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저란트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진혜.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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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하게 몇 년 전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열여섯 살의 소년일 때, 그는 대단한 첫사랑을 했다. 상대의 이름을 ‘사라’라고 하자. 소년과 사라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을 했고, 키스를 나누었지만 더 이상은 없었다. 소년은 동정이었고 사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믿는다. 사라는 자신의 풋풋한 마음을 부모에게 알렸다. 호기심이 생긴 부모는 외동딸의 남자친구가 어떤 아이인지 궁금해 그를 저녁 만찬에 초청했다. 사라의 부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소년은 다림질한 흰 셔츠와 넥타이, 양복을 차려입고 사라의 현관문을 들어섰다. 광을 낸 구두를 신은 발을 응접실 마루에 들여놓자 소년의 코에는 마루 광택용 왁스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사라의 부모는 소년을 꽤나 마음에 들어 하여, 어머니는 자꾸 생선요리를 접시에 담아주었고, 아버지는 진짜 백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백포도주 네댓 잔을 곁들인 만찬이 끝나자 이미 깊은 밤이었다. 사라의 아버지는, 결코 소년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전히 점잖게 너무 늦은 시간이니 하루 자고 가라 은근하게 권했고, 소년 역시 정중하게 마음은 그러고 싶으나 초면에 그리 신세를 질 수 없다고 거절을 했다. 잠시 후 사라의 아버지가 다시 한 번 자고 갈 것을 권했을 때 소년은 마침내 그러하기로 했다.
  방문 앞에서 사라의 키스를 받고 침실에 든 소년은 꿈만 같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고 기뻐 어찌할 줄 몰랐다. 고양된 기분에 고급 백포도주의 취기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그리고는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깊은 밤인지는 몰랐다. 자면서 뭔가 축축한 느낌. 방이 온통 물에 젖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소년은 한 순간에 잠이 확 깨면서, 아차, 하필이면 몽정을 했구나, 라고 당황했다. 적신 리넨 위에 남을 흔적에 대한 집중으로 잠깐 고통스럽던 소년은 곧이어 그것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고, 그것이기는커녕, 차라리 몽정이었으면 귀엽기라도 했을 텐데, 배불리 먹은 저녁식사와 백포도주 전부를 침대 위에다가 토해놓은 거였다. 심지어 똥까지 싸놓았으니 이 불쌍한 소년을 어찌할까. 그의 나이 겨우 열여섯 살, 고1 정도에 불과한데. 소년은 벌떡 일어나 의자 위에 벗어놓은 셔츠와 양복과 양말을 들고, 구두를 신은 채 살금살금, 사라의 부모가 눈치 채지 못하게 집을 벗어나 벌판을 뛰기 시작했다. 수치심으로 울부짖으면서. 이후 소년은 단 한 번도 사라와 마주치치 않았다.
  <파저란트>는 이 소년이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사이의 성인남자가 된 후 연이은 여행을 떠났던 이야기다. 나는 두 번째 장chapter에 나오는 위의 에피소드를 주목했다. 열여섯 살 때 저런 경험을 당했다면, 이 소년, 이젠 소설의 화자 ‘나’가 평생 짊어지고 다녀야 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작가인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독일 각지에 친구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독일의 모든 곳을 다녀본 것도 아니고 아는 것은 더욱 아니다. 자신이 벌었는지, 가문으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의 소년, ‘나’는 고급 호텔에 숙박하며 비싼 술을 마시고 싶을 때까지 마실 수 있는 부르주아이며, 심지어 프롤레타리아들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물론 친구들 가운데는 프롤레타리아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없는 건 아니어서 일부러 다 해진 옷과 신발을 신고 다니기도 한다. ‘나’와 친구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역시 최고급 승용차인 S시리즈 메르세데스 벤츠에 카폰을 달고 다니고, 거대한 집을 몇 채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초라한 카페나 아파트에서 열리는 파티를 찾아다니며 프롤레타리아들과 마약에 취하기도 한다. 대단한 재산의 상속자 자격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인텔리나 부르주아 떨거지들을 불러 파티를 열어주기도 해야 한다. ‘나’는 이미 상당한 단계까지 알코올 의존증에 도달해 있으며 고급 담배를 거의 체인처럼 물고 다니는데 결코 아름답지 않은 담배연기를 비행기 금연석에 앉아 뿜어내는 취미가 있기도 하다. 책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는 ‘나’의 대표적인 경향은 남의 말을 경청하지 못하는 것.
  책을 열면 ‘나’가 있는 곳이 독일 최북단, 누드 비치로 유명한 쥘트 섬이다. 한때 몸이 대단히 비대한 괴링이 여름을 보내곤 한 휴양지. 한 번은 그가 ‘피와 명예의 단도’를 분실해 포상금을 걸고 해변을 샅샅이 뒤져 보이 자르센이란 젊은 농부가 포상금을 탄 적도 있는 곳. 이젠 늙은이들의 누드 비치. 이렇게 곳곳에서 ‘나’는 과거 나치의 흔적이나, 이제 나치의 적어도 일부를 계승한 것처럼 보이는 사민당-나치를 곳곳에서 불쑥 발견하기도 한다. 일찍이 나치를 탄생시켜본 경험이 있는 나라의 국민으로, 이건 마치 열여섯 살 때 겪었던 치명적인 수치스러움을 평생 지녀야 하는 ‘나’의 원죄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상대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오직 하나의 꿈을 가지고 산다. 여배우 이사벨라 로셀리니와 결혼 해 아이도 두엇 두고, 저 북쪽의 황량한 섬에서 작은 오두막을 짓고 겨울 내내 두꺼운 옷을 입은 채 세상과 연을 끊고 사는 일.
  그건 그냥 희망이다.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나’하고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아마 없을 거 같다. 그러면 희망이라기보다 꿈이다. 독일의 몇 군데를 다니면서, 당일치기로 그리스의 동성애자 해변이 있는 섬에까지 다녀와 봐도 ‘나’는 뚜렷한 정체도 없고, 목적도 없고, 그저 술을 마시고, 구토하고,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에도 어쩔 수 없이 마약 또는 신경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알약도 한 번 먹어보고, 무엇보다 정처가 없다. 스위스 취리히에 닿기 전까지. 하이델베르크와 비슷하지만 보행자 전용도로도 없고 아직도 전차가 다니는 취리히.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 아하, 토마스 만이 취리히에 묻혔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취리히 근교, 토마스 만이 잠든 공동묘지를 찾아가지만 날이 어두워져 만의 무덤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어서, 독자인 나는 뻥! 머리가 어질어질. 결말이 이런 거였어?


