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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O. Z. 리반엘리 지음, 고영범 옮김 / 가쎄(GASSE) / 202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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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생 오메르 줄퓌 리바넬리가 56세인 2002년에 발표한 책. 리바넬리는 1971년 군사 쿠데타 당시 체포, 투옥 등을 겪다가 망명을 떠난 튀르키예의 작가, 음악인 등이다. 그래서 이이의 작품엔 주로 튀르키예의 정치상황과 독재자, 오트만 제국 말기의 혁명 상황 같은 것을 풍자한 작품이 많다.
하급 중산층 가정의 시골 소년이 전액 장학금을 받고 보스턴의 하버드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얻어, 그곳에서 만난 튀르키예 최고의 부르주아 여성을 만났다. 이후 하버드 교수가 되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조금 수정해 아내와 함께 튀르키예로 돌아온 이르판 쿠르달 교수. 이르판은 뉴욕과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한 이스탄불에서 가장 교육을 잘 받고, 존경받고, 성공한 그룹의 일원에 속한다. TV 주간 토크쇼에 정기 출연하는 훤칠하고 체격 좋은 44세의 사내. 아내 아이젤 역시 미국에서 유학하다 이르판을 만나 그를 튀르키예의 최상급 부르주아들이 미국의 뉴욕, 보스턴 등 대도시에 짜 놓은 네트워크의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하급 중산계급 출신의 이르판은 상상도 하지 못하게 화려한 미국내 튀르키예 소사이어티에 처음엔 놀랐지만, 몸에 익히고, 즐기는 상황을 거쳐 이제는 결혼 후에 장소만 뉴욕에서 이스탄불로 바뀌기만 했지 초 상류 부르주아 사회에 푹 잠겨 있었다. 아내 아이젤이 워낙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이르판은 자기가 돈을 벌 필요도 없었으니, 교수 급여에 높은 TV 출연료, 기타 수입을 합친 것이 자금 운용 시스템 안에서 몇 년을 돌아 튀르키예의 경제 위기 속에서도 어마어마하게 몸집이 커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계속 하다보니 이르판의 가슴 속에는 불운한 검은 새 한 마리가 날개를 치고 있는 것 같은 감정을 키웠다. 검은 새. 이것은 두려움의 한 상징이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이르판 쿠르달 교수는 무엇을 두려워할까? 앞부분에서는 그의 방황만 계속 묘사하고, 두려움의 정체는 283쪽에 가서야 실토한다.
“바다로 나선 이후, 이르판은 그가 이스탄불에서 겪으면서 고통을 받았던 두려움과 위기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당장이라도 삶을 바꿔야 한다는 욕구를 부여해 준 죽음에 대한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 살면서 중요한 것을 생산해내지도 못했고 아주 사소한 은적조차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p.282~3)
앞 세대의 위대한 학자, 작가들처럼 불멸의 저작 한 편을 쓰고 싶은 소망이 있었는데 그걸 쓰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 같아서, TV에 하도 자주 출연하는 바람에 튀르키예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최고 인기 교수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하얗게 세우면서, 한밤중에 욕실 욕조에 걸터앉아 “난 행복해.” 조금 있다가 “나는 정말 행복해.”를 두 번 반복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운다.
우울증 아닌가? 하여간 작심한 바 있어, 이 철없는 교수는 아름답지만 남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으면서 살도록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은 아내 아이젤에게 사랑한다는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자기 계좌의 잔액을 몽땅 현금으로 인출해, 먼저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 집에 가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하루를 보낸 다음, 에게 해변에서 침실이 세 개 있는 요트를 장기 대여해 와인빛 바다 에게해로 나간다. 에잇, 팔자 좋다!
