), 언제가 쓰고자 하는 '기형도론'의 초안 성격을 갖는다. 자료 정리 차원에서 여기에 옮겨둔다(각주는 제외하거나 압축하였다).

1. 편집증/분열증적 문명

남자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정으로부터, 혹은 여자로부터. 어느쪽이든 멋지지 않느냐. 여자들이나 아이들도 서투른 만류 공작 같은 하고 있을 틈이 있으면, 남겨지는 것보다 먼저 도망치는 쪽이 낫다. 행선지 같은 건 알게 뭐냐. 어쨌든 도망쳐라, 도망쳐라, 어디까지든... 여기서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인간에게는 두 형태, 즉 파라노이아paranoia형과 스키조프레니아schizophrenia형이 있다는 최근의 주장이다. 파라노이아라는 건 편집증형을 말하는데, 과거의 모든 일을 적분(=통합)integrate하여 짊어지고 있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10억원을 가지고 있는 구두쇠가 10만원만 더, 5만원만 더, 라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에 대해, 스키조프레니아라는 건 분열증형으로, 그때마다 시점 제로에서 미분(=차이화)differentiate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항상 <지금>의 상황을 예민하게 살피면서 순간순간에 모든 것을 거는 도박꾼 같은 사람이 그 전형이다.

가장 기본적인 편집증형의 행동이라고 한다면, <정주(定住)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가정을 이루고, 그곳을 중심으로 영토의 확대를 도모하는 동시에, 재산을 산더미처럼 축적한다. 아내를 성적으로 독점하고, 태어난 자식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가정의 발전을 도모한다. 이 게임은 도중에서 그만두면 진다. <그만둘 수 없다, 멈출 수 없다>를 계속하여, 어쩔 수 없이 편집증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병이라고 하면 병이지만, 근대 문명은 이런 편집증적 추진력에 의해 여기까지 성장해온 것이다... 그런데, 사태가 급변하기라도 하면, 편집증형은 약해진다. 잘못하다가는 울타리 안에 들어박혀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목숨을 바치게 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여기서 <정주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등장하는 것이 <도망치는 사람>이다. 이 녀석은 무슨 일이 있으면 도망친다. 머무르지 않고 아무튼 도망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이 가볍지 않으면 안된다. 가정이라는 중심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선에 몸을 둔다. 재산을 부지런히 모으거나, 가장으로서 처자식 위에 군림하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때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이용하고, 대를 이을 아이도 적당하게 씨를 뿌려놓고 뒷일은 운명에 맡겨버린다. 의지가 되는 것은 사태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센스, 우연에 대한 직감, 그것뿐이다. 이렇게 되면 정말 분열증형이라 할 만하다... <편집증적 인간>으로부터 <분열증적 인간>으로, <정주하는 문명>에서 <도망치는 문명>으로의 대전환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편집증적 인간은 모든 과거를 적분(=통합)하여 등뒤에 짊어지고 그것에 매달려 있는 것을 뜻한다. 편집증적 인간은 <따라잡고 뛰어넘어라> 경주에 열심인 경주자이다. 그는 한발이라도 앞으로 나가자, 조금이라도 많이 축적하자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계속 열심이다. 한편, 분열증형은 그때마다 시점 제로에서 미분(=차이화)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분열증적 인간은 <따라잡고 뛰어넘어라> 경주에서 추월당했다고 하더라도, 금방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고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달려가버린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아이들은 스키조 키즈다. 금방 정신이 산만해지고, 한눈을 팔고, 다른 데로 빠진다. 오로지 <따라잡고 뛰어넘어라>의 편집증적 추진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근대 사회는 그러한 스키조 키즈를 강인하게 편집증적으로 만들고 경주 과정으로 억지로 끌어들이는 일을 존립 조건으로 하고 있다... 일정한 방향으로 숨 가쁘게 달리는 편집증형의 자본주의적 인간은 이제 종언을 고하고 있다. 그 후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아사다 아키라, <도주론>)

