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완 선생 - 그때가 우리에게 가장 자신만만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4
판샤오칭 지음, 이경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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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목이 적각의생만천화赤脚醫生萬泉和. 만천화萬泉和는 사람의 이름으로 고유명사. 의생醫生은 책에선 ‘선생’으로 일정한 지위에 오른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사용했다. 그러니 의사선생 정도로 보면 되겠다. 그럼, 적각赤脚을 ‘맨발’이라고 번역한 것. 글쎄, 이거 말 그대로 하면 맨발이 아니라 ‘맨다리’를 일컫는 거 아냐? 긴 바지를 걷어 알종아리가 보이는 상태. 당연히 맨다리라면 맨발을 포함해서 말할 테니 뭐 까탈이야 하겠느냐만, 20세기 중반 중국에서 성인이 맨다리를 드러낸 채 다닐 수 있던 지역은 시골, 즉 농사짓기 위해 맨다리를 내놓을 수 있는 장소였겠지. ‘의생’도 의과대학 졸업해서 면허증 가진 의사선생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한의학‘漢’醫學, 즉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의 후예로서 대를 이어 중국의술을 사용해 농민들의 질병을 보살피기도 하고, 이것만 가지고 먹고 살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틈틈이 알종아리를 내놓고 논농사, 밭농사도 짓던 이들을 말하는 것으로 짐작했다. 뭐 대강 맞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저 촌구석의 한의사들 있었다. 면소재지의 비싼 한의사들과 달리 한 마을에 누가 병이 났다 하면 냅다 뛰어가던 반쯤 아마추어 의사, 그런 거. 시골구석에는 ‘약방’이란 간판을 달고, 정식 면허증이 없으나 워낙 오랜 세월 약을 팔아와 약사 비슷하게 약을 판매할 수 있는 자격을 내준 적이 있고, 동네에 갑자기 토사곽란을 하면 아이들더러 빨리 뛰어가 약 사오라 심부름시키던 약 판매소, 약방이 있었다. 그런 ‘약방’ 아들이 나 빌어먹고 사는 회사의 부장으로 있다가 뛰쳐나가 회사 하나 만들어 지금 잘 먹고 잘 산다. 그래서 안다. 여기까지가 ‘맨발의 의사선생’ 완취안허의 정체에 대한 설명. 이해가시지?
 다음은 시대적 배경.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다 맨발의 의사선생이지만 정작 목수가 장래희망인 열 몇 살의 완취안허가 동네 어린 왈짜의 귀 속에서 벌써 싹이 난 썩은 콩 한 알을 집게로 꺼내 아무도 고치지 못했던 말썽장이 ‘완완진’의 병을 낮게 해주면서, 자신의 희망사항과 전혀 관계없이 ‘맨발의 의사선생’의 길로 들어설 때가 중국혁명사의 가장 어리석었던 문화혁명 시기. 이때부터 완취안허가 점점 나이 들어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어라 어떻게 중풍 맞은 아버지가 여길 다 오셨네, 라고 당시 자기 아버지의 나이만큼 시절을 보내고 났을 때까지다. 중국 근대사의 가장 굴곡이 많았던 20세기 가운데 중반부터 후반까지. 딱 생각나는 중국 작가들 몇 명 있다. 이 시기를 작품의 주요무대로 정해서 한없이 궁상맞고, 처절하고, 격변하는 중국의 인민들을 그린 작가.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중국의 작가를 대면 다 이 시절 범주에 든다. 문화혁명 시절에 몰두했던 다이허우잉, 2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두루 중국현대사를 무대로 한 모옌, 문화혁명 시절부터 현대까지 아우른 위화와 옌롄커, 수퉁 등등.

 

 

작가 판샤오칭

 

