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세상 을유세계문학전집 96
레이날도 아레나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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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5년 10월에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태어난 수사,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의 일생을 그린 소설. 프랑스 혁명 당시에 피가 끓는 24세. 아무리 멕시코에 머물렀다 한들 유럽에서 불어오는 자유, 평등, 박애의 격랑을 모른 척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 멕시코를 비롯한 거의 모든 라틴 아메리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세르반도 수사는 프랑스 발 혁명정신을 아메리카 대륙에 확산시키기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을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으로 본 인물. 당연히 공화주의자이다. 그러나 세르반도 수사를 특정하는 사건은 그가 공화주의자라는 것보다는, 일찍이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기적으로 믿었던 사건, 1531년에 나타났었다고 알려진 멕시코의 수호신 과달루페 성녀의 출현 시기를 부정하고, 과달루페 성녀의 유령 또는 영혼이 나타난 시기는 1750년이라 강연했다는 것(위키피디아 발췌)이란다. 책에 의하면 1531년이면 멕시코 땅에 스페인, 즉 기독교가 들어오기도 전인데 어찌하여 유럽여인도 아니고 라틴 아메리카 인디언 처녀가 성녀로 지정될 수 있었으며 이미 죽은 그녀의 영혼이 등장해 멕시코의 수호성인이 될 수 있었겠느냐가 세르반도 수사가 주장하는 증거의 일부분이었다. 어쨌든 시작은 이러했는데, 일주일 후에 스페인 출신 대주교를 비롯해 몇몇 귀하신 성직자 여러분이 수도원에서 모여 곰곰이 검토를 해 본 결과, 이 작자를 그냥 두면 자신들의 만수무강에 지장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해, 박사학위를 몰수하고, 성직자의 직위에서도 물러나게 하며, 10년 동안 스페인의 수도원 감옥에서 금고형을 받도록 선고를 해버렸다.
 여기까지 독후감을 읽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심정일 것이다. 내가 다 안다. 그렇게 읽으시라고 썼으니까. 책을 열고 본문에 접어들면, 1장이 세 번, 2장도 세 번, 7장 역시 세 번에 걸쳐 나온다. 이게 작가 아레나스의 역사관이다. 1장의 제목은 각각 “몬테레이에서 내 유아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그리고 일어난 다른 사건에 대하여”, “몬테레이에서 너의 유아기와 일어난 다른 사건에 대하여” 그리고 “몬테레이에서 그의 유아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그리고 일어난 다른 사건에 대하여”로 되어 있다. 작가는 세르반도 수사가 멕시코에서 추방되어 유럽과 아메리카 각지를 떠돌았고 다시 멕시코로 돌아와 생을 마친 것만이 ‘공식역사’라고 하는데, 작가는 언제나 ‘상세하고 정확한’ 자료로 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을 불신해왔단다. 역사는 결코 대략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문서처럼 명확한 것만을 요약한 것이 아니어서 자신은 영원하고 다양한 시간에서 역사를 비유하고자 했다고 서문에 썼다. 나처럼 그냥 서문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책을 읽는 사람은, 책 앞부분에 나열되는 매우 현란한 세상을 맞닥뜨리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언제까지? 과장, 풍자, 시간성의 역전, 그로테스크, 아이러니, 우화적 표현, 고딕, 해학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이런 모든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익숙해지고 난 다음에야 책에 재미를 느끼고, 전개가 궁금해지고,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숙고하게 된다. 이 책은 한 확신범이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어떤 고난이냐 하면, 투옥과 탈옥, 감금과 탈출을 연속하는 빠삐용 적 영웅담인데, 그러면서 추호도 변함이 없는 굳건한 신념을 가진 인물을 그리고 있다.
 세르반도 수사는 자신이 끊이지 않는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모욕당했어요. 그 이유는 정직하게 이해하고 생각한 것을 말한 것 때문이지요. 나는 내 조국에서 추방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능숙하게 피해야 했던 그리고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그 속에서 내가 죽게 될 비열한 행위 대신 진실이 제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진실이라는 건, 초두에서 얘기한 과달루페 성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그걸 만인 앞에서 강론한 사실을 말한다. 진실을 알고 그것을 청중 앞에서 밝힌 대가로 멕시코에서의 구류와 스페인에서의 잔혹한 감금과 탈출,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미국, 쿠바, 다시 미국, 멕시코 등에서의 고난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데, 작가 아레나스의 못 말리는 역사에 대한 불신과 우화가 뒤섞여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우화적 장난기로 뒤덮어버렸다. 어떤 우화고 어떤 장난기인지는 직접 읽어보셔야 안다. 내가 아무리 독후감에다 대고 설을 풀어도 도무지 제대로 표현할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1943년에 쿠바의 빈농가정에서 태어나 정치지원 코스의 일환으로 아바나 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한 아레나스의 출신성분과, 카스트로 정권에 대한 반체제 운동과 동성애 혐의로 감방생활을 해본 경험이, 세르반노 수사의 굶주림과 처참한 옥중 생활을 그리도 맛나게 버무렸을 것이다. 결국 1990년 47세의 나이로 에이즈 말기를 맞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그는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지 않을까.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책을 읽어보시면 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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