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판타지아
아시아 제바르 지음, 김지현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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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아시아 제바르가 총 세 권. 이제 세 번째 제바르를 읽는다. <사랑, 판타지아>. 여기서 ‘판타지아’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출판사 ‘책세상’은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판타지아’를 이렇게 소개한다.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행해지는 아랍 기병들의 기예, 행진을 일컫는다. 화승총이나 화약을 쏘며 화려한 기예를 뽐내는 기마행진은 군대의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행해지지만, 성인(聖人)을 기리는 종교의식, 결혼 예식, 성지순례 행렬에서도 볼 수 있다. 여자들은, 용맹한 기병의 움직임에 아랍 특유의 날카로운 함성인 ‘유유’ 소리로 화답한다. 1830년대에 마그레브 지역을 방문한 화가 외젠 틀라크루아와 외젠 프로망탱은 판타지아 장면을 여러 작품에 담았다.”
 그러면서 외젠 틀라크루아의 작품 <모로코의 기마 놀이>를 흑백으로 실었다. Wikipedia 검색하면 이런 그림을 볼 수 있다.

 

 

 

 1830년부터 시작한 프랑스의 알제 침공으로 알제리의 식민 상태가 시작되었다고 하면 1962년 독립할 때까지 무려 132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셈이다.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떨어지게 된 내력을 보면, 참 아쉽게도 우리나라와는 너무 다르다. 이전부터 알제를 향해 군침을 흘리며 군대를 파견하곤 했던 스페인 해군에 대항해 승전을 거둔 경험으로 사기가 충천하고 있던 알제. 그러나 1830년 6월 13일, 대구경 대포를 장착하고 수만의 병사를 몰고 온 프랑스 군대를 견디지 못해 수도 알제를 넘겨주고 만다. 이 전투에서 알제에서는 여인들까지 손톱으로 프랑스 병사의 심장을 후벼내 ‘한 명은 피투성이 손에 프랑스 병사의 심장을 쥐고 있고, 다른 한 명의 알제 여인은 봄의 석류 같은 아이의 머리통을 필사적으로 산산조각 내’며 항전했다고, 당시 바르슈 남작은 회상했다. 몇 명의 술탄들이 모여 나라를 통째로 가져다 바치는 문서에 서명을 한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한 도시, 한 도시 수많은 목숨을 신의 뜻에 맡기고 필사의 항전을 해가며 함락되었던 거다. 이 책에서도 1830년 프랑스의 알제 함락 이외 그 후 10여 년에 걸친 항불전쟁과 그에 따른 비참함 같은 것들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몇 십 년에 걸친 독립운동 역시 그리고 있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독립운동이었다는 알제리 해방투쟁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와 세 남자 형제를 모두 잃고 만다. 소설은 픽션이니 책에 나오는 내용이 전부 아시아 제바르가 직접 체험한 것을 서술하고 있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물론 곳곳에 틀림없는 작가의 자전적 모습이 등장하기는 하겠지만, 작가는 분명하게 이야기 한다. 회고록일지라도 모국의 언어가 아니라 적enemy의 언어로 회고록을 쓴다면 그것은 반드시 픽션으로 변하기 마련이라고.
 소설가이자 영화 제작자이자 또한 역사학자이기도 한 아시아 제바르는 ① 식민지 알제리에서 반식민 투쟁과 ② 회교 사회 안에서 여성의 정체성, 그리고 ③ 피식민지 지식인이 한때 분명히 ‘적의 언어’였던 프랑스어로 문학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심사숙고를 이 책에서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알제리의 독립 과정도 부럽기만 하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자기들의 식민지에 독립을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한반도처럼 어떤 의미에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해방이 아니라, 백범이 그리도 원했듯 인민들이 스스로 무장투쟁을 벌여 혹독한 대가를 치루고 얻어낸 독립이었다. 그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고 살벌하고 잔혹했었는지는 <프랑스 식 전쟁술>에 잘 묘사가 되어 있다. 1945년 프랑스는 알제리의 지방에서 벌어진 소요사태에 개입해 1만부터 4만까지로 추정되는 민간인을 무참하게 학살했으며 이것을 계기로 태동하기 시작해 1962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막판 8년간의 알제리 전쟁에서 비행기를 동원해 소이탄을 무한정 폭격한 야만적 학살에 대하여, 아직, 단 한 번의 사과도 한 적이 없다. 올랑드 전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한 게 유일하다. 지네딘 지단이 백 명 나와도 프랑스는 요지부동이다. 대신 아시아 제바르를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3국출신 최초로 아카데미프랑세즈의 종신회원으로 임명하고, 제바르 역시 이 제의를 받아들인다. 아카데미프랑세즈 종신회원? 전 세계에서 프랑스어를 제일 잘 구사하는 몇 몇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그래 사학자로서 프랑스의 알제리 침공과 독립전쟁에 대하여, 여성으로 아랍 하렘 속의 여인들의 삶과 베일에 대하여, 소설가로서 프랑스어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일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제바르에게 프랑스어는 무엇일까. 정답은 스스로 입지 않을 수 없는 네소스의 셔츠. 네소스의 셔츠가 무엇인가. 반인반마 켄타우로스 족 네소스가 헤라클레스의 독화살을 맞고 죽으면서 자신의 피가 묻은 셔츠를 데이아네이라에게 주며 헤라클레스에게 입히면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유언을 남긴 그 셔츠. 결국 헤라클레스는 셔츠를 입게 되고, 독이 퍼지는 걸 느끼면서 셔츠를 벗어버리다가 살점이 뜯겨져 죽고 마는 것. 작가는 자신에게 적의 언어, 프랑스어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흐릿한 과거에 자리 잡은 언어이며, 적에게서 얻은 그 언어로는 사랑의 말을 나눌 수 없다면서.
 제바르에게 프랑스어는 법정에서 판사와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들만이 쓰던 언어로 요구와 소송과 폭력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자기 피부에 닿아 자신에게 독을 퍼뜨리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지 않으면 스스로 죽고야 마는 네소스의 셔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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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8-2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절판인 책을 잘 구하셨네요!