 책의 분위기도 딱 그렇다. 다이허우잉은 주로 당시 지식인의 신념과 사랑과 진실과 실천에 관한 책을 써서 이들과 좀 다른데, 나머지들은 전부 이 55년생 아줌마 판샤오칭과 비슷한 계급의 등장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래 <맨발의 완 선생>을 읽어보면 인물들이 이미 익숙한 느낌이 들 수밖에. 가난하고, 힘겹고, 무식하고, 본능적인 인간들의 비빔밥. 이들이 서로 얽히고설키고, 그러면서 참으로 대륙적으로 받아들이고, 포기하고, 체념하고, 인생사라고 넘기면서, 때로는 그것도 복수라며 심각하지 않은 지질한 보복을 해가면서 그냥 살아내는 군상들. 그 속에서 사랑이 있고 배신이 있고, 남의 애인 빼앗고, 후안무치 아니면 도무지 할 법하지 않은 일을 전 약혼자에게 버젓이 맡겨버리기도 하는 일도 일어나니, 이런 장면이면 우리의 순박한 바보 완취안허의 체념적인 게으름에 마구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공 같이 착한 바보 비슷한 인간이 마지막 장면에 잘 풀린다는 믿음 하나로 끝까지 읽어나가게 되는데, 그게 정말 잘 풀리는 것인지 아닌지는, 이것도 현대소설이라고 분명하지 않게 끝나고 만다. 책 뒤에 해설 없이 본문만 478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마음먹고 읽으려면, 하루에는 좀 힘들고 넉넉잡아 하루 반이면 충분한데, 지금 품절 상태라 구하기도 쉽지 않고, 보시다시피 표지 디자인도 우습고 그래서 뭐 굳이 읽어보실 분은 읽어보셔도,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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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거 푸시 작가정신 소설향 20
이명랑 지음 / 작가정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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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화자에 의한 일인칭 전지적 시점의 중편 소설. 일인칭 소설은 쓰기가 쉽지 않다고 어디선가 읽은 거 같다. 그건 세계를 자신(작중 ‘나’)의 세계관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고, 편집하고,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정확히 이렇게 쓰여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취지로 읽었다. 일인칭 소설의 경우에 독자도 마찬가지로 작가가 만들어놓은 화자 ‘나’의 시선으로 (작품의)세계를 보기 때문에 어떤 때엔 과하게 ‘나’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할머니의 손에 길러져 자연스레 어머니와 사이가 껄끄러운 여자.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나쁜 영향이 제일 컸으리라 짐작이 가는 자연스러운 성장으로의 비행소녀 출신. 비행이라 해야 그리 큰 비행도 아니고 그저 가벼운 절도와 며칠 만에 다시 돌아오는 몇 번의 가출. 가출을 끝내고 귀가할 때마다 어머니는 열일곱 딸의 손을 잡고 산부인과로 직행해 임신여부를 검사하고, 그때마다 엄마는 딸이 임신하지 않았다는 데, 그렇게까지는 인생을 망쳐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을 한 것처럼 ‘나’의 눈에 보인다. 다시 강조하는 바, 작품이 일인칭 시점이라 정말로 어머니가 자기가 낳은 딸이 가출을 해서 무절제한 성관계의 결과로 임신하지 않았고, 그래서 자신을 효과적으로 비난하지 못하는 것에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나’의 서술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심지어 작가 자신도 모른다.
 다른 거 다 빼고, <삼오식당>과 <나의 이복형제들>을 쓴 이명랑이 왜 이런 작품을 썼는지 의아했다. 영등포시장의 악착같은 상인들이 만들어내는 비극적 코미디 <삼오식당>과 이후 세월이 흘러 다국적 외국인(들)과 장애인(들)을 향한 애틋한 시선의 <나의 이복형제들>을 읽다가 갑자기 고급 백화점 문화강좌 가운데 하나인 ‘라틴 댄스’ 수강생들과, 지극히 비정상적인 한 가정의 외동딸이 가정을 이루어 사는 모습은 어찌됐든 내겐 불편했다. “겨울 밤, 시장에 인적이 뜸해지면 빈 가게 아무데나 들어가 엉덩이가 타는 줄도 모르고 화투판에 앉아 있는 시장놈”이었던 ‘삼오식당’ 주인 여편네의 딸(소설의 관찰자)의 남편은, 이번엔 OO공업고등학교 졸업 학력의 육군하사로, 많아봐야 서른 살의 나이에 생식기 신경절단과 보형물 삽입 시술을 받는 근육질의 조루증 기질이 농후한 마초로 변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삼오식당>을 해설했던 평론가 강상희의 말대로 영등포시장의 건강한 원시적 생명력을 가진 무수한 인물들로부터 배운 다양한 ‘경험의 언어’로 무장하기는 했으나, 원시적 생명력이란 것이 악의적인 동적動的인 에너지로 작동을 하기에 그친다. 그러니 더 이상 건강하지는 않다, 라고 하면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과 유사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 ‘나’가 불편했던 것. 21개월 된 아들아이를 키우는 스물일곱 살의 여자. 그럼 30개월 전에 임신을 했고, 몇 년 동안 주말부부 비슷하게 떨어져 살며 남편이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결혼 4년차로 쳐도 스물세 살에 혼인을 한 거다. 책의 앞쪽에 분명히 삼류대학에 다녔다고 했으니 졸업과 동시에 육군하사와. 부부 사이에 섹스를 끝내고 곧바로 욕실로 향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이 남자를 사랑하는 날이 오게 될까?”를 생각하는 여자. 관계 중에 엑스터시 비슷한 것이 찾아오면 자기도 모르게 첫사랑의 남자 ‘찬’을 발음해 소리 내는 나쁜 습관이 있는 여자. 남편이 아무리 동물 같고, 조루증 기운이 있고, 배꼽과 허벅지에 사정을 하고, 고리타분하다 해도 이 정도면 ‘나’도 남편을 조금은 불쌍하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혀 시각을 타인의 입장으로 돌릴 수 없는 일인칭 시점의 ‘나’는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자신이 피해자가 되고, 설득당하는 자가 되어 어쩔 수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무생물의 삶으로 살고 있다. 몸만 다 큰 성인일 뿐 의식은 분명히 미성숙의 상태에 머무는 삶.