  <망자들>을 인상 깊게 읽어 곧바로 크라흐트의 책 두 권을 샀다. <파저란트>는 1995년에 발표했고, 우리나라에선 2012년에야 번역, 출간했다.  이 책 역시 대단히 인상 깊다. 물론 내 취향하고 맞지 않는 것도 자주 등장한다. 출연진들이 너무 자주 술과 마약을 하고, 구토도 한다. 물론 꼼꼼히 읽어보면 정말로 구토한다기보다 일종의 비유법으로 구토를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하여간 구토, 하면 좀 지저분하다. 다른 과한 장면도 있고. 그것만 아니었으면 누구에게나 권할 텐데. 그만큼 흥미진진하고, 발표한지 벌써 3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참신한데 말이다.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앞으로도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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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0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어나가다가 ‘결말이 이런 거였어?‘ 때문에 급 읽고 싶어졌는데요,
저도 마약과 구토..가 너무 싫어서 또 망설여지네요.

제가 오래전에 읽은 책들 중에서도 이런 게 있었어요.
‘에릭 라인하르트‘의 <신데렐라>라는 책인데요, 검색해보니 2010년에 번역되어 나온 책이네요.
여기에 보면 주인공이 연정을 품은 상대의 집에 찾아갔다가(사춘기였던 때로 역시 기억합니다) 그 집에서 식사를 대접받고 갑자기 설사가 나올 것 같아 그 집 화장실에 찾아갔지만, 옷을 벗는 속도가 다소 늦었던 겁니다. 네...........
그래서 팬티에.... 이 일을 어쩌나, 이걸 어떻게 해결하나 싶어 난처해 화장실에서 나가지 못하는데 하도 안나오니 바깥에서는 아 유 오케이? 차 준비해놨어, 나와서 마셔~ 하고, 소년은 에라 모르겠다, 냄새나는 팬티를 벗어던지자, 하고는 멍청하게도 그 팬티를 변기에 넣고 돌려버리는 겁니다....


이 책은 이부분만 생각나요. 책이 두꺼웠는데 책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고요. 하하.
으..싫다.

술과 마약, 구토는 너무 싫지만, 머리가 어질어질 결말이 어떤걸까 너무 궁금해서, 저는 또 장바구니에 담으러 갑니다. 그럼 이만..

Falstaff 2020-12-01 09:39   좋아요 0 | URL
으, 술, 구토 싫어하시면 읽지 마세요. 정말 힘듭니다. 소싯적에 술 마시고 똥은 싸본 적 없어도 잠자리에 구토해본 입장에서, 묘사가 너무 리얼해 정나미가 뚝 떨어질 정도입니다. ㅋㅋㅋㅋㅋ
마약 하고 취한 중에 벌어지는 일도 위에다 묘사를 안 해서 그렇지 참 역겹고요. 대신 을유에서 나온 <망자들>을 추천해도 되겠습니까?????