2. 20세기 한국시와 기형도

20세기 한국시와 기형도를 읽는데 있어서 편집증/분열증의 도식이 왜 필요한가? 대답은 간단하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재미에 맛을 들였고, 급속도로 전자 미디어화되어 가는 문화와 삶의 양태 또한 이러한 재미의 윤리(fun ethic)를 권유하고 부추긴다.(나에게 재미가 있으면 좋은 거고, 없으면 나쁜 거.) 그것이 대안이 될지 어떨지는 속단할 수 없다. “어쨌든, 분열증적인 운동성과 편집증적인 억압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니까. 다만, 여기서는 20세기 한국시의 편집증/분열증적 시의 운동과 계보를 간략하게 더듬어보는 것으로 기형도 읽기에 대한 예비공작을 대신하도록 한다.

<황무지>(1922)의 시인이자, 아마도 가장 유명한 20세기 시인, T. S. 엘리엇은 시뿐만 아니라 시론에서도 정력적이었는데, 그가 유달리 강조한 것은 전통과 역사의식이었다. 모름지기 25세 이후에도 시를 쓰려는 자는 역사에 대한 “감”을 먼저 연마해야 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역사는 단순한 시사(詩史)를 넘어서 종교사, 종교적/상징적 상상력의 역사에 걸쳐 있지만, 하여간에 시란 것이 젊은 날의 겉멋이나 치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줄곧 강조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김춘수는 (25세 이후에도?) 시론(詩論)을 갖고 있지 않은 시인은 천재이거나 아마추어라고 평했는데, 시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 혹은 관념(idea)이 없다면 일찌감치 시는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뜻을 그의 주장은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시론이란 것이 모국어에 대한 감각과 시사(詩史)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할 때(김춘수 또한 시론(詩論)에 정력적인 시인이며 여러 권의 시론집을 낸 바 있다),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시의 전통과 역사적 전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에 대한 부단한 의식 속에서, 그것과 맞서며 아주 조금씩 전진해나갈 따름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편집증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인은 그 이전에 씌어진 모든 시를 다 읽고 나서야 거기에 한 문장, 혹은 한 글자 덧붙일 수 있을 따름이다. 편집증적인 시의 역사?..

그러한 시의 역사를 재구성할 때, 20세기 한국시란 무엇이었나? 20세기 초에 한국시의 기초를 이룬 시인들의 이름으로 김소월(魂의 시), 이육사(精神의 시), 이상(技巧의 시) 등등의 계보를 지적할 수 있을 테지만(김윤식의 분류이다), 20세기를 통틀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시업(詩業) 60년을 넘긴 미당 서정주를 들 것이다. 그의 정치적 과오 때문에 한때 미당(未堂)보다는 말당(末堂)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그가 우리 부족시의 족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을 자임하는 그의 시를 보라(*이 글은 그가 작고하기 이전에 씌어졌다).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이/ 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시를 못쓰날에 할망구 손톱 발톱 깎어주며 마음 달래는 일도 “이뿌게” 시로 만드는 그의 솜씨는 대가급이다. 그러나 서정주의 시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있는, 체념적 달관 혹은 달관적 체념의 세계(비평가 김현은 서정주의 정신주의에 대해서 “그의 정신주의는 그가 그의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태도의 희극”이라고 적은 바 있다)는 이념(idea), 혹은 형이상(形而上)을 배제한 세계이다(“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추천사(鞦韆詞)>는 구절에는 그의 체념적 달관이 집약되어 있다. 이 이념-이후에 그는 “가난이란 한낱 襤樓에 지나지 않는다/.../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無等을 부며>)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것이 또한 달관적 체념의 세계이다).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같이 활동했던 청마 유치환은 서정주와 달리 이념적 ‘깃발’을 표나게 내세운 바 있으나, 언어적 조탁에 있어서 그에 미치지 못했고, 한자어투로 이루어진 그의 남성적 어조는 계보를 얻지 못했다(청마를 가까이 한 이에 김춘수가 있지만, 김춘수의 여성적 세계는 유치환의 남성적 세계와 대조적이다. 김춘수 자신이 시인하는 바이지만, 그의 초기시는 서정주의 계보에 속한다). 그리고 그의 시업(詩業) 또한 너무 일찍 한국시사에서 단절되었다. 그리하여 멀리는 40년대부터, 한국시단은 미당과 그 일가(一家)에 의해 접수된다(한국시사에서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사례인 ‘청록파’의 경우, 박두진의 몇몇 시편들을 제외하면 비이념적 정관적(靜觀的)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다. 박목월의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구름에 달가듯”한 세계엔 이념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그림(=풍경)만 남고 목소리가 빠진 시는 왜소하다).

