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 ㅣ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4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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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미롭스키를 찾아 읽는 중이다. 처음 읽었을 때부터 좋은 인상을 받았다가 그간 잊고 있었던 작가. 그게 좀 미안했는지 굳이 찾아서 읽고 있다. 1903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부유한 유대인 가족의 따님으로 태어난 작가. 책의 앞 날개에는 그러나 네미롭스키가 불행하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소개한다. 금융가였던 아버지? 쉬운 말로 전세계 어떤 민족도 흉내내지 못하는 천재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대인 직종, 고리대금업자로 시작해 입지전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말이고, 부르주아의 아내 자리에 오른 어머니는 네미롭스키를 유모의 손에 맡긴 채 “자신의 삶을” 누렸다고 해도, 외롭기는 했겠지만 정말로 불행했을까? 나름대로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자기 민족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불행한 거니까. 나름대로.


  앞날개의 문구를 시비하는 건 이유가 있다.

  작품의 초기 무대가 우크라이나의 한 도시. 시대는 190X년. 유대인에게 이 도시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강과 가까운 도시 아래쪽은 불가촉천민과 같은 취급을 당해 마땅한 유대인과 불량배, 가난한 장인, 음침한 가게의 세입자, 유랑민이 모여 살고 동네엔 언제나 더러운 유대인 소년들이 질러대는 고함으로 넘실거렸다.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자들이 지옥의 암흑과 불길에 휩싸여 허우적대는 곳이라 해 마땅한 지역.

  언덕 위에 있는 선민들의 거처는 고급 저택의 광휘에 싸여 있는 발할이라 불러 마땅한 곳. 아래쪽 아이들은 열 살 먹도록 한 번이라도 이 동네에 놀러 와본, 아니 그저 지나가본 적이라도 있을까 말까 한 금단의 장소. 20세기 초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니콜라이 2세 황제 시절에는 유대인이 거주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아 이 언덕 위의 저택 지역에는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저 법령이 그랬다는 의미. 어느 민족보다 돈에 집착한 유대인들은 러시아 관리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뇌물을 공여하는 대가로 조금씩 이 지역에 자리 잡기 시작했으며, 유럽의 여러 왕가에끼자 돈을 빌려줄 정도의 부르주아들이 이웃집에 사는 것을 시비하거나 질투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귀족이나 부르주아는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시의 중앙부근에는 평온하고 창백한 빛이 비치는 평민들이 차지했다. 중앙이라 해도 언덕과 가까운 곳에는 의사, 변호사, 귀족의 영지 관리인 같은 이들이, 아래쪽과 가까운 경계에는 주로 위쪽과 아래쪽을 뛰어다니며 중개인 역할을 하거나 기타 장사치, 양복장이, 약사 등이 모여 살았다.

  책 앞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면 이렌 네미롭스키는 어린 시절에 적어도 잘 먹고, 잘 먹는 수준을 떠나 게토 지역의 어린 아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맛과 영양을 지닌 음식만 골라 먹었을 것이며, 고급 모피로 만든 모자, 외투, 토시, 신발 등의 의류,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벽난로 같은 시설로 아무리 겨울이라도 아래 동네 아이들과 비교해 힘든 것이라고는 1도 모른 채 지나왔을 터. 그럼에도 불행하다고 활자를 박았으니, 그래, 이렌도 나름대로 불행하긴 했겠지. 그렇겠지.


  <개와 늑대>의 주인공 아다 시너.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와 비슷한 나이로 생각하면 된다. 1903년? 아버지는 이스라엘 시너. 엄마는 먼저 죽었다. 시너는 도시의 중간지역이기는 하지만 아래쪽 게토와 인접한 곳에 사는 중개인으로 먹고 살기 위하여 비트, 설탕, 밀, 농기구 등 유통할 수 있는 모든 품목을 취급한다. 때로는 비단과 차, 터키 과자, 석탄, 아시아 과일, 볼가강에서 잡은 캐비어 같은 비싼 것들도 있기는 하다. 어떤 경우라도 중개인한테 요구되는 자질, 빠른 말투, 요란한 몸짓, 다급함, 비굴함, 고집스러움, 간청이나 애원하는 기술, 그리고 경쟁자를 비방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돈을 벌어 함께 사는 책상물림 장인과 하나밖에 없는 딸 아다를 먹여 살리기 위한 비즈니스 측면에서 그렇고, 아다를 위하여는 세상 둘도 없이 헌신적인 아버지. 뭐 세상의 아버지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오직 자식을 위하여 일하고, 살고, 희망을 품는 시너는 정말로 유대 족속 답게 아다가 만일 음악이나 예술, 배우 쪽으로 재능이 있다면 자기 살과 뼈가 도륙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스위스, 독일,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려는 욕심에 충만해 있다.

  이때 삼촌이 죽었다. 유대인이라면 동생이 죽을 경우에 당연히 동생이 남긴 식구들, 제수와 조카들을 형이 거두어야 한다. 그래서 졸지에 군식구가 셋 늘어 탐탁치 않지만, 엄마 없는 딸을 돌볼 여자가 필요한 때라서 별 불만 없이 거두었다.

  숙모와 사촌이 도착했다. 여기서 이렌 네미롭스키의 착오가 생긴다. 이때 아다가 일곱 살. 사촌 릴라 언니는 한 다섯 살 정도 나이가 많고, 말썽꾸러기 벤이 여섯 살(p.31). 저 뒤쪽으로 가면, 아다와 숙모 일행의 거주지가 파리로 바뀌고 난 다음에 갑자기 아다가 17세, 벤이 21세로(p.140) 휘까닥 뒤집어진다. 근데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가도 좋으니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렇게 알고 말자. 뭔가 이유가 있겠지.


  본격적인 사건은 이 도시에서 포그롬, 유대인 탄압과 린치 사건 때 벌어진다. 포그롬?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집단 폭행과 학살은 유대인의 계급과 상관없이 벌어졌는데, 사실 그건 나치가 본격적으로 권력을 잡은 후에 “수정의 밤” 같은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만행이었고, 190X년 우크라이나의 한 도시에서 있었던 작품 속의 작은 포그롬은 비록 사납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중류 또는 하류 게토 지역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던 모양이다. 폭도들이 귀족, 부르주아가 사는 동네에는 함부로 발자국을 찍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시너 씨와 외할아버지, 숙모는 릴라 언니를 천주교도 친구집으로 보내고, 벤과 아다는 먼지투성이 건물의 다락방으로 피신시켰다.