Falstaff 2019-08-29 09:57   좋아요 1 | URL
옙. 구하는 방법은요, 절판이라도 일단 보관함에 넣는 겁니다. 책 구경하면서 보관함을 가끔 보면 저처럼 알라딘 중고를 정가 대비 절반 가격으로 살 수 있더라고요. 상태도 높을 ‘상‘을요. ㅋㅋㅋ

케이 2019-08-29 1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14년 월드컵에서 라마단 기간이라 쫄쫄 굶고 나온 알제리 선수들이 독일 상대로 연장전까지 가며 대단한 접전을 펼쳤던 경기가 있어요. 세계 최강이던 독일 선수들 앞에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뛰던 알제리 선수들의 투지에 감동받아, 끝내 알제리가 독일에 졌을 땐 알제리 사람도 아닌 주제에 펑펑 울었지 뭐예요. ㅋㅋㅋ 결국 약자는 죽어라 노력해도 지는 건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도 결국은 결국은 지는 결말인가!! 싶어서 어찌나 슬프던지요. 경기 끝나고 알제리 선수들도 서럽게 울더라고요. 팔스타프님 글을 보니 그 경기에서 알제리 선수들이 보여줬던, 품위와 투지가 괜히 나온 게 아니란 생각이 들면서, 알제리에 대해 궁금해집니다. 댓글은 안 달지만 언제나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그 해 월드컵 우승은 결국 독일이 했습니다.)

Falstaff 2019-08-29 10:58   좋아요 1 | URL
별거 없는 독후감을 즐겁게 읽어주신다니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우리나라하고 경기할 때 저는 4:1로 한국이 진다는 데 만원 걸었었습니다. 4:2로 지는 바람에 좀 아쉬웠지요.ㅋㅋ 당시 독일축구는 (준결승에서 주최국 브라질한테 7:1로 이기지 않았나요?)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이었잖아요. 그들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싸울 수 있었다는 것 가지고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물론 이겼다면 더욱 감격적이었겠지만요.
이 책이 절판된 건 정말 안 좋은 일입니다. ‘책세상‘에서는 더 이상 이런 책을 찍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판권을 다른 출판사에 넘기는 한이 있더라도 독자들이 계속 읽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입니다.