Falstaff 2020-12-01 09:42   좋아요 0 | URL
결말도 쇼킹한 거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어떤 책을 읽어야만 팍 공감이 와 닿을 텐데요, 그거 가르쳐드리면 스포일러, 재미가 적어질 거 같아서 제목을 숨겼습지요.

다락방 2020-12-01 09:56   좋아요 1 | URL
망자들 검색해보겠습니다. 아이참, 폴스타프님은 제가 모르는 책을 너무 많이 알고 계셔서 올 때마다 제가 검색하느라 바쁩니다. ㅎㅎ

저는 소설 읽으면서 대부분 잘 공감하는 편이긴한데 유독 마약 얘기는 힘들더라고요. 도무지 공감이 안되고 공감에의 의욕 조차도 안생기는 것 같아요. ㅠㅠ

2020-12-01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팀 오브라이언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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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팀 오브라이언 스스로가 1968년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징집되어 1969년부터 70년까지 베트남전에 사병으로 참전한 전력이 있다. 1968년에 대학을 다녔으면서도 베트남으로 가야 했던 젊은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1968년의 들불 같은 반전 운동을 겪은 미국의 젊은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청년들은 약간의 돈과 대량의 대마초가 든 가방을 등에 지고 캐나다로 거주를 옮겨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에 옮겼으며, 훨씬 더 많은 청년들은 심각하게 양심적 병역거부를 고민하다 베트남 전쟁에 휩싸이기 위한 군사교육을 받았고, 아주 적은 청년들은 미국 내에서 끝까지 참전을 거부하며 기꺼이 전과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하여 1968년 이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그 해를 기점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병사들은 전장으로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왔을 때 역시 미국 역사상 어느 전쟁과 비교해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미국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반대하고, 그 전쟁에 참전했던 것을 자랑스레 이야기하지 않는/않았던 두 번의 전쟁이, 우연하게도 동(남)아시아에서 있었던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뿐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승리하지 못했으며, 베트남에서 건국 역사상 최초로 패전의 멍에를 썼다.

  불명예스러웠던 베트남 전쟁을 다룬 많은 작품이 나와 있다. <디어 헌터>, <지옥의 묵시록>,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 <프래툰> 같은 영화부터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하얀 전쟁>으로 제목을 바꾼 안정효의 <시장과 전장>,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등의 우리나라 소설들이 떠오를 뿐, 놀랍게도 외국(특히 패전국인 미국) 문학에서 진지하게 베트남 전쟁을 그린 소설 작품은 생각나지 않는다. 장교여야 하지만 작품을 쓰기 위해 일부러 사병으로 지원해 경험한 것을 쓴 태평양 전쟁 소설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의 작가 노먼 메일러의 <밤의 군대들>은 위에서 얘기한 1968년 반전 운동을 현장 취재한 것이고, 알렉시 제니의 <프랑스식 전쟁술>은 미국과의 전쟁 이전 베트남에서 벌어진 독립투쟁으로의 인도차이나 전쟁을 부분적으로 다루었으니 그것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나도 베트남 전쟁에 관한 미국인들의 작품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팀 오브라이언의 다분히 자전적, 경험적인 소설 또는 이야기인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을 재미있게 읽었을 수밖에.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경험했던 베트남 전쟁에서의 여러 단편fragment들을 여러 매체를 통해 먼저 발표하고, 나중에 그것들을 모아 서로 연관 있게 배열하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말단 병사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책의 제목인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각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짊어지고, 들고, 몸에 부착하고 다닌 것들을 개별 장비, 무기, 보호구, 개인 지참물 등을 뜻하고, 작가는 이것들에 관해 무게, 길이 등을 독자에게 상세하게 보고한다.

  전투를 위한 준비물과 무기 말고, 소대장인 지미 크로스 중위는 뉴저지 주의 마운트 서배스천 칼리지 3학년에 재학중인 ‘마사’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보낸 편지 뭉치와 사진을 가지고 다니면서 일과가 끝나면 참호를 파고 그 안에서 보는 습관을 들였는데 이때마다 뉴햄프셔 화이트산맥으로 낭만적인 캠핑을 떠나는 상상에 젖고는 한다. 헨리 도빈스는 덩치가 거구인지라 다른 건 빠뜨리더라도 여분의 식량은 꼭 가지고 다니고, 데이비드 젠슨은 야전 위생 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어서 칫솔과 치실을 항상 지참하고 여기다가 요양휴가 중에 훔쳐온 호텔용 크기의 비누 바를 배낭 옆구리에 챙기는 걸 잊지 않는다. 4월 중순에 탄케 마을 수색 중 머리통에 총알이 박힐 예정인 테드 라벤더는 원래 겁이 많은 친구라서 이걸 보완하기 위해 진정제를 아침마다 서너 알씩 먹는 버릇이 있고 여기에 6~7 온스의 질 좋은 마리화나를 어딘가에 숨겨 다닌다. 밀림 속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콘돔은 무전병 미첼 센더스의 전투복 상의 주머니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일곱 개의 훈장을 받고 제대해 귀국하는 노먼 보커는 쓰지도 않는 일기장을, 랫 카일리는 만화책을, 인디언 출신 침례교도 카이오와는 아버지가 선물한 신약성경 없이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다.