  어린 아다와 벤은 밤새도록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곳에서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날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그곳을 나온다. 집으로 가던 중, 아무리 어려도 위험한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려 몸을 피해 달려간 곳이 사나운 남자들이 훨씬 적은 언덕 위였다. 그곳에서 아다는 생전 처음으로 아름답고 아름다운 저택을 구경한다. 세상에 사람 사는 곳에 이런 건물이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그 건물이 사람이 직접 들어가 사는 집이라는 것에 깜짝 놀란다. 문패를 보니 한 번 더 놀라서 집주인이 “시너”씨. 이런, 자기네와 멀기는 하겠지만 친척이다. 배는 고파 죽겠지, 모자도 없이 창들을 넘느라 아다도 벤도 상처나고 피도 좀 흐르고, 옷도 찢기고, 머리카락은 다락방의 먼지와 엉겨 함부로 삐죽삐죽 솟구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음에도, 그냥 담장을 넘어 현관으로 가서 벨을 누른다.

  이럴 때 뭐라 한다고?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하여간 멀고 먼 친척 집에 용감하게 쳐들어간 아다와 벤은 걸진 아침을 얻어먹고, 노할아버지가 아다의 아버지 이스라엘 시너의 이름을 들은 바 있어서, 이 유력 가문 전속 거간꾼 중의 한 명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처음으로 특별한 (부와 안락함 같은)쾌감을 발견한 아다의 눈에 고귀하고 독특한 울림을 가진 미지의 이름, 해리 시너라고 하는 옷 잘 입은 아이가 눈에 들어왔고, 보자마자 이 낯선 이름의 소년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였다.


  윗동네 시너 가문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에 큰 공장을 운영했고, 노할아버지의 둘째와 셋째 아들은 파리에서 탄탄한 국제 은행을 설립해 막강한 부를 거머쥐고 있었다. 이런 집안에 전담 중개인 자리에 오른 이스라엘 시너 씨, 아다의 아버지는 돈 좀 만졌겠지? 그렇다. 큰 부자는 아닐지언정 제법 돈을 벌어, 포그롬 때 충격으로 장인이 시름시름 앓다가 곧 세상 하직한 이후 중간 지역의 도시 중앙으로 이사했고, 가만 보니까 딸 아다에게 미술적인 재능이 대단한 걸 알아챈다. 마침 배우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조카 릴라가 있어서 숙모 역시 시너 씨를 살살 긁어 숙모와 아이들 셋이 파리로 유학하기에 이른다. 이 때가 1914년 5월. 그리고 석달 후에 뭐? 맞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그러니 이들 앞에는 고생길이 훤할 수밖에.

  더욱 아쉬운 건, 우리의 시너 씨는 이들을 보내고 나서 작품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한 마디가 없이.

  근데 전쟁이 터지고, 이 식구들은 죽어라 고생길로 접어들었을 때, 릴라가 재주도 좋지, 런던 이튼을 졸업한 해리 시너가 파리 중심가의 저택에서 호화롭게 사는 것을 알게 되고, 해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저 동쪽 늑대의 피를 물려받은 아다는(해리는 기껏해야 개라는 의미도 되고 뭐 그런데) 후끈, 어린 시절의 사랑이 달아오른다. 야수는 자기 몸에 그런 피가 흐르는 지도 모르고 살았으나 이제 눈을 뜨게 되었으니,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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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전집 ㅣ 그리스 고전 문학선
소포클레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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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소포클레스를 2014년에 처음 읽었다. 당연히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이란 제목의 책으로. 읽기 전에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오이디푸스 왕>은 중학생 시절부터 스토리 대부분을 알았다. 이게 오히려 책 읽기를 방해한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다.


  천병희 선생의 책을 읽기에 앞서 카를 오르프가 작곡한 오페라 <폭군 외디푸스 Oedipus der Tyrann>의 음반을 들었다. 이거 한 방에 그냥 뻑 갔다. 카를 오르프의 고전 3부작이, <폭군 외디푸스>와 <안티고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이다. 지금은 아마존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내가 처음 들었을 때는 별의 별 어둠의 경로를 통한 야매 음반을 들어야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LP를 CD로 변환해 다시 발매하기 시작한 정식 음반과 DVD를 구해 들었다. 오르프의 <폭군 외디푸스> 음반에 글쎄 대본이 없는 거다. 왜 없느냐 하면, 카를 오르프가 한 날 베를린에서 독일어 번역으로 공연한 연극 <오이디푸스 왕>을 보고 감동 감화를 받아 당장 자신이 직접 오페라로 작곡하기로 마음먹었고, 소포클레스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기 위해 독일어 번역본의 대사를 일체의 빠짐도 없고 수정도 없이 <오이디푸스 왕> 그냥 그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본, 즉 리브레토를 구해 읽느니 희곡집을 한 권 사서 읽는 게 훨씬 좋다는 말을 들어서.

  이렇게 소포클레스를 읽은 시작은 미미했지만, 2014년에 정말로 소포클레스를 읽고 나서, 소포클레스야말로 소위 무인도 책, 이 가운데서도 제일 앞에 두어야 할 필생의 책으로 여기게 되었다.


  말 나온 김에 오르프의 오페라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

  우리 입에 익숙한 작곡가들 가운데 예상 외로 좋은 오페라를 작곡한 사람들이 많다. 한 번 놀라 보실래? 핸델은 뭐 다 아시지만, 하이든, 베를리오즈, 차이코프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안톤 루빈스타인, 라흐마니노프, 스메타나, 드보르자크, 야나체크,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베르크, 젬린스키, 테오도라키스 등등. 이 가운데 카를 오르프. 정말 독특하다. (슈만과 슈베르트의 오페라는 피해가는 편이 좋다! 재미없어 못 듣는다.)

