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발신자 - 프루스트 미출간 단편선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윤진 옮김, 뤼크 프레스 해제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지난 달엔 프루스트 소설집 《질투의 끝》을 읽었다. 도서관 홈페이지의 관심도서에 몇 년 동안 쌓아두기 만했다가 이웃분의 말씀 끝에 나와, 아이쿠 싶어서 얼른, 재미있게 읽었다. 이번엔 혹시 프루스트의 책 가운데 내가 모르는 것이 또 있을까 싶어 서가를 뒤지다가 2022년에 문학동네에서 낸 《알 수 없는 발신자》를 찾았다. 부제가 “프루스트 미출간 단편선”이다.

  아시는 분은 아신다. 내가 이 “미출간 작품”을 별로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걸. 프루스트가 죽은 지 벌써 백 년이 넘었다. 이 책 나올 때가 딱 백 년이 되는 해였던 걸 보면 문학동네가 딱 시기를 맞춰 프루스트 마케팅을 한 걸로 보이며, 같은 해 2월에도 현암사에서 같은 레퍼토리(실린 작품들)로 “미출간 작품집” 《밤이 오기 전에》를 내기도 했다. 이 번역서의 원본 또한 2019년에 나왔는데, 여러 번 주장했던 내 생각은, 만일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품질이 좋았다면, 좋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면, 죽고나서 97년이 지나서야 책으로 찍었을까? 하는 거.


  이 책 속에는 겨우 두 페이지 분량밖에 되지 않는 미완성 작품도 들어 있다. 독자는 이걸 과연 작품으로 봐야 할까? 혹시 작품 쓰기 전에 메모 비슷하게, 아니면 좀 혹독하게 말해서 끄적인 낙서 정도로 치부해도, 기껏 책을 낸 출판사나 역자는 기분 나쁠지 몰라도, 안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도 이미 너무 올드한(확실히 외래어 남용이란 지탄을 받아 마땅한 표현이다) 것들을. 뭐가 그리 올드하냐고? 예컨대 이런 문장들?

  “저는 당신의 몸을 원합니다. 그럴 수 없음에 절망과 광란에 빠져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에 종이를 구기고 나무껍질에 이름을 새기고 바람에 대고 혹은 바다를 향해 이름을 부르듯이, 그렇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제 입으로 당신의 입꼬리가 올라가게 만들 수 있다면 내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똑같이 저를 달아오르게 만듭니다. 지금 내가 바로 그 욕망으로 제정신이 아님을 이 편지를 받은 부인께선 알 수 있을 겁니다.” (p.56)

  이 편지를 쓴 사람이 책의 표제작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발신자” 크리스티안이다. 발신자가 그리 몸을 원하는 문제의 부인은 프랑수아즈인데, 이 편지를 죽어가는 그가 마지막 소원을 담아 쓴 편지인 걸 알고, 소원을 들어주려 자기 고해 신부까지 불러 사정을 설명해봤건만 신부는 딱 잘라 안 된다고 하고, 크리스티안까지 마지막 숨이 넘어간다는 스토리. 뤼크 프레스라는 이름의 프루스트 연구자는 이 작품이 189X년에 쓴 것으로 추정하지만 발신자가 누군인지 모르는 이 편지만 읽어보면, 19세기라도 세기말이 아니라 세기 초중반에 썼다고 해도 그리 참신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니 내가 비록 문외한이더라도 올드하다고 입을 놀릴 수 있었겠지.


  물론 프루스트다운 길고 유려한 문장이야 말 해 뭐하겠고, 이런 긴 글을 유려하게 번역하는 윤진의 우리말 실력이야 내가 진작 알고 있는 터, 여기에 관해서는 도무지 까탈을 잡을 수 없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거다. 그리하여 아마추어가 함부로 평을 하자면, 해제를 쓴 뤼크 프레스처럼 프루스트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닌 일반 독자가, 프루스트한테 환장을 하지 않았으면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는 것.

  이 책에서 중요한 건 프루스트의 미발표작, 메모 또는 끄적인 낙서를 읽는 것보다, 오히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뤼크 프레스의 해제를 읽는 것일 수 있다. 이 책이 “옮긴이의 말”까지 모두 합쳐 209쪽인데, 프레스 교수가 쓴 서문이 34쪽에서 끝난다. 그러고 마는 것도 아니라서, 각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를 시작하기 전에 각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에 관한 프레스의 해설이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한다.

  또 있다. 각 페이지 아랫동네에 자잘한 글씨로 쓰인 각주. 멀미 날만큼, 하늘의 별만큼 달려 있어서 표제작 <알 수 없는 발신자>에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150개의 각주를 달았다. 처음엔 각주 표시가 있으면 습관적으로 본문 아래 각주를 한 번씩 찾다 보다가 딱 두 페이지 넘긴 다음부터는 각주 표시가 아무리 다닥다닥 붙어도 문학동네, 아니, 각주동네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본문만 읽고 지나가게 된다. 아니라고? 당신은 정말로 단편 분량도 되지 않는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를 읽을 때마다 각주동네 구경까지 꼬박꼬박 하셨다고? 그럼 당신은 프루스트한테 환장한 거 맞다. 그것도 1급 환장.


  그래도 내 마음에 딱 드는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도 있다. <베토벤 8번 교향곡 이후>.

  나는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베토벤 교향곡 가운데 4, 6, 8번이 홀수 번호보다 더 좋아졌다. 이 가운데서도 8번이 참 좋다. 뭐라? 8번이 <영웅>, <운명>, 위대한 7번, 그리고 <합창>보다 더 좋다고? 그렇다. 그거야 내 마음이지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잖여? 그잖여?

  8번 중에서도 3악장 미뉴에트. 아오, 나이 좀 먹으니까 엄숙무비한 것보다 발랄하고 상큼하고, 앙큼한 게 얼마나 좋아? 나는 이제 대규모 편성 교향곡, 브루크너,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말러 같은 건 못 듣겠더라고, 변비 생길 거 같아서. 8번 3악장, 미뉴에트 한 번 들어 보실 텨?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브레멘 독일 실내 관현악단의 연주이다.


 

  이걸 프루스트는 이렇게 듣고(감상하고) 얘기한다.