  전쟁터는 진짜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있는 것이라 세상 어느 곳보다 징크스가 심하리라는 건 당연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만의 잡동사니를 마치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기도 하는데, 카이오와는 신약성경과 더불어 발소리를 없애주는 사슴 가죽 모카 신발 한 켤레(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아무 작품 참조), 데이브 젠슨은 카로틴이 풍부한 야맹증 개선 비타민, 리 스트렁크는 최후의 무기라고 주장하는 새총, 랫 카일리는 브랜디와 M&M 초콜릿, 테드 라벤더는 6.3 파운드나 나가는 야간투시경을, 그리고 헨리 도빈스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적으로 여자친구의 팬티스타킹을 목에 두르고 다닌다. 도빈스는 얼마후 여자친구로부터 결별 선언 편지를 받지만 잠깐 고민하다가, 그래도 팬티스타킹이 자신을 보호해주는 능력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 믿으며 계속 목에 감고 다닌 결과 책이 끝날 때까지 상처 하나 입지 않는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인간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상황을 우리는 전쟁이라 부른다. 애초에 세상에 정당한 전쟁은 없다고 믿는 나는 같은 맥락에서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 그래 이 책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참상, 시신들이 함부로 훼손된 광경, 차라리 몸이 터져 하늘로 솟구치며 나뭇가지에 바로 전까지 함께 농담한 친구의 내장이 걸리고, 나무를 기어 올라가 그걸 수습하는 일. 끊임없이 폭우가 내리는 절정의 우기에 마을의 공동변소 비슷한 용도로 사용하던 곳을 하필이면 야영지로 골랐다가, 하필이면 박격포의 집중 포격을 받고, 하필이면 가장 진중하던 카이오와가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 하필이면 똥의 늪 속으로 빠지는 걸 뻔하게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출해낼 수 없는, 참경들.

