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수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7
이광수 지음, 이경훈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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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원. 진정한 애증의 인물. <무정>과 <사랑>에 이어 세 번째 읽은 작품 <흙>. 당연히 심훈의 <상록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계몽적 브나로드 계열. 1932년부터 33년까지 연재한 신문소설로 춘원 자신이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던 시절에 안창호 선생의 영향을 받아 귀농운동을 독려하기 위하여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나온다. 황군입대를 독려하는 등의 부일행위는, 절대로 잊지도 용서하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이 독후감에선 거론하지 않겠다.
 그런데, 춘원의 부일행위를 빼고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가, 결국엔 다 지워버렸다. 부일행위를 빼고는 도무지 춘원과 그의 작품을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흙>에서 작가가 줄창 주장하고 있는 것이 조선적인 것의 아름다움. 그걸 지켜나가는 사업으로 협동조합, 야학, 유치원 등의 교육 등의 농민운동이다. 반면에 주로 서울에 거주하는 부르주아들의 신문물에서 비롯하는 경박한 행동양식을 힐난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나는 특정 한 장면을 곱게 봐줄 수가 없었다. 본문만 760쪽에 육박하는지라 다시 찾아보기도 힘든데 마침 작품해설에도 딱 그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만주사변 이후 본격화된 중일전쟁에 징집되어 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군인들을 보는 주인공 허숭.
 “송영하는 군중이나 송영받는 장졸이나 다 피가 끓는 듯하였다. 이 긴장한 애국심의 극적 광경에 숭은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나라를 위하여 죽음의 싸움터로 가는 젊은이들, 그들을 맞고 보내며 열광하는 이들, 거기는 평시에 보지 못할 애국, 희생, 용감, 통쾌, 눈물겨움이 있었다. 숭은 모든 조선 사람에게 이러한 감격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사지에 임하는 군인들의 긴장한 애국심. 이런 군국주의적 일본정신을 모든 조선 사람이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는다면 오버인가? 이광수의 의식 속에서는, 한 커뮤니티(책 속에선 농촌무대인 ‘살여울’)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농민운동 역시 이런 ‘긴장한 애국심’에 입각해 수행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애초부터 작가는 조선적인 건 순응과 자제, 신독 같은 수동적 미덕 정도로 대표하였으며, 그러면서도 낙후하고, 미개하고, 더럽고, 초라하고, 관습적으로 수탈당해온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로 지정해버렸다. 토지와 집을 저당으로 잡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자에게 살여울에 사는 거의 모든 조선 농민이 돈을 얻어 잔치를 하고, 술과 고기를 먹고, 노름을 하다 ‘순식간에’ 기둥뿌리가 뽑힌다는 설정은 참. 하여간 그리하여 특히 조선의 농촌은 새로 개량되어야 하는 지역이어서 주인공 허숭으로 하여금 공동작업, 협동조합, 유치원 등을 건설하게 하지만, 1930년대 당시 독자들은 이 책 또는 신문연재 소설을 읽으면서 ‘일본 것이 세계 최고’라는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의 기본인식이 일본 군인들의 긴장한 애국심을 조선 사람들에게도 같은 감격으로 느낄 기회를 주고 싶었으니까.
