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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먹는 사람들
로맹 가리 지음, 이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로맹 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 이상하게 안 읽히는 작가였다. 그래 이번에도 <별을 먹는 사람들>을 사놓고 4백 쪽이 넘어가는 장편인데 이걸 어떻게 읽을까, 조금 근심을 했었다. 하지만 기우. 재미있게 잘 읽었다. 로맹 가리가, 이번에 처음에 알았는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처럼 러시아 태생으로 어려서 서유럽으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물론 나보코프처럼 대 귀족 출신도 아니고, 이미 혁명도 한참 지난 1928년에야 프랑스 니스에 정착한 차이는 있지만. 중요한 경력으로 가리가 불가리아, 미국, 볼리비아, 이중에서 특히 라틴 아메리카인 볼리비아에서 외교관으로 체류한 적이 있다는 점으로 보인다. 그래 이이의 작품 가운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등의 라틴 아메리카를 무대로 하는 것들이 있나보다. 내가 가리에 대해 뭘 알아서 이렇게 말하는 건 전혀 아니고 그냥 이이의 라이브러리를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든다, 하는 수준. 이번에 읽은 <별을 먹는 사람들> 역시 라틴 아메리카의 가상 국가에서 한 독재자의 마지막 하루를 좇았다.
책을 열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호아트 박사. 보잉기 조종석 보다 아스텍 피라미드 꼭대기의 제사장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기장이 모는 비행기를 타고 자포츨란 반도 상공을 날고 있는 중이다. 자포츨란이 어디 있는지 구태여 찾아볼 필요 없다. 내가 먼저 검색해봤다. 그런 곳, 없다. 하여간 그랬는데, 비행기가 예정에도 없던 공군기지에 착륙하더니 한 노부인을 태우는 것. 세상에, 비행기를 도중에 세워서 부인 한 명을 태워? 그렇다. 시기는 대충 1970년대 초 같고, 당시 라틴 아메리카는 못 말릴 수준의 독재와 밀림 속 인민혁명군의 무장투쟁이 한참일 때였으니, 쿠바 사태 이후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의 적화를 방지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독재자들을 지원하던 시기였고, 특히 북부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은 저 유라시아 반도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대한민국의 독재자보다 훨씬 더한 무소불위의 권세를 자랑했으니, 독재자가 자기 엄마 한 명을 수도로 불러들이기 위해 그깟 하늘을 나는 보잉기 한 대를 공군 기지에 세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호아트 박사는 미국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 수준의 기돗발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어 비록 가톨릭 국가이기는 하지만 노부인의 아들이자 이 나라의 지배자인 알마요 장군이 정식으로 초청해 막 영공을 넘어온 차이다. ‘금발의 천사장’이란 별명과 천부의 쇼맨십, 설득력과 무대매너, 여기다가 드라마틱한 효과를 연출하는 탁월한 능력으로 자주, 유명 영화배우보다 잦은 빈도로 신문기사에 등장하지만 찬사와 거의 비슷한 비율로 비난, 불만, 악의에 찬 야유의 논평을 받는 목사. 신기한 건 비난과 야유를 받는 것과 비례해 이이의 인기가 치솟는다는 것. 뭐 우리나라에도 비난을 받을수록 인기가 치솟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하다. 장관을 비롯한 집권자들한테 욕을 먹을수록 지지도가 올라가는 사람. 하여간 호아트 박사는 매년 세후 백만 달러 이상을 교회에 벌어다주면서 자신은 교회로부터 받는 봉급만 수령해 딱 그 수준에 안분하는 청렴한 인물인데, 그만큼 종교적으로는 까다롭다는 이야기겠지 뭐.
이 목사가 공항에 도착하니, 독재자의 초청에 의한 방문이니까 당연하게 별도의 수속 없이 곧바로 리무진에 승차를 하는데, 자연스레 자기 혼자 탑승하는 줄 알았으나 동행이 있는 거였다. 마른 몸매에 키가 큰 매력적인 외모의 코펜하겐 출신 덴마크 사람 아게 올슨. 그리고 올슨의 어깨 위에 앉은 올레 옌슨. 옌슨 씨는 살과 뼈와 내장과 피 대신 목재로 만든 인형이다. 덴마크 인이 먹고 살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삼은 복화술의 주인공. 복화술? 이 이야기 하니까 떠오르는 소녀가 한 명 있다. 아무리 바빠도 이건 한 번 보고 가자.
하여튼 박사는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닌 상태로 사화산 지대를 지나는데, 수백만 년 전에 지축을 흔들며 폭발했던 상처가 이젠 놀라운 경치로 남은 해발 2천7백 미터 고지를 지나면서 보니 목사가 탄 차 뒤로 캐딜락이 네 대가 더 따라오는 거였다.