 만일 이명랑의 전작들을 읽어보지 않아서, 이이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능청스런 생명력에 축복을 내릴 줄 아는 작가인지 모른다면 이 책을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불행하게 나는 그렇지 못해 <슈거 푸시>는 내가 읽은 이명랑 가운데 D를 줄 수밖에 없다. 220쪽에 달하면 장편 아니냐고? 큼지막한 글씨에 넓은 자간과 행간. 널럴한 편집으로 반나절이면 다 읽고 독후감까지 쓴다. 물론 D란 학점은 (하필이면!)요즈음 내가 외국의 장편 명작들을 계속해 읽은 여파일 수도 있을 터. 이명랑.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시라. 난 여전히 당신의 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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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 도덕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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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저자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의 정체가 무엇일까. 이렇게 묻는다면 그가 어떤 분야의 공부를 했는가, 하는 물음과 비슷하다. 소위 말하는 전공. 책을 읽다보면 참으로 다양한 분야를 통섭하지 않고는 이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단정하게 된다. 작가 소개를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9세 때 지능지수 170. 15세에 미네소타 대학 화학과 신입생 과정 수료. 이후 생화학 공부 잠깐. 방황 후 군대 입대, 한국 파병으로 근무. 제대 후 미네소타 대학 철학 학사. 인도 바라나시 힌두대학에서 동양철학 수학. 미네소타 대학에서 저널리즘 공부. 중단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집필활동. 다시 미네소타 대학 저널리즘 분야 석사학위. 몬태나 주립대학 영작문 교수.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 중 정신병원 수용. 퇴원 후 아들 크리스와 1968년 모터사이클 여행. 이 여행의 추억과 철학적 사색을 담은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1974년 출간, 세계적 명성을 얻음. 책 출간 다음 해 보트를 타고 수피리어 호수에서 출발해 허드슨 강을 따라 여행.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못다 한 철학적 사색을 보트 여행과 섞어 1991년 <라일라> 출간. 책 두 권이 대박이 나 2017년 4월, 자택에서 88세로 운명할 때까지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편안한 노후를 보냄. 모터사이클 여행을 함께 했던 아들 크리스는 10대 후반 시절에 아빠 닮아 동양의 선(禪)을 공부하던 중 노상강도에게 칼 맞아 죽었으며, 쉰 살이 넘어 딸을 낳았는데 아내와 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음.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정말 재미있게 읽어, 단박에 후속 작품 <라일라>를 사놓고 일부러 두 책 사이에 숨을 죽인 다음 읽기 시작했다. 위에 쓴 피어시그의 간략한 일생을 보면 두뇌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젊은 시절의 철학적 고뇌와 학습, 학문적 논쟁, 정신병원 같은 건 1975년의 책에 다 들어 있다. 이제 1976년에 보트 여행을 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앞의 책에서 못다 한 철학적 논의를 더 확장하기 위해 <라일라>를 쓴다. 앞의 책에서 화자 ‘나’가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주어진 이름 ‘파이드로스’가 <라일라>의 주인공으로 그대로 등장한다. 책엔 파이드로스가 보트 여행을 하는데, 여행을 왜, 어떻게 떠나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모든 여정은 궁극적으로 오디세우스의 긴 모험과 유사하다. 단, 여정을 통해 우연히 만나 일정 구간을 함께 하게 된 여인 ‘라일라’로 인해, 파이드로스가 다시 ‘질quality’과 ‘가치’를 정적인 가치와 동적인 가치, 사회적인 가치와 생물적인 가치, 등등 여러 분야로 사색을 확장하는 철학적 항해, 이것이 오디세우스의 그것과 더욱 유사하다, 라고 말해야겠다.
 열여섯에 임신을 하고 결혼을 해서, 열일곱에 딸을 낳았으나, 경험 없는 어린 엄마가 갓난이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가 그만 질식해 죽어버려 정신질환을 앓았고, 병원에서 퇴원한 다음에 수많은 남자와 관계를 가지며 되는대로 살고 있는 여자 라일라. 항해 중 잠깐 정박했던 로체스터의 한 술집에서 우연히 어울려 잔뜩 술을 마시고 취한 파이드로스와 라일라. 이들은 함께 배로 돌아와 그때부터 며칠을 함께 지내며 항해를 하고, 격렬하게 싸우고, 라일라가 다시 정신질환의 초기상태에 진입했다가 결국 이별을 하게 되는, 1976년의 경험을, 1990년쯤에 회상을 한다. 파이드로스가 십여 년 전에 골몰했던 화두 ‘가치’를 더 확장하게 되는 이유는, 라일라의 삶을 알고 있었던 라일라의 초등학교 동창인 변호사 라이절이, 그녀와 처음으로 하루를 잔 다음날 아침의 파이드로스에게 묻는 한 의문문에서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노형은 라일라 M. 블르윗 양이 질이 높은 여인이라 생각하시오?”
 물론 파이드로스는 라이절에게 이 질문을 받기 전부터 인류학적으로, 특별히 규정된 한 집단, 이 책에선 아메리카 인디언의 예를 들고 있으나 독자들은 굳이 그렇게 특정시킬 필요는 없으리라 보는 집단의 사회적, 생물적, 질적인 가치를 동적인 것과 정적인 구분해, 새로운 체계랄까, 철학이랄까 하는 통섭의 작업을 하기 위해 수많은 카드를 작성하고 분류했던 참이었다. 여기에 라일라라는 한 개체의 인간이 틈입해 다시 피어시그 특유의 집요한 질적 구분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당연히 피어시그가 주장하는 것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곳곳에서 터지는 피어시그 특유의 사회현상에 대한 명쾌한 정의 또는 근본을 설명하는 문장들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보자.