그리하여 여기에 유사-오디푸스 콤플렉스가 개입한다. 미당 이후의 시인은 하여간에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미당과 싸워야 했다. 그를 넘어서거나 그와 다른 세계로 질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5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이 잠시 시림(詩林)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곧 빈수레였다는 것이 들통난다. 그들은 木馬를 타고간 소녀의 옷자락 얘기만 잠시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언어(말부림)’를 가지고 미당에 맞서 그보다 윗길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고은 정도가 서정주의 어법을 가지고도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남은 희귀한 사례이다), 그의 시업이 60년을 넘길 수 있을는지?

미당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이라는 것은 미당의 이념적 ‘퇴행’을 걸고 넘어질 수 있는 이념이어야 했다. 60년대 김수영과 김춘수는 이 점에서 제각각의 방식이긴 하지만, 뚜렷하다. 60년대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이념적 화두가 ‘자유’였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색이 없다. “달나라의 장난” 같은 그의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노래, 아니 절규한 것이 바로 자유였기 때문이다. 산문적인 그의 시의 어법 또한 미당과는 전혀 종류를 달리하였다. 4.19 이후에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고 그는 적고 있는데, 조금 다른 맥락에서, 김수영은 미당의 그늘 아래 놓인 해방 이후 한국시사에서 자신의 ‘방’을 마련한 드문 예에 속한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김춘수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미당의 빈 자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는 언어의 이념(이라기보다는 관념)을 자신의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이 또한 의미(=역사)로부터의 도피, 혹은 퇴행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힘든 경우지만, 어쨌거나 언어의 가지 끝에 매달리는 데는 성공한다. 이념의 부재로 미당의 시를 특징지울 수 있다면, 김춘수의 시는 한술 더 떠서 의미의 부재를 지향한다. 언어적 자의식을 대표하는 그에게 시는 “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고 “얼굴을 가리운 나의 新婦”이다. 그것은 말부림의 세계가 아니라, 말 비우기의 세계, 의미의 빈 그릇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어쨌거나 김수영과 김춘수에 와서 한국시는 미당시에서 탈색된 근대성(=시대성)을 다시 획득한다. 그러나 그것은 김수영의 이른 죽음을 대가로 치른 것이었다. 그리고 맞은 70년대에도 미당시는 여전히 도전/극복의 대상이다.

젊은 전사들의 이름으로 평론가 김현은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을 지목하고 있는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즐거운 편지>)의 황동규는 “물 빛 라일락의 빛과 香”을 가진 미당의 “永遠” 대신에 비극적 세계인식의 “자세”를 대립시키고,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병신 같은 女子, 시집 같은 女子,...”(<한 잎의 女子>)의 오규원은 대상과 언어와의 관계를 의혹이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연기(緣起)론 세계인식에 딴지를 건다. 거기에 “나는 별아저씨, 바람 남편이지”의 시인 정현종의 “숨통“과 “걸음걸이”가 미당의 행보를 뒤쫓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70년대를 증언할 수 있는 시인은 70년대의 포문을 연 <오적(五賊)>(1970)의 김지하이다. 그는 대뜸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던가. “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이 황토(黃土)의 땅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일에 비하면, 조곤조곤한 시들은 좀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70년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것 또한 그의 ‘대표성’을 수긍하게 한다. 시 또한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마땅했을 시기가 아니었던가.

80년대 한국시는 80년 광주에서 시작된다. 그보다 조금 먼저 등단한 이성복은 이 “정든 유곽”의 땅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진단서를 제출한 바 있지만(이성복은 기형도의 전사(前史)로서 빼놓을 수 없다.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그날>)라는 진술은 기형도의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안개>)란 진술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형도에 와서 그 “아픔”, “신음소리”는 “개인적인 불행”으로 이미 내면화된다), 가장 명료하게 80년대를 규정한 이는 황지우이다.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에프킬라를 뿌리며>) 여기서 황지우의 “초토”는 김지하의 “황토”에 견줄 만하다.