그런데 작품이 이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의 어리광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지는 않다. 미쳤지, 자기가 뭐라고 세상에 흔적을 남기려 해. 난 나 죽은 다음에 내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인간이라서 이르판의 심정이 더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O.Z.리바넬리가 짚고 싶었던 튀르키예의 문제는 이런 부르주아들의 엄살이 아니라, 동부 튀르키예의 한정된 고장에서 자신들의 나쁜 문화로 유지하다가 쿠르드족과의 전투가 시작되면서 난민들이 튀르키예 전역, 이 가운데서도 이스탄불 주변으로 몰려들어, 이제는 전 튀르키예 지역과 심지어 해외로 빠져나간 일부 무슬림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명예살인’에 관한 것이다.
튀르키예 동부 아르메니아 고원에 있는 커다란 반 호수 근처 반 마을에 타신 아그하라는 남자가 살았다. 대가족 가운데 ‘둘째 아버지’의 위치에 있다. 이 완고한 무슬림에서 둘째는 별로 의미가 없다. 오직 가부장적 전통에 따라, 집안의 모든 일은 하는 일 없는 ‘큰 아버지’의 결정에 따른다. 하여간 타신 아그하라의 첫 아내는 딸 메리엠을 낳다가 죽었다. 둘째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해 셋째 아내 ‘되네’를 들여 아이 둘을 낳았다. 큰아버지는 첫 아내와의 사이에 건강한 아들 둘을 두었다. 이 가운데 하나 ‘제말’이 훗날 튀르키예 북동쪽 가바산맥 경사면 초소에서 특공대에 근무하며 해방 쿠르트족 PKK와 죽음을 불사하는 전투를 2년 동안 치룬 다음에 정상이라고 보기 힘든 정신을 가진, 육체적으로 거친 사내가 되어 귀가한다.
제말이 메리엠의 서너댓 살 많은 사촌 오빠. 제말의 아버지이자 메리엠의 큰아버지는 농사와 집안 일은 전부 동생에게 맡겨놓고 자기는 포도농장 인근 오두막에 자리를 잡고 이 지역 종교의 지도자 역할에 전념한다. 엄격하고 다혈질적이고 위압적인 성격에다 쿠란과 예언자 무하마드의 어록을 수시로 인용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 불행하게, 정말 불행하게, 이슬람 원리주의자이며 종교 지도자인 큰아버지한테도 두 다리 사이에 끄트머리의 껍데기를 면도칼로 벗긴, 할례 받은 생식기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으며 그게 아무 때나 가동을 하고 싶어했다는 거였다. 여기서 ‘불행하게’라는 부사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무 죄도 없는 타인을 불행하게,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불행을 던져주는 행위를 말한다.
<행복>을 시작하기도 전에 열다섯 살 먹은 메리엠이 포도원 오두막으로 큰아버지 드시라고 식사를 가져다 드렸는데, 큰 아버지가 메리엠의 손목을 잡고 오두막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강간해버렸다. 다리 아래로 피를 흘리며 뛰쳐나간 메리엠은 가시덤불 위에 가시에 찔려 여기저기 피투성이가 되고 혼절한 상태에서 지나가던 두 명의 청년에 의하여 발견된다. 청년들은 메리엠의 상태를 짐작하고 그를 들쳐 매고 메리엠의 집에 데려다 주었다.
여자들이 보니, 어떤 일을 당했는지 한 번에 딱 알겠다. 그리하여 여자들은 메리엠을 집안에 들이지 않고 그길로 주로 벌을 줄 때 사용하는 헛간에 쳐 넣고 밖에서 문을 닫았다. 여자들에게 일말의 동정도 없었다. 특히 셋째 어머니 되네가 독했다. 먹을 것 약간을 들고 들어온 되네가 메리엠에게 말한다.
“너는 이스탄불에 가게 될 거야.”
그리고 손가락으로 한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 밧줄이 놓여 있었다.
“스스로 목을 매는 아이들은 이스탄불에 보내지 않지. 어떤 애들은 밧줄을 찾아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거든.”