  “우리 마음 속에서 애정으로 변하는 그 미소를 우리는 무한히 돌려받는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속도의 현기증을 느끼고, 기운이 소진될 때까지 싸워도 피로하지 않으며, 아무 위험 없이 미끄러지고 솟아오르고 날아오른다. 그곳에서는 매 순간 힘이 의지에 부응하고 관능이 욕망에 부응한다. 매 순간 모든 사물이 우리의 공상으로 달려와 가득 채워도 싫증나지 않는다.” (p.119)

  딱 하나, 위 인용에서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신 “나” 단수로 썼으면 좋겠다. 내가 애정으로 변하는 미소를 돌려받는지 마르셀 프루스트가 아니라 귀신이라도 그걸 어떻게 알아? 특히 음악, 미술, 시, 소설 같은 예술에 있어서야 사람마다 다 다른 거니까 함부로 “우리”라는 말 쓰면 안 될 걸? 비록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우리”를 편애한다는 건 알아도 말이지.

  하여간, <베토벤 8번 교향곡 이후>라는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가 내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나는 이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 모음집 《알 수 없는 발신인》을 당신한테 읽어보라고 권할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나는 프루스트에 결코 환장한 인간이 아니거든. 오히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활자까지 다 읽기는 했어도, 하마터면 질식사할 뻔했거든. 위대하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재미있고, 의미심장하고, 깊게 공감하며 읽은 분이라면 이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 모음집도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고 믿는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필립과 다른 사람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4
세스 노터봄 지음, 지명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노터봄은 7, 8년 전에 <의식>을 읽고는, 이 책 <필립과 다른 사람들 : 이하 “필립”이라 표기>도 읽은 줄 알았다. 그래서 이 책을 볼 때마다, 읽은 책, 이렇게 판단하고 그냥 넘어갔다. 안 읽은 줄 알았다면 벌써 해치웠을 터인데.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개가실 서가에서 책을 뽑아 훌훌 넘기다 보니 생판 처음 만나는 스토리다. 아이쿠, 이 책 안 읽었구나. 얼른 빌려서 다음날 하루만에 다 읽었다. 2백쪽 정도 분량의 짧은 작품이다.

  미리 말해두거니와, 읽는 재미를 기대하면 읽기 힘들 걸?


  <필립>을 읽기 전에 세스 노터봄의 바이오를 조금 알아두는 편이 좋겠다. 1933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난 노터봄. 호적상 이름은 코르넬리스 요한네스 야고부스 마리아 노터봄. 이런 건 안 중요하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 이제부터 진짜. 노터봄이 점점 자라 열 살이 되던 1943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일 당시, 철없는 아빠께서 노터봄을 돌본 젊은 유모와 눈이 맞아 새삼스레,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는 줄 알고 헤이그 시내에 방을 얻어 집을 나가버린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십계명을 어긴 아빠를 심판하고자 바로 다음 해에 영국 공군의 폭격기를 헤이그 하늘 위로 보내 무자비한 폭격을 퍼붓게 하고, 이 와중에 노터봄의 아빠는 시신도 확인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된다.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았던 엄마도 1948년에 가톨릭 신자와 재혼해 버렸다. 의붓아버지는 뭐 서로 보기 어색해서 그랬겠지만 노터봄을 가톨릭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집어넣었고, 입학할 당시엔 그러지 않았지만 곧 밀어닥친 사춘기를 맞아 제대로 된 전투적 일탈 청소년의 전범이 된다. 사춘기가 되면 몸과 일탈 충동만 거세지는 게 아니라 자아도 그만큼 커지는데, 노터봄은 이때부터, 남자 작가들 거의 다 대개 이때 부터이기는 하지만, 독서, 작문, 시작 등을 모색했다고.

  만날 기숙학교에서 탈출하고 그랬으니 당연히 퇴학을 당했겠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학을 할 수밖에 없었던 노터봄은 어찌어찌 위트레흐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병역 면제를 받고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에서 잠시 일을 하다가, 때려치운 후 2년 동안 유럽 각지를 아마도 당시 말로 “무전여행” 요새 말로 배낭여행을 한 후, 이때까지의 기억과 경험을 모아 처음으로 책을 내니 그게 바로 <필립>이다. 그리하여 <필립>의 시간적 배경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 필립 엠마누엘 반데를레이의 (노터봄의 아빠가 유모하고 손잡고 집을 나간) ①열 살 시절 잠깐, ②열여섯 부터 열여덟 살까지 잠깐, ③열여덟 살부터 조금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작품의 앞부분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인물은 사회 부적응적이면서 상당한 돈과 지적 수준을 갖고 있는 삼촌 안토닌 알렉산더. 네덜란드 중부의 소도시 호이에서 “몰골스럽고 섬뜩할 만큼 덩치가 큼지막한 집”에서 혼자 사는 독신남이다. 필립이 안토닌 삼촌을 처음 만났을 때가 열 살. 당시 삼촌은 칠순 정도라고 기억한다. 삼촌이 필립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 삼촌 집에 오면서 선물도 없이 맨손으로 왔느냐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필립은 얼른 집밖으로 나가 옆집 정원에서 철쭉꽃을 꺾어와 선물한다. 그제야 만족한 삼존은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다. 필립은 그것이 자신의 십년 생애 난생처음이자 유일무이한 진짜 파티로 기억하게 된다.

  삼촌과 필립은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로스드레흐트로 가, 다시 걸어 플라스 호수로 갔다. 시간이 흘러 달빛이 호수 표면의 윤슬에 부서질 때 삼촌을 보니, 낮게 울고 있었다. 필립이 왜 혼자 사느냐고 물었다. 삼촌은 “나는 나 스스로 결혼한 셈”이라며 “원래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오비디우스의 변신 개념으로) 나로 변신해버린 추억하고” 결혼한 셈이란다. 중요한 메타포. 후에 필립은 “나로 변신한 추억”으로의 한 여성, 중국인 얼굴을 한 여성을 찾기 위하여 전 유럽을 떠돌게 된다.

  다시 버스를 두 번 타고 집에 돌아온 삼촌은 야심한 밤에 쳄발로를 연주해준다. 바흐의 파르티타. 아리아, 사라방드, 미뉴에트, (아마도)지크, 구랑트, 알라망드 등등. 필립이 태어났을 때, 바흐의 아들 가운데 엠마누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필립의 가운데 이름에 ‘엠마누엘’을 넣으라고 강권한 사람이 안토닌 알렉산더 삼촌이었다고. 연주를 끝내고 가상의 J.S. 바흐와 인사를 나누게 하고서야 삼촌은 필립을 재운다. 방에 들어온 필립은 구석에서 축음기를 발견하고, 축음기 통에 들어 있는 바그너의 <로엔그린> 판을 올려 구동하니, 옛 시절 축음기라 음량 조절 장치가 없어서 그랬는지, 테너가 노래하는 ‘성배 이야기’가 크게 쏟아져 나왔다. 늙은 삼촌이 들이닥쳐 화를 내는 바람에 필립이 서둘러 금속 바늘을 제거하는 동안 바늘로 음반을 거칠게 긁어 깊게 홈이 파이고 말았다.