 “파이드로스는 이 운동에 대한 이해가 그처럼 어려웠던 것은 정적인 지성에 해당하는 ‘이해’ 자체가 이 운동의 적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 시기의 문화 전달자 역할을 하는 책인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는 지성에 대항하여 펼치는 일종의 노상 강연이었다. ‘뉴욕에 거주하는 나의 모든 친구들은 사회를 폄하하고 그네들의 진부한 학구적 또는 정치적 또는 정신분석학적 이유를 주워대는 소극적인 위치에, 악몽 속을 헤매는 것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케루악의 서술은 이렇게 이어졌다. ‘하지만 딘(소설의 주인공)은 다만 빵과 사랑을 얻기 위해 사회를 질주했다. 그는 방법이 어떤 것이든 개의치 않았다.’”   (569쪽)


 내가 좋아하는 책,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가 미국의 어떤 상황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무엇에 대한 반응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률이 무너지고 대신 지식인들의 도덕이 세계를 지배했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는 지식인들이 계속 지배는 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도덕률을 주장하는 비트 문화와 히피 문화가 대두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들의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런데, 나는 이런 사회해석적인 것보다 정말 애정하는 책 『길 위에서』의 성격을 이리 잘 설명해놓았다는 것이 반가웠다. 누가 나더러 왜 이 책을 좋아하는지 얘기해보라면 사실 할 말이 막막했기 때문에.