  <폭군 외디푸스> DVD를 보면, 처음 작품을 시작할 때, 오케스트라 피트 안에 그랜드 피아노가 두 대 놓여 있는데, 피아니스트가 당연히 주로 건반을 두드리지만, 작은 나무망치로 직접 피아노 현을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오르프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애초에 타악기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걸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 유튜브 검색을 열라 해봤는데, 내 실력으로는 도무지 찾지 못하겠다. 아쉽다. 연주뿐만 아니고 성악가들의 노래도 아주 흥미롭다. 노래는 이 작품에서만 그런 건 아니다. 그의 또다른 유쾌한 명품 <재치 부인 Die Kluge>에서 이미 들어본 거의 유사한 톤으로 발성/노래하는데(아, 영원하리, 고틀롭 프리크와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레치타티보도 아닌 것이, 노래이면서 동시에 배우들의 대사와 흡사하다. 물론 화성을 포함하니까 배우의 대사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그리고 선율의 힘을 보탠 결과 청중에게 전달하는 호소력도 막강하다.

  게다가 원본 텍스트가 2천5백년 동안 인류에 의하여 끊임없이 공연되었을 정도로 인간 공통의 비극을 호소한 진짜 고전 아닌가 말이지. 그리하여 오페라로 만든 사람도 많다. 오르프 말고도 스트라빈스키와 에르네스쿠도 <오이디푸스 왕>의 작곡가로 이름을 올렸다. 물론 재미 측면에서 도무지 오르프를 따라갈 수 없지만.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무대 예술로서 음악적 스토리텔링 기법이니, 같은 <오이디푸스>인데 무슨 재미 차이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면 좋겠다.

  음악을 이야기할 때 단어의 빈곤함이란! 음악의 문자화, 이건 내 수준에선 죽어도 풀지 못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다.


  책을 이야기하지 않고 음악으로 서두를 오뉴월 쇠불알처럼 늘인 것은, 사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그리고 일곱 성문城門의 테바이 이야기, 헤라클레스, 일리아스를 모르는 분이 몇 명이나 되겠나? 다 알고 계시는 스토리로 독후감을 때우는 것도 민망한 일이라서 그렇게 됐다. 혹시 당신이 소포클레스를 아직 읽지 않았다면 그냥 도서관에 가셔서 천병희 선생이나 오늘 독후감 핑계를 대고 자판 두드리고 있는 이준석 번역을 골라 읽어 버리시라.

  이렇게 말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그러면 이준석 번역을 천병희 번역과 비교해도 괜찮을 것인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에 관한 의견뿐이겠다.

  그간 그리스 고전에 관한 한 거의 독보적 위치를 고수하던 분이 천병희 선생이다. 2022년에 83세의 연치로 별세한 전설적 역자. 이준석 방송통신대 교수는 서울대 학부에서 미학을, 대학원에서는 고전문헌학을 전공해 소포클레스 연구로 석사논문과, 박사과정 수료, 이후 스위스 바젤에서 7년간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로 박사논문을 쓴 50대, 천선생과 비교하면 막내 아들 뻘 되는 젊은 학자.

  나는 여전히 천선생의 업적을 능가할 작업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그늘이 워낙 컸기 때문에 그리스 고전을 읽으려면 자동적으로 제일 먼저 천선생을 떠올리지 않기도 힘든 수준이겠지. 게다가 이 책도 정가가 3만원. 그리스 고전 책값이 만만하지 않아 일단 여태까지 숱한 사람들이 “믿고 읽는다”는 천선생의 책을 최우선 선택지로 선정해 두었을 확률도 매우 높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나도 소포클레스는 천선생의 책을 가지고 있고, 비싼 책값을 주고 다른 소포클레스 역서를 또 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 책 《소포클레스 전집》은 나 다니는 도서관에서 누군가가 희망도서 신청을 해, 신간도서 전시대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집어 든 거다. 워낙 소포클레스, 특히 <오이디푸스 왕>을 좋아한데다가, 기회가 닿기만 하면 다른 역서를 꼭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차였으니.

  이준석의 번역은,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훨씬 입에 잘 붙는다. 물론 이이 특유의 단어, 다른 역자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엄연한 우리 고유말이며 표준말을 쓰는 등 좀 돋보이려는 면도 없지는 않지만(그래서 살짝 귀엽기도 하다) 그럼에도 문장의 표현이 천선생에 비하여 많이 현대적이다. 그러니 귀에 착착 감긴다. 읽는 즉시 등장인물의 대사가 품는 감정이 와 닿는다. 이것들 다 합해서 진짜 연극을 위한 희곡/대본 같은 느낌이 든다. 천선생의 책과 비교해서 훨씬 더 그렇다. 나는 이런 번역이 더 좋다.

  이건 대단히 긍정적인 면 아닌가? 고전은 언제나 다시 번역해야 한다. 20년에 한 번 또는 30년에 한 번? 천만의 말씀. 고전은 언제나 다시 번역해야 한다. 늘 새롭게. 새롭지 않으면 더 이상 고전이라는 계수나무 잎을 이마에 쓸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여태 이준석의 번역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반성한다. 사실 책값,이라기보다 책 쌓아 놓을 공간 부족으로 선뜻 구입할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건 핑계일 뿐이겠지. 좋다. 조만간에 이준석 번역의 다른 고전을 또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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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8-05 07: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왼전, 100% 공감 공감 입니다.
제가 지금 이준석 번역자의 오뒷세이아 읽고 있는데 같은 의견이라서 반가워요.
소포클레스도 꼭 재독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Falstaff 2026-08-05 07:15   좋아요 2 | URL
공감하신다니 즐겁습니다. 그것도 백퍼! ㅎㅎㅎ
저는 9월 14일에 <일리아스> 업로드 예정입니다. <오뒷세이아>는 올해 읽을까, 내년에 읽을까 생각중이고요. 페넬로페 님의 <오뒷세이아> 기대하겠습니다!

coolcat329 2026-08-05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준석 번역자의 책이 좋다는 얘기 듣고 읽고 싶었는데, 정말 그렇군요~요즘 영화 오디세이 덕분에 일리아스 등 그리스 고전이 다시 관심을 받고 있더라구요. 참 좋네요~

Falstaff 2026-08-05 11:53   좋아요 2 | URL
뉴스에서 봤습니다. <율리시스>가 다시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거요. ㅎㅎㅎ 제 세대에 율리시스는 미아삼거리 대지극장에서 몰래 땡땡이 쳐 본 커크 더글러스였는데요, 유튜브에서 보면 얼마나 촌스러운지... ㅋㅋㅋ

잠자냥 2026-08-05 12:35   좋아요 1 | URL
요즘 진짜 신간 나오는 거 중에 오디세이 관련 책 우르르르르르. ㅋㅋㅋㅋ 제 주변엔 오디세이아 원전은 지루할 거 같아서 ㅋㅋㅋ 그냥 영화로 보겠다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잠자냥 2026-08-05 10: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전 천병희 역으로만 읽었는데...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수록된 작품들 다 좋아서 또 읽어도 좋을.