80년대는 죽음의 연대였고, 시인들은 네크로필리야(necrophilia)에 들린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그 죽음을 파헤치고 음미하였다. 죽음에 분노하였고, 그 부채의식에 통곡하였다. 간혹 미치기도 하였다. “아싸라비야, 도로아미타불”이나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찍이 나는>)고 한 최승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성복의 어법을 빌리자면, “모두 죽었는데, 아무도 죽은 줄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죽음의 기운이 조금씩 떨쳐지는 것은 87년 이후이다. 그 이후 한국사회는 개량적․형식적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이어진 90년대에 80년대는 이미 “과거”가 돼 버리고, “후일담”이 횡행한다(한국사회는 가끔 (나쁜 쪽으로) 정신분열증적이다. 과거-망각(청산이 아니다!)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듯하다. 정신분열증적인 포스트-모던사회에서의 선전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3. 기형도-정거장-고드름

잠시 에둘러왔지만, 기형도의 시가 자리하는 건 80년대 말이다. 100년의 한국시사가 두 쪽에 요약될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편집증적인 시읽기에 있어서) 시의 전사(前史)를 모르고 한 시인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전공작이 필요하였다. 미리 말하자면, 기형도의 시는 죽음-의식과 비관적 세계인식의 한 극점으로 평가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80년대적이지만, 그의 비관론이 개인사적인 근원을 더 강하게 갖는다는 점에서 80년대를 넘어선다. 그렇다고 90년대적일까?

참고로, 90년대적인 시(현상)으로 장정일과 유하의 경우를 들고 싶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의 장정일과 <무림일기>(198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유하는 키치적인 상상력과 패러디적인 기법으로 무장하고 “진지한 시”의 전통에 냉소를 퍼붓는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식혀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시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 무렵 하남 당에서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아,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大血劫)/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空輸無極破天掌)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이들의 “가벼운 흥분”과 재미의 세계는 80년대적인 무거움과 극적이면서 단호하게 결별한다. 이는 새로운 시이면서, 시의 끝(=종말)이다. 근황? 장정일은 일찍이 시를 그만 두었고, 유하는 영화계 주변을 맴돌다가 다시 시의 초심(初心)으로 되돌가겠다며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를 발표하고 욕을 먹는다.

하긴 90년대의 많은 시인들이 기형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그의 시에도 불운한 시대의 징후/이미지들이 알레고리나 상징의 형태로 들어서 있다. 하지만 그 징후/이미지들은 그의 “개인적인 불행”과 겹쳐지면서 증폭되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니다. 그는 어떠한 “후일담”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집요하게 비관적이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오래된 書籍>)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미빛 인생>)
“자시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가란 말인가!”(<여행자>)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진눈깨비>)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

이 비관론의 출처는 개인적인 심리적 외상(外傷, trauma)이다. 그 상처로 여러 평자들이 지목하고 있는 바는, 유년/소년시절의 가난과 청년시절의 실연이다. 거기에 덧붙여서 소년시절 누이의 죽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러한 상처는 상징이 아니다. 대리체험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다.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고 평론가 김현이 적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또한 그것이다. 그러한 상처 이후에 기형도에겐 집이 없다.

여기서 그가 떠나온 자리를 기록해 두기로 하자. 어린시절의 가족사와 가난을 증언하고 있는 여러 시편 가운데서 <폭풍의 언덕>의 끝부분: “다음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폭풍의 밤마다 언덕에 오르는 일을 그만두엇다. 무수한 변증의 비며을 지르는 풀잎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였다.”