 작품 자체에 대한 독후감은 별로 쓸 것이 없다. 브나로드 운동의 일환으로 한 것이니 계몽주의 소설일 것이고, 당대의 문호 이광수의 작품이라 당연히 남녀상열지사가 포함되었을 터이며, 30년대 장편소설들이 그렇듯이 등장인물들은 정형화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는 다들 짐작하실 것이다. 무엇보다 거의 무오류한 주인공 허숭이 등장하고, 한 사건을 기점으로 천하제일의 악당이 순식간에 그리도 혐오하던 농촌운동에 전 재산을 다 바쳐 투신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개차반 귀족 자제가 난데없이 조선에서도 제일 열악한 검불랑에서 적수 허숭과 같은 농촌운동을 벌여야 했는지도 ‘의문 없이’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은 비록 농촌운동을 주제로 하지만, 읽는 이에 따라서 1930년대 당시 서울에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들이 즐기던 방탕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겠다. 이 책으로 이광수는 더 읽지 않으리라 새삼 작정한다. 그러나 이광수, 이 사람이 애증의 이광수라서 작정한 것을 잊고 언제 또 춘원의 장편을 내키지 않는 손길로 한 권 골라 읽을 지도 모른다. 내 경우만 그런가, 참 나. 이광수, 지긋지긋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진짜 애증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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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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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소제목이 붙은, 본문만 735쪽에 달하는 장편소설. 읽어보면 이 책은 소설과 철학 사이의 기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화두는 질質. “꾸미지 아니한 본연 그대로의 성질”이 사전적 의미인데, 당연히 책에서는 사전적 의미만 포함하지 않는다. 소제목처럼 질은 “가치”와 대단히 가까이 자리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희랍시대 철학자에 의하여 발견되고, 의미가 축소된 “비범함”, 희랍어로 “아레테”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예술의 본질은 쾌락이다”라는 건 아무에게나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비범한 존재들, 아레테를 보유한 소수의 인간들에게만 허여된 쾌락인 것.
 주인공 파이드로스가 대학에서 수사학 전임강사로 일 할 무렵, 학과장은 학생들에게 ‘질質 적인 강의’를 하라고 주문한다. 여기서 처음 “질”이란 테마가 등장한다. 학과장에게 질이 무엇인지 묻자 그녀는 자기 전공이 아니란다. 한 번 화두를 잡으면 죽기 살기로 용맹 정진하는 체질의 파이드로스는 “질”이란 것을 더 공부, 연구하여 정체를 밝히기 위해 탐색해본 바, 시카고 대학의 “개념분석과 방법론 연구”라는 위원회가 있는 걸 발견했다. 이 위원회는 고대 희랍을 전공한 위원장과 영문학, 철학, 중문학 교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일종의 통섭학문 과정이다. 그래 우리나라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할 결정, 먹고 살만한 전임강사가 시카고 대학의 학부에 입학을 한다. 그러나 고루한 위원장은 그의 전공이 수사학이란 걸 알자마자 위원회 대신 철학과에 들어가도록 조치를 해버린다. 파이드로스는 기본적으로 대단한 철학적, 수사학적 소양을 지니고 있던 학생. 거기다가 질, 아레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아리스토텔레스가 최고의 철학이라 주장한 변증법의 시녀로 전락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과,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소피스트들까지 몽땅 연구한다. 그리하여 천하무적의 신공을 지니게 된 파이드로스는 강의 중 토론을 통해 철학 교수를 격파하고, 철학 교수 대신 강의를 이어받는 “개념분석과 방법론 연구” 위원장마저 일도양단, 파이드로스가 결론을 낸 2:0의 스코어로 작살을 내버린다.
 하 이거 참, 세상에 이런 무협지가 또 있나. 좀 어리벙벙한 부잣집 아드님이 중원을 떠도는 고수한테 부모님이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집안도 거덜이 나서, 숲속에 은거하고 있던 초절정 도사를 찾아가 갖은 죽을 고생을 해 무예를 연마, 드디어 중원의 고수에게 복수를 하는 것만 무협지가 아니다. 평생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해온 위원장에게 대항하기 위해 탈레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집중력을 쏟아 탐구한 다음 벌이는 일기필마의 진검승부. 철학에 관한 논의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진짜 무협지 아니냐!