Falstaff 2026-08-05 11:5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울 잠자냥 님은 이 독후감 아니었어도 틀림없이 읽어보실 분.
 
비둘기의 날개 1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98
헨리 제임스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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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2년 만에 다시 헨리 제임스를 읽었다. 제임스를 읽을 때마다 늘 그렇듯이 그의 장황한 상세묘사에 아예 넋이 나가버렸다. 1권, 2권, 서문과 해설을 합해서 꼴랑 860페이지를 읽느라 무려 일주일을 다 소비했다. 상세묘사도 상세묘사 나름. 이번에는 인물이나 주요 장소인 베네치아의 명소 등 외관에 관한 상세묘사 대신 사람의 심리를 샅샅이 해부했다. 심리적 실핏줄까지 전부 언어로 써 놓았으니 그의 노고가 “정말로” 대단하지만, 그걸 읽는 독자는 콱 질려버린다. 누군가 말했지. 진짜 잘 쓴 소설은 전부 심리소설이라고. 여태 그 말에 동의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이젠 그만. 심리 소설도 심리 소설 나름.

  영국 젠트리 계급의 속물성을 지면에 그대로 옮겨 놓은 작품.

  초간이 1902년이니까 헨리 제임스가 미국인으로 살 때이다. 하지만 무대는 런던. 벨 에포크 시대가 절정을 달하던 때. 영국을 비롯한 거의 모든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귀족, 부르주아 종족들은 사치와 계급 유지와 일 하지 않는 미덕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나는 이런 집단의 일원이기도 했던 헨리 제임스가 애초 영국 젠트리와 미국 부르주아의 속물성을 까발리기 위하여 작품을 썼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런 유치한 사람들이 펼치는 사랑 놀음과 나름대로의 진정한 사랑을 읊느라고 읊은 것을 한 세기를 넘어 지금 시각으로 읽으니 눈꼴 신 속물성이 눈에 훤히 보이는 거라고 생각한다. 말이 길다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스물다섯 살 먹은 케이트 크로이 양. 위로 두 오빠와 언니가 있었지만 오빠 둘은 죽었다. 아버지 라이어널 크로이 씨로 말하자면 한 시절에 가히 영국 최고의 미남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훤하게 잘 생겼던 남자. 생긴 꼴을 하느라고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집안 살림을 망쳐 놓는데 전력을 다했음에도 아직 완전히 망자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독자가 보기엔 망가진 인물이고 망가진 집안이다. 지금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방을 얻어 아버지 혼자 산다. 인간미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지만 완벽한 외모와 몸에 박힌 신사의 품행을 가진 빈틈없는 영국 신사. 속 마음과 달리 악의를 찾을 수 없는 상냥한 눈과 또렷하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갖고 있는 사기꾼.

  언니 메리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찍이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교회 목사한테 시집 가더니 결국 아이 넷 달린 과부 신세가 됐다. 아빠를 닮아 수려한 외모를 가졌으나 그쪽으로는 관심이 없는 여인. 죽은 남편의 누이 두 명과 여태 친분을 쌓고 있다. 일찍 죽은 어머니가 메리언과 케이트, 두 딸한테 각각 2백 파운드의 연금을 남겼으나,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착하고 정의로운 케이트가 네 아이를 키우는 언니한테 1백 파운드를 양보했다. 그게 아버지의 불만이다. 젊은 메리언한테 줘 봤자 시누이들 비스킷 값으로 다 넘어갈 테니 차라리 자기한테 쓰라고 하면 오죽 좋았겠느냐는 거겠지.

  하여간 메리언 언니에 대하여 헨리 제임스는 조금도 좋은 방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읽기에 주인공이자 정의로운 사랑꾼인 동생 케이트보다 훨씬 진정한 인물이다. 적어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복잡하지도 않게 산다.

  케이트는 이모 모드 러더 부인 집에서 이모와 함께 산다. 다만 조건이 있다. 아버지 라이어널 크로이 씨와 어떤 이유라도 왕래하지 말 것. 나름대로 고민하다가 아버지한테 찾아가 함께 살자고 제안했지만 깨끗하게 거절당했다. 라이어널이 미쳤니? 자기 한 입 먹고 살기도 힘든데 노동하지 않을 것이 뻔한 막내딸을 들이게?

  모드 러더 부인은 전형적인 영국의 부르주아. 랭커스터게이트의 부촌에 저택을 짓고 산다. 사회적으로 대단한 지위가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인물. 조카들을 가끔 찾았지만 극도의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나름대로 돌보느라 애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이런 이모가 케이트와 함께 살고 있으니 조카의 거의 모든 일 역시 이모의 관심 속에, 관리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애정 문제도 마찬가지.


  케이트의 연인이 머튼 덴셔. 아쉽게도 월급 많이 주는 좋은 직장에 다녀야 할 정도로 돈이 없는 청년이다. 모드 러더 부인 눈에 찰 턱이 없다. 아무리 잘 생기고 몸가짐 바르고 성격도 좋지만 돈 없으면 꽝이다. 케이트 역시 이를 알아 덴셔가 자기 애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던셔도 마찬가지. 이모가 꼽는 케이트의 신랑감 가운데 한 명이 마크 경. 경卿. 영어로 Sir. 마크한테 시집을 보내면 잘 하면 공작부인이 될 지 그걸 누가 알아? 많지는 않지만 돈도 꽤 있는 양반인데. 하지만 틀렸다. 돈은 이모 생각만큼 많지 않다. 대신 나이가 많다. 벌써 머리가 훌렁 벗겨진 늙은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나이 많은 남자가 그리 큰 흉이 아니어서 웬만하면 그냥 밀어붙이고 싶다. 케이트야 질색을 하건 말건.