  6년 후의 두번째. 열여섯 살 필립은 삼촌을 만나기 전에 옆집 마당에서 철쭉꽃 한 다발을 꺾어와 선물했다. 흡족한 삼촌은 똑 같은 과정으로 호수에서 파티를 하고, 집에 돌아와 쳄발로 연주를 해준다. 바흐 파르티타. 연주가 끝나고 이번에는 바흐를 비롯해서 안토니오 비발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제미니아니, 본포르티, 코렐리 등등을 소개하고 인사하라고 권한다. 물론 실물이 없는 허상. 6년 전에 묵었던 방에서 다시 찾아낸 축음기. 필립은 또 <로엔그린>을 올리고, 또다시 서둘러 들어온 삼촌은 이번에는 화를 내는 대신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로엔그린>을 못 틀게 하는 이유. 그런 줄 알았지만 삼촌은 책꽂이에 있는 사진틀 속 인도네시아 혼혈 소년 폴 스웨일로 이야기만 하고 만다.

  삼촌이 끝내 해주지 않은 이야기. 왜 <로엔그린>을 틀지 못하게 하는지, 그 속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일일 것이다. 그러려면 바그너의 <로엔그린> 스토리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 참. 너무 긴 이야기라서 소개하려 마음먹었다가 머리통만 벅벅 긁고 있는 중이다. 우짤까?


  북쪽 유럽에 있는 그랄이라는 동네는 로엔그린의 아빠이자 성스러운 바보인 파르지팔이 이끄는 기사들이 성배를 수호하는 곳인데, 로엔그린이 나이가 들어 부랄이 굵어지자 파르지팔이 막둥이 장가들라고 백조가 모는 배를 태워 지금은 네덜란드 땅인 브라반트로 보낸다. 여기에 엘자라는 죽은 영주의 딸이 곤경에 처해 있었다. 로엔그린은 선한 엘자의 대변인으로 엘자의 악당 삼촌이며 왕위를 노리는 프리드리히 폰 델라문트와 맞짱 대결을 펼쳐 이기고, 엘자의 남편이자 공국의 후계자 자리에 오를 예정이다. 로엔그린은 엘자에게 결혼 조건으로 자기가 누군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 말라고 하고, 엘자도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뭐 신들의 장난이지. 지켜지지 못할 약속을 강제하는 것이 신이 제일 자주 하는 짓궂은 장난 아냐?

  삼촌의 아내, 그러니까 엘자의 숙모이며 마녀이기도 한 오르트루트가 결혼 전날 엘자를 심하게 꼬드겨 이름도 모르는 남자를 어떻게 남편이라고 하느냐고, 이름을 물어보라고 딴지를 건다. 순진한 엘자는 숙모한테 꿈벅 넘어가 오후에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 신방에 들어, 고쟁이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로엔그린의 이름을 물어보기에 여념이 없다. 흑흑, 말씀을 안 해주시는군요. 소첩을 사랑하지 않으시니까 그런 겁니다.

  로엔그린도 눈물을 머금고 만조백관을 그 새벽시간에 출두시켜 모든 이가 보는 광장에서 엘자에게 자기 신분, 이름, 고향을 말한 뒤, 일찍이 자기 이름을 물어보면 모든 계약이 무효임을 상기하여, 다시 백조가 모는 보트에 올라 브라반트를 떠난다. 사랑하는 엘자를 만나, 첫날밤도 치루지 못하고 떠나고 마는 로엔그린. 왜 삼촌은 이 음악을 듣지 못하게 했을까?


  이거, 책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로엔그린> 스토리를 알고 <필립>을 읽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듯하여 소개했다. 고맙지?

  2년 동안 삼촌과 살다가 18세, 법적 성인이 된 필립이 중국인 얼굴을 한 아가씨를 찾아 전 유럽을 떠돌아, 결국 만나기는 만나는데, 그 다음에 로엔그린처럼 어찌 될까봐서? 글쎄. 그럴 수도 있고. 해석은 당신이 하시라.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25-10-13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저도 읽은 책을 만나서 혼자 기뻐하고 있습니다.
제목의 ‘다른 사람들’ 이란 other people 이란 뜻이겠지요? different from Philip 이렇게 볼수도 있을것 같아서요.

Falstaff 2025-10-14 04:23   좋아요 0 | URL
한가위 잘 쇠셨겠지요? ㅎㅎㅎ 아무래도 other people이 맞는 거 같습니다.
 
성가신 사랑 나쁜 사랑 3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7년 전에 읽은 페란테의 “나폴리 사부작” 가운데 1책 <나의 눈부신 친구>는 미국 뉴욕타임스 선정 “21세기 백대 소설” 중에서 제일 윗자리를 차지한 작품이다. 내가 나폴리 사부작을 읽은 감상은, 걸작이나 명작이란 찬사를 가져다 바치지는 못할지언정 참 재미있는 소설, 이라고 당시 독후감에 썼는데, 이후 아쉽게 생각하는 건, 시간이 별로 많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작품에 대한 기억이 별로 뚜렷하지 않다는 점, 한 방에 휘리릭 사라졌다는 거였다. 이탈리아에서 시칠리아와 사르데나 같은 섬 지역 말고 아직도 벤데타 문화가 사라지지 않은 지역. 내 아들 내외가 신혼여행을 나폴리로 간다 해서, 거기 가면 당연히 소매치기 조심하고, 행여나 코 흘리는 아이들 귀엽다고 건드리지 말고, 예쁜 아가씨 훔쳐보지 말라고 훈수를 둔 곳이다. <성가신 사랑>에서도 나온다. 집 앞 벤치에 앉은 다 늙은 할배가 주인공 화자에게 아이들을 가리키며, 저 아이들 한테 손을 대기만 하면 그건 죽은 목숨이라오.

  하여간 페란테의 사부작은 다 읽었고, 근데 사부작, 하면 내 마음 속 사부작은, 가시는 길 뿌려준 진달래꽃잎을 사부작, 사부작 밟고 가는 님 발자국 소리밖에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폴리 사부작을 읽은 기념으로 페란테라는 이름은 내 기억에 콱 박혀 있었던 바, 그의 새로운 삼부작, 이번엔 제목을 “나쁜 사랑 삼부작”으로 한 삼부작이 나왔다는 걸 알았지만, 나폴리 이야기를 무척 재미나게 읽고나서 기억이 금세 휘발되고 만 것이 생각나, 나중에 읽지 뭐, 하고 내버려둔 것이 어영부영 6년이 넘었다.