레삭매냐 2019-08-29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먼저 접한 아시아 제바르 아지매의
책인데 여적 못 읽고 있네요.

절판 책이라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다가
중고로 사들였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겠네요.

결국 <프랑스어의 실종>을 먼저 읽었
네요.

우리와 정말 먼 나라 알제리에 대해 생각
해 보게 만들어준 책이었지 싶습니다.

Falstaff 2019-08-29 20:35   좋아요 0 | URL
레삭메냐 님은 진짜 책 부자예요. 안 읽은 책들, 언젠가는 읽습니다. ㅋㅋㅋㅋ
저도 아시아 제바르 세 권 다 읽었는데 <프랑스어의 실종>이 가장 좋았습니다. 레삭매냐 님의 서평 덕에 제바르 아줌마한테 홀딱 빠져버렸답니다. ^^
 
현란한 세상 을유세계문학전집 96
레이날도 아레나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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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5년 10월에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태어난 수사,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의 일생을 그린 소설. 프랑스 혁명 당시에 피가 끓는 24세. 아무리 멕시코에 머물렀다 한들 유럽에서 불어오는 자유, 평등, 박애의 격랑을 모른 척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 멕시코를 비롯한 거의 모든 라틴 아메리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세르반도 수사는 프랑스 발 혁명정신을 아메리카 대륙에 확산시키기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을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으로 본 인물. 당연히 공화주의자이다. 그러나 세르반도 수사를 특정하는 사건은 그가 공화주의자라는 것보다는, 일찍이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기적으로 믿었던 사건, 1531년에 나타났었다고 알려진 멕시코의 수호신 과달루페 성녀의 출현 시기를 부정하고, 과달루페 성녀의 유령 또는 영혼이 나타난 시기는 1750년이라 강연했다는 것(위키피디아 발췌)이란다. 책에 의하면 1531년이면 멕시코 땅에 스페인, 즉 기독교가 들어오기도 전인데 어찌하여 유럽여인도 아니고 라틴 아메리카 인디언 처녀가 성녀로 지정될 수 있었으며 이미 죽은 그녀의 영혼이 등장해 멕시코의 수호성인이 될 수 있었겠느냐가 세르반도 수사가 주장하는 증거의 일부분이었다. 어쨌든 시작은 이러했는데, 일주일 후에 스페인 출신 대주교를 비롯해 몇몇 귀하신 성직자 여러분이 수도원에서 모여 곰곰이 검토를 해 본 결과, 이 작자를 그냥 두면 자신들의 만수무강에 지장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해, 박사학위를 몰수하고, 성직자의 직위에서도 물러나게 하며, 10년 동안 스페인의 수도원 감옥에서 금고형을 받도록 선고를 해버렸다.
 여기까지 독후감을 읽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심정일 것이다. 내가 다 안다. 그렇게 읽으시라고 썼으니까. 책을 열고 본문에 접어들면, 1장이 세 번, 2장도 세 번, 7장 역시 세 번에 걸쳐 나온다. 이게 작가 아레나스의 역사관이다. 1장의 제목은 각각 “몬테레이에서 내 유아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그리고 일어난 다른 사건에 대하여”, “몬테레이에서 너의 유아기와 일어난 다른 사건에 대하여” 그리고 “몬테레이에서 그의 유아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그리고 일어난 다른 사건에 대하여”로 되어 있다. 작가는 세르반도 수사가 멕시코에서 추방되어 유럽과 아메리카 각지를 떠돌았고 다시 멕시코로 돌아와 생을 마친 것만이 ‘공식역사’라고 하는데, 작가는 언제나 ‘상세하고 정확한’ 자료로 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을 불신해왔단다. 역사는 결코 대략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문서처럼 명확한 것만을 요약한 것이 아니어서 자신은 영원하고 다양한 시간에서 역사를 비유하고자 했다고 서문에 썼다. 나처럼 그냥 서문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책을 읽는 사람은, 책 앞부분에 나열되는 매우 현란한 세상을 맞닥뜨리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언제까지? 과장, 풍자, 시간성의 역전, 그로테스크, 아이러니, 우화적 표현, 고딕, 해학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이런 모든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익숙해지고 난 다음에야 책에 재미를 느끼고, 전개가 궁금해지고,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숙고하게 된다. 이 책은 한 확신범이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어떤 고난이냐 하면, 투옥과 탈옥, 감금과 탈출을 연속하는 빠삐용 적 영웅담인데, 그러면서 추호도 변함이 없는 굳건한 신념을 가진 인물을 그리고 있다.