보라,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추억>) “딱딱한 손”이란 건 유사-죽음의 이미지이다. ‘상처’ 이후에 그에겐 집이 없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물 속의 사막>의 끝부분: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장마통에 집을 버”린 개처럼 (눈)물마저 집을 버려서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나의 악몽조차 적셔주지(=위로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라는 도저한 비관조차도 빌딩 속이라는 이 도시적 공간에서는 아무런 반향을 얻지 못한다. 이런 비관이 그에게 포즈가 아니었다니!). 그런 그의 마음은 죽음이 잠시 유예된 거처일 뿐이며, “저녁의 정거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시의 이러한 결말은 서두에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려다”고 한 화자의 의지와 모순된다. 그의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행위(포기/체념)가 역설적으로 그에겐 마지막 남은 희망이라는 뜻일까? 모든 희망을 포기함으로써, 희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그는 역설적으로 희망의 문턱에 서게 되는 것일까? 혹 그에게 희망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이 누추한 육체” 속에 가두어진 삶의 비극성으로부터의 해방이 어찌 희망이 아닐 수 있겠는가! 어쨌거나, 그는 추억이 잠시 머물다 가거나 손을 깨물고 가는 정거장이다. 또 길 위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남발하는 여행자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러한 ‘여행’의 이미지들이 다른 세계로의 아무런 탈출구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인도(印度)로 가지도 않고 타히티로 가지도 않는다. 그는 항상 떠나되 언제나 제자리이다. 그는 정거장이되, 모든 길들이 흘러(들어)오는 정거장이다. 그는 정거장(停車場)에 정거(停居)되어 있다. 그는 거기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왜? 그에게 이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는가? “어둠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에 의하면 일생을 그르친 것은 오히려 희망이다. 그는 희망에 떠밀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여행을 하지만, 결국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조차],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여행자>) 그래서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하지만,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여행자>).

기형도의 시는 꿈을 꾸는 시가 아니라, 추억에 들려 있는, 사로잡혀 있는 시이다. 그는 편집증적으로 추억에 매달리며, 그것에 시달린다.(추억에 바쳐진 시들의 예시는 장석주의 <기형도, 혹은 길 위에서의 중얼거림> 참조.) 추억은 그에게 상처이며 억압이고 죽음에의 유혹이다. 추억은, 혹은 추억의 통합/집적은 그를 더욱 지치게 하고 늙게 만든다. 그는 일찍이 집을 잃고, <정주민(定住民)>의 대열에서 이탈했지만, 그렇다고 마음 가볍게 <유량민/유목민>의 대열에 합류하지도 못한다. 그는 자유롭게 증발하지도 못하고(=유랑민), 물이 되어 흘러 대지에 스며들지도(=정주민) 않는 고드름과도 같다. 그는 문밖에서 서성이며 밤새 처마끝을 지키고 서 있다. 그가 견디는 외로운 천형을 보라.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오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벼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고드름의 이미지는 기형도적 편집증의 정점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그토록 가늘은 유리막대처럼 위태로운 모습”(<폭풍의 언덕>)의 반복이면서, 그 자신의 “낡아바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와 조응하는 이미지이다: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위험한 가계․1969>) 등에서 보여지듯이, 그의 잠(=안식)은 일시적이고, 그래서 불안하다. 그것은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라는 아버지의 진술이나, “나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러닝 셔츠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두눈 부릅뜨고 헤아려보았다.”(<폭풍의 언덕>) 같은 구절과 조응한다. “가난한 아버지” “아버지, 불쌍한 내 장난감/ 내가 그린, 물그림 아버지”(<너무 큰 등받이의자>) 등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무력함’, ‘굳게 뿌리내리지 못함’은 그에게서 ‘집없음’(→여행자→정거장)으로 표상되는데, 그의 ‘정거장’은 동적인 운동성보다는 정적인 정체(停滯)성을 주된 자질로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거장은 고드름과 통한다.

그의 꿈, 고드름의 (냉각된!) 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생을 적시는 것이다. 기형도의 시는 딱딱하게 굳어진 눈물의 시이고, 고체화된 액성의 시이다. 오오, 그런 그의 시를 우리가 어찌 비웃을 것이냐, 버려둘 것이냐!..