 여러 번 얘기한 것 같은데, 내가 철학하고 친해지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같은 말을 어렵게 하려고 기를 쓰는 철학자들의 문장을 해석하는 일이 너무 힘겹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소피스트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저 후대의 칸트, 흄을 비롯해 무수한 철학자들을 인용하며 질質과 가치, 또는 탁월함(아레테)를 설명하는데도 오직 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피어시그가 써서 주장한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글을 읽어가면서 흥미를 느꼈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올 때마다 동의를 했거나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으며, 심지어 재미까지 있었으니, 내가 그동안 철학을 멀리했던 가장 큰 문제는 그동안의 철학자들이 쓴 수사법아니었을까. 나도 얼마든지 철학적 논의에 끼어들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하긴 뭐, 철학자들이 밥 먹고 죽자사자 용맹정진해 깨달으려고 하는 게 인간살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파이드로스가 “개념분석과 방법론 연구”의 위원장을 상대로 철학적 육박전 끝에 2:0으로 이기는 게 다냐고? 천만의 말씀. 하루에 네 시간만 자고 거의 모든 나머지 시간을 공부하는데 쏟은 그는 이후 네 시간이 두 시간으로 되고, 두 시간에서 전혀 잠을 자지 않는 인간으로 변하고, 하루 종일 침실 벽만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쉬운 얘기로 미쳐버렸다.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 그것도 지금은 절대 금지된 치료방법, 일찍이 켄 키지가 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주인공 맥 머피처럼 전두엽 근처에 전기충격을 가해 과거의 많은 부분을 잊어버리게 된 상태에서 퇴원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이 되는 바, 새롭게 만들어진 인간이 화자 ‘나’가 된다.
 책은 화자 ‘나’가 열한 살짜리 아들 크리스를 모터사이클에 태우고 미국 중부를 출발해 서부까지 휴가여행을 감행하는 과정을 써나간다. ‘나’는 기계공학 또는 기계수리에도 일가견이 있어 모터사이클을 수시로 분해 조립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보유했다. 화자 ‘나’가 파이드로스라는 사실을 왜 이야기하느냐 하면, 책을 읽으면 50쪽에 이르기도 전에 이 사실을 알 수 있으니 굳이 독후감에서 언급하지 않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이다. 처음엔 밴드에서 드럼을 치는 이웃 부부와 함께 출발했다가 몬태나 주에 있는 ‘나’의 친구 집에서 ‘나’와 크리스는 등산을 하기로 하고 드러머 부부는 귀가를 한다. 부자가 고생고생을 하며 등산을 마치자 곧바로 또다시 길을 떠나 캘리포니아를 향해 가며 갈등을 겪기도 하고 당연히 화해도 해가며, 사실은 아빠가 정신이상이었다는 고백까지 곁들여 이야기가 자꾸 복잡해지기도 한다.
 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하나는 로드 무비, 모터사이클을 타고 아들과 함께 하는 여행과 모터사이클과 기계공학과 수리에 관한 실제적 사색 또는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나’가 파이드로스 시절에 벌였던 철학적 오디세이아, 이렇게 구성이 된다.
 이 책에 대해선, 사실 여태 쓴 독후감이 아무 필요가 없다. 책 읽으면서 독후감에 인용하거나 하여간 써먹으려고 포스트잇 몇 장 붙여놨었다가 그냥 다 떼버렸다. 이건 읽어봐야 안다. 정말이다. 이 책을 소개하기 위한 가장 쉬운 말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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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성서 RCH72E-1C - 대(大) 단본 무색인 - 보급판, 가톨릭용
대한성서공회 편집부 엮음 / 대한성서공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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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에 최초로 신구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한 것은, “20세기 후반기에 있어서 기독교인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깊은 의미를 가진 큰 일”이었다고 이 책의 머리말에 쓰여 있다. 그 전에는 구교용 성서와 신교용 성서가 있었다는 뜻일 터이다. 그래 같은 하느님을 모시면서 다른 성서를 써온 것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공동으로 번역하기로 했는데, 책표지 아래쪽에 보면 괄호 열고 ‘가톨릭 용’ 괄호 닫고, 이리 표기가 되어있다. 그러니까 1977년에 어찌됐든 공동으로 번역을 했지만 신교 쪽에서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들만의 ‘성경’을 따로 사용하는 바람에 ‘공동번역 성서’는 가톨릭용으로만 쓰인다는 의미, 라고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한테 들었다. 나는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에게 소주 한 잔을 따라주며, 1977년에 신구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한 일은 너희들, 신구교를 막론하고 기독을 믿는 너희한테는 모르지만 ‘너희들을 제외한 인류 전체’에겐 전혀 깊은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고 발언하는 것으로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공동번역 성서> 가운데 애초부터 신약에는 흥미가 있지 못해 구약만 읽기로, 읽기는 읽는데 단 한 글자로 빼놓지 않고 모두 읽기로 작정을 하고 이제 막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모두 읽기를 마친 지금, 과연 성서를 읽고 나서도 독후감을 쓰는 게 옳은지 걱정부터 앞선다. 원래 <공동번역 성서>의 구약을 읽을 자리(순서)에 갑자기 다른 책을 끼워 읽고 독후감을 썼다가 야훼의 불칼을 맞은 바 있어, 다른 책도 아니고 ‘구약성서’의 독후감을 쓰기가 오금이 다 저리다. 책 자체가 진리인 성서/성경을 읽었으면 그냥 진리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감히 ‘읽은 느낌’이 이러니저러니 나댄다고, 전 세계는 그만두고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신도들한테, 예수가 세리들에게, 야훼가 애굽인들에게 했듯, 귀싸대기 한 대씩만 맞는다고 쳐도, 최하가 중상일 테니.