  “나쁜 사랑 삼부작” 가운데 1권 <성가신 사랑>. 첫 작품부터 기대 이하이다. 뭐, “나쁜 사랑”에 관한 소설 세 편을 썼는데 그 가운데 제일 나쁜 사랑일 수 있으니 읽은 소감도 제일 나쁜 독후감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책은 주인공 화자 ‘나’ 델리아의 시각으로 쓰였으나 독후감은 3인칭으로 쓰겠다.

  델리아는 43~44세의 만화가로 로마에 산다. 나폴리에서 시골 화가와 재봉사 사이의 세 딸 가운데 맏이로 이제 나폴리에는 부모가 각각 다른 집에서 살고 아이들은 모두 객지에 터를 잡았다. 자매는 일년에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고, 그나마 가족 일원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하여 아주 가끔 서로 전화를 한 번씩 하는 걸로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한다. 모두 다시 나폴리로 돌아가 사는 건 꿈에도 바라지 않는다. 말투에서도 어느새 나폴리 사투리는 거의 사라졌다. 할 수 없이 나폴리에 가야 할 경우에도 갑작스런 상황이 아니라면 또박또박 로마 또는 각자 살고 있는 곳의 이탈리아어로 말한다. 그만큼 나폴리에 정이 뚝 떨어졌다는 뜻이다. 심지어 두 동생의 이름은 나오지도 않는다. 남은 아니지만 남보다 못해 웬수가 되지 않으려 마지막 발돋움을 하느라 종종거리는 모습.


  막이 올라가면 델리아의 생일인 5월 23일 밤에 어머니가, 예전에 가족들이 여름에 농가 한 채를 빌어 해수욕을 가곤 하던 스파카벤토 해변 인근에서, 평소에 입던 누더기 같이 다 헤진 브래지어 대신에, 섬세한 레이스 처리를 한, 나폴리의 부잣집 사모님들이 즐겨 찾는 ‘보시’ 고급 속옷가게 제품을 착용하고, 다른 옷은 스타킹 하나 걸친 것이 없는 시신 상태로 발견되었다.

  엄마는 죽기 전 몇 달 동안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델리아의 아파트를 찾아와 며칠씩 묵어 갔다. 하도 오래 떨어져 살던 모녀 사이라 지내다 보면 조금 불편한 것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데, 델리아가 엄마 때문에 힘든 기색을 보이면 바로 나폴리로 돌아갔다. 그러니 얼마 동안 머물겠다는 언질을 주었던 적은 없었다.

  어머니가 죽어, 아무리 유럽이라도 여러가지 방면으로 발전이 늦은 지역이라 온갖 관청에 뒷돈을 주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서류처리를 한 다음에 장례식을 할 수 있었는데, 장례식에 아버지가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반쯤 가슴을 노출한 집시 여인을 그린 그림을 건장한 흑인청년 네 명이 들고 성당의 복도를 걷게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좀 이상하지?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신경정신과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오래 전, 아버지는 아내와 세 딸을 집에서 쫓아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유부남이기도 한 훤칠하고 잘 생긴 카세르타 씨와 정분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를 두드려 팬 다음, 처남, 델리아의 외삼촌 필리포와 함께 카세르타의 집에 가서 카세르타 역시 자근자근 밟아주고 돌아와, 아내를 쫓아냈는데, 가톨릭 사회에서 서류작업을 끝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이혼을 기어이 해버린 건지, 법적 가족분할은 하지 않고, 즉 혼인 상태는 유지한 채 서로 보지 않겠다는 졸혼을 한 건지 확실히 밝히지 않았지만 이렇게 갈라졌고, 이때 세 딸 모두 어머니를 선택했다.


  책을 넘기면 “어머니에게”라는 헌사가 나오고 한 장 더 넘기면 이런 경구가 씌어 있다.

  “유년 시절은 과거시제로 영원히 머물러 있는 거짓말의 공장이다.”


  이 책에서 사실인 것은,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다정한 성격이라는 것 말고는 없다. 아버지가 하필이면 불행하게도 편집증적인 증세가 심해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한 상태였다는 거. 아버지가 어머니를 의심할 때 처음부터 아내를 두드려 팼겠느냐만, 일단 손찌검을 시작하게 된 후에, 그 심각함이 날로 더해졌겠지. 많은 이탈리아 남자가 가지고 있던 주취폭행 성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작중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온전히 편집증, 신경정신과적 증상이다. 작중 시점이 휴대폰도 나오지 않았을 때이며,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드려 팬 시기는 작중 시점부터 30년 이상을 더 과거로 밀어내야 하니까 1960년대쯤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아무리 이탈리아가 G7 가입국이라도 의처증이라는 이름의 편집증 증상으로 병원을 찾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편집증은 누구나 갖고 있는 질환이기는 하지만 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의 중증은 당연히 병원에 가야 하고, 심하면 입원도 해야 할 질병이다. 이런 상태를 환자라고 생각해야지, 나쁜 인간으로 여기면 곤란하다. 남자건 여자건 마찬가지다. 편집증 증세가 있는 여성에게 시달림을 받는 남성도 많다. 폭력 같은 가시적 증거로 나타나지 않아서 모르고 있을 뿐이지.

  델리아가 나폴리의 한 골목에서 살 때, 델리아도 틀림없이 어머니가 카세르타와 함께 있는 것을 봤다고 믿는다. 이때 델리아가 네 살. 이 기억이 틀림없을까?

  확실한 건,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드려 팼고, 코피를 터뜨렸으며 옆구리를 발로 찼다는 거. 아버지와 필리포 삼촌이 카세르타를 찾아가 곤죽이 되도록 엎어치고 메쳤다는 거. 이제는 늙어서 많았던 검은 머리카락이 거의 빠져 뾰족한 머리통을 하고 있는 늙은 아버지가 이야기해주듯, 카세르타가 집으로 어머니 선물로 장미꽃다발, 나폴리식 맛난 쿠키 같은 걸 자주 선물했다는 거. 그때마다 편집증이 유별난 아버지는 발광을 했다는 거. 카세르타도 미친놈이지 남의 아내한테 장미꽃다발 선물을 왜 하니?