4. 다시, 분열증적 읽기

대강 건너뛰면서 기형도 시의 한 가지 주제를 살펴보았다. 추억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이 고드름이란 이미지로 극화되는 과정에 어떤 논리를 부여하고 싶었지만, 결과는 신통찮다. 많은 걸 건너뛰고 생략했기 때문이다(시간관계상!). 기형도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그의 보편문법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의 ‘편집증적’ 읽기 또한 다시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시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들의 반복을 좇아가며 거기에 논리를 부여하려는 편집증적 읽기, 시사(詩史)적인 맥락에 대한 집착적 읽기에서 놓여난다면, 우리는 시집의 아무 페이지나 읽고 또 덮어둘 수 있을 것이다. 아무 구절이나 암송하고, 간혹 정거장이나 혹은 술집에서 되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잊을 것이다. 시에 대해서, 시인에 대해서... 왜냐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는 나는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燈皮를 다 닦아내는 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바람은 그대 쪽으로>)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를 두고 얼마나 많은 밤을 메마른 눈물로, 불면으로 지새웠던가(손수건을 씹어댔던가!). 그럼에도, 여전한 것...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沈黙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다닌다.”

그리하여, 현명한 당신은 이제 알 것이다. 이 모두가 다만 침묵하기 위해서 말해진 것일 뿐이라는 것을!... (어서 도망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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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 고은


그 누구의 고향도 아니었다

단 한번도 갓난아기 없이

동해 난바다 한복판

목쉰 늙은 갈매기 울음조차

쌓이는 파도소리에 묻혀

그 누구의 고향도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솟아올라

먼 바다일망정

하필 거기 솟아올라

그토록 오래 바윗덩이의 묵언인 채

그 누구의 고향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누구 있어 먼 곳으로 길 떠나

함부로 돌아올 수 없을 때

그곳이야말로 고향을 넘어

어쩔 수 없는 패배로부터 일어서서

하늘가 뜨거운 낙조에 담겨 파도소리 이상이었다


일찍이 그 누구도 거기에 가지 못한 이래

바람의 세월 몇천 년 동안

오직 그곳만이 파도소리에 묻혀

그 누구도 태어나지 않은 곳

먼 곳 자지러지게 떠도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끝내 고향이었다 오오 동해 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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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김소월의 진달래꽃

[시인공화국 풍경들] <1> 金素月의 '진달래꽃'
[한국일보 2005-03-02 17:21]    
김소월 이래 한국 현대 시문학의 영토를 넓혀온 시인들의 대표 시집을 리뷰하는 ‘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시집 산책’을 매주 목요일에 게재한다. 이 시리즈는 국어 교과서나 문학 교과서, 주류 문단 등으로 이뤄진 문학제도의 울타리 안쪽에 굳건히 발을 디디면서도, 그 바깥쪽까지 넉넉한 눈길을 건네며 현대 한국어의 가장 아름다운 속살을 탐색할 것이다. 편집자 주

詩人共和國의 政府

나는 시인들의 공화국을 주유(周遊)하기 위해 정교한 로드맵을 만들지는 않았다. 산책은 그 때 그 때 내 변덕에 떠밀려 발길 닿는 대로 진행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발을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진달래꽃’(1925)으로 내딛는 것은, 최소한의 질서감각에서 내가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진달래꽃’은 한국 현대시문학의 수원지(水源地)다. 아니 그것은 수원지일 뿐만 아니라 가장 높은 봉우리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것은 예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이고, 깊다라면서도 높다랗고, 순정하면서도 풍만하다. 상투적 표현을 쓴다면, ‘진달래꽃’은 시인공화국의 정부(政府)다. 공화국 창건기에 세워진 이 정부는 지금까지 장기집권하고 있다.

장기집권하는 정부는 죄다 부패하게 마련이지만, ‘진달래꽃’에선 악취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정부의 권력 행사가 근원적이되 요란스럽지는 않은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교양 있는 시 독자들에게 그가 좋아하는 시인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소월이라는 이름을 대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이 꼽는 이름들은 대체로 ‘문학과지성시인선’이나 ‘창비시선’의 리스트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백하는 취향을 결정한 것이 그들 나름의 독립적 판단인지는 확실치 않다.