먼저 당당한 풍채와 콧수염과 턱수염이 아주 멋진 40대 중년 남자로 자신을 마르세이유에서 온 앙투안이라 소개한다. 앙투안 씨는 공을 열두 개 가지고 공연하는 프랑스 사람으로 2년 전에 샤를 드골에게 직접 레지옹 도뇌르 십자 명예훈장을 받은 권위 있는 예술가. 자칭 18세기의 프랑스 전통을 이어가는 고전주의자로 함께 동행한 나이 든 미국인 공연 캐스터 찰리 쿤으로부터 ‘현재로서는’ 분명한 일인자의 자리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현재로서는’이라는 단서 조항을 유난히 강조해 발음했던 것이 좀 문제이긴 하지만.
공연 기획자 찰리 쿤은 본명이 ‘메지라 쿠라’이며 시리아 알레프 출생으로 40년도 넘어 전에 미국으로 이주해 공연기획사에서 일을 해와, 지금은 하필이면 알마요 장군이 주식의 75퍼센트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에 있는지라 장군의 요구에 맞는 할리우드 여자 영화배우를 물색, 조달하는 채홍사 역할과, 특히, 특이한 공연을 하는 새로운 재능을 찾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존 셸던이란 이름의 변호사도 끼어 있다. 이이는 알마요 장군의 어마어마한 미국 투자 자금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으며, 심지어 스위스 비밀 계좌에도 깊숙하게 관련이 있다. 이이와 동승한 사람은 허약한 젊은이로 안톤 마누레스코라는 이름의 루마니아 사람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유명 연주자이긴 하다. 루마니아의 유명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게오르게스 에네스코의 애제자로 비발디에서 프로코피예프까지 방대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 엄청난 곡들을 아무 받침대 없이 물구나무로 연주하는 기이한 광대다. 이러한 연주 방식으로 돈을 벌어 이젠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도 한 대 장만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 조만간 똑바로 서서 연주회장에서 연주하는 정식 바이올리니스트로 데뷔할 생각을 하고 있다.
쿠바 젊은이도 한 명 있는 바, 이 젊은이는 도색, 즉 음란 공연의 대가로 쉬지 않고 열일곱 번의 정사를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벌일 수 있는 쿠바 판 변강쇠다. 이 변강쇠와 동승한 사람이 무지하게 중요한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일찍이 날아가는 비행기를 세워 타고 도착한 장군의 어머니. 이이는 적도 지방의 무더운 계곡에서 사는 인디언 쿠혼 족으로 (‘쿠혼’ 족이 어떤 사람들인지 검색해보지 마시라. 내가 먼저 해봤으니. 안 나온다. 가리가 만든 가라 원주민 종족이다.) 명품 가방에 마스탈라 잎을 잔뜩 채워 가지고 늘 한입 가득 말린 이파리를 씹고 있다. 이 이파리를 씹으면 잎에 든 성분 때문에 일종의 환각상태에 접어들어 세상사가 그렇게 힘든 줄, 심지어 배고픈 지도 모를 정도라, 마스탈라 잎을 씹는 사람들을 일컬어 “별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단다.
이들이 수도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길가에 있는, 더럽기가 말할 수 없으나 어울리지 않게 현대식 전화기가 카운터에 놓여 있는 카페에서 차를 세우더니 이들을 호송하던 가르시아 대위가 모처에 전화를 걸고는 갑자기 독한 데킬라를 벌컥벌컥, 마누라 도망가 소주 세 병 마시고 농약 먹는 인간처럼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큰 소리로, 모랄레스 대령님, 이런 중요한 사안은 장군님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아야겠습니다. 어쩌구저쩌구 전화통에다 대고 흥분해서 떠들어 댄다. 몇 분 후, 드디어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이자 하늘을 나는 보잉기도 입 한 번 벙긋해서 떨어뜨리는 호세 알마요 장군과의 직접 통화가 이루어졌고, 당연히 그의 지시도 직접 받게 된다.
“잘 듣게, 바보 멍청이 같으니라고. 거기 있는 자들을 모두 총살한다. 즉시 이행하도록. 잘 들었나, 가르시아? 즉시 한다. 시신은 산으로 가져가게.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그리고 모랄레스는 매장하라고 했겠지만 매장은 하지 말게. 사람들 눈에 띄도록 해야 할 걸세. 도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버리게. 잘 보이는 곳에다. 그러고 나서 나한테 보고하도록 하게.”
지금 알마요 장군은 자신이 직접 초청한 미국 최고의 기돗발 목사와 예술가들, 심지어 자기의 생모, 게다가 변강쇠까지, 다 총살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거였다. 심지어 이곳에 막 도착한 자신의 미국인 애인까지도. 도대체 이거 뭐야. 진짜 이 사람들의 앞날, 앞날은커녕 몇 분 후에 저 먼 이국 땅, 경치만 좋은 화산지대에서 정말 숟가락 놓는 거야? 힌트. 아게 올슨의 어깨 위에 앉은 올레 옌슨은 책의 저 뒤편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음…… 피와 살로 만들어진 당신들 중 누군가 이 지상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