 이런 것도 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를 가든 그를 기다리는 것은 족쇄다.’라는 생각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다. 모든 아이들은 생물적 필요성이라는 족쇄에 묶인 채 태어나며, 태어날 때부터 그를 묶고 있는 이 족쇄보다 더 악랄한 족쇄는 따로 없다. 원래 사회가 존재하게 된 것은 이 같은 생물적 족쇄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할 목적에서였다.”  (580쪽)


 물론 위에 예를 든 두 문단은 이 책 <라일라>의 핵심적인 가치가 있는 것들이 아니다. 애초 얘기한 것과 같이 곳곳에서 터지는 피어시그의 명쾌한 정의 같은 매혹적인 문장들일 뿐이다. 고생물학과 생물학, 양자물리학, 화학, 당연히 철학, 인류학, 문학,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등 정말 다양한 학문에 관하여 일정 수준 이상이 아니면 서술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것들을 서슴없이 통합할 수 있는 이런 작가의 역작을 어찌 필부에 불과한 내가 이해했다거나 평가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전작에 비해 과하게 철학적이어서, 특히 390쪽에 달하는 1부에 집중된 철학적 논의가 많이 힘들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척추 역할을 하는 스토리 역시 전작에 비해 다양하지 않아 그리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이제 피어시그는 끝냈다. 그는 이미 죽었으며, 그의 책 두 권을 모두 읽었으니. 물론 내가 책을 읽고 그걸 이해했는지 아닌지는 별개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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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의 여인 1 창비세계문학 60
알베르 코엔 지음, 윤진 옮김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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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여태 알베르 코엔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을까. 이토록 화려하고, 장려하고, 장황하지만 아름다운 넋두리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둘만의 사랑’이라는 감옥과, 한 인간의 고결함을 천상에서 지옥으로 순식간에 떨어지게 만드는 질투와, 결국엔 땅 속 나무 상자 안의 바싹 마른 뼈밖에 남지 않을 풍만한 아름다움의 허무와, 야훼가 선택한 자신의 민족을 향해 서서히 그러나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위협의 숨 막힘을 어느 인류가 있어 이보다 더 훌륭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장려한 불륜 이야기.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가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써야하는 쏠랄. 주네브 리츠 호텔의 무도회장에서 위로 휘어지는 눈썹을 가진 아름다운 ‘아리안’을 발견해 단박에 사랑에 빠진 이이는 어느 날 늙어 송곳니 두 개를 남기고 전부 이가 빠진 늙은 유대인으로 변장, 다회茶會를 연 아리안의 남편 됨 씨의 집 커튼 뒤에 숨어 그녀를 기다린다. 다회가 끝나자 자기 방에 든 아리안은 갑자기 자기 앞에 나선 흉측한 모습의 유대인 늙은이가 난데없이 자신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듣고 대경실색을 하는데, 아 한 번인들 생각이나 해봤을까, 어떤 작가가 그토록 장황하고 화려한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는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 옮겨본다.

 

 “그날 리츠에서의 저녁, 그 운명의 저녁에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비천한 인간들 틈에서 오로지 그녀만이 고귀했고,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그녀와 나뿐이었습니다, 그 떠들썩한 사람들, 성공에 혈안이 되고 더 큰 힘을 향한 탐욕에 가득 찬, 이전의 나와 같은 그 사람들 틈에서 우리 둘만 유배된 자들이었습니다. 오직 그녀만이 나와 같았습니다, 그녀는 나처럼 슬펐고, 도도한 표정으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벗 삼은 채,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눈까풀이 한번 깜박이던 순간, 그 첫 순간에 난 그녀를 알아보았습니다. 바로 그녀, 예기치 않게 나타난, 하지만 내가 계속 기다려왔던 여인, 그 운명의 밤에 내가 선택한 여인, 끝이 휘어 올라간 그녀의 긴 속눈썹이 처음 깜박이던 그 순간 내가 선택해버린 여인, 그녀, 성스러운 부하라, 행복한 사마르칸트, 고결한 그림이 수놓인  자수, 그녀가 바로 당신입니다.”  (1권 52쪽)

 