 그러나 이교도도 아니고 무신론이자 유물론자인 내 입장에서는, 애초부터 <성서>를 ‘그냥 책’으로 인식을 하고 읽었으니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처럼 <성서>의 내용이 어찌됐든 그냥 쓰여 있는 대로 알아서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분명 느낌이 있었으며, 그걸 속으로만 가지고 있는 대신 글로 써두어, 나중에 내가 <성서>의 구약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었구나, 알 수 있게, 이를 기념한다는데 누가 까탈을 잡으랴. 또 까탈이 잡혀 내 독후감을 읽은 기독교도들이나 다른 종교인한테 한 번 더 불칼, 이번엔 조금 더 해서 불창, 불총, 불대포를 받더라도 이를 어이하랴. 할 수 없는 일이지. 내가 쓴 독후감이 어찌 됐든 내가 책임진다. 어째 좀 비장하지? 독후감의 대상이 되는 책도 그렇고, 야훼의 불칼 맛이 어떤지 몇 주 전에 경험을 해 조금은 알 듯해서 더욱 그러는 듯. 어쩌랴, 책을 읽으면 독후감을 쓰고 싶고, 썼으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을. 이런 짓하다 가끔 얻어터지기도 하고, 욕도 먹고, 말로는 안 해도 실망스러워 하기도 하고. 그게 인생이지.
 <구약성서>를 읽어보기로 결심을 한 건, 어느 책에서든가 기억나지는 않지만(솔직히 이거 아니면 저건데, 섣불리 하나 찍었다가 아니면 창피하잖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귀가 구약의 시편이라는 거. 그래 여주인공이 늘 시편을 읽는 장면이 인상 깊어서였다. 그거 말고도 숱하게 창작의 재료가 되어왔던 창세기와 출애굽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판관 삼손의 머리카락, 솔로몬의 지혜, 홀로페르네스의 대가리를 잘라온 유디트, 흔히 ‘느브갓네살’ 또는 ‘나부코’로 알려진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한 바빌론 유수, 기타 등등. 또 있다. 황석영이 썼다고 했다가 나중에 양아치 출신(진짜 양아치 출신이다) 제13대 국회의원 이철용이 쓴 소설로 밝혀진 <어둠의 자식들>에서 ‘범털’이 아니라 ‘개털’로 감옥에 간 이동철이 구약성서를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하면, 바로 “이스라엘 삼국지.” 다분히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의 역사서라고 생각해서 읽기 시작했다가, 죽는 줄 알았다. 물론 재미있는 부분도 많았지만, 아이고 머리야, 한 얘기 또 하고, 그 얘기 한 번 더 하고, 한 번 더 한 얘기 또 하고, 그리하여 n번쯤 반복하는 데야 어떻게 견딜 방법이 없더라. 시편도 진심으로 기독교를 믿는 신자/신도들이면 감동 감화 가득해서 마음을 울리며 읽겠지만 애초부터 유물론적 사고방식이 꽉 들어찬 불쌍한 인간은 도대체 이걸 감사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집단에 경의를 표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름다워? 그건 선생님들이나 그런 거고.