  머튼 덴셔가 일을 꽤 잘한 모양이다. 이 시절 영국의 목면 사업의 최대 파트너는 미국. 이 가운데서도 뉴욕. 그리로 몇 달간 출장을 가게 됐다. 그래서 잠깐 무대가 미국으로 바뀐다. 뉴욕에서 만나 사랑은 아니고 그냥 아는 사람 정도로 좋은 감정을 나눈 아가씨가 밀리 실. 덴셔를 출장보낸 회사의 파트너 기업 최대 주주. 아버지가 일찌감치 죽으면서 졸지에 젊고 아름답고, 예절 바르기도 하고, 생각하는 것도 건전한 아가씨 손에 무지막지한 돈벼락이 떨어졌다. 자상한 헨리 제임스가 밀리 아가씨를 이런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하여 친척 나부랭이들이 한 명도 없고, 형제 자매도 하나 없는 완벽하게 외로운 젊은 여성으로 설정했다.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

  밀리 실 양이 가진 부는 영국 섬나라의 부르주아 모드 로더 부인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헨리 제임스가 설정한 여러 미국인들은 대개 무지무지하게 부자인 것과 마찬가지. 밀리가 알프스에 쉬러 갔다. 부잣집 아가씨가 여행을 혼자 떠나지는 않았겠지? 샤프롱 자격으로 함께 길을 나선 이가 수전 셰퍼드 스트링엄 부인. 보스턴 사람 스트링엄 부인이 젊은 시절에 어찌저찌 해서 모드 매닝엄을 알게 되어 아직 주소를 가지고 있다. 이래서 밀리와 스트링엄 부인이 다음 행선지로 이탈리아가 아닌 런던을 택하게 된 것.

  여기서 주목할 가장 중요한 반전 상황.

  밀리 실 양의 런던 행에는 사실 다른 목적이 하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수술 집도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루크 스트랫 박사를 만나기 위한 여행이기도 했던 점.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차린다. 밀리 양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겠군. 1권 256페이지에 스트링엄 여사를 향한 밀리의 대사가 나온다.


  “겉보기에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보장해주는 즐거움조차 훌륭한 묘비에 적힐 정도가 못 되는 그날 내가 그럴 테지요. 지금까지의 인생을 죽은 것처럼 살았으니까, 틀림없이 죽을 때는 살아 있는 것처럼 죽을 거예요. 그게 아마 아줌마가 바라는 모습일 테고요.”


  “복선?” 나는 위 문장을 읽고 이렇게 메모해 놓았다.

  런던에서 자연스럽게 밀리 양은 모드 러더 부인과 일당들인 케이트, 마크 경을 만나 알게 되고, 케이트와는 우정까지 돈독하게 또는 겉으로만 돈독하고 속으로는 던셔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자일 수도 있게 되겠지? 뉴욕에서부터 던셔를 만나 속으로 평한 밀리의 생각이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여서, 훗날 알게 되는 사실, “개인적인 재산이라고는 없고, 생길 가능성도 없”는 건 밀리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애초에 던셔가 가난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정말 가난한 무산 계급 사람이 들으면 완전 허파 뒤집어질 이야기다. 몇 달씩 휴가 내고 베네치아에 갈 수 있는 청년이 개인적 재산이 “없다”고? 욕 나오겠지? 내 입에선 욕 나왔다. 더러운 속물 젠트리들.


  밀리는 무지막지한 부자. 그러나 곧 죽을 수도 있다. 1권에서 보면. 이때 내 머리 속에서 번쩍 떠오른 미쿡 사람 한 명. <한 여인의 초상>에서 주인공 이사벨 아처의 이모부. 이사벨이 문병을 와 이모부한테 얼른 쾌차하셔야지요? 라고 의례적으로 묻자, “싫다. 나중에 죽으려면 또 이만큼 아파야할 거 아니겠니?”라고 대답해 나를 감격시켰던 인물. 이이가 진짜로 죽으면서 현금 7만 달러, 2017년 현재가치로 251억원을 상속해주었다.

  혹시 밀리 역시 죽으면서 이 불행한 연인, 현 상황이라면 절대 결혼에 성공할 수 없는 케이트와 덴셔에게 당연히 전 재산은 아니지만 거액을 물려주는 거 아냐? 만일 그렇다면 앞으로 다시는 헨리 제임스를 읽지 않겠다. 이렇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스스로한테 했다.

  어떻게 되느냐고? 안 알려드린다.

  이건 말할 수 있겠지. 벨 에포크 시절 귀족 부르주아 사회의 속물성, 지저분한 사고방식, 위선이 온갖 말빨과 수사와 눈치에 섞여 있다는 거. 등장인물 가운데 자기 생각을 드러내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불쌍한 네 아이의 엄마이자 과부인 가난한 메리언 밖에 없다. 세상에서 제일 피하고 싶은 사람이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니?” 자기 본심은 꽁꽁 숨긴 채, 뜻대로 되지 않으면 꼭 그걸 꺼내 비틀어버리는 인간들. 이런 사람들 구경 한 번 제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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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8-04 14: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 더위 잡수셨어~!! ㅋㅋㅋㅋ

“케이트의 런던 행에는 사실 다른 목적이 하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수술 집도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루크 스트랫 박사를 만나기 위한 여행이기도 했던 점.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차린다. 케이트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겠군.”

얼른 밀리로 바꾸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6-08-04 16:08   좋아요 1 | URL
아이쿠... 뭔 할 말이 읎게 만드시네요. ㅋㅋㅋ 얼른 고쳤습니다.
덥기는 덥네요. 알라딘 두고 갑자기 ˝밀리˝서재가 뭔 말씀? 이랬다니까요. ㅋㅋㅋㅋ
 
야생 종려나무 - 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95
윌리엄 포크너 지음, 권지은 옮김 / 민음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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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 쓰려 워드 열어 놓고 몇 십 분 멍 때리고 있다. 도대체 뭐라고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

  이 책은 <야생 종려나무>와 <노인> 두 작품을 교체로 번갈아 실었다. 독자는 책을 읽어가며 결국 어느 한 점에서 만나는 결말을 늘 염두에 두게 된다. 그렇게 되는지 아닌지는 알려드리지 않겠다.


  먼저 <야생 종려나무>.

