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 전집 그리스 고전 문학선
소포클레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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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소포클레스를 2014년에 처음 읽었다. 당연히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이란 제목의 책으로. 읽기 전에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오이디푸스 왕>은 중학생 시절부터 스토리 대부분을 알았다. 이게 오히려 책 읽기를 방해한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다.


  천병희 선생의 책을 읽기에 앞서 카를 오르프가 작곡한 오페라 <폭군 외디푸스 Oedipus der Tyrann>의 음반을 들었다. 이거 한 방에 그냥 뻑 갔다. 카를 오르프의 고전 3부작이, <폭군 외디푸스>와 <안티고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이다. 지금은 아마존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내가 처음 들었을 때는 별의 별 어둠의 경로를 통한 야매 음반을 들어야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LP를 CD로 변환해 다시 발매하기 시작한 정식 음반과 DVD를 구해 들었다. 오르프의 <폭군 외디푸스> 음반에 글쎄 대본이 없는 거다. 왜 없느냐 하면, 카를 오르프가 한 날 베를린에서 독일어 번역으로 공연한 연극 <오이디푸스 왕>을 보고 감동 감화를 받아 당장 자신이 직접 오페라로 작곡하기로 마음먹었고, 소포클레스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기 위해 독일어 번역본의 대사를 일체의 빠짐도 없고 수정도 없이 <오이디푸스 왕> 그냥 그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본, 즉 리브레토를 구해 읽느니 희곡집을 한 권 사서 읽는 게 훨씬 좋다는 말을 들어서.

  이렇게 소포클레스를 읽은 시작은 미미했지만, 2014년에 정말로 소포클레스를 읽고 나서, 소포클레스야말로 소위 무인도 책, 이 가운데서도 제일 앞에 두어야 할 필생의 책으로 여기게 되었다.


  말 나온 김에 오르프의 오페라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

  우리 입에 익숙한 작곡가들 가운데 예상 외로 좋은 오페라를 작곡한 사람들이 많다. 한 번 놀라 보실래? 핸델은 뭐 다 아시지만, 하이든, 베를리오즈, 차이코프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안톤 루빈스타인, 라흐마니노프, 스메타나, 드보르자크, 야나체크,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베르크, 젬린스키, 테오도라키스 등등. 이 가운데 카를 오르프. 정말 독특하다. (슈만과 슈베르트의 오페라는 피해가는 편이 좋다! 재미없어 못 듣는다.)

  <폭군 외디푸스> DVD를 보면, 처음 작품을 시작할 때, 오케스트라 피트 안에 그랜드 피아노가 두 대 놓여 있는데, 피아니스트가 당연히 주로 건반을 두드리지만, 작은 나무망치로 직접 피아노 현을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오르프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애초에 타악기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걸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 유튜브 검색을 열라 해봤는데, 내 실력으로는 도무지 찾지 못하겠다. 아쉽다. 연주뿐만 아니고 성악가들의 노래도 아주 흥미롭다. 노래는 이 작품에서만 그런 건 아니다. 그의 또다른 유쾌한 명품 <재치 부인 Die Kluge>에서 이미 들어본 거의 유사한 톤으로 발성/노래하는데(아, 영원하리, 고틀롭 프리크와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레치타티보도 아닌 것이, 노래이면서 동시에 배우들의 대사와 흡사하다. 물론 화성을 포함하니까 배우의 대사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그리고 선율의 힘을 보탠 결과 청중에게 전달하는 호소력도 막강하다.

  게다가 원본 텍스트가 2천5백년 동안 인류에 의하여 끊임없이 공연되었을 정도로 인간 공통의 비극을 호소한 진짜 고전 아닌가 말이지. 그리하여 오페라로 만든 사람도 많다. 오르프 말고도 스트라빈스키와 에르네스쿠도 <오이디푸스 왕>의 작곡가로 이름을 올렸다. 물론 재미 측면에서 도무지 오르프를 따라갈 수 없지만.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무대 예술로서 음악적 스토리텔링 기법이니, 같은 <오이디푸스>인데 무슨 재미 차이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면 좋겠다.

  음악을 이야기할 때 단어의 빈곤함이란! 음악의 문자화, 이건 내 수준에선 죽어도 풀지 못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다.


  책을 이야기하지 않고 음악으로 서두를 오뉴월 쇠불알처럼 늘인 것은, 사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그리고 일곱 성문城門의 테바이 이야기, 헤라클레스, 일리아스를 모르는 분이 몇 명이나 되겠나? 다 알고 계시는 스토리로 독후감을 때우는 것도 민망한 일이라서 그렇게 됐다. 혹시 당신이 소포클레스를 아직 읽지 않았다면 그냥 도서관에 가셔서 천병희 선생이나 오늘 독후감 핑계를 대고 자판 두드리고 있는 이준석 번역을 골라 읽어 버리시라.