 시편에 이어지는 잠언도 뭐 별로. 가까운 사이에선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솔직한 말을 해줘야 한다는데, 아이고 랍비님, 경험상 말씀드리는 바,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되는 사람한테 일수록 솔직한 말 해주면 ‘가까운 사이’가 결딴나더라. 이건 그냥 예를 하나 든 바이며, 구약성서니까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가 막 생기기 시작할 당시에 기록한 율법과 바른 행동양식, 미풍양속, 기타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 되살려 너도 나도, 젊거나 늙었거나, 여자들은 빼고 남자들만, 새삼스레 할례를 받을 수도 없는 거고 말씀이지. 적어도 구약에 의하면 할례를 받지 않으면 사형이다. 지금이야 가정의학과, 비뇨기과, 심지어 피부과에서도 할례를 해주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예언자 또는 선견자들 또는 레위의 후손들만 할례를 베풀 수 있었는데 도대체 유대인들은 귀두포피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그까짓 껍데기에 목을 맬까? 궁금하시지? 글쎄 기독교도도 아니며 모든 종교에 관심도 없는 인간이 처음 구약을 읽으며 든 생각인데, 할례는 단순히 위생적 측면에서 귀두포피를 잘라내는 의료행위라기 보다 야훼를 믿는 집단의 정화의식이라고 봐야할 거 같다. 중간 너머 읽어 가다보면, 가슴에 또는 머리에 할례를 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봐 그렇다는 말이다. 많이 아시는 기독교인 계시면 무슨 엉뚱한 이야기를 하느냐 지탄하실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생각대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다. 당신이 기독교도/기독교인이라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고, 만일 기독교는 믿지 않지만 나처럼 ‘살면서 한 번 읽어봐야 할 책’ 정도로 가톨릭 용 <성서>나 개신교용 <성경>을 꼽는 분이 있다면, 강력하게 권하니, 재고해보시라. 무엇보다 과하게 장황하다. 1,474 페이지. 한 페이지에 양면 분할 인쇄. 그래서 읽어야 할 면은 1,474 x 2 = 2,548 면이다. ‘습자지’라고 하면 젊은 분들은 무슨 야한 얘기가 나올 거라 기대할 수 있겠으나 습자지는 1970년대 붓글씨 쓰던 얇은 종이를 칭하는 것으로, 습자지만큼 얇은 종이로 1,474 페이지, 737 장을 넘기는데,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그냥 그 자리를 읽고 있는 듯한 지루함은 진짜 읽어봐야 안다. 위에서 얘기한 양아치 출신 지체장애인 13대 국회의원 이철용이 쓴 작품의 주인공 이동철(작가 자신은 나중에 자신이 정말로 목사가 되지만)은, 성경을 감방 안에서 한 장씩 찢어 몰래 담배를 말아 피우는 목적으로 애용하기도 한다. 이젠 담배 피우는 인종은 야만인으로 대접받는 냉혹한 현실에서 비 기독교인에게 성서의 용도는 점차 좁아지기만 할 뿐이다. 성서에서 모든 역사적 사건은 야훼의 관점으로 극단적인 왜곡을 당하고 있으며, 그게 한 사건 당 수십 차례 되풀이 되며 믿음 없는 독자를 콱 질리게 만든다. 기독교도들은 시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귀라고 했으나, 나는 읽으면서 정말로, 시각에서 비롯하는 육체적 멀미를 느껴야 했다. 비기독교도로 나처럼 <성서>를 교양의 대상으로 섣불리 겪으려는 분들, 다시 말씀드리오니, 신중하게 재고해보시라.
 독후감 다 썼다. 돌 던지실 분은 지금부터 던지시면 된다. 단, 나는 야훼의 돌보심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종임을 감안해주시면서 팔매질을 하시기 바랄 뿐이다.