 세르반도 수사는 자신이 끊이지 않는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모욕당했어요. 그 이유는 정직하게 이해하고 생각한 것을 말한 것 때문이지요. 나는 내 조국에서 추방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능숙하게 피해야 했던 그리고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그 속에서 내가 죽게 될 비열한 행위 대신 진실이 제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진실이라는 건, 초두에서 얘기한 과달루페 성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그걸 만인 앞에서 강론한 사실을 말한다. 진실을 알고 그것을 청중 앞에서 밝힌 대가로 멕시코에서의 구류와 스페인에서의 잔혹한 감금과 탈출,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미국, 쿠바, 다시 미국, 멕시코 등에서의 고난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데, 작가 아레나스의 못 말리는 역사에 대한 불신과 우화가 뒤섞여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우화적 장난기로 뒤덮어버렸다. 어떤 우화고 어떤 장난기인지는 직접 읽어보셔야 안다. 내가 아무리 독후감에다 대고 설을 풀어도 도무지 제대로 표현할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1943년에 쿠바의 빈농가정에서 태어나 정치지원 코스의 일환으로 아바나 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한 아레나스의 출신성분과, 카스트로 정권에 대한 반체제 운동과 동성애 혐의로 감방생활을 해본 경험이, 세르반노 수사의 굶주림과 처참한 옥중 생활을 그리도 맛나게 버무렸을 것이다. 결국 1990년 47세의 나이로 에이즈 말기를 맞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그는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지 않을까.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책을 읽어보시면 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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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기 중국전통희곡총서 2
사천성천극원 지음, 임미주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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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수유기’, 어려운 한자 유襦가 섞여 있어 굳이 옥편을 찾아봐야 했다. 유襦는 저고리 유자다. 그러니 수유는 저고리에 수를 놓는 이야기라는 뜻.
 드디어 본문 1막에 들어서면 2012년 부산연극제에서 <수유기> 공연 사진이 보이고 대갓집 아드님 정원화가 기녀 이아선과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한다. 정원화의 아버지는 덕망을 중시하는 관리고, 어머니는 자상한 안방마님이다. 1막에서는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2막에 접어들면 정원화. 이 아이는 지방귀족 출신으로 나름대로 문벌이 화려한 집안의 외동아들이며, 장안에서 3년마다 열리는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출발했으나, 고대 중국 내륙의 교통중심지로 문물이 발달한 양주에 잠깐 머물다가 그만 아름다운 얼굴, 빼어난 몸매와 따뜻하지만 굳은 마음을 가진 기녀 이아선과 엮여 신세를 망친 철부지다. 엄한 아버지가 무려 천금의 돈을 내려 과거 시험을 보고오너라 했더니 ① 천한 기녀한테 엎어지고, ② 돈은 돈대로 집사 나도덕羅道德이 홀랑 삼켜버리고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이아선으로 말할 거 같으면 본래부터 기녀는 아니었지만 없는 집구석에 갑자기 아버지가 숟가락 놓는 바람에 장례나마 번듯하게 치러 남부럽지 않게 저승길 보내기 위해 스스로 몸을 팔아 장례비용을 댄 효녀란다. 그런 일이 당시 기준으로 효녀였나 보다. 따따부따 하지 말자. 그런데, 이제 돈도 없고, 집도 없어져버린 정원화는 어떻게 되었겠나. 이아선의 뜻과는 상관없이 냉혹한 기생어멈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아 진짜 거지신세로 떨어진다.