  이렇게 말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그러면 이준석 번역을 천병희 번역과 비교해도 괜찮을 것인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에 관한 의견뿐이겠다.

  그간 그리스 고전에 관한 한 거의 독보적 위치를 고수하던 분이 천병희 선생이다. 2022년에 83세의 연치로 별세한 전설적 역자. 이준석 방송통신대 교수는 서울대 학부에서 미학을, 대학원에서는 고전문헌학을 전공해 소포클레스 연구로 석사논문과, 박사과정 수료, 이후 스위스 바젤에서 7년간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로 박사논문을 쓴 50대, 천선생과 비교하면 막내 아들 뻘 되는 젊은 학자.

  나는 여전히 천선생의 업적을 능가할 작업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그늘이 워낙 컸기 때문에 그리스 고전을 읽으려면 자동적으로 제일 먼저 천선생을 떠올리지 않기도 힘든 수준이겠지. 게다가 이 책도 정가가 3만원. 그리스 고전 책값이 만만하지 않아 일단 여태까지 숱한 사람들이 “믿고 읽는다”는 천선생의 책을 최우선 선택지로 선정해 두었을 확률도 매우 높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나도 소포클레스는 천선생의 책을 가지고 있고, 비싼 책값을 주고 다른 소포클레스 역서를 또 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 책 《소포클레스 전집》은 나 다니는 도서관에서 누군가가 희망도서 신청을 해, 신간도서 전시대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집어 든 거다. 워낙 소포클레스, 특히 <오이디푸스 왕>을 좋아한데다가, 기회가 닿기만 하면 다른 역서를 꼭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차였으니.

  이준석의 번역은,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훨씬 입에 잘 붙는다. 물론 이이 특유의 단어, 다른 역자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엄연한 우리 고유말이며 표준말을 쓰는 등 좀 돋보이려는 면도 없지는 않지만(그래서 살짝 귀엽기도 하다) 그럼에도 문장의 표현이 천선생에 비하여 많이 현대적이다. 그러니 귀에 착착 감긴다. 읽는 즉시 등장인물의 대사가 품는 감정이 와 닿는다. 이것들 다 합해서 진짜 연극을 위한 희곡/대본 같은 느낌이 든다. 천선생의 책과 비교해서 훨씬 더 그렇다. 나는 이런 번역이 더 좋다.

  이건 대단히 긍정적인 면 아닌가? 고전은 언제나 다시 번역해야 한다. 20년에 한 번 또는 30년에 한 번? 천만의 말씀. 고전은 언제나 다시 번역해야 한다. 늘 새롭게. 새롭지 않으면 더 이상 고전이라는 계수나무 잎을 이마에 쓸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여태 이준석의 번역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반성한다. 사실 책값,이라기보다 책 쌓아 놓을 공간 부족으로 선뜻 구입할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건 핑계일 뿐이겠지. 좋다. 조만간에 이준석 번역의 다른 고전을 또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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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8-05 07: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왼전, 100% 공감 공감 입니다.
제가 지금 이준석 번역자의 오뒷세이아 읽고 있는데 같은 의견이라서 반가워요.
소포클레스도 꼭 재독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Falstaff 2026-08-05 07:15   좋아요 2 | URL
공감하신다니 즐겁습니다. 그것도 백퍼! ㅎㅎㅎ
저는 9월 14일에 <일리아스> 업로드 예정입니다. <오뒷세이아>는 올해 읽을까, 내년에 읽을까 생각중이고요. 페넬로페 님의 <오뒷세이아> 기대하겠습니다!

coolcat329 2026-08-05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준석 번역자의 책이 좋다는 얘기 듣고 읽고 싶었는데, 정말 그렇군요~요즘 영화 오디세이 덕분에 일리아스 등 그리스 고전이 다시 관심을 받고 있더라구요. 참 좋네요~

Falstaff 2026-08-05 11:53   좋아요 2 | URL
뉴스에서 봤습니다. <율리시스>가 다시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거요. ㅎㅎㅎ 제 세대에 율리시스는 미아삼거리 대지극장에서 몰래 땡땡이 쳐 본 커크 더글러스였는데요, 유튜브에서 보면 얼마나 촌스러운지... ㅋㅋㅋ

잠자냥 2026-08-05 12:35   좋아요 0 | URL
요즘 진짜 신간 나오는 거 중에 오디세이 관련 책 우르르르르르. ㅋㅋㅋㅋ 제 주변엔 오디세이아 원전은 지루할 거 같아서 ㅋㅋㅋ 그냥 영화로 보겠다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잠자냥 2026-08-05 10: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전 천병희 역으로만 읽었는데...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수록된 작품들 다 좋아서 또 읽어도 좋을.

Falstaff 2026-08-05 11:5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울 잠자냥 님은 이 독후감 아니었어도 틀림없이 읽어보실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