  책을 열면 바닷가 이층 오두막집과 그 옆집. 집 주인은 48세의 통통한 의사. 이곳에서 사는 건 아니고 여기에서 6km 떨어진 시내에 전기가 들어오는 회반죽으로 벽을 바른 집에서 살면서 이곳을 별장 비슷하게 여긴다. 의사는 주립대 의대 4년, 뉴올리언스에서 인턴생활 2년을 제외하고 나면서부터 줄곧 한적한 이곳에서 살고 있는 토박이. 전혀 적성에 맞지 않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는 20세기 초반의 잘 큰 시골 범생이답게 의사 면허를 따 고향에 돌아온 다음 해 아버지가 골라준 배필과 결혼해서 아직까지 아이 없이 살고 있다. 아내가 이재에 밝아 결혼 10년 후에 바닷가에 이층 오두막과 옆집을 사서 휴가객에게 주 단위로 이른바 팬션업을 하는데 이게 의외로 쏠쏠하다.

  이 두 오두막 집 옆에 종려나무가 서 있다. 바닷가라서 바람이 불면 날카롭게 버석거리는 야생의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는 것이 인상 깊다. 제목이 이 장면에서 나왔다. 야생 종려나무가 야생 종려나무이려면 반드시 조금은 거센 바람이 불어야 한다. 그래야 “날카롭게 버석거리는 야생의 소리”가 날 터이니.

  독자는 처음부터 헛갈릴 수도 있다. 포크너가 의사 부부, 특히 의사에 대해 조금 과하게 정보를 주어, 중년의 의사가 작품의 주인공이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지만 아니다. 나흘 전에 남녀 한 쌍이 별장 옆 건물에 두 주일 일정으로 들어왔다. 이들이 진짜 주인공들.

  여자는 어딘가 두려움에 찬 얼굴을 하고 있다. 노란 눈동자를 하고, 자크가 옆구리에 달린 여성용 바지가 아니라 격식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다리에 달라붙는 남성용 바지를 입은 여자는 쾡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의사가 척 보니 단순히 마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수척한 모습이다. 분명히 병든 모습. 1기 아니면 2기. 어쩌면 3기일 수도 있지만 심장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아직 독자는 눈치채지 못한다. 의사라는 직업이 이이의 적성에 맞지는 않지만 이 정도로 돌팔이 비슷한 지는 모를 단계라서.

  작가 포크너가 묘사하기를, 여자의 증오에 찬 시선은 인류 전체를 향한 증오, 인류 전체가 아니라 남자들을 향한 혐오로 보인다. 의사 부부는 이미 알고 있거나 적어도 눈치채고 있었다. 이들이 결혼하지 않은 커플이라는 것을. 숱한 사람들을 겪은 부동산 중개업자가 틀림없다고 귀띔을 해준 상태. 그러나 부부는 이 사실이 매우 불쾌하지만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으려 한다. 만일 말이 나왔다 하면, 그 순간에 의사가 이들을 내보낼 것이란 걸 둘 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받은 2주치 집세를 다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어서. 그리고 따져 보니 그들, 숙박객의 전 재산이 20달러뿐이고 그것도 3일 전 이야기이며 여자 상태가 좋지 않아 인정상 내보내기가 껄끄러워서.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 남자 해리 윌본이 의사가 머무는 2층 오두막집의 현관을 두드린다. 강한 바닷바람이 예의 종려나무 잎사귀에서 날카롭게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한 밤중, 윌본은 집주인에게 급하게 의사의 왕진을 요청하는 전화를 해야 하겠다고 하고, 그는 자신이 의사라고 밝힌다. 해리 윌본과 함께 묵고 있는 여자 샬럿 리튼마이어가 피를 흘리고 있단다. 의사는 생각한다. 아하, 폐의 문제였구나. 심한 각혈을 하고 있다니.


  해리 윌본. 나이 많은 의사 아버지가 두 번째 결혼을 통해 낳은 막내 아들. 두 살 때 아버지가 죽으면서 아들의 의대 수업료와 재학중 생활비로 사용하라고 2천 달러를 상속했다. 자신이 어렵게 돈을 벌어가며 의사가 됐던 시절에 필요했던 2백달러의 열 배에 달하는 돈이니 충분하리라 생각했겠지만 그건 19세기 말의 관점이었을 뿐이라서 해리는 의대 4년, 뉴올리언스에서 1년 인턴 생활하는 동안 지독하게 근면해야 했기 때문에 스물일곱 살이 되도록 딱지도 떼지 못했다.

  그러던 하루, 절친이 강압하다시피 파티에 함께 가자고 재촉해 그의 정장을 빌려 입고 참석한 파티에서 필생의 여인을 만난다. 이이가 바로 샬럿 리튼마이어. 천생 신사이자 부르주아인 프랜시스 리튼마이어의 아내이자 두 딸의 엄마. 둘은 만나자마자 확 불이 붙는다. 물론 한 번도 사랑은커냥 딱지도 때지 않은 윌본은 그게 사랑의 불인 줄 그때는 몰랐다. 샬럿은 윌본을 자기 집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또 초대하고, 밖에서 만나기 시작하더니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화염에 휩쓸려버린다. 불 같은 여성. 사랑에 관한 한 절제도, 한계도, 다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화염 그 자체. 샬럿은 남편에게 애인이 생겼으며, 그의 이름이 해리 윌본인데 이제 둘이 떠나야겠다고 통보한다. 가톨릭 신자인 남편이 이혼해주지 않을 것임을 이해해서 혼인의 청산은 바라지 않는다며.

  쥐, 랫Rat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남편 프랜시스는 해리 윌본을 만난다. 그 자리에서 3백달러 수표를 건네며, 해리가 샬럿을 책임질 수 없는 때가 오면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어 샬럿을 다시 돌려보내라고 한다. 만일 그 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 반드시 사기 혐의로 고소할 것임을 통보하면서. 독자가 주인공 입장에서 스토리를 바라보는 건 당연하겠지만, 이 프랜시스 리튼마이어야말로 내가 보기에 신사 중의 신사, 부처님 가운데 토막 중에서도 가운데 토막의 사나이. 그러나 구습에 얽매인 조금 막힌 사내라서 자유분방하고 사랑 하나에 목숨 거는 샬럿한테는 맞지 않는 불운의 사나이다.

  이래서 집 나가는 샬럿과 의대 졸업하고 2년을 채워야 하는 인턴 기간을 절반 밖에 수료하지 않은 해리 윌본. 일찍이 우리나라 탤런트 변우민이 말한 바 있다. “집 나가면 개고생.” 사랑은 좋지만 이들 앞에 닥친 것은 대공황과 아무 쓸모없는 의대 졸업장. 그리하여 우물 밖의 정글 속에 이들은 세월의 사나운 발톱질을 견디다, 견디다 무너져야 할 일만 남았으리.