  팀 오브라이언은 참경과, 그걸 목도했던 병사들이 훗날 무력감과 후유증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이런 것들 ‘만’ 쓰고 있지 않다. 그는 과거 베트남에서 겪었던 일들과 이에 관한 트라우마와 치유라기보다는 그것, 기억들, 후유증과 함께 살아내기를 말하고 있는데, 이의 해결을 위한 방법으로의 “이야기”, 이야기를 만드는 것, 이야기를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 그것을 통해 전쟁, 궁극적으로 죽음과의 화해를 도모하고 있다. 이것이 오브라이언이 글을 쓰는 목적이라고, 단순히 이 책만 읽으면 결론을 낼 것 같다. 그래서 작가의 경험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단편의 모음을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 다 빼고, 전쟁터에서 수컷들의 일상적인 욕설도 빼고, 빼어난 문장을 중심으로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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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먹는 사람들
로맹 가리 지음, 이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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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맹 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 이상하게 안 읽히는 작가였다. 그래 이번에도 <별을 먹는 사람들>을 사놓고 4백 쪽이 넘어가는 장편인데 이걸 어떻게 읽을까, 조금 근심을 했었다. 하지만 기우. 재미있게 잘 읽었다. 로맹 가리가, 이번에 처음에 알았는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처럼 러시아 태생으로 어려서 서유럽으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물론 나보코프처럼 대 귀족 출신도 아니고, 이미 혁명도 한참 지난 1928년에야 프랑스 니스에 정착한 차이는 있지만. 중요한 경력으로 가리가 불가리아, 미국, 볼리비아, 이중에서 특히 라틴 아메리카인 볼리비아에서 외교관으로 체류한 적이 있다는 점으로 보인다. 그래 이이의 작품 가운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등의 라틴 아메리카를 무대로 하는 것들이 있나보다. 내가 가리에 대해 뭘 알아서 이렇게 말하는 건 전혀 아니고 그냥 이이의 라이브러리를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든다, 하는 수준. 이번에 읽은 <별을 먹는 사람들> 역시 라틴 아메리카의 가상 국가에서 한 독재자의 마지막 하루를 좇았다.
  책을 열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호아트 박사. 보잉기 조종석 보다 아스텍 피라미드 꼭대기의 제사장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기장이 모는 비행기를 타고 자포츨란 반도 상공을 날고 있는 중이다. 자포츨란이 어디 있는지 구태여 찾아볼 필요 없다. 내가 먼저 검색해봤다. 그런 곳, 없다. 하여간 그랬는데, 비행기가 예정에도 없던 공군기지에 착륙하더니 한 노부인을 태우는 것. 세상에, 비행기를 도중에 세워서 부인 한 명을 태워? 그렇다. 시기는 대충 1970년대 초 같고, 당시 라틴 아메리카는 못 말릴 수준의 독재와 밀림 속 인민혁명군의 무장투쟁이 한참일 때였으니, 쿠바 사태 이후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의 적화를 방지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독재자들을 지원하던 시기였고, 특히 북부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은 저 유라시아 반도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대한민국의 독재자보다 훨씬 더한 무소불위의 권세를 자랑했으니, 독재자가 자기 엄마 한 명을 수도로 불러들이기 위해 그깟 하늘을 나는 보잉기 한 대를 공군 기지에 세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호아트 박사는 미국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 수준의 기돗발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어 비록 가톨릭 국가이기는 하지만 노부인의 아들이자 이 나라의 지배자인 알마요 장군이 정식으로 초청해 막 영공을 넘어온 차이다. ‘금발의 천사장’이란 별명과 천부의 쇼맨십, 설득력과 무대매너, 여기다가 드라마틱한 효과를 연출하는 탁월한 능력으로 자주, 유명 영화배우보다 잦은 빈도로 신문기사에 등장하지만 찬사와 거의 비슷한 비율로 비난, 불만, 악의에 찬 야유의 논평을 받는 목사. 신기한 건 비난과 야유를 받는 것과 비례해 이이의 인기가 치솟는다는 것. 뭐 우리나라에도 비난을 받을수록 인기가 치솟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하다. 장관을 비롯한 집권자들한테 욕을 먹을수록 지지도가 올라가는 사람. 하여간 호아트 박사는 매년 세후 백만 달러 이상을 교회에 벌어다주면서 자신은 교회로부터 받는 봉급만 수령해 딱 그 수준에 안분하는 청렴한 인물인데, 그만큼 종교적으로는 까다롭다는 이야기겠지 뭐.
  이 목사가 공항에 도착하니, 독재자의 초청에 의한 방문이니까 당연하게 별도의 수속 없이 곧바로 리무진에 승차를 하는데, 자연스레 자기 혼자 탑승하는 줄 알았으나 동행이 있는 거였다. 마른 몸매에 키가 큰 매력적인 외모의 코펜하겐 출신 덴마크 사람 아게 올슨. 그리고 올슨의 어깨 위에 앉은 올레 옌슨. 옌슨 씨는 살과 뼈와 내장과 피 대신 목재로 만든 인형이다. 덴마크 인이 먹고 살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삼은 복화술의 주인공. 복화술? 이 이야기 하니까 떠오르는 소녀가 한 명 있다. 아무리 바빠도 이건 한 번 보고 가자.

 

 