되네가 말하는 이스탄불은 지리적으로 튀르키예의 거대도시 이스탄불을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 메리엠은 아직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알아듣는다. 아무도 찾지 않는 헛간에서 온갖 불길한 생각에 시달리는 메리엠. 태어날 때부터 엄마를 죽이고 세상에 나와 신으로부터 아무 사랑도 받지 못하는 아이. 소년기가 지난 후에 정말로 메리엠에게 다정하게 구는 친구도 없었다. 신의 미움을 받아 엄마 잡아먹은 년이라서. 그나마 어렸을 때는 메리엠과 함께 온갖 개구진 놀이도 마다하지 않은 제말 오빠와 쿠르트족 출신 메모 오빠. 이들은 그러지 않았지만.
날이 가고, 쿠르드족과의 전투에서 지뢰를 밟아 몸이 터져 죽은 동료, 머리통에 총구멍이 난 동료를 보고, 치명적으로 자신의 기총소사와 수류탄 투척으로 산산조각이 난 인물이 적군 병사가 아니라 열살짜리 염소치기 소년이었다는 걸 알고 PTSD가 제대로 작동되기 시작한 제말이 만기 제대해 집에 오면서 메리엠의 일은 급속도로 진행된다. 두 번 올가미에 목을 넣었다 다시 뺐을 뿐 아직 목을 매지 않았으니 이제 메리엠을 정말로 이스탄불로 보내야 한다고 강간범 큰아버지가 판결했다. 이 임무를 맡은 사람이 특공대원 출신 제말. 동네에서 메리엠을 죽이면 옛날과 달라서 누군가의 진술로 결국 제말의 짓임이 드러날 것이고, 그러면 제말도 현행 튀르키예 법에 따라 아주 길지는 않지만 제법 감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제말은 메리엠과 함께 이스탄불까지 여행을 해야 하며, 여행 도중에, 아니면 1천4백만 명이 사는 거대도시 이스탄불의 으슥한 골목에서 메리엠을 끝장내야 한다는 지시와 함께.
이렇게 메리엠과 제말은 떠난다. 제말은 예전 제말이 아니다. 아직 여자의 피부를 만져본 적도 없고, 놀랍게도 접촉은커녕 자위를 해본 적도 없다. 꿈속에 관능적인 무구한 여성이 등장할 때마다 몽정을 했는데, 몽정을 하기만 하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밖에 나가 반쯤 언 통 속의 물을 머리부터 거꾸로 뒤집어써 스스로를 정화해야 했다. 이것이 다 엄격한 이슬람주의자이자 이슬람 지도자이며 메리엠을 강간한 아버지한테 배운 절차였다.
드라마는 이 세 명이 우연히 만나는 것을 계기로 본격화한다. 큰 요트를 교수 혼자 운용하려니 힘드는 건 두 번째고 사고의 위협을 자주 만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만 근처에 있는 농어, 도미 양식장에서 (제말이 어떻게 메리엠을 죽이지 않고 함께 이곳까지 왔느냐는 생략하겠지만) 세 명이 만나 이르판이 둘을 고용하면서, 책의 저 앞에 거의 모든 독자가 예상했듯 셋이 상봉한다.
무리를 이루면 반드시 무리 구성원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법.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깬 자와 깨지 못한 자, 현명한 자와 조금 막힌 자. 이런 갈등은 못 배운 자, 깨지 못한 자, 조금 막힌 자의 열등감을 유발하고, 열등감을 갖게 된 이가 완력이나 금력 등 하여간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이 있으면 결국 그 권력을 사납게 사용하게 된다. 그게 사회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는 간혹 결과, 결말이다.
어떻게 어쩔 수 없이 결말에 이르게 되는 지는 말하지 않겠다. 썩 괜찮은 소설가 O.Z. 리바넬리가 이 책에서 절정에 이르게 하는 방법은… 이번엔 너무 상투적이라 조금 실망했다는 말을 보태며 독후감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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