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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발신자 - 프루스트 미출간 단편선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윤진 옮김, 뤼크 프레스 해제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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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엔 프루스트 소설집 《질투의 끝》을 읽었다. 도서관 홈페이지의 관심도서에 몇 년 동안 쌓아두기 만했다가 이웃분의 말씀 끝에 나와, 아이쿠 싶어서 얼른, 재미있게 읽었다. 이번엔 혹시 프루스트의 책 가운데 내가 모르는 것이 또 있을까 싶어 서가를 뒤지다가 2022년에 문학동네에서 낸 《알 수 없는 발신자》를 찾았다. 부제가 “프루스트 미출간 단편선”이다.
아시는 분은 아신다. 내가 이 “미출간 작품”을 별로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걸. 프루스트가 죽은 지 벌써 백 년이 넘었다. 이 책 나올 때가 딱 백 년이 되는 해였던 걸 보면 문학동네가 딱 시기를 맞춰 프루스트 마케팅을 한 걸로 보이며, 같은 해 2월에도 현암사에서 같은 레퍼토리(실린 작품들)로 “미출간 작품집” 《밤이 오기 전에》를 내기도 했다. 이 번역서의 원본 또한 2019년에 나왔는데, 여러 번 주장했던 내 생각은, 만일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품질이 좋았다면, 좋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면, 죽고나서 97년이 지나서야 책으로 찍었을까? 하는 거.
이 책 속에는 겨우 두 페이지 분량밖에 되지 않는 미완성 작품도 들어 있다. 독자는 이걸 과연 작품으로 봐야 할까? 혹시 작품 쓰기 전에 메모 비슷하게, 아니면 좀 혹독하게 말해서 끄적인 낙서 정도로 치부해도, 기껏 책을 낸 출판사나 역자는 기분 나쁠지 몰라도, 안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도 이미 너무 올드한(확실히 외래어 남용이란 지탄을 받아 마땅한 표현이다) 것들을. 뭐가 그리 올드하냐고? 예컨대 이런 문장들?
“저는 당신의 몸을 원합니다. 그럴 수 없음에 절망과 광란에 빠져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에 종이를 구기고 나무껍질에 이름을 새기고 바람에 대고 혹은 바다를 향해 이름을 부르듯이, 그렇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제 입으로 당신의 입꼬리가 올라가게 만들 수 있다면 내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똑같이 저를 달아오르게 만듭니다. 지금 내가 바로 그 욕망으로 제정신이 아님을 이 편지를 받은 부인께선 알 수 있을 겁니다.” (p.56)
이 편지를 쓴 사람이 책의 표제작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발신자” 크리스티안이다. 발신자가 그리 몸을 원하는 문제의 부인은 프랑수아즈인데, 이 편지를 죽어가는 그가 마지막 소원을 담아 쓴 편지인 걸 알고, 소원을 들어주려 자기 고해 신부까지 불러 사정을 설명해봤건만 신부는 딱 잘라 안 된다고 하고, 크리스티안까지 마지막 숨이 넘어간다는 스토리. 뤼크 프레스라는 이름의 프루스트 연구자는 이 작품이 189X년에 쓴 것으로 추정하지만 발신자가 누군인지 모르는 이 편지만 읽어보면, 19세기라도 세기말이 아니라 세기 초중반에 썼다고 해도 그리 참신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니 내가 비록 문외한이더라도 올드하다고 입을 놀릴 수 있었겠지.
물론 프루스트다운 길고 유려한 문장이야 말 해 뭐하겠고, 이런 긴 글을 유려하게 번역하는 윤진의 우리말 실력이야 내가 진작 알고 있는 터, 여기에 관해서는 도무지 까탈을 잡을 수 없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거다. 그리하여 아마추어가 함부로 평을 하자면, 해제를 쓴 뤼크 프레스처럼 프루스트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닌 일반 독자가, 프루스트한테 환장을 하지 않았으면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는 것.
이 책에서 중요한 건 프루스트의 미발표작, 메모 또는 끄적인 낙서를 읽는 것보다, 오히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뤼크 프레스의 해제를 읽는 것일 수 있다. 이 책이 “옮긴이의 말”까지 모두 합쳐 209쪽인데, 프레스 교수가 쓴 서문이 34쪽에서 끝난다. 그러고 마는 것도 아니라서, 각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를 시작하기 전에 각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에 관한 프레스의 해설이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한다.
또 있다. 각 페이지 아랫동네에 자잘한 글씨로 쓰인 각주. 멀미 날만큼, 하늘의 별만큼 달려 있어서 표제작 <알 수 없는 발신자>에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150개의 각주를 달았다. 처음엔 각주 표시가 있으면 습관적으로 본문 아래 각주를 한 번씩 찾다 보다가 딱 두 페이지 넘긴 다음부터는 각주 표시가 아무리 다닥다닥 붙어도 문학동네, 아니, 각주동네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본문만 읽고 지나가게 된다. 아니라고? 당신은 정말로 단편 분량도 되지 않는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를 읽을 때마다 각주동네 구경까지 꼬박꼬박 하셨다고? 그럼 당신은 프루스트한테 환장한 거 맞다. 그것도 1급 환장.
그래도 내 마음에 딱 드는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도 있다. <베토벤 8번 교향곡 이후>.
나는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베토벤 교향곡 가운데 4, 6, 8번이 홀수 번호보다 더 좋아졌다. 이 가운데서도 8번이 참 좋다. 뭐라? 8번이 <영웅>, <운명>, 위대한 7번, 그리고 <합창>보다 더 좋다고? 그렇다. 그거야 내 마음이지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잖여? 그잖여?
8번 중에서도 3악장 미뉴에트. 아오, 나이 좀 먹으니까 엄숙무비한 것보다 발랄하고 상큼하고, 앙큼한 게 얼마나 좋아? 나는 이제 대규모 편성 교향곡, 브루크너,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말러 같은 건 못 듣겠더라고, 변비 생길 거 같아서. 8번 3악장, 미뉴에트 한 번 들어 보실 텨?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브레멘 독일 실내 관현악단의 연주이다.
이걸 프루스트는 이렇게 듣고(감상하고) 얘기한다.
“우리 마음 속에서 애정으로 변하는 그 미소를 우리는 무한히 돌려받는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속도의 현기증을 느끼고, 기운이 소진될 때까지 싸워도 피로하지 않으며, 아무 위험 없이 미끄러지고 솟아오르고 날아오른다. 그곳에서는 매 순간 힘이 의지에 부응하고 관능이 욕망에 부응한다. 매 순간 모든 사물이 우리의 공상으로 달려와 가득 채워도 싫증나지 않는다.” (p.119)
딱 하나, 위 인용에서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신 “나” 단수로 썼으면 좋겠다. 내가 애정으로 변하는 미소를 돌려받는지 마르셀 프루스트가 아니라 귀신이라도 그걸 어떻게 알아? 특히 음악, 미술, 시, 소설 같은 예술에 있어서야 사람마다 다 다른 거니까 함부로 “우리”라는 말 쓰면 안 될 걸? 비록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우리”를 편애한다는 건 알아도 말이지.
하여간, <베토벤 8번 교향곡 이후>라는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가 내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나는 이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 모음집 《알 수 없는 발신인》을 당신한테 읽어보라고 권할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나는 프루스트에 결코 환장한 인간이 아니거든. 오히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활자까지 다 읽기는 했어도, 하마터면 질식사할 뻔했거든. 위대하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재미있고, 의미심장하고, 깊게 공감하며 읽은 분이라면 이 작품이랄까 메모 또는 낙서 모음집도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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