  하여튼 박사는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닌 상태로 사화산 지대를 지나는데, 수백만 년 전에 지축을 흔들며 폭발했던 상처가 이젠 놀라운 경치로 남은 해발 2천7백 미터 고지를 지나면서 보니 목사가 탄 차 뒤로 캐딜락이 네 대가 더 따라오는 거였다.
  먼저 당당한 풍채와 콧수염과 턱수염이 아주 멋진 40대 중년 남자로 자신을 마르세이유에서 온 앙투안이라 소개한다. 앙투안 씨는 공을 열두 개 가지고 공연하는 프랑스 사람으로 2년 전에 샤를 드골에게 직접 레지옹 도뇌르 십자 명예훈장을 받은 권위 있는 예술가. 자칭 18세기의 프랑스 전통을 이어가는 고전주의자로 함께 동행한 나이 든 미국인 공연 캐스터 찰리 쿤으로부터 ‘현재로서는’ 분명한 일인자의 자리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현재로서는’이라는 단서 조항을 유난히 강조해 발음했던 것이 좀 문제이긴 하지만.
  공연 기획자 찰리 쿤은 본명이 ‘메지라 쿠라’이며 시리아 알레프 출생으로 40년도 넘어 전에 미국으로 이주해 공연기획사에서 일을 해와, 지금은 하필이면 알마요 장군이 주식의 75퍼센트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에 있는지라 장군의 요구에 맞는 할리우드 여자 영화배우를 물색, 조달하는 채홍사 역할과, 특히, 특이한 공연을 하는 새로운 재능을 찾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존 셸던이란 이름의 변호사도 끼어 있다. 이이는 알마요 장군의 어마어마한 미국 투자 자금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으며, 심지어 스위스 비밀 계좌에도 깊숙하게 관련이 있다. 이이와 동승한 사람은 허약한 젊은이로 안톤 마누레스코라는 이름의 루마니아 사람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유명 연주자이긴 하다. 루마니아의 유명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게오르게스 에네스코의 애제자로 비발디에서 프로코피예프까지 방대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 엄청난 곡들을 아무 받침대 없이 물구나무로 연주하는 기이한 광대다. 이러한 연주 방식으로 돈을 벌어 이젠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도 한 대 장만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 조만간 똑바로 서서 연주회장에서 연주하는 정식 바이올리니스트로 데뷔할 생각을 하고 있다.
  쿠바 젊은이도 한 명 있는 바, 이 젊은이는 도색, 즉 음란 공연의 대가로 쉬지 않고 열일곱 번의 정사를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벌일 수 있는 쿠바 판 변강쇠다. 이 변강쇠와 동승한 사람이 무지하게 중요한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일찍이 날아가는 비행기를 세워 타고 도착한 장군의 어머니. 이이는 적도 지방의 무더운 계곡에서 사는 인디언 쿠혼 족으로 (‘쿠혼’ 족이 어떤 사람들인지 검색해보지 마시라. 내가 먼저 해봤으니. 안 나온다. 가리가 만든 가라 원주민 종족이다.) 명품 가방에 마스탈라 잎을 잔뜩 채워 가지고 늘 한입 가득 말린 이파리를 씹고 있다. 이 이파리를 씹으면 잎에 든 성분 때문에 일종의 환각상태에 접어들어 세상사가 그렇게 힘든 줄, 심지어 배고픈 지도 모를 정도라, 마스탈라 잎을 씹는 사람들을 일컬어 “별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단다.
  이들이 수도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길가에 있는, 더럽기가 말할 수 없으나 어울리지 않게 현대식 전화기가 카운터에 놓여 있는 카페에서 차를 세우더니 이들을 호송하던 가르시아 대위가 모처에 전화를 걸고는 갑자기 독한 데킬라를 벌컥벌컥, 마누라 도망가 소주 세 병 마시고 농약 먹는 인간처럼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큰 소리로, 모랄레스 대령님, 이런 중요한 사안은 장군님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아야겠습니다. 어쩌구저쩌구 전화통에다 대고 흥분해서 떠들어 댄다. 몇 분 후, 드디어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이자 하늘을 나는 보잉기도 입 한 번 벙긋해서 떨어뜨리는 호세 알마요 장군과의 직접 통화가 이루어졌고, 당연히 그의 지시도 직접 받게 된다.
  “잘 듣게, 바보 멍청이 같으니라고. 거기 있는 자들을 모두 총살한다. 즉시 이행하도록. 잘 들었나, 가르시아? 즉시 한다. 시신은 산으로 가져가게.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그리고 모랄레스는 매장하라고 했겠지만 매장은 하지 말게. 사람들 눈에 띄도록 해야 할 걸세. 도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버리게. 잘 보이는 곳에다. 그러고 나서 나한테 보고하도록 하게.”
  지금 알마요 장군은 자신이 직접 초청한 미국 최고의 기돗발 목사와 예술가들, 심지어 자기의 생모, 게다가 변강쇠까지, 다 총살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거였다. 심지어 이곳에 막 도착한 자신의 미국인 애인까지도. 도대체 이거 뭐야. 진짜 이 사람들의 앞날, 앞날은커녕 몇 분 후에 저 먼 이국 땅, 경치만 좋은 화산지대에서 정말 숟가락 놓는 거야? 힌트. 아게 올슨의 어깨 위에 앉은 올레 옌슨은 책의 저 뒤편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음…… 피와 살로 만들어진 당신들 중 누군가 이 지상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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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4