 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어서, 딱 이 때를 잡아 정원화의 아버지 정북해가 공무로 출장을 왔다가 복귀하던 중 양주를 들르게 된다. 양주가 교통의 중심지니까 충분히 그럴 듯하다. 그래 부자가 곡강에서 만나 반가움을 표한 다음 어째 이렇게 거지꼴이 됐는지를 따지던 중, 정원화는 처음엔 도적을 만나 돈과 말을 다 뺏겼다고 거짓말을 하다가, 다음엔 나도덕이가 훔쳐 달아났다고 하는 바람에 눈치를 챈 아버지에게 이실직고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굵은 몽둥이로 숨이 아슬아슬 멈추기 전까지 두드려 맞는다. 이 장소가 곡강曲江.
 아하! 딱 눈치 챘다. 이거 전에 읽어본 작품이다. 그때 제목이 뭔가 하면, 석군보의 잡극 “곡강지의 꽃놀이 李亞仙花酒曲江池”.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시리즈 78번 <원잡극선>에 실려 있다. 같은 내용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글공부 하는 총각과 기녀 사이의 로맨스 극인 것, 장소가 곡강을 옆에 둔 양주인 것은 맞다. 흠. 그렇군. 남송 시대 남중국 지역인 사천성 지역의 천극이 나중에 원나라 시대 원곡의 대표작이 되는 것이로구나.
 여기까지 얘기해도 대강 드라마의 내용은 짐작하시리라. 한 가지, 제목이 왜 수유기, 저고리에 수를 놓는, 저고리에 바느질하는 이야기인지 힌트만 드리지.
 소포클레스의 위대한 작품 <독재자 오이디푸스>를 읽어보면, 아니, 연극이나 카를 오르프가 작곡한 오페라를 보면 (오페라는 놀랍게도 소포클레스의 독일어 번역 대본을 그대로 쓴다) 독재자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스스로 멀게 하는 장면이 끔찍스럽게 나온다. 공연기술의 발달로 눈에서 마치 진짜 피가 뚝뚝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다들 알고 계시지? 오이디푸스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자기 눈을 찌르는지. 브로치brooch의 핀으로 눈을 콕콕 쑤신다. 심지어 그것도 실황으로 보여준다. 그럼 수유기, 저고리 바느질은 무슨 용도겠습니까? 아, 오늘은 힌트가 너무 노골적이다. 기녀, 과거 시험 치는 서생, 엄한 부모와 가문. 이런 구성도 70년대 한국영화에서 무지하게 많이 봤다. 룸살롱 호스티스와 사법고시생. 다행스러운 건 남송시대에 이 장르는 해피엔드였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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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책
알베르 코엔 지음, 조광희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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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우리나라 출판사들에게 진심으로 바라는 건, 어느 출판사가 됐든 알베르 코엔의 유대인 4부작 가운데 <솔랄>, <망주클루>, <용감한 형제들>을 번역 출판해주었으면 하는 일이다. 사부작의 세 번째 작품 <주군의 여인>은 창비가 번역해 내놓았다. 그 책을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내 어머니의 책>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이 책을 코엔이 썼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 서슴없이 구입했다. 서재친구들은 다 아시리라. 내가 이미 죽은 부모를 내세워 감성팔이 하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 코엔의 유려하면서도 장황한 문장을 읽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도무지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의 내용과 부록으로 달린 작가 연보를 보면, 코엔은 1895년 그리스 코르푸 섬에서 출생한다. 유럽의 반유대주의 사상은 20세기 초중반 독일의 나치들에 의하여 새로이 개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유구한 전통을 이루던 것이 이 때에 돌이킬 수없이 공고화되어 버린 거다. 하여간 그리스에서도 반유대주의가 점차 고조되자 코엔 가족은 말 그대로 남부여대하여 프랑스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면서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유로 이주하고, 아리안 족 한 명에게 거의 전 재산을 사기당하고 만다. 이런 여파에도 유대인의 전통 가운데 자식 교육 하나는 똑바로 시키라는 항목을 준수하여 부모는 알베르를 수녀원 부속학교에 입학시킨다. 알베르가 점점 자라 스무 살이 되자 쥬네브로 유학을 가고, 거기서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스위스 국적을 취득한다. 이후 책에서 아버지의 자취는 사라져버리고 오직 어머니 한 명만 남는다. 