 

 

 한 마디 더. 쾰른 대성당, 파리 노트르담 성당, 로마 대서당,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이런 건축물을 (비행기 타고 가서 직접 본 게 아니라 TV를 통해)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미의 태중에 있을 때 낙태 당하지 못한 것을 한탄할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불행한 운명을 견디는 동안에 분명히 하느님은 자신을 위한 이런 웅대하고, 거창하고, 화려하고, 눈부신 전당을 짓는 걸 바라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왔다. 난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출애굽기에서부터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는 자신의 성막聖幕과 제사장을 위해 에봇이란 초호화판 의상을 입히는 등, 당시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장치와 의상을 요구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최초의 성전 역시 당시 기술로 최고로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요란난만하게 지었으며, 성전 준공식에는 황소 이만 이천 마리, 양 십이만 마리를 도살해 불에 태웠다. 이른바 번제.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는 소와 양이 타면서 하늘로 치솟던 초미세먼지를 흠향하고 있었던 거다. 수소 22,000 마리라고 하니까 실감이 안 나시지? 이게 돈 가치의 하락 때문이다. 수소 마리당 꼬리 빼고 코끝부터 엉덩이뼈까지 길이가 2미터라고 가정하면 이 수소들을 한 줄로 늘어세우면 얼마나 되는 줄 아시나? 44,000미터. 44킬로미터. 화곡동에서 천호동 가는 거리다. 양 십이만 마리. 한 마리에 1미터로 계산하면 120킬로미터. 검색해보시라. 한 줄로 세우면 서울 시청에서 원주시청까지 가고도 십 킬로미터 더 간다. 이거 말고도 각종 번제와 십분의 일 세금 등등은, 그만 하자.
 성전의 화려함은 또 말도 못해서, 거의 대부분이 금과 은으로 도금되었다고 하는데, 전기도금 장치가 없던 시절이라 금과 은을 얇게 펴 바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 상상도 못하게 많은 진짜 금과 은을 성전 짓는데 소비해야 했다. 그러니 내가 틀렸다. 쾰른, 노트르담, 로마,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은 종교권력을 형성했던 인간들이 자신들의 허영과 권위와 집권욕과 과시욕, 그리고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건축물이 아니라, 야훼 스스로가 말했듯 질투의 하느님, 복수의 하느님이 다른 신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뻑적지근하게 자신이 얼마나 숭앙받고 있는지 과시하고자 하는 천부의 랜드 마크였다.
 기독교 신자/신도께선 용서하시라. 위의 모든 것은, 한 불쌍한 유물론자가 감히 구약을 읽고 헛소리 한 것에 불과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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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 시티 민음사 모던 클래식 17
레나 안데르손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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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덕 시티. 표지에서 보듯 오리들이 사는 도시다. 굳이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을 거론하자면 도널드 D. 그냥 쉽게 연상되듯 도널드 덕. 스웨덴 사람이 쓴 풍자적 우화소설. ‘덕 시티’는 미국을 모델로 한 것이라 짐작할 수도 있고, 실제 역자 해설에서도 “그로테스크한 미국을 상징한다.”고 콕 집어서 이야기했다. 도널드에게 (패스트푸드를 하도 많이 먹어 뚱뚱한)조카가 세 명 있는데, 날씬한 청년들이 다 전쟁터에가 몰살을 당하니까 일찌감치 지원했음에도 부적격자로 입대하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던 조카 셋이 전부 세상의 어느 곳에 있는 사막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다. <덕 시티>가 2006년 작품이며, 스웨덴은 애초에 이 전쟁과 상관이 없으니 당연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이야기하는 것이겠다.
 방금 다 읽고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 21세기 들어 스칸디나비아 출신 작가들이 (이탈리아 작가들과 더불어) 한국 문학계에 블루칩으로 떠오르기 시작해, 조금, 아니, 많이 관심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 독후감의 처음부터 솔직하게 얘기하긴 조금 그렇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작품을 설계하는 단계에서 작가가 왜 사막에서의 전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스토리 중간 중간에 참전한 조카들 이야기를 삽입하고, 마지막에 세 조카 가운데 한 명이 생존해 돌아오는 것으로 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처음부터 에이햅, 아 참, ‘에이햅’이라니까 나중에야 눈치 챌 수 있었잖은가, 흔히 쓰듯이 ‘에이해브’라고 해야 <모비딕>의 광기어린 포경선 선장을 떠올릴 텐데, 하여간 에이햅 군대에 의하여, 뉴욕에서 벌였던 원조 ‘범죄와의 전쟁’ 비슷한 ‘흰 향유고래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권력자들, 작전과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패스트푸드를 열라 만들어 파는 회사 JvA 사장이자 ‘덕 시티’ 대통령의 친구, 흰 고래들, 흰 고래는 아니지만 그들의 인권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인간들만 작품의 대상으로 했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싶었으나, 글 읽고 이리 생각하는 것이 독자의 권리이듯이, 하고 싶은 얘기 쓰는 건 작가의 권리이니, 뭐 그러거나 말거나. 여기서 흰 고래라는 게 뭐냐 하면, 초고도비만자들. 그들이 공통적으로 몸에 달고 다니는 지방 덩어리를 일컫는다.