윌리엄 골딩 지음, 안지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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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뜬 밤하늘 달이 꽉 차면 정여사 제사다. 정여사 살아생전 고등학교 훈장질을 하셔서 그랬는지, 퇴직은 중학교에서 했지만, 소년들 이야기인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그리 상찬을 했었다. 골딩이 노벨상을 탄 1983년에 번역 출간된 책을, 나는 일 년 후 지긋지긋한 군대생활을 마치고야 읽었던 바, 군역을 마치고도 이런 내용을, 그러니까 매일 밤 인간이 인간에 대한, 같은 병졸이 병졸에 대한 구타와 비인간적 대우에 아직도 학을 질려하는 아들한테, 인간본성 속의 야만과 상호의 이리상태에 대한 책을 권하시다니, 정여사께서 벌써 노망이 들기 시작한 건 아닌지 의심하며, 그저 몇 페이지 읽다가 치워버렸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정여사가 천국의 즐거움을 찾아 가시고도 일곱 해가 더 흐른 2014년에 드디어 <파리대왕>을 정식으로 읽게 되는 바, 이게 과연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소설가의 대표작으로 합당한지 의아했었던 것이, 너무 노골적으로, 침을 튀며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약시로 두꺼운 오목렌즈를 끼고 다니는 아이의 안경알로 태양광을 집중시켜 불을 얻는다고? 이게 웬일이야? 옥스퍼드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했던 골딩이 이렇게 썼다면, 실수가 아니라 극한 은유, 아니면 우화일 것인데 나는 그 비의를 밝히지 못했던 바, 차라리 이 우화 또는 극한 은유를 비난하는 치사한 방법을 택했었다.
  그리하여 한참동안 골딩을 선택하지 않았다가 36개월이 흐른 뒤에 <상속자들>을 읽었다. 참신하게도 주인공이 네안데르탈인. 평화를 사랑하는 네안데르탈인들이 호모 사피엔스들에게 사냥을 당한다는 내용. 이 책을 읽고 다시는 윌리엄 골딩을 읽지 않겠다고 했는데, <상속자들>이 후진 책이란 뜻은 ‘절대’ 아니었고 다만 나하고는 극한으로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이런 작가들이 몇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읽을 때마다 불편함을 느껴야 했던 작가 쿳시. 그러나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상속자들>을 읽고 또다시 36개월이 흐른 2020년 11월에 내 선택은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표지에 실은 <피라미드>였다. 세 권의 골딩은 삼 년 터울로 매 11월에 읽은 꼴이니 2023년 11월에는 어떤 골딩을 읽게 될까. 그때까지 책을 읽을 정도로 시력을 유지할 수 있기는 할까.
  <피라미드>는 기본적으로 계급에 관한 이야기다. 무대는 영국의 소도시 스틸본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지역. 비가 오는 여름. 주인공은 18세. 여름이 끝나면 옥스퍼드로 화학을 공부하러 떠나야 하는 나, 올리버가 아마추어치고는 매우 뛰어난 실력으로 쇼팽의 연습곡 12번 다단조를 연주하고 있다. 온 종일. 당연히 작품 10의 12번 <혁명>인줄 알았는데, 저 뒤로 가면 작품 25의 12번 <대양>이었음이 밝혀진다. 나는 <대양Ocean>이란 곡이 있는지도 몰랐다. 올리버는 이 곡을 연주하며 18세 남자의 넘치는 리비도가 필요 이상의 성녀로 승격시켜놓은 여인에 대한 희망 없는 격정적 사랑을 표현하고 있던 거였다. 18세의 남자가 어떠냐고? 당신이 여성이라면 이순원이 쓴 <19세>를 읽어보시라. 우리나라 19세면 만으로 18세니까. 그 시절의 남자들은 참 어렵다. 나는 결코 소년시대로 돌아가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은데, 물론 군대 가기 싫어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것보다 사춘기를 한 번 더 보내기가 죽기보다 싫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이모젠 글렌틀리가 그만 약혼을 해버렸던 것. 이모젠은 스물세 살. 물론 이모젠 아가씨가 올리버의 생각처럼 우아하고 고결한 여성이기는커녕 머리가 비었고 무감각하며 허영심이 충만한 여성이란 건 독자들이 나중에 발견하겠지만 그건 독후감이 끝나고 직접 읽어봐야 아실 터.
  그런데, 무대가 어디? 그렇다, 스틸본. 원문은 Stilbourne 이지만, 사산死産을 뜻하는 Still born과 발음이 같다. 아니면 적어도 매우 비슷하다. 아, 짜증나. 누가 골딩 아니랄까봐. 이랬다. 한 번 이런 마음이 드니까, 이어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아직 말도 한 번 붙여보지 않은 열여덟 살 아가씨 이비 베버컴이 과감하게 자신의 창문에 작은 돌을 던져 잠을 깨워 아직 비가 줄줄 내리는 밖으로 불러내는 것도, 옆집 사는 크랜웰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간 로버트 이완이 그녀와 함께 차를 몰고 가다가 얕은 연못에 빠져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이제 조금 후면 또다시 골딩 표 엽기 사건이 벌어지리라 예상할 수밖에. 그러나 아니었다. 올리버가 이비를 따라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달려간 작은 연못엔 바지도 못 입고 신발 한 짝도 없어진 채 이들 득득 부딪히며 와들와들 떨고 있는 의사 댁 아드님 로버트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 동네 최고 계급이랄 수 있는 돌리시 부인의 2인승 자동차를 훔쳐 타 으슥한 연못가에 와서 둘이 비비적대는 것까진 좋았는데, 누군가의 엉덩이 놀임에 의하여 브레이크가 풀리는 바람에 만유인력에 이끌려 내리막에 있던 연못에 빠져버렸다는 것.