  그렇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필리포 삼촌과 카세르타 씨의 시절까지는 하여간 자기들이 저질렀거나 기질로 가지고 있는, 당시엔 ‘성격’이라고 불리던 의처증 또는 편집증 때문에 인생을 조졌다고 치고, 그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 조진 것인지, 어머니의 자살을 계기로 로마에서 고향 나폴리로 돌아온 화자 ‘나’, 만화가 델리아 선생은, 어머니의 빈 옷장과 고급 남자 셔츠 한 장, 그리고 어머니가 입던 누더기 속옷을, (조금 후 알게 되겠지만 어머니가 델리아의 생일선물로 주려고 가져간) 옷가방을 교환하자고 제의하는 카세르타 등등을 감안하여 과거를 추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보탤 다른 기재는 자신의 기억. 만 네 살짜리 어린 아이의 기억. 과거시제로 영원히 머물러 있는 거짓말의 공장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 책의 결말 가운데 70~80퍼센트는 가정hyposesis이다.

  ‘가정’보다 더 허구적인 건 없다. 이 작품 속 작가의 기억은 그래서 완전히 거짓말이다. 하다못해 폭력의 장면도 그러하다.

  “아버지에게 엉덩이를 발로 차이는 바람에 어머니는 침실 장롱까지 날아갔다. 어머니는 일어서서 벽에 걸린 그림을 모조리 찢어버렸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머리채를 붙잡고 장롱 거울에 머리를 박아 거울을 깨뜨렸다.” (p.228)

  네 살 유아의 기억. 자라면서 TV를 많이 봤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머리채를 거머쥐고 거울을 박아 깨뜨렸으면, TV/영화처럼 깨진 거울이 중력에 의하여 한 번에 와장창 쏟아졌을 터이고, 깨진 거울면은 생각 외로 날카로워 TV/영화와 달리 아버지의 손등과 팔뚝, 어머니의 뒤통수와 불운했다면 목의 혈관까지 다 절개해버렸을 터이다. 어머니의 머리는 인체에서 가장 두꺼운 두개골에 의하여 보호되고 있었겠지만 혈관이 유별나게 조밀한 머리피부도 다양한 열상으로 말도 못할 만큼의 피가 터졌을 것인데, 무엇보다도 기억에 사무칠 엄청난 피칠갑에 대한 묘사는 없다. 유리가 깨져 사람이 다친 현장을 본 경험이 있는 독자는 이 장면도 진실이 아니라 네 살 먹은 유아의 상상이 만든 그림이라고 여겨 마땅하다.

  몇 가지 되지 않는 증거로 엘레나 페란테는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폭력적인 남성들을 창조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이것도 페미니즘이라면 뭐 할 말은 없지만, 이야기를 어떻게 이런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는지, 혹시 페란테의 유년시절에 델리아가 자신이 당했다고 상상하는/믿는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역자 김지우가 쓴 해설을 보면 결론이라서 내가 여기서 대놓고 말할 수 없지만 델리아가 결말부에서 “기억속에 묻혀 있던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p.290)고 했다. 나는 이 “충격적인 진실” 역시 정확한 사실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저 작품의 결말에 어울릴 만한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픽션” 장면 하나를 만들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그래서 작가도 “유년시절은 거짓말의 공장”이라고 제일 앞에서 말했던 것이라고. 독자는 가끔 자신이 지금 픽션을 읽고 있다는 것을 잊는다.

  나쁜 사랑 삼부작? 나는 이걸로 삼부작은 그만 읽기로 했다. 나이 들어서 그런가, 이젠 독한 게 싫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
O. Z. 리반엘리 지음, 고영범 옮김 / 가쎄(GASSE)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46년생 오메르 줄퓌 리바넬리가 56세인 2002년에 발표한 책. 리바넬리는 1971년 군사 쿠데타 당시 체포, 투옥 등을 겪다가 망명을 떠난 튀르키예의 작가, 음악인 등이다. 그래서 이이의 작품엔 주로 튀르키예의 정치상황과 독재자, 오트만 제국 말기의 혁명 상황 같은 것을 풍자한 작품이 많다.


  하급 중산층 가정의 시골 소년이 전액 장학금을 받고 보스턴의 하버드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얻어, 그곳에서 만난 튀르키예 최고의 부르주아 여성을 만났다. 이후 하버드 교수가 되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조금 수정해 아내와 함께 튀르키예로 돌아온 이르판 쿠르달 교수. 이르판은 뉴욕과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한 이스탄불에서 가장 교육을 잘 받고, 존경받고, 성공한 그룹의 일원에 속한다. TV 주간 토크쇼에 정기 출연하는 훤칠하고 체격 좋은 44세의 사내. 아내 아이젤 역시 미국에서 유학하다 이르판을 만나 그를 튀르키예의 최상급 부르주아들이 미국의 뉴욕, 보스턴 등 대도시에 짜 놓은 네트워크의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하급 중산계급 출신의 이르판은 상상도 하지 못하게 화려한 미국내 튀르키예 소사이어티에 처음엔 놀랐지만, 몸에 익히고, 즐기는 상황을 거쳐 이제는 결혼 후에 장소만 뉴욕에서 이스탄불로 바뀌기만 했지 초 상류 부르주아 사회에 푹 잠겨 있었다. 아내 아이젤이 워낙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이르판은 자기가 돈을 벌 필요도 없었으니, 교수 급여에 높은 TV 출연료, 기타 수입을 합친 것이 자금 운용 시스템 안에서 몇 년을 돌아 튀르키예의 경제 위기 속에서도 어마어마하게 몸집이 커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계속 하다보니 이르판의 가슴 속에는 불운한 검은 새 한 마리가 날개를 치고 있는 것 같은 감정을 키웠다. 검은 새. 이것은 두려움의 한 상징이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이르판 쿠르달 교수는 무엇을 두려워할까? 앞부분에서는 그의 방황만 계속 묘사하고, 두려움의 정체는 283쪽에 가서야 실토한다.

  “바다로 나선 이후, 이르판은 그가 이스탄불에서 겪으면서 고통을 받았던 두려움과 위기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당장이라도 삶을 바꿔야 한다는 욕구를 부여해 준 죽음에 대한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 살면서 중요한 것을 생산해내지도 못했고 아주 사소한 은적조차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p.282~3)

  앞 세대의 위대한 학자, 작가들처럼 불멸의 저작 한 편을 쓰고 싶은 소망이 있었는데 그걸 쓰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 같아서, TV에 하도 자주 출연하는 바람에 튀르키예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최고 인기 교수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하얗게 세우면서, 한밤중에 욕실 욕조에 걸터앉아 “난 행복해.” 조금 있다가 “나는 정말 행복해.”를 두 번 반복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운다.