 국민들이 점점 고도비만의 지경으로 처하는 걸 보다 못한 대통령이 하루는 에이햅 작전을 벌여 뚱보(흰 고래)들을 대상으로 지방 퇴치 작전을 벌이는 이야기. 날이 갈수록 비만을 악덕시하는 바람에 덕 시티에선 체지방률이 높은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비인간 비슷하게 취급을 받기 시작하고, 시간이 좀 더 지나가니까 정상인들도 체지방률 0(zero)를 위해 단식과 과격한 운동으로 죽어 자빠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다분히 문명 비판적이고, 현대 육체에 대한 미학을 비꼬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문제는, 솔직히, 별로 재미가 없다는 거. 지금은 품절. 민음사 모던클래식 시리즈에 좋은 작품이 많아 기대하고 골랐다가 김이 좀 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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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의 승부수 -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3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3
막스 갈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예담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네로 황제 말기 시절부터 티투스의 죽음까지를 그리고 있다.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1부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에서 기록자로 나온 가이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의 후손인 세레누스가 화자話者 ‘나’로 등장하는 건 2부 <네로의 비밀>과 같다. <네로의 비밀>에서 보면 아그리피나가 네로를 낳을 때 옆에서 시립해 있어, 대가리에 쇠똥도 벗겨지지 않은 네로를 제일 처음으로 본 신하로 등장한다. 3부 <티투스의 승부수>에선 티투스가 죽고 벌써 2년이 흘러 이제 자신도 죽음의 신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 쓰기 시작한 <내 삶의 연대기>가 거의 끝난 시점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러니 화자 세레누스를 대강 기원 10년 경에 출생했다면, 이이가 거친 황제만 (위키피아를 참고로 해서) 읊어 봐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이렇게 총 11명의 황제 시대를 걸쳐 살았다.
 막스 갈로의 기준으로 보면 로마 최초의 황제 그룹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에선 유일하게 현명한 황제가 초대 아우구스투스였을 것이고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책에서는 클라우디우스가 참 어진 황제로 나오는데 갈로는 어질기는 하지만 형편없는 황제라고 슬쩍 넘어가고 만다) 네로 이후 혼돈기와 베스파시아누스 황조에선 역시 유일하게 티투스만 좋은 황제였다. 네로를 다룬 2부에서 네로는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로 질탕하고, 폭력적이고, 우스꽝스럽고,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물로 일관하다 중도에 뚝 끊어버린다. 려, 뭐 이딴 게 있나 싶을 정도의 중동무이. 그러다 3부 <티투스의 승부수>에서 네로는 친위대의 배신으로 주위의 아첨꾼들이 모두 떠나자 유모의 도움을 받아 자살을 하는 것으로 너무 간단하게 취급해 읽기가 허탈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후에 로마 역사는 사실 정신없이 팽팽 돌아가게 되는데, 실제로, 이후 황제를 해먹는 갈바는 7개월, 네로의 아내 포퐈이아의 전남편 오토는 3개월, 게르마니아 지역 사령관이었던 비텔리우스는 8개월 동안 황위에 올랐을 뿐, 이후 베스파시아누스 일가가 세 번에 걸쳐 황제를 할 때까지 너무 속도를 내서 휙휙 지나가, 사실 중요한 사건은 없고 그냥 힘 센 놈이 덜 센 놈 잡아 죽이는 쌍권총시대였을 뿐이기는 하지만, 달리는 말 잔등 위에서 먼 산 바라보는 느낌을 숨길 수 없다.