  그러니까 이게 로버트, 올리버, 이비의 삼각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고, 또한 독자가 이들로 대변되는 스틸본 지역의 계급 상황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장면이다. 로버트의 이완네 식구들과 올리버의 식구들은 서로 데면데면하다. 로버트와 다른 의사의 아들들이 올리버에게 ‘너는 내 노예다.’라고 선언한 적이 있고, 선언의 근거로 제시한 것이, 그들은 의사의 아들인 반면 올리버는 의사의 지시에 의하여 약을 조제해야만 하는 약사의 아들이라는 점으로, 당연히 아이들은 이 때문에 서로 투닥투닥 싸웠고,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져 공기총으로 상대방의 머리위에다 대고 위협사격까지 하는 선까지 갔다가, 비즈니스를 계속해야 하니까 다시 정상을 찾았던 것. 여기에 이비는, 일단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역인 챈들러스 크로스에 산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처지는데다가, 아버지 베버컴 중사로 말하자면 시청관리인이며 울타리와 교구의 관리인이자 18세기 의상을 걸친 채 마을의 정리, 그러니까 잡부보단 좀 나은 자리에 있었으니, 알기 쉽게 부등호를 사용한 식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로버트 > 올리버 >>> 이비
  근데 어찌하여 로버트와 이비가 차 안에서 서로 부비적댈 수 있었느냐고? 서로 눈이 맞을 때까지는 계급이 없다. 이들의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풀린 걸 알아챘을 때는 로버트의 바지가 발목까지 내려와 있는 상태였고, 이비의 발이 차창 위에 올려 있었기 때문에 눈을 뻔하게 뜬 채 그대로 연못에 잠겨야 했던 것. 이런 상태에서 수습을 위해 올리버가 도착해 성공적으로 이들을 위기에서 구하지만, 다음날 이비의 눈엔 베버컴 중위에 의하여 시퍼런 원이 그려져 있었고, 베버컴 씨는 마을을 돌면서 “호, 와, 호, 와, 호, 와! 찾습니다. 챈들러스 레인에서 채플로피즈와 챈들러스크로스 사이에서 금 십자가 목걸이. 이니셜 E와 B가 있어요. Amor Vincit omnia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라고 새겨져 있고요. 찾은 사람에겐 보상금이 있습니다.” 라고 외치며 다닌다. 어제 와중에 목걸이를 잃어버린 거다.
  그리고 다시 계급이야기. 올리버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로버트는 다음날 아침 올리버에게 약간의 비웃음을 받고는 곧바로 싸움을 청해 투닥투닥 주먹다짐을 벌여 코가 깨진다. 베버컴 씨는 딸의 눈에 안와골절을 입혔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단단한 주먹을 날린 반면에 마을의 유일한 가톨릭 신자인 베버컴 부인 생각엔, 로버트 이완 군은 도무지 올라갈 수 없는 나무이지만 그래도 올리버 집안 정도는 적어도 넘볼 수 있는 수준일 것이라 여겨 올리버를 볼 때마다 호의 가득한 웃음을 보낸다.
  그럼 이비는? 로버트에겐 대단히 유리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오토바이. 날씬하고 키가 크다는 거. 올리버는 단단하지만 투박하다. 1920년대에 오토바이가 있는 젊은이가 그리 흔했을까. 그러나 로버트는 크랜웰로 돌아가야 했고, 아직 옥스퍼드에 입학하려면 시간이 남아 있는 올리버는 시시때때로 이비에게 돌진하는데, 어떻게 됐을까? 이들의 나이 18세. 이비로 하여금 올리버의 깊은 상흔, 이모젠의 그림자를 지우게 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안 알려줌.
  골딩의 작품으로는 예외적으로 재미있기까지 하다. 뒤에 해설엔 리얼리즘 작품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깟 사조야 무슨 관계가 있으랴. 여태 이야기한 건 전체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먼 훗날 이제 중년 또는 노년을 맞은 올리버가 고급 승용차를 몰고 스틸본 시로 돌아와 추억이 서린 장소를 돌아볼 때까지 굵직한 에피소드 세 개가 들어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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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페터 바이스 지음 / 한국문화사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에잇.

독자가 책 읽고 독후감 쓰면 그걸로 끝이지, 역자, 출판사가 구질구질하게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것이 짜증나 내용은 다 삭제해버렸다.

한 번 책을 내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거, 모르시나?

 

독자여, 도서관에 가서 직접 읽어보시고 판단해보시라. 내가 뭐라 썼겠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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