  우울증 아닌가? 하여간 작심한 바 있어, 이 철없는 교수는 아름답지만 남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으면서 살도록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은 아내 아이젤에게 사랑한다는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자기 계좌의 잔액을 몽땅 현금으로 인출해, 먼저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 집에 가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하루를 보낸 다음, 에게 해변에서 침실이 세 개 있는 요트를 장기 대여해 와인빛 바다 에게해로 나간다. 에잇, 팔자 좋다!


  그런데 작품이 이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의 어리광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지는 않다. 미쳤지, 자기가 뭐라고 세상에 흔적을 남기려 해. 난 나 죽은 다음에 내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인간이라서 이르판의 심정이 더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O.Z.리바넬리가 짚고 싶었던 튀르키예의 문제는 이런 부르주아들의 엄살이 아니라, 동부 튀르키예의 한정된 고장에서 자신들의 나쁜 문화로 유지하다가 쿠르드족과의 전투가 시작되면서 난민들이 튀르키예 전역, 이 가운데서도 이스탄불 주변으로 몰려들어, 이제는 전 튀르키예 지역과 심지어 해외로 빠져나간 일부 무슬림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명예살인’에 관한 것이다.

  튀르키예 동부 아르메니아 고원에 있는 커다란 반 호수 근처 반 마을에 타신 아그하라는 남자가 살았다. 대가족 가운데 ‘둘째 아버지’의 위치에 있다. 이 완고한 무슬림에서 둘째는 별로 의미가 없다. 오직 가부장적 전통에 따라, 집안의 모든 일은 하는 일 없는 ‘큰 아버지’의 결정에 따른다. 하여간 타신 아그하라의 첫 아내는 딸 메리엠을 낳다가 죽었다. 둘째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해 셋째 아내 ‘되네’를 들여 아이 둘을 낳았다. 큰아버지는 첫 아내와의 사이에 건강한 아들 둘을 두었다. 이 가운데 하나 ‘제말’이 훗날 튀르키예 북동쪽 가바산맥 경사면 초소에서 특공대에 근무하며 해방 쿠르트족 PKK와 죽음을 불사하는 전투를 2년 동안 치룬 다음에 정상이라고 보기 힘든 정신을 가진, 육체적으로 거친 사내가 되어 귀가한다.

  제말이 메리엠의 서너댓 살 많은 사촌 오빠. 제말의 아버지이자 메리엠의 큰아버지는 농사와 집안 일은 전부 동생에게 맡겨놓고 자기는 포도농장 인근 오두막에 자리를 잡고 이 지역 종교의 지도자 역할에 전념한다. 엄격하고 다혈질적이고 위압적인 성격에다 쿠란과 예언자 무하마드의 어록을 수시로 인용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 불행하게, 정말 불행하게, 이슬람 원리주의자이며 종교 지도자인 큰아버지한테도 두 다리 사이에 끄트머리의 껍데기를 면도칼로 벗긴, 할례 받은 생식기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으며 그게 아무 때나 가동을 하고 싶어했다는 거였다. 여기서 ‘불행하게’라는 부사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무 죄도 없는 타인을 불행하게,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불행을 던져주는 행위를 말한다.

  <행복>을 시작하기도 전에 열다섯 살 먹은 메리엠이 포도원 오두막으로 큰아버지 드시라고 식사를 가져다 드렸는데, 큰 아버지가 메리엠의 손목을 잡고 오두막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강간해버렸다. 다리 아래로 피를 흘리며 뛰쳐나간 메리엠은 가시덤불 위에 가시에 찔려 여기저기 피투성이가 되고 혼절한 상태에서 지나가던 두 명의 청년에 의하여 발견된다. 청년들은 메리엠의 상태를 짐작하고 그를 들쳐 매고 메리엠의 집에 데려다 주었다.

  여자들이 보니, 어떤 일을 당했는지 한 번에 딱 알겠다. 그리하여 여자들은 메리엠을 집안에 들이지 않고 그길로 주로 벌을 줄 때 사용하는 헛간에 쳐 넣고 밖에서 문을 닫았다. 여자들에게 일말의 동정도 없었다. 특히 셋째 어머니 되네가 독했다. 먹을 것 약간을 들고 들어온 되네가 메리엠에게 말한다.

  “너는 이스탄불에 가게 될 거야.”

  그리고 손가락으로 한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 밧줄이 놓여 있었다.

  “스스로 목을 매는 아이들은 이스탄불에 보내지 않지. 어떤 애들은 밧줄을 찾아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거든.”

  되네가 말하는 이스탄불은 지리적으로 튀르키예의 거대도시 이스탄불을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 메리엠은 아직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알아듣는다. 아무도 찾지 않는 헛간에서 온갖 불길한 생각에 시달리는 메리엠. 태어날 때부터 엄마를 죽이고 세상에 나와 신으로부터 아무 사랑도 받지 못하는 아이. 소년기가 지난 후에 정말로 메리엠에게 다정하게 구는 친구도 없었다. 신의 미움을 받아 엄마 잡아먹은 년이라서. 그나마 어렸을 때는 메리엠과 함께 온갖 개구진 놀이도 마다하지 않은 제말 오빠와 쿠르트족 출신 메모 오빠. 이들은 그러지 않았지만.


  날이 가고, 쿠르드족과의 전투에서 지뢰를 밟아 몸이 터져 죽은 동료, 머리통에 총구멍이 난 동료를 보고, 치명적으로 자신의 기총소사와 수류탄 투척으로 산산조각이 난 인물이 적군 병사가 아니라 열살짜리 염소치기 소년이었다는 걸 알고 PTSD가 제대로 작동되기 시작한 제말이 만기 제대해 집에 오면서 메리엠의 일은 급속도로 진행된다. 두 번 올가미에 목을 넣었다 다시 뺐을 뿐 아직 목을 매지 않았으니 이제 메리엠을 정말로 이스탄불로 보내야 한다고 강간범 큰아버지가 판결했다. 이 임무를 맡은 사람이 특공대원 출신 제말. 동네에서 메리엠을 죽이면 옛날과 달라서 누군가의 진술로 결국 제말의 짓임이 드러날 것이고, 그러면 제말도 현행 튀르키예 법에 따라 아주 길지는 않지만 제법 감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제말은 메리엠과 함께 이스탄불까지 여행을 해야 하며, 여행 도중에, 아니면 1천4백만 명이 사는 거대도시 이스탄불의 으슥한 골목에서 메리엠을 끝장내야 한다는 지시와 함께.