오늘날, 교양 있는 시 독자들의 취향은 미끈한 문학비평가들과 날씬한 문학저널리스트들의 손아귀에서 빚어지기 십상이다. 이런 문학적 교양의 유행에서 벗어나 시를 제 몸으로 느껴보라고 주문한다면, 그리고 시인이란 모국어의 속살에 도달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점을 피조사자들에게 환기시킨다면, 그들이 좋아하는 시인의 리스트는 사뭇 다르게 작성될지도 모른다.

그 때, 소월과 ‘진달래꽃’은 교양 있는 시 독자들의 선호에서도 최상위를 차지하게 될지 모른다. 이런 사고실험의 결론이야말로 내 편견의 소산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산책을 ‘진달래꽃’에서 시작하는 것은 그런 편견 때문이다.

시인은 모국어의 속살에 도달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판단으로 돌아가 보자. 그럴 때 내게 대뜸 떠오르는 시인은 소월과 백석(白石)이다. 한국어문학 바깥에도 제 모국어의 속살에 도달한 사람들은 수두룩하겠지만, 한국어가, 한국어만이 모국어인 나는 한국어 바깥 풍경을 상상할 수 없다. 소월보다 열 살 아래인 백석은 소월과 동향이고, 소월의 오산학교 후배다.

그들의 시가 한국어 화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시어가 한국어 화자의 몸에 깊숙이 새겨진 기층 어휘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당대에 이르기까지 일천 수백 년 간 한국어에 침윤한 중국제 한자어를, 그리고 그들의 당대 얼마 전부터 한국어 어휘장에서 중국제 한자어와 경쟁하기 시작한 일본제 한자어를,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언어로서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동향의 이 두 시인이 사용한 한국어는 한국인들에게 꽤 다른 질감으로 다가온다. 지금 한국인들의 마음만이 아니라 시인과 동시대를 살던 한국인들의 마음에도, 백석의 시가 소월의 시만큼은 드센 떨림을 유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 가운데 큰 것은 백석 시어의 강한 지방성에 있을 것이다.

백석의 서북 방언은 그 자체가 하나의 견고한 성채다. 그것은 서북 바깥의 한국인들에겐 더러 소통의 빙벽이다. 거기에 비해 소월의 서북 방언은 일종의 겨자와도 같다. 소월의 시에서 서북 방언은 뉘앙스다. 그 서북 방언은, 그의 시에서 이따금씩 보이는 한자어들처럼, 생선회에 풍미를 더해주는 와사비 같은 것이다.

‘진달래꽃’의 시어가 기층 한국어라는 것은 그것이 민족적이라는 것 못지않게 민중적이라는 뜻이다. 소월의 한국어는 한글학회의 국어순화운동이나 이북의 말다듬기 운동이 만들어낸 신(新)한국어가 아니다.

그것은 당대 민중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던 진짜 한국어다. 그런 자연스러움은, 소월의 시에서, 어휘의 수준만이 아니라 말 무더기의 수준까지, 곧 리듬의 수준까지 스며들어 있다. 그것이 그의 시를 노래로, 가락에 올라탄 진짜 노래로 만든다.

‘엄마야 누나야’ ‘옛이야기’ ‘못 잊어’ ‘진달래꽃’ ‘산유화’를 비롯해 시집 ‘진달래꽃’의 많은 시들이 대중가요나 가곡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시들은, 그런 제도적 노래가 되기 이전에도, 소월의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미 노래였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로 시작하는 ‘못 잊어’나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로 시작하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를 한 번 소리 내어 읊어보라.

그 소리들의 연쇄가 우리의 귀에 닿기도 전에, 우리의 구개와 가슴이 먼저 반응하며 언어와 유쾌하게 통정(通情)하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소월의 시가 한국어 화자의 육체에 친밀한 것은 물론 도드라진 정형성 때문이지만, 그의 뛰어난 시들은, 위의 두 시에서도 보이듯, 그 정형성을 유지하면서도 살짝 구부린 것이다.