알베르는 <주군의 여인>에서 주군, 즉 솔랄처럼 스위스에 있는 국제연맹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를 어머니가 보기에 자기 아들이 모든 나라가 참여하고 있는 세계제일의 기관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여름만 되면 몇 주 동안 마르세유에서 쥬네브로 알베르의 거처를 방문하는 엄마. 그러다 세월이 더 지나면 알베르는 런던으로 파견을 가게 되고, 이때 2차 세계대전이 터져 엄마는 마르세유에 남아, 독일군에 의한 마르세유 유대인 가스 박멸작업이 시작되기 두 주 전에 생을 마감한다. 알베르 코엔은 저 멀리서 땅에 묻힌 어머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가슴 위에 무거운 대리석을 올려놓아 절대로 땅을 뚫고 다시 살아날 수 없게 단단하고 찬 땅에 굳어버린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어머니와 함께 지낸 유년시대, 소년시대, 쥬네브 시대를 떠올리며 통한의 마지막 편지를 1943년과 44년에 걸쳐 연재를 한다. 우리는 이럴 때 뭐라고 한다고? 그렇다. 내 신조이기도 하다.
 “있을 때 잘하지.”
 코엔 역시 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가서 세상의 모든 아들들에게 절절한 감정으로 제발 있을 때 잘하라고 호소하지만, 절대로 그들이 진짜 있을 때 잘하리라고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정도면 그림이 훤하게 그려지시지, 어떤 책인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이 책의 내용은 결코 기대하지 않고 샀다. 코엔의 유려한 만연체 문장을 읽어보기 위한 목적 하나, 그것이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떻기에 그럴까 궁금하신 분은 이 책을 읽기 전에 <주군의 여인>부터, 길어서 읽어치우기 좀 버거운 작품이지만 <주군의 여인>을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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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이야기
폴린 레아주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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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느 세실 데클로스라는 프랑스 소설가가 있었는데, 주로 ‘도미니크 오리’라는 가명으로 소설을 쓰다가 1954년에 ‘폴린 레아주’라고 다른 가명으로 발표한 작품. 1954년. 프랑스 문학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폴린 에라주라는 여성이 발표한 <O 이야기> 하나로 발칵 뒤집혀진다. 왜냐하면 정말로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여태 살면서 야한 작품 깨나 읽어본 내가 읽어도 쇼킹할 정도의 외설적 표현과 가학과 피학적 성도착 장면을 시종여일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품으로 폴린 레아주는 젊은 프랑스 작가에게 수여한다는 ‘되 마고 상’을 수상하기까지 이른다. 누가 썼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작품. 세계대전이 끝나고 1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이나 D.H.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정도는 이 책에 비하면 ‘이도 안 난 수준’이며 억지로 가져다 붙인다면 지저분한 분뇨 이야기를 '뺀' 사드 후작 정도나 가능할 정도의 쇼킹한 성애장면이 여성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의하여 쓰였고, 괜찮은 상까지 받은 것도 모자라, 공전의 히트를 거두는 베스트셀러가 됐던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을 필두로 거의 모든 백인들은 폴린 레아주라는 사람이 이름만 여성이지 사실은 앙드레 말로나 레몽 크노일 거라는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고 한다. 도대체 진짜 필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난 세월이 40년. 87세에 접어든 안느 세실 데클로스, 일반적으로 도미니크 오리라고 알려진 노파가 세상을 접기 불과 4년 전에, <O 이야기>를 쓴 작가가 자신이라고 커밍아웃을 함으로써 오랜 의문이 벗겨진다.
