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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저란트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진혜.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평점 :
정확하게 몇 년 전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열여섯 살의 소년일 때, 그는 대단한 첫사랑을 했다. 상대의 이름을 ‘사라’라고 하자. 소년과 사라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을 했고, 키스를 나누었지만 더 이상은 없었다. 소년은 동정이었고 사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믿는다. 사라는 자신의 풋풋한 마음을 부모에게 알렸다. 호기심이 생긴 부모는 외동딸의 남자친구가 어떤 아이인지 궁금해 그를 저녁 만찬에 초청했다. 사라의 부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소년은 다림질한 흰 셔츠와 넥타이, 양복을 차려입고 사라의 현관문을 들어섰다. 광을 낸 구두를 신은 발을 응접실 마루에 들여놓자 소년의 코에는 마루 광택용 왁스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사라의 부모는 소년을 꽤나 마음에 들어 하여, 어머니는 자꾸 생선요리를 접시에 담아주었고, 아버지는 진짜 백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백포도주 네댓 잔을 곁들인 만찬이 끝나자 이미 깊은 밤이었다. 사라의 아버지는, 결코 소년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전히 점잖게 너무 늦은 시간이니 하루 자고 가라 은근하게 권했고, 소년 역시 정중하게 마음은 그러고 싶으나 초면에 그리 신세를 질 수 없다고 거절을 했다. 잠시 후 사라의 아버지가 다시 한 번 자고 갈 것을 권했을 때 소년은 마침내 그러하기로 했다.
방문 앞에서 사라의 키스를 받고 침실에 든 소년은 꿈만 같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고 기뻐 어찌할 줄 몰랐다. 고양된 기분에 고급 백포도주의 취기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그리고는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깊은 밤인지는 몰랐다. 자면서 뭔가 축축한 느낌. 방이 온통 물에 젖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소년은 한 순간에 잠이 확 깨면서, 아차, 하필이면 몽정을 했구나, 라고 당황했다. 적신 리넨 위에 남을 흔적에 대한 집중으로 잠깐 고통스럽던 소년은 곧이어 그것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고, 그것이기는커녕, 차라리 몽정이었으면 귀엽기라도 했을 텐데, 배불리 먹은 저녁식사와 백포도주 전부를 침대 위에다가 토해놓은 거였다. 심지어 똥까지 싸놓았으니 이 불쌍한 소년을 어찌할까. 그의 나이 겨우 열여섯 살, 고1 정도에 불과한데. 소년은 벌떡 일어나 의자 위에 벗어놓은 셔츠와 양복과 양말을 들고, 구두를 신은 채 살금살금, 사라의 부모가 눈치 채지 못하게 집을 벗어나 벌판을 뛰기 시작했다. 수치심으로 울부짖으면서. 이후 소년은 단 한 번도 사라와 마주치치 않았다.
<파저란트>는 이 소년이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사이의 성인남자가 된 후 연이은 여행을 떠났던 이야기다. 나는 두 번째 장chapter에 나오는 위의 에피소드를 주목했다. 열여섯 살 때 저런 경험을 당했다면, 이 소년, 이젠 소설의 화자 ‘나’가 평생 짊어지고 다녀야 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작가인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독일 각지에 친구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독일의 모든 곳을 다녀본 것도 아니고 아는 것은 더욱 아니다. 자신이 벌었는지, 가문으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의 소년, ‘나’는 고급 호텔에 숙박하며 비싼 술을 마시고 싶을 때까지 마실 수 있는 부르주아이며, 심지어 프롤레타리아들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물론 친구들 가운데는 프롤레타리아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없는 건 아니어서 일부러 다 해진 옷과 신발을 신고 다니기도 한다. ‘나’와 친구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역시 최고급 승용차인 S시리즈 메르세데스 벤츠에 카폰을 달고 다니고, 거대한 집을 몇 채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초라한 카페나 아파트에서 열리는 파티를 찾아다니며 프롤레타리아들과 마약에 취하기도 한다. 대단한 재산의 상속자 자격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인텔리나 부르주아 떨거지들을 불러 파티를 열어주기도 해야 한다. ‘나’는 이미 상당한 단계까지 알코올 의존증에 도달해 있으며 고급 담배를 거의 체인처럼 물고 다니는데 결코 아름답지 않은 담배연기를 비행기 금연석에 앉아 뿜어내는 취미가 있기도 하다. 책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는 ‘나’의 대표적인 경향은 남의 말을 경청하지 못하는 것.
책을 열면 ‘나’가 있는 곳이 독일 최북단, 누드 비치로 유명한 쥘트 섬이다. 한때 몸이 대단히 비대한 괴링이 여름을 보내곤 한 휴양지. 한 번은 그가 ‘피와 명예의 단도’를 분실해 포상금을 걸고 해변을 샅샅이 뒤져 보이 자르센이란 젊은 농부가 포상금을 탄 적도 있는 곳. 이젠 늙은이들의 누드 비치. 이렇게 곳곳에서 ‘나’는 과거 나치의 흔적이나, 이제 나치의 적어도 일부를 계승한 것처럼 보이는 사민당-나치를 곳곳에서 불쑥 발견하기도 한다. 일찍이 나치를 탄생시켜본 경험이 있는 나라의 국민으로, 이건 마치 열여섯 살 때 겪었던 치명적인 수치스러움을 평생 지녀야 하는 ‘나’의 원죄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상대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오직 하나의 꿈을 가지고 산다. 여배우 이사벨라 로셀리니와 결혼 해 아이도 두엇 두고, 저 북쪽의 황량한 섬에서 작은 오두막을 짓고 겨울 내내 두꺼운 옷을 입은 채 세상과 연을 끊고 사는 일.
그건 그냥 희망이다.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나’하고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아마 없을 거 같다. 그러면 희망이라기보다 꿈이다. 독일의 몇 군데를 다니면서, 당일치기로 그리스의 동성애자 해변이 있는 섬에까지 다녀와 봐도 ‘나’는 뚜렷한 정체도 없고, 목적도 없고, 그저 술을 마시고, 구토하고,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에도 어쩔 수 없이 마약 또는 신경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알약도 한 번 먹어보고, 무엇보다 정처가 없다. 스위스 취리히에 닿기 전까지. 하이델베르크와 비슷하지만 보행자 전용도로도 없고 아직도 전차가 다니는 취리히.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 아하, 토마스 만이 취리히에 묻혔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취리히 근교, 토마스 만이 잠든 공동묘지를 찾아가지만 날이 어두워져 만의 무덤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어서, 독자인 나는 뻥! 머리가 어질어질. 결말이 이런 거였어?
<망자들>을 인상 깊게 읽어 곧바로 크라흐트의 책 두 권을 샀다. <파저란트>는 1995년에 발표했고, 우리나라에선 2012년에야 번역, 출간했다. 이 책 역시 대단히 인상 깊다. 물론 내 취향하고 맞지 않는 것도 자주 등장한다. 출연진들이 너무 자주 술과 마약을 하고, 구토도 한다. 물론 꼼꼼히 읽어보면 정말로 구토한다기보다 일종의 비유법으로 구토를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하여간 구토, 하면 좀 지저분하다. 다른 과한 장면도 있고. 그것만 아니었으면 누구에게나 권할 텐데. 그만큼 흥미진진하고, 발표한지 벌써 3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참신한데 말이다.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앞으로도 지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