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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판타지아
아시아 제바르 지음, 김지현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아시아 제바르가 총 세 권. 이제 세 번째 제바르를 읽는다. <사랑, 판타지아>. 여기서 ‘판타지아’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출판사 ‘책세상’은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판타지아’를 이렇게 소개한다.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행해지는 아랍 기병들의 기예, 행진을 일컫는다. 화승총이나 화약을 쏘며 화려한 기예를 뽐내는 기마행진은 군대의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행해지지만, 성인(聖人)을 기리는 종교의식, 결혼 예식, 성지순례 행렬에서도 볼 수 있다. 여자들은, 용맹한 기병의 움직임에 아랍 특유의 날카로운 함성인 ‘유유’ 소리로 화답한다. 1830년대에 마그레브 지역을 방문한 화가 외젠 틀라크루아와 외젠 프로망탱은 판타지아 장면을 여러 작품에 담았다.”
그러면서 외젠 틀라크루아의 작품 <모로코의 기마 놀이>를 흑백으로 실었다. Wikipedia 검색하면 이런 그림을 볼 수 있다.

1830년부터 시작한 프랑스의 알제 침공으로 알제리의 식민 상태가 시작되었다고 하면 1962년 독립할 때까지 무려 132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셈이다.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떨어지게 된 내력을 보면, 참 아쉽게도 우리나라와는 너무 다르다. 이전부터 알제를 향해 군침을 흘리며 군대를 파견하곤 했던 스페인 해군에 대항해 승전을 거둔 경험으로 사기가 충천하고 있던 알제. 그러나 1830년 6월 13일, 대구경 대포를 장착하고 수만의 병사를 몰고 온 프랑스 군대를 견디지 못해 수도 알제를 넘겨주고 만다. 이 전투에서 알제에서는 여인들까지 손톱으로 프랑스 병사의 심장을 후벼내 ‘한 명은 피투성이 손에 프랑스 병사의 심장을 쥐고 있고, 다른 한 명의 알제 여인은 봄의 석류 같은 아이의 머리통을 필사적으로 산산조각 내’며 항전했다고, 당시 바르슈 남작은 회상했다. 몇 명의 술탄들이 모여 나라를 통째로 가져다 바치는 문서에 서명을 한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한 도시, 한 도시 수많은 목숨을 신의 뜻에 맡기고 필사의 항전을 해가며 함락되었던 거다. 이 책에서도 1830년 프랑스의 알제 함락 이외 그 후 10여 년에 걸친 항불전쟁과 그에 따른 비참함 같은 것들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몇 십 년에 걸친 독립운동 역시 그리고 있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독립운동이었다는 알제리 해방투쟁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와 세 남자 형제를 모두 잃고 만다. 소설은 픽션이니 책에 나오는 내용이 전부 아시아 제바르가 직접 체험한 것을 서술하고 있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물론 곳곳에 틀림없는 작가의 자전적 모습이 등장하기는 하겠지만, 작가는 분명하게 이야기 한다. 회고록일지라도 모국의 언어가 아니라 적enemy의 언어로 회고록을 쓴다면 그것은 반드시 픽션으로 변하기 마련이라고.
소설가이자 영화 제작자이자 또한 역사학자이기도 한 아시아 제바르는 ① 식민지 알제리에서 반식민 투쟁과 ② 회교 사회 안에서 여성의 정체성, 그리고 ③ 피식민지 지식인이 한때 분명히 ‘적의 언어’였던 프랑스어로 문학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심사숙고를 이 책에서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알제리의 독립 과정도 부럽기만 하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자기들의 식민지에 독립을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한반도처럼 어떤 의미에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해방이 아니라, 백범이 그리도 원했듯 인민들이 스스로 무장투쟁을 벌여 혹독한 대가를 치루고 얻어낸 독립이었다. 그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고 살벌하고 잔혹했었는지는 <프랑스 식 전쟁술>에 잘 묘사가 되어 있다. 1945년 프랑스는 알제리의 지방에서 벌어진 소요사태에 개입해 1만부터 4만까지로 추정되는 민간인을 무참하게 학살했으며 이것을 계기로 태동하기 시작해 1962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막판 8년간의 알제리 전쟁에서 비행기를 동원해 소이탄을 무한정 폭격한 야만적 학살에 대하여, 아직, 단 한 번의 사과도 한 적이 없다. 올랑드 전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한 게 유일하다. 지네딘 지단이 백 명 나와도 프랑스는 요지부동이다. 대신 아시아 제바르를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3국출신 최초로 아카데미프랑세즈의 종신회원으로 임명하고, 제바르 역시 이 제의를 받아들인다. 아카데미프랑세즈 종신회원? 전 세계에서 프랑스어를 제일 잘 구사하는 몇 몇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그래 사학자로서 프랑스의 알제리 침공과 독립전쟁에 대하여, 여성으로 아랍 하렘 속의 여인들의 삶과 베일에 대하여, 소설가로서 프랑스어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일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제바르에게 프랑스어는 무엇일까. 정답은 스스로 입지 않을 수 없는 네소스의 셔츠. 네소스의 셔츠가 무엇인가. 반인반마 켄타우로스 족 네소스가 헤라클레스의 독화살을 맞고 죽으면서 자신의 피가 묻은 셔츠를 데이아네이라에게 주며 헤라클레스에게 입히면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유언을 남긴 그 셔츠. 결국 헤라클레스는 셔츠를 입게 되고, 독이 퍼지는 걸 느끼면서 셔츠를 벗어버리다가 살점이 뜯겨져 죽고 마는 것. 작가는 자신에게 적의 언어, 프랑스어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흐릿한 과거에 자리 잡은 언어이며, 적에게서 얻은 그 언어로는 사랑의 말을 나눌 수 없다면서.
제바르에게 프랑스어는 법정에서 판사와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들만이 쓰던 언어로 요구와 소송과 폭력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자기 피부에 닿아 자신에게 독을 퍼뜨리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지 않으면 스스로 죽고야 마는 네소스의 셔츠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