 벗겨진다? 그렇다. 벗겨졌다. 이 책에서도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가운데 하나도 ‘벗기다’와 ‘벗다’다. 내가 이 책을 사서 읽은 건, 설마 이 정도로 야한 책이란 건 상상도 못한 상태에서, 어느 책 속의 등장인물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O 이야기>를 찔끔찔끔 읽는 장면이 재미있어서였다. 오호, 그렇게 재미있어? 서슴지 않고 책을 검색했더니 ‘19세 인증’이 뜬다. 확 구미가 당겼다는 걸 고백한다. 얼른 휴대폰 인증하고 독자서평, 출판사 책 소개, 이런 것들 함부로 읽는 것이 책을 진짜로 재미있게 읽는데 방해가 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그냥 구입했다. 야하다. 21세기도 벌써 20% 정도 지나간 시점에 읽어도 그렇다. 총 4부로 되어 있는데, 3부에서는 비위가 좀 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사드의 책처럼 장면이 하도 더러워 그런 것이 아니라, 약간의 신체 훼손 장면이 나오는데 내가 원래 그런 종류를 견디지 못해서 그랬다.
 한 여자가 있다. 이름이 알파벳 ‘O'.
 어떤 여자인지, 원래 어떤 여자였는지 책의 134쪽에 설명이 되어 있다.
 “예전에 그녀는 늘 쿨하고 활기찼으며, 자기한테 반하는 사내들 마음을 말 한마디 제스처 하나로 후리는 데 재미를 느끼는 아가씨였다. 절대 자기를 완전히 내어주는 법이 없었고, 그저 극진한 정성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장난삼아 한 번씩 몸을 허락하는, 그러면서도 상대의 달뜬 열정에는 더욱 불을 지펴 가혹한 희생자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타입의 여자였던 것이다.”
 책의 줄거리는 이렇게 오만하고 자신감에 차있고 지배성향까지 있는 여인이 말 그대로 성노예가 되는 과정이다. O는 자신에게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채찍질하고, 성적으로 학대하고, 그가 있는 장소에서 낯선 사내(들)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을 그를 향한 ‘사랑’이라고 오해한다.
 “르네,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을 사랑해…… 나를 가지고 얼마든지 당신 원하는 대로 해도 좋아…… 다만, 나를 버리진 말아줘, 제발 부탁이야, 나를 버리지마……” (133쪽)
 심지어 사랑하는 르네가 피가 섞이지 않은 이복형제 스티븐 경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넘겨 상당한 수준의 성적 학대를 당하게 하는 것도 처음엔 르네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렇도록 사랑했던 르네를 그리 쉽게, 짧은 시기에 잊고 새로이 스티븐 경을 사랑하게 됐기 때문인 줄 안다. O가 바보냐고? 아니다. 작가에 의하면 그리도 오만하고 매사에 자신감에 차있고 남자를 지배할 줄도 아는 여성 O가 ‘루아시’라는 장소에서 지독한 마조히즘적 단련을 받아 그렇게 변했다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책의 첫 장면, 르네와 함께 택시를 타고 루아시까지 갈 때부터 마지막 장면, 두 명의 남자가 번갈아 O를 차지하는 장면까지 한 번도 독자는 O의 원래 모습이 똑 부러지고, 독립적인 여자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수시로 채찍질을 당하는 루아시에서의 성적 단련 장면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 <샤토 루즈>가 떠올랐다. 결혼을 했지만 부부간 성적 접촉은 서너 번에 불과한 부부. 섹스는커녕 깊은 애무도 거부하는 아내를 견디지 못하고 프랑스에 있는 성城 샤토 루즈Château Rouge에 있다는 성性 능력 개발센터에 보내는 소설. 그 책에서는 아내에게 성적 흥분이 어떤 것이며 그것을 최대한으로 느낄 수 있는 잠재능력을 극대화하는 훈련 장면이 등장한다. 와타나베의 (이 책에 비하면) 조금밖에 외설적이지 않은 책 속에서는 가학, 피학 같은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간질간질한 섬세한 자극이 꽉 차 있어서, 야하지만 흥미있게 읽을 수 있었는데 <O 이야기>는 내 수준에 과했다.
 역자 성귀수는 후기에서
 “일개 에로틱한 내용의 소설이라는 것만으로는 정의가 턱없이 부족하다. 예컨대, 이 책속에 난무하는 사도-마조히즘적 담론들은 단순히 성적 쾌락의 수행으로 읽히기보다는 어떤 극한의 추구, 절대를 향한 자아의 완전한 헌정(獻呈) 의지로 해석된다. 마치 노예처럼, 용해되는 원소처럼 연인이라는 존재에, 사랑 자체에 완전히 속해 버리고자 하는 작가의, 아니 O의 연애편지……”
 라고 주장한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이 책은 엄연히 남자들의 권력으로 특정한 여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견고한 시스템을 만들고 그 안에서 여성 노예를 통해 오직 성적 쾌락만을 최대한으로 뽑아내는 비인간적 유희를 미화해버렸다. 작가가 의도했건 아니건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여성에 의하여 쓰인 가장 극명한 안티-페미니즘 소설이며, 반인륜적 작품이다. 남자가 읽기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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