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4
윌리엄 골딩 지음, 안지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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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뜬 밤하늘 달이 꽉 차면 정여사 제사다. 정여사 살아생전 고등학교 훈장질을 하셔서 그랬는지, 퇴직은 중학교에서 했지만, 소년들 이야기인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그리 상찬을 했었다. 골딩이 노벨상을 탄 1983년에 번역 출간된 책을, 나는 일 년 후 지긋지긋한 군대생활을 마치고야 읽었던 바, 군역을 마치고도 이런 내용을, 그러니까 매일 밤 인간이 인간에 대한, 같은 병졸이 병졸에 대한 구타와 비인간적 대우에 아직도 학을 질려하는 아들한테, 인간본성 속의 야만과 상호의 이리상태에 대한 책을 권하시다니, 정여사께서 벌써 노망이 들기 시작한 건 아닌지 의심하며, 그저 몇 페이지 읽다가 치워버렸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정여사가 천국의 즐거움을 찾아 가시고도 일곱 해가 더 흐른 2014년에 드디어 <파리대왕>을 정식으로 읽게 되는 바, 이게 과연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소설가의 대표작으로 합당한지 의아했었던 것이, 너무 노골적으로, 침을 튀며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약시로 두꺼운 오목렌즈를 끼고 다니는 아이의 안경알로 태양광을 집중시켜 불을 얻는다고? 이게 웬일이야? 옥스퍼드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했던 골딩이 이렇게 썼다면, 실수가 아니라 극한 은유, 아니면 우화일 것인데 나는 그 비의를 밝히지 못했던 바, 차라리 이 우화 또는 극한 은유를 비난하는 치사한 방법을 택했었다.
  그리하여 한참동안 골딩을 선택하지 않았다가 36개월이 흐른 뒤에 <상속자들>을 읽었다. 참신하게도 주인공이 네안데르탈인. 평화를 사랑하는 네안데르탈인들이 호모 사피엔스들에게 사냥을 당한다는 내용. 이 책을 읽고 다시는 윌리엄 골딩을 읽지 않겠다고 했는데, <상속자들>이 후진 책이란 뜻은 ‘절대’ 아니었고 다만 나하고는 극한으로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이런 작가들이 몇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읽을 때마다 불편함을 느껴야 했던 작가 쿳시. 그러나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상속자들>을 읽고 또다시 36개월이 흐른 2020년 11월에 내 선택은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표지에 실은 <피라미드>였다. 세 권의 골딩은 삼 년 터울로 매 11월에 읽은 꼴이니 2023년 11월에는 어떤 골딩을 읽게 될까. 그때까지 책을 읽을 정도로 시력을 유지할 수 있기는 할까.
  <피라미드>는 기본적으로 계급에 관한 이야기다. 무대는 영국의 소도시 스틸본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지역. 비가 오는 여름. 주인공은 18세. 여름이 끝나면 옥스퍼드로 화학을 공부하러 떠나야 하는 나, 올리버가 아마추어치고는 매우 뛰어난 실력으로 쇼팽의 연습곡 12번 다단조를 연주하고 있다. 온 종일. 당연히 작품 10의 12번 <혁명>인줄 알았는데, 저 뒤로 가면 작품 25의 12번 <대양>이었음이 밝혀진다. 나는 <대양Ocean>이란 곡이 있는지도 몰랐다. 올리버는 이 곡을 연주하며 18세 남자의 넘치는 리비도가 필요 이상의 성녀로 승격시켜놓은 여인에 대한 희망 없는 격정적 사랑을 표현하고 있던 거였다. 18세의 남자가 어떠냐고? 당신이 여성이라면 이순원이 쓴 <19세>를 읽어보시라. 우리나라 19세면 만으로 18세니까. 그 시절의 남자들은 참 어렵다. 나는 결코 소년시대로 돌아가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은데, 물론 군대 가기 싫어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것보다 사춘기를 한 번 더 보내기가 죽기보다 싫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이모젠 글렌틀리가 그만 약혼을 해버렸던 것. 이모젠은 스물세 살. 물론 이모젠 아가씨가 올리버의 생각처럼 우아하고 고결한 여성이기는커녕 머리가 비었고 무감각하며 허영심이 충만한 여성이란 건 독자들이 나중에 발견하겠지만 그건 독후감이 끝나고 직접 읽어봐야 아실 터.