그 구부러진 정형성 속에서 화자-독자의 감정은, 평평한 모래땅 위를 흐르던 물이 굽이에 이르러 휘어 감기듯, 순하고 천연스럽게 펼쳐진다. 그 때 소월의 언어는, 네모 도시락 속의 식은 밥처럼 밋밋한 자수(字數)의 구속에서 살짝 벗어나, 본원적 정서의 여분을 서럽게 쓰다듬는다. 소월은 시를 쓰지 않고 시를 노래했다. 그는 시인의 원형으로서 가인(歌人)이었다.

시집 ‘진달래꽃’의 많은 시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 속의 많은 사랑노래들이 그렇듯, 그 시들은 결핍으로서의 사랑,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예컨대 ‘삭주(朔州) 구성(龜成)’의 화자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립”고, ‘산(山)’의 화자는 “십오년 정분을 못 잊”는다.

그러니까 ‘진달래꽃’의 연애시들이 노래하는 것은 사랑으로부터의 소외, 제가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의 소외다. 그 시들은 사랑의 노래이자 이별의 노래다. 더러 그 노래는 넋두리에 그치기도 하지만, ‘개여울’이나 ‘초혼(招魂)’에서 보듯 정서의 밑동을 긁어내기도 한다. 이런 사랑, 이런 그리움을 표출하는 ‘진달래꽃’의 몇몇 시들은, 그 애절한 설움의 정서 때문에, 화자가 여성인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움이나 설움은 여성의 정조라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정조다. 화자가 여성이라는 것이 문맥에서 또렷이 드러나지 않는 한, 화자를 시인과 포개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예컨대 “추거운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당신은 잊어바린 설움이외다”로 끝나는 ‘님에게’는 갓스물에 이른 소월 자신의 실연시(失戀詩)가 분명하다. 비록 전통적 7.5조 리듬을 답습하고 있지만, 이 시는 실연의 심리를 정교하게 묘파한 절창이다.

‘님에게’에서 보듯 시집 ‘진달래꽃’의 그리움이 향하는 대상은 더러 ‘님’으로 호명된다. 그 ‘님’이 반드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들으면 듣는 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잊고 말아요”로 끝나는 ‘님의 노래’에서, 그 ‘님’은 뮤즈나 시혼(詩魂)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역시 7.5조 리듬에 실린 이 작품에서, 화자와 뮤즈의 로맨스는 즐겁게 졸졸졸 흐른다. 뮤즈를 사랑하게 된 앳된 청년의 행복감, 가슴 두근거림, 조바심 같은 것이 투명한 단순성 속에서 아른거린다. 시집 ‘진달래꽃’이 보이는 결핍으로서의 사랑은, 유년기로의 퇴행 속에서 어떤 이상향을 그리는 ‘엄마야 누나야’에서 보듯, 지나간 과거를 향하기도 한다.

마치 밀레의 그림 한 폭을 연상시키는 ‘밭고랑 위에서’따위의 힘찬 노동시가 한쪽에 버티고 있긴 하지만, 시집 ‘진달래꽃’의 세계는 애절하고 애달프고 애잔하다. 그러나 그 세계는 한(恨)의 세계라기보다 서글픈 흥(興)의 세계다. 이 생뚱맞은 흥은 화자의 젊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순정한 젊음 속에서는 애잔함이나 수줍음이나 무력함 마저 도도하다. ‘진달래꽃’의 화자들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노래하지만, 그 불운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이 서글픈 흥의 세계에 도덕이나 계몽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더 나아가 종교가 들어설 자리도 없다. 무속을 비롯한 전통 종교든 기독교 같은 외래 종교든, 어떤 종교의 그늘도 ‘진달래꽃’에 드리워져 있지 않다는 것은 놀랍고 기쁘다. ‘진달래꽃’의 화자들은 많은 경우에 무력했지만, 그 무력을 자율적 주체로서, 단독자로서 감당했다.

그 점에서 이 화자들은, 결국 소월은 근대적 개인주의자였다. 소월은 서른 두 살에 아편을 삼키고 죽었다. “쓸데도 없이 서럽게만 오고 가는 맘”(‘잊었던 맘’)이 너무 고단했나 보다.

먼 후일(後日)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물이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물이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나물이다: ‘나무라다’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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