 어쨌든, 화자 세레누스로 말할 거 같으면, 네로 시절을 다룬 2부에서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의 밥이 됐던 기독교인들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바, 이번 3부에선 티투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에 황자의 자격으로 떠난 예루살렘 원정이 주요 장면인 관계로, 한없이 벌어지는 살육과 고문 등을 보며 자연스레 부활과 기독교를 믿게 되는, 가능하기는 하지만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진다. 암만해도 네로 이후의 황제들을 보는 작가 갈로의 시각은 기독교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겠다 싶기도 하다. 친 기독이면 우리 편, 반 기독이면 너네 편, 이런 식.
 다수의 유대교와 극소수의 기독교인들이 똘똘 뭉쳐 대 로마 항쟁에 나선 갈릴리와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 그러나 당시 로마는 세상의 어떤 민족과 싸워도 쉽게 이길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상태. 이스라엘과 갈릴리의 아그리파 왕과 여동생 베레니케 여왕, 이집트 군단을 지휘하는 유대인 출신 로마 시민인 티베리우스 알렉산드로스 같은 이들은 역불급이니 유대민족의 군사력이 로마를 능가할 때까지는 좀 굴욕스럽지만 생명을 이어가면서 인구를 늘리는 것이 상책이라 주장하는 반면(출애굽기 때부터 유구한 전통이다), 젊은 투사들의 집단인 ‘열심당’과 ‘단검자객단’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은 세계에서 가장 우월한 유대인이 로마인들의 지배하에 있다는 걸 참지 못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는데, 어떤 것이 옳은 건지, 화자 세레누스는 헷갈린다.
 책은 그리하여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 연합군과 유대인들의 전투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어린애 팔 비틀기 정도의 무력이 충돌하니 당연히 로마가 이기겠지만, 과거 유대인의 깡다구 역시 만만하지 않다. 근데, 잘 나가다가, 1인칭 시점을 사용하는 책에선 화자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제일 중요한 법이라서, 점점 그리스도라는 신을 믿는 집단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독자는 환장하겠더라. 전쟁에서 당하는 피지배민족 유대인의 참화를 너무 강조하는 것. 비단 티투스의 정벌뿐이랴. 세상에 정당한 전쟁이 언제 한 번이라도 있었더냐. 이래서 2/3쯤 지나면 김이 팍 새버리고 만다. 내 조부께서 이런 경우에 말씀하셨지. 스팀 아웃?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시리즈가 모두 다섯 권으로 이어졌는데, 세 권을 읽었고, 네 번째가 로마 오현제五賢帝 가운데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관해서다. 5현제가 언제 적 이야기냐 하면, 티투스가 즉위 2년 만에 숟가락 놓고(동생에 의한 독살설도 있단다) 친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황제를 먹었다가, 이왕 황위에 올랐으니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겠다는 일념 하에 온갖 난장판을 다 저지른 결과, 암살을 당하신 다음에 추대된 이가 네르바 황제. 이이가 초대 5현제다. 이후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이때부터 호칭이 복잡해지는데)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 다섯 명을 일컫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드님이 누군가 하면,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아주 얍삽하게 생기고 누이를 사랑하며, 감히 러셀 클로한테 맞짱 뜨자고 하던 (물론 영화에서만 그랬다) 바로 그 콤모도스 되겠다. 왜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쓴 <명상록>은 나도 읽어봤을 정도로 아직도 명작으로 치지만(근데 읽어보면 정말 재미없다), 책 소개를 보면, 이 황제님이 기독교를 탄압했다는 거 때문에 막스 갈로 선생의 미움을 좀 받는 거 같아서다. 물론 읽어봐야 알겠지만 이런 정도의 정보만 보고도 책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다. 5현제 시절이야말로 아직 기독교가 세상에 퍼지기 전에 일부 혼돈스럽고, 일부 야만적이지만, (서쪽에서만)거의 자연적인 상태의 인류였던 시절이라, 앞으로 이천 년을 지배하게 될 이데올로기를 굳이 벌써부터 가까이 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싶어서.
 에이, 됐다. 로마 인물소설 시리즈는 여기서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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