  다음은 <노인>.

  때는 1927년 5월. 미시시피주에 대홍수가 있던 시절. 두 죄수를 소개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한 명은 25세 정도. 키가 크고 마른 몸매에 그을린 얼굴. 분노로 들끓는 눈매를 가지고 있다. 이 분노는 자신이 저지를 범죄를 막은 사람들을 향한 분노라 아니라 작가들을 향한 분노이며, 싸구려 소설에 등장하는 무형의 이름의 주인공들, 다이아몬드 딕이나 제시 제임스 같은 부류를 향한 분노였다. 특히 작가들이야말로 그를 현재의 곤경에 빠뜨린 주범이라 할 만했다.

  이 키 큰 죄수가 범죄를 저지른 건 18세 때. 싸구려 소설에서 하도 많이 다이아몬드 딕과 제시 제임스 같은 서부의 무법자를 많이 읽어 그들을 흉내 냈다. 그리하여 다이아몬드가 했던 그대로 복면을 하고 (발포되지도 않는 고물 또는 가짜) 권총을 들고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어 (소설에 의하면)금고가 실린 칸에 들어가 총을 뽑기도 전에 경비원들에게 두드려 맞고 현장에서 붙잡힌 강도 미수로 교도소에 들어왔다. 그러니 싸구려 소설과 주인공들과, 무엇보다 형편없는 소설을 쓴 작가에게 큰 분노를 갖게 된 건 당연한 일이다.

  두번째 죄수는 키가 작고 통통한 몸집에 매우 흰 피부, 그리고 알 대머리의 남자. 아무도 이이가 무슨 죄를 지었는 지 모른다. 다만 형기가 199년에 이른다는 건 확실하게 알고 있다. 도대체 무슨 범죄이길래? 그래서 독자는 이이의 범죄 사실을 밝히는 이야기일 수 있겠다고 짐작하지만 천만의 말씀. 이이는 1927년에 미시시피강 홍수 때 키 큰 죄수와 함께 고립된 두 사람을 구하러 조각배를 타고 나섰다가 홀로 구조되는 인물일 뿐이다. 엑스트라와 조연 사이 정도의 무게감.

  하여간 두 죄수는 미시시피 강이 범람하고 제방이 무너져 큰 난리가 나, 나무 꼭대기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여성과 건물 옥상에 고립된 남성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받고 떠난다. 키 작은 죄수는 심지어 노를 저을 줄도 모르지만 하여간 키 큰 죄수를 따라 나섰다. 거대한 강에서 홍수가 나면 물길이 하나로 일관되게 흐르는 게 아니어서 애초에 나룻배 수준의 작은 배를 노 저어 간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 그리하여 소용돌이에 갇히는 일이 생겼고, 이때 헤엄도 치지 못하는 키 작은 죄수가 물에 빠졌는데 다행히 큰 나무 아래라서 꼭대기에 올라 겨우 구조될 수 있었다. 이이가 나무에 올라 사방을 보니 이미 조각배와 다른 죄수는 시야에서 사라져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실제로 교도소장과 부소장에게 그렇게 보고하여 키 큰 죄수는 법적으로 익사 처리됐다.

  그러나 키 큰 죄수는 하잘것없는 조각배를 기어이 노 저어 가 나무 위에 매달려 있는 여성을 구해냈고, 그 여성이 만삭이 임산부였는데 하여간 그이를 안전하게 보호해 예정일이 남았지만 무사하게 출산하게 해주었으며 몇 주 동안 배를 곯지 않게 돌보았다. 독자는 이 죄수가 하는 행동을 읽으며 저절로 <야생 종려나무>의 주인공 해리 윌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는 짓이 비슷하다. 생각하는 것도 별 차이가 없다. 그리하여 죄수가 어설픈 열차 강도 미수범이란 것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 민망해 피식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두 작품을 책 한 권에 교차 편집한 것도 나 같은 독자를 위해 그리 했으리라.

  플롯은 두 작품 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래도 윌리엄 포크너의 문장이라니. 별로 길지 않은 책을 오랜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읽었다. 이런 “책 읽는 즐거움”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다. 문장 하나하나 곱씹으며 즐기는 일. 참 근사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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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8-03 1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밀도가 높은 소설이라 진작에 다 읽고도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어요.
미국이란 나라는 워낙 넓어 이런 소재의 글이 나오는 것 같아 부러웠습니다.
제발 알려주세요.
야생 종려나무와 노인의 접점이 무엇인지요?

Falstaff 2026-08-03 12: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접점은요 뭘. 그냥 소설 두 편이더라고요. 괜히 뭔가 있는 것처럼 독후감 써본 겁니다. ^^;;
며칠 전에 연작소설 <내려가라, 모세여> 읽었는데요, 그것도 마음에 딱 들었습니다! 놓치지 마세요!!

그레이스 2026-08-03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샀습니다.
아직 못읽었지만 ㅎㅎ

Falstaff 2026-08-04 04:36   좋아요 2 | URL
재미있습니다. 후딱 읽으셔요! ㅎㅎ
 
지금, 그리고 그때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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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삼스레 킨케이드를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까 재미있는 가족사가 나온다.


  “킨케이드는 1979년에 작곡가이자 베닝턴 컬리지 교수인 앨런 숀과 결혼했는데, 그는 (킨케이드가 1976년부터 전속작가로 일하고 있던) 뉴요커의 오랜 편집자 윌리엄 숀의 아들이며, 극작가 월리스 숀과 형제이다. 슬하에 남매를 두었다. 어쩌구저쩌구… 킨케이드와 숀은 2002년에 갈라섰다.”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루시>에서 뉴욕 근처에 입주 보모, 오페어로 들어간 이야기를 한 바 있고, <미스터 포터>는 생물학적 아버지, <내 어머니의 자서전>은 좀 냉정한 어머니에 대하여 말했다. 이제 <지금, 그리고 그때>를 쓰면서 자신의 결혼생활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이 2013년에 나오면서 앞에 인용한 위키피디아 내용 때문에 미국 안에서는 조금 구설에 올랐던 모양이다. 작중 부부의 남편 미스터 스위트가 누가 보더라도 앨런 숀하고 너무 닮았기 때문에.