 다시 말하건대 극히 일부분이다. 이런 사랑의 고백이 수 페이지에 걸쳐, 문단 변환 없이 구구절절 이어지는 걸 처음 경험하는, 경악, 경이. 오, 놀라워라. 나는 이 부분을 읽자마자 주저 없이 알베르 코엔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보았다.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것은 수필집밖에 없다. 이 작품 <주군의 여인>은 주인공 쏠랄과 쏠랄의 가문을 둘러싼 네 편의 소설, 차례대로 <쏠랄>(1930), <망주끌루>(1938), <주군의 여인>(1968), <용자들>(1969) 가운데 세 번째 작품에 해당한단다. 나머지 세 편은 언제나 번역을 해 나로 하여금 읽는 즐거움과 또 다른 경이를 안겨줄까. <주군의 여인>에서도 괴팍하고 재치가 번뜩이는 언변을 자랑하는 매력적인 캐릭터 망주끌루와 다른 네 명을 더한 ‘용자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불륜 이야기라고는 위에서 이야기했다. 주인공 쏠랄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앞으로 유사한 비극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협약기구인 ‘국제연맹’에 사무차장의 직위에 있는 프랑스 국적의 유대인이다. 국제연맹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만든 국제연합과 달리 토론과 결의에 의한 제재나 군대의 동원 같은 물리력을 사용할 권한이 없어 사실상 강대국들의 사교집단에 불과했으나 당시 부르주아와 그때까지 작위를 유지했던 (그래서 촌스러웠던) 귀족들에게는 상당히 명예로운 직업이었던 모양이다. 무능한 국제기구라서 사무처장(국제연합에서의 ‘사무총장’과 비슷한 자리), 부처장副處長은 주로 국제연맹에서 지급하는 급여와 판공비로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다른 이들이 마련한 야회에 참여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했고, 실제적인 일은 세 명의 사무차장들이 맡았다고 하는 바, 우리의 잘생기고 키 큰 주인공 쏠랄이 세 명 가운에서 가장 중요하고 능력 있는 차장으로 설정되어 있다.
 시대는 3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일 두체, 뭇소리니, 스페인의 프랑코가 등장해 유럽의 하늘 아래 파시즘의 암울한 검은 기운을 두르기 시작했고, 특히나 독일 안에서는 반유대주의가 노골적으로 펼쳐져, 이런 반유대주의 기운이 독일을 중심으로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제외한 그리스, 심지어 로스차일드를 배출한 영국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글쎄, 히틀러한테도 배워야 할 게 있단 말이야!) 스위스에서도 프랑스에서도, 흰 백묵으로 쓴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란 벽서가 곳곳에서 눈에 띄기는 하나 누구도 이 비정한 흰 벽서를 지우려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감잡히시지? 쏠랄은 스스로 유대인으로,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듯이)독일에서 조만간 인종 학살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독일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희망하는 사람은 자유로이 유럽의 다른 국가로 이주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을 국제연맹에 상정하려 준비하다가, 벼락을 맞아, 긴급하게 열린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조금의 시간적 유예도 없이 즉각 사임을 당한다. 서양인들에게 사임이란 건, 참관인 입회하에 자기 사무실에서 자신이 쓰던 개인 소유물을 박스에 담아 20분 안에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쏠랄은 그동안 사무차장으로 많은 급여를 고스란히 모아 놓았으며, 민족의 DNA에 들어있는 똘똘한 지능과 돈에 대한 본능적 감각을 밑바탕으로 한 번 해본 주식투자가 대박이 나서 죽을 때까지 주네브 최고 호텔인 칼츠의 스위트룸에서 먹고 잘 수 있는 그거, 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천생 부르주아랄 밖에.
 불행은 언제나 혼자 오는 법이 없다. 사무차장의 직위에서 쫓겨나자마자 파리 법정은 쏠랄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기 전에 프랑스 영토 내에서 살아온 기간이 규정보다 짧음에도 불구하고 공문서에 허위로 기재해 불법으로 국적을 얻었다고 판단, 프랑스 국적도 몰수해버린다. 여권과 공민증을 압수당하고 대신 체류확인증을 발급받은 쏠랄은 이제 본격적인 방황하는 유대인의 대열의 일원이 될 수밖에. 일찍이 유대인 노인으로 변장을 하고 스위스 유부녀 ‘아리안’(어째 이름이 그렇다. 독일 민족이 아리안 족 아냐?)의 방에서 열정적으로 사랑을 토로했지만 흉한 외모 덕택에 그리도 유려한 말빨에도 불구하고 단칼에 거절당한 쏠랄은, 사무차장 직을 잃기 전에 이미 자신의 칼츠 호텔 스위트룸에 부부를 초대하고, 이 과정에서 아리안