  이렇게 메리엠과 제말은 떠난다. 제말은 예전 제말이 아니다. 아직 여자의 피부를 만져본 적도 없고, 놀랍게도 접촉은커녕 자위를 해본 적도 없다. 꿈속에 관능적인 무구한 여성이 등장할 때마다 몽정을 했는데, 몽정을 하기만 하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밖에 나가 반쯤 언 통 속의 물을 머리부터 거꾸로 뒤집어써 스스로를 정화해야 했다. 이것이 다 엄격한 이슬람주의자이자 이슬람 지도자이며 메리엠을 강간한 아버지한테 배운 절차였다.


  드라마는 이 세 명이 우연히 만나는 것을 계기로 본격화한다. 큰 요트를 교수 혼자 운용하려니 힘드는 건 두 번째고 사고의 위협을 자주 만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만 근처에 있는 농어, 도미 양식장에서 (제말이 어떻게 메리엠을 죽이지 않고 함께 이곳까지 왔느냐는 생략하겠지만) 세 명이 만나 이르판이 둘을 고용하면서, 책의 저 앞에 거의 모든 독자가 예상했듯 셋이 상봉한다.

  무리를 이루면 반드시 무리 구성원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법.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깬 자와 깨지 못한 자, 현명한 자와 조금 막힌 자. 이런 갈등은 못 배운 자, 깨지 못한 자, 조금 막힌 자의 열등감을 유발하고, 열등감을 갖게 된 이가 완력이나 금력 등 하여간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이 있으면 결국 그 권력을 사납게 사용하게 된다. 그게 사회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는 간혹 결과, 결말이다.

  어떻게 어쩔 수 없이 결말에 이르게 되는 지는 말하지 않겠다. 썩 괜찮은 소설가 O.Z. 리바넬리가 이 책에서 절정에 이르게 하는 방법은… 이번엔 너무 상투적이라 조금 실망했다는 말을 보태며 독후감을 접는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울지 마, 아이야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20세기말부터 매년 가을만 되면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도 숱한 매체에서 노벨문학상 후보 리스트에 올려놓아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던 작가 가운데 한 명이 케냐의 키쿠유어(語) 소설가 응구기 와 시옹오였다. 1938년생이니 87년을 살다가 갔다. 우리나라에도 온 적 있다. 박경리 문학상을 받았다.

  케냐의 나이로비 북부 농촌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 시옹오 와 응구기는 아내가 네 명, 자녀가 스물여덟이 있었는데 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는 세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n번째 자식이었다. 불운이 이 가정을 덮친 것은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이 자기들 마음대로 정한 “제국 토지법”에 따라 시옹오 집안 소유의 토지가 전부 압류되어 영국에서 배 타고 식민지로 온 백인의 소유로 넘어간 일이었다. 많기도 한 이복 형제 가운데 한 명은 2차 세계대전에 영국군으로 참전해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죽었고, 다른 형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1952~1960년에 있었던 마우마우 봉기 당시 “영국 군인들의 정지하라는 말을 듣지 못해서” 영국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다른 형은 당시 마우마우 단에 들어가 영국 및 식민지 정부와 투쟁하다 죽었으며 응구기 와 시옹오의 친엄마 역시 당시에 영국인과 이들에 협조하는 케냐인으로 구성된 시민군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이 모두 <울지 마, 아이야>에 나온다.

  케냐 원주민들의 일부다처제 식구들은 어머니가 달라도 형제 간의 정은 친 동기간의 정보다 전혀 못하지 않아서, 이런 가정사에도 불구하고 어리지만 공부 잘하는 응구기 와 시옹오만큼은 끝까지 공부를 시키려고 모든 형제들이 나서서 도왔단다. 내전 기간 동안 죽임과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도 기숙학교에 다니던 응구기 와 시옹오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학교를 그만두지 말라고 할 정도로 이복형제들이 이이의 교육에 집착했다고 한다.


  <울지 마, 아이야>에 이런 정황들이 모두 나온다. 아버지 응고토는 1차 세계대전에 소년병 신분의 영국군으로 참전해 백인병사를 위해 군수품을 나르고, 도로를 닦는 등의 일을 하고 돌아왔지만 이 사이에 집안의 토지 전부가 “영국 제국 토지법”에 따라 영국인 하울랜즈의 소유로 넘어가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울랜즈에게 고용되어 농장 일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 애초부터 비극을 품고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응고토의 두 아들, 첫번째 아내 은제리의 장남 보로와, 주인공 은조로게의 친어머니 뇨카비가 낳은 첫아들 므왕가가 역시 영국군으로 참전해 이집트, 예루살렘, 미얀마 전투에 투입되어 므왕가는 돌아오지 못했고, 이야기(구술문학)하기 좋아하던 보로는 우울한 청년이 되어 돌아왔다.

  이들 가족이 사는 집은 ‘자코보’라는 이름의 케냐 원주민의 땅 위에 지은 것으로 당연히 땅 임대료를 지불해야 했다. 자코보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당시 원주민들의 눈으로 보기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살면서 아들은 나이로비에 있는 고등학교를 거쳐 런던으로 유학으로 보내고, 주인공 은조로게보다 한두 살 덜 먹었지만 정상적으로 학교에 입학해 후에 같은 반이 되는 딸 므위하키도 나이로비에 있는 여자 기숙학교에 다닌다. 흑인 자코보가 땅을 소유하고 있고 하울랜즈의 농장에 비하면 그리 볼품없지만 그래도 제법 큰 농장을 가지고 있다면, 식민지 시절에 이런 인간은 백이면 백 친영국파라고 보면 된다.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동족을 고발하고, 사적인 감정으로 없는 일을 있다고 해서 곤욕을 치루게 하는 인간. 어디에도 있다. 식민지 조선에 있었듯 식민지 케냐에서도 이하동문이다. 그리하여 은조로게의 바로 위 이복형 카마우가 말한다.

  “백인은 백인일 뿐이야. 하지만 백인이 되려는 흑인은 고약하고 잔인하지.”

  외국인투자법인의 외국인 사장은 뭐 그런대로 사장질을 한다. 자기도 낯선 고장에 와서 사장질 하려면 현지인들 눈치를 안 볼 수 없거든. 그러나 한국인 사장은? 눈 뜨고 보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 요즘에야 시대가 달라져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지, 여전할 지도. 아마 조금은 그럴 걸? 주인 마님보다 더 무서운 게 그 집구석 청지기라잖아.