  그런데, 무대가 어디? 그렇다, 스틸본. 원문은 Stilbourne 이지만, 사산死産을 뜻하는 Still born과 발음이 같다. 아니면 적어도 매우 비슷하다. 아, 짜증나. 누가 골딩 아니랄까봐. 이랬다. 한 번 이런 마음이 드니까, 이어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아직 말도 한 번 붙여보지 않은 열여덟 살 아가씨 이비 베버컴이 과감하게 자신의 창문에 작은 돌을 던져 잠을 깨워 아직 비가 줄줄 내리는 밖으로 불러내는 것도, 옆집 사는 크랜웰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간 로버트 이완이 그녀와 함께 차를 몰고 가다가 얕은 연못에 빠져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이제 조금 후면 또다시 골딩 표 엽기 사건이 벌어지리라 예상할 수밖에. 그러나 아니었다. 올리버가 이비를 따라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달려간 작은 연못엔 바지도 못 입고 신발 한 짝도 없어진 채 이들 득득 부딪히며 와들와들 떨고 있는 의사 댁 아드님 로버트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 동네 최고 계급이랄 수 있는 돌리시 부인의 2인승 자동차를 훔쳐 타 으슥한 연못가에 와서 둘이 비비적대는 것까진 좋았는데, 누군가의 엉덩이 놀임에 의하여 브레이크가 풀리는 바람에 만유인력에 이끌려 내리막에 있던 연못에 빠져버렸다는 것.
  그러니까 이게 로버트, 올리버, 이비의 삼각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고, 또한 독자가 이들로 대변되는 스틸본 지역의 계급 상황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장면이다. 로버트의 이완네 식구들과 올리버의 식구들은 서로 데면데면하다. 로버트와 다른 의사의 아들들이 올리버에게 ‘너는 내 노예다.’라고 선언한 적이 있고, 선언의 근거로 제시한 것이, 그들은 의사의 아들인 반면 올리버는 의사의 지시에 의하여 약을 조제해야만 하는 약사의 아들이라는 점으로, 당연히 아이들은 이 때문에 서로 투닥투닥 싸웠고,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져 공기총으로 상대방의 머리위에다 대고 위협사격까지 하는 선까지 갔다가, 비즈니스를 계속해야 하니까 다시 정상을 찾았던 것. 여기에 이비는, 일단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역인 챈들러스 크로스에 산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처지는데다가, 아버지 베버컴 중사로 말하자면 시청관리인이며 울타리와 교구의 관리인이자 18세기 의상을 걸친 채 마을의 정리, 그러니까 잡부보단 좀 나은 자리에 있었으니, 알기 쉽게 부등호를 사용한 식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로버트 > 올리버 >>> 이비
  근데 어찌하여 로버트와 이비가 차 안에서 서로 부비적댈 수 있었느냐고? 서로 눈이 맞을 때까지는 계급이 없다. 이들의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풀린 걸 알아챘을 때는 로버트의 바지가 발목까지 내려와 있는 상태였고, 이비의 발이 차창 위에 올려 있었기 때문에 눈을 뻔하게 뜬 채 그대로 연못에 잠겨야 했던 것. 이런 상태에서 수습을 위해 올리버가 도착해 성공적으로 이들을 위기에서 구하지만, 다음날 이비의 눈엔 베버컴 중위에 의하여 시퍼런 원이 그려져 있었고, 베버컴 씨는 마을을 돌면서 “호, 와, 호, 와, 호, 와! 찾습니다. 챈들러스 레인에서 채플로피즈와 챈들러스크로스 사이에서 금 십자가 목걸이. 이니셜 E와 B가 있어요. Amor Vincit omnia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라고 새겨져 있고요. 찾은 사람에겐 보상금이 있습니다.” 라고 외치며 다닌다. 어제 와중에 목걸이를 잃어버린 거다.
  그리고 다시 계급이야기. 올리버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로버트는 다음날 아침 올리버에게 약간의 비웃음을 받고는 곧바로 싸움을 청해 투닥투닥 주먹다짐을 벌여 코가 깨진다. 베버컴 씨는 딸의 눈에 안와골절을 입혔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단단한 주먹을 날린 반면에 마을의 유일한 가톨릭 신자인 베버컴 부인 생각엔, 로버트 이완 군은 도무지 올라갈 수 없는 나무이지만 그래도 올리버 집안 정도는 적어도 넘볼 수 있는 수준일 것이라 여겨 올리버를 볼 때마다 호의 가득한 웃음을 보낸다.
  그럼 이비는? 로버트에겐 대단히 유리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오토바이. 날씬하고 키가 크다는 거. 올리버는 단단하지만 투박하다. 1920년대에 오토바이가 있는 젊은이가 그리 흔했을까. 그러나 로버트는 크랜웰로 돌아가야 했고, 아직 옥스퍼드에 입학하려면 시간이 남아 있는 올리버는 시시때때로 이비에게 돌진하는데, 어떻게 됐을까? 이들의 나이 18세. 이비로 하여금 올리버의 깊은 상흔, 이모젠의 그림자를 지우게 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안 알려줌.
  골딩의 작품으로는 예외적으로 재미있기까지 하다. 뒤에 해설엔 리얼리즘 작품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깟 사조야 무슨 관계가 있으랴. 여태 이야기한 건 전체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먼 훗날 이제 중년 또는 노년을 맞은 올리버가 고급 승용차를 몰고 스틸본 시로 돌아와 추억이 서린 장소를 돌아볼 때까지 굵직한 에피소드 세 개가 들어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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