  앨런 숀이 작곡가이자 컬리지 교수. 미스터 스위트는 집에 부속한 차고 위에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를 둔 작업실에서 음악에 전념하는 작곡가. 뉴욕주의 주도 올버니에서 관객 스물 댓 명을 모시고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도 연주하는 모양이다. 듀크 앨링턴의 재즈와 현대 음악, 주로 안톤 베베른, 아널드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류의 음악을 연결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장르를 불문해 교향곡, 성악, 현악, 피아노곡 등을 망라하지만, 현대음악이 거의 다 그렇듯 대중의 호응이 거의 없는 불운한 작곡가. 무대가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로 보이는데 집안이 뻑적지근하고, 아프리카계 이민자인 미시즈 스위트와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는 결국 성대한 결혼식을 끝내고 저지 맨해튼 건물의 옥상에서 자유낙하로 생을 마감해버렸다. 물론 이 불행한 죽음은 앨런 숀의 경우와 다르리라 믿는다. 하여간 이런 맥락으로 보아 아프리카계 이민자인 미시즈 스위트의 남편 미스터 스위트는 백인 인텔리겐치아일 것이다.


  처음엔 미시즈 & 미스터 스위트도 좋아서 죽고 못 살았겠지. 하는 짓마다 예뻐 보이고, 잘나 보였을 테지. 그렇게 살다가, 사실 결혼하자마자 시어머니가 투신자살 해버렸으니 사랑과 행복의 시기가 지극히 짧았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맏딸, 아름다운 페르세포네를 낳을 때까지는 다른 부부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거 같다. 하지만 다음에 어린 헤라클레스를 낳았을 때, 미스터 스위트는 벌써 아내를 몹시 미워하는 상태였고, 미움을 넘어 그녀가 얼른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랄 때가 허다했다. 아내가 미우면 아내가 낳은 아들도 미울까? 미스터 스위트가 갓난 헤라클레스의 탯줄을 끊자마자 품 안에 안았을 때, 자기도 모르게 헤라클레스를 손에서 놓치는 바람에 “도끼다시”한 시멘트 바닥에 거꾸로 떨어져 두개골이 박살이 나 죽어버리는 광경을 머리 속에서 그리기도 한다. 저메이카 킨케이드, 이혼한지 10년이 넘은 전 남편이 얼마나 미웠으면 이렇게까지 악담을 서슴지 않았을까? 이 책에서 작가는 전작에 비해 유달리 입이 험하다.

  “신생아인 아들을 바라보았는데 아기를 품에 꼭 안기가 두려웠다. 품에서 놓쳐 아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싶은 더없이 강렬한 열망이, 몸은 멀쩡하지만 머리가 깨져, (중략) 분만실 바닥 사방에 아이의 뇌가 흩뿌려지는 걸 보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p.77)

  미스터 스위트가 본 미시즈 스위트는 출신부터 바나나보트를 타고 미국에 들어온 유민. 바나나보트? 칼립소의 황제이자 내 우상이기도 한 해리 벨라폰테의 노래 중에 <Banana Boat Song>이 있는데 이 바나나보트가 아니다. 미스터 스위트가 말하는 건, 서인도제도에서 거렁뱅이들이 사람이 타는 여객선이 아니라 바나나 수송용 화물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한 불법 행위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자기는 마누라하고 씨가 다르다는 건데, 이런 혼인은 시한폭탄 하나를 품에 안고 시작하는 꼴이다. 언젠가 한 번은 터질 폭탄. 다만 시간이 문제일 뿐.

  그러면 미스터 스위트는 여태 왜 살았느냐고? 킨케이드 가라사대, “미움은 사랑의 정반대이고 그래서 사랑과 가장 유사한 형태”란다. 그러니 미움을 사랑이라 오해하면서 살 수 있었다는 뜻이겠지.

  웃기네. 웃기지?

  처음엔 자기와 다른 피부색도 좋아 보였고, 계급이 다른 것도 오히려 그래서 매력적이고, 부모가 특히 엄마가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도 재미있었을 수도 있고, 이것 저것 다 합해 남들 앞에서 후까시 잡기도 괜찮은 거 같았는데 살면서 보니까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가 너무나 많이 서로 다르니까 처음에 싫다가 결국 미워졌겠지. 이러다 보면 결국 사고 친다. 그리하여 저 뒤로 가면 아름다운 페르세포네와 어린 헤라클레스를 앞에 두고 미스터 스위트가 고백을 해버린다. 자기한테 진정한 사랑이 찾아 왔노라고. 꼴값하는 거지 뭐.


  그래서 결국 미시즈 & 미스터 스위트는 혼인의 불행한 종말을 맞는데, 이게 주된 내용이 아니라 작품의 핵심은 이런 문장이다.

  “현재는 그때이자 지금이고, 과거도 그때이자 지금이며, 미래도 그때이자 지금이 될 것.”

  쉬운 이야기로 하자면,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지금 벌어지는 모든 것도 영원히 남을 거란 뜻이다.

  이 정도면 미시즈 스위트도 깔끔하게 자기 이름에서 “스위트”를 싹 지워버리고 당연히 위자료 넉넉하게 챙겨 아이들하고 오붓하게 살면 될 것을, 서인도제도 사람들의 정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지난 이야기, 심지어 자기 모국 엔티카 바부다의 인정머리 없는 어머니와 얼굴만 아는 아버지 생각까지, 그것만 딱 끄집어 내기 뭐하니까, 괜히 지구가 탄생한 40억년 전부터 무슨 대, 무슨 기, 무슨 세 등을 망라하면서 독자들 해골 흔들리게 만드느라 열심이다.

  이 작품 속 최근 미시즈 스위트의 나이가 52세. 만일 미시즈 스위트가 작가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분신이라면 이혼 과정이 완료되기 1년 전이다. 사는 곳은 뉴잉글랜드의 작은 마을 셜리 잭슨 하우스. 즉 이혼 소송을 하면서 위자료 명분으로 집은 미시즈 스위트 혹은 킨케이드 소유로 한 모양이다. 요즘 세상에 그거면 됐지 무슨 감정이 남아서. 어차피 처음부터 시한폭탄을 가지고 시작한 결혼이었으니 말이지.



4별은 좀 과한 기분이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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