  이 작품은 응구기 와 시옹오가 스물네 살에, 우간다 마케레레 대학에 적을 두었을 때 쓴 아주 초기 작품이다. 그래서 소년 은조로게를 주인공으로 하고, 이 아이가 열여덟 살의 청년이 될 때까지를 그린 일종의 성장소설을 썼다. 불운하게 이 시기가 케냐의 마우마우 봉기 기간과 겹쳤고, 작가 자신이 고스란히 이 때를 겪은 만큼 젊은이 답게 식민 모국인 백인 영국인과 부영附英 흑인의 원주민에 대한 학살과 고문을 고발한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그들의 만행이 아니라 케냐 사람들의 저항이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케냐 흑인 가정이 어떻게 무너지고 말았는가, 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당시가 식민 시절이었으니 등장인물을 극단적 선악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던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선한 쪽은 당연히 약자인 케냐 사람들과 특히 응고토 가족 구성원이고, 악한 쪽의 극단은 백인이자 응고토의 토지를 모두 흡수해버린 영국인 뜨내기, 그러나 지금은 지역의 최고 권력자인 하울랜즈와, 이의 악마적인 흑인 하수인 자코보.

  작게 보면 응고토 가족, 크게 보면 케냐 사람들의 최초 불만은 자신들의 땅을 빼앗긴 것부터 시작한다. 전쟁에 나가 영국을 위하여 싸웠건만 돌아온 건 토지 몰수였다. 이제 자기 땅이었던 곳에 고용되어 농장 일을 해야 하는 현지인. 그럼에도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이에 대하여 항의라도 하면 곧바로 해고되는 난감한 상황에 빠져, 이들이 선택한 것은 집단 파업이었다. 작중에서도 나이든 응고토는 파업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가, 파업 현장에 나와 이들을 해산시키려 위협하는 자코보에게 정면으로 나서 맞서는 바람에, 자코보 땅 위에 지은 집에서 쫓겨나고, 그것보다 더 험한 건, 자코보로하여금 앙심을 품게 만든다. 그러니까 총 파업이 두번째 전환점이 되는 셈.


  세번째이자 결정적 파국은 위에서 여러 번 이야기한 마우마우 봉기이다.

  응고토의 첫번째 아내 은제리는 차례로 보로, 코리, 카마우 세 아들이 있고, 두번째 아내 뇨카비는 전쟁 나가서 죽은 므왕기와 주인공 은조로게, 이렇게 두 아들, 합해서 다섯 아들을 두었다. 이 가운데 보로와 코리가 마우마우 단에 (한꺼번에는 아니지만) 입단해 영국인과 케냐 하수인으로 구성된 시민군과 싸운다. 싸우긴 싸우는데, 주인공의 친형들이니 그냥 싸우는 정도가 아니다. 그동안 자기 딸 므위하키와 은조로게가 은근히 은은한 사랑을 꽃피우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다양한 방법으로 응고토를 위시하여 이이의 아들들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던 자코보를 죽여버린다.

  한 가족의 가장의 의무 가운데 제일 무거운 의무는 가족을 지키는 일. 이 암살이 자기 아들 중에서 카마우가 한 일일 것이라고 오해한 응고토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시민군 총사령관으로 변신한 전 직장이자 오래 전에 자기 땅이던 “하울랜즈 농장”의 주인 하울랜즈에게 자기가 한 일이라고 자수해버린다. 이미 파업할 때 응고토를 해고해버린 하울랜즈는 이것이 거짓 자수인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응고토에게 모진 고문을 가한다. 죽기 바로 전까지. 그리고 먼 곳의 기숙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은조로게까지 학교에서 체포해 펜치로 고환을 조이는 등의 극한 고문을 해 감히 주인공이 반 정도 넋이 나가게 만들었으니, 하울랜즈, 무사하게 소설을 끝내기는 글렀다.

  아니나 다를까, 고문으로 몸이 엉망진창이 된 채 집에 실려온 지 며칠 만에 아버지 응고토가 죽어버리고, 공부 잘하는 막내 은조로게는 반쯤 정신이 나가버렸으며, 성실한 카마우는 감옥에 갇혀 언제 나올지, 벌써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야밤을 틈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응고토의 침상에 그림자처럼 나타난 맏아들 보로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귀신처럼 사라져 영국 백인, 하얀 귀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해버린다. 작품 중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둘째 아들 코리는 일찌감치 마우마우 단에 들어가버려 소식도 없다. 이제 이 집안에 남은 유일한 남자는 은조로게.

  응구기 와 시옹오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은 케냐 사람들. 흑인들은 화해를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어떻게? 스물네 살의 작가, 훗날 매해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자 목록에 들 “아프리카 문학의 거인”으로 빛나지만 아직 구상유취한 신삥 작가는 별로 세련되지 못한,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해서, 뻔한 방식을 선택해 “가능하지 않은 화합”을 주장한다. 역자 황가한은 이 방식을 아프리카 문학의 최고 거봉이자 후대 아프리카 출신 작가들의 롤 모델 치누아 아체베의 대표작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오콩고와 비교하며 이들의 앞에 그나마 희망이 남아 있음을 강조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근데 “화해”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 건가? 짧은 작품이니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5-10-08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번 노벨상 후보에만 올라가는데,,, 이번에도 안되겠지요?!
왠지...!
내일 발표네요

Falstaff 2025-10-08 15:11   좋아요 1 | URL
ㅎㅎ 갔어요, 올해.
나머지 휴일 편하게 보내셔요.

감은빛 2025-10-10 0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녀가 스물여덟명이라면, 저는 아이들 이름도 다 못 외우고 얼굴도 바로 못 알아볼 것 같아요. 길에서 만났을 때 화장한 엄마와 동생을 못알아본 적이 있었거든요. 이 많은 아이들의 이름은 어떻게 지어줬을지도 궁금하네요. 저는 둘 밖에 없는 아이들 이름 짓느라 매번 출생신고 마감일까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어요. ㅎㅎㅎㅎ

좋은 글에 쓸데없는 댓글을 주저리 달았네요. 아까 올해 노벨상 수상자의 단편집에 남긴 글도 읽었어요. 헝가리와 케냐 작가들(뿐만이 아니겠지만)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시는지 궁금하네요.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5-10-10 07:01   좋아요 1 | URL
만일 n번째 자녀 응구기를 부르려 하면, 응구기의 아버지 시옹오는 1번 부터 n번까지 아이들 이름을 다 불렀을 겁니다. ㅎㅎㅎ 전에도 식구 많은 집안에 항용 그랬듯이요.
이이의 작품 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피의 꽃잎들>이 제일 좋았다고 기억합니다. 읽어보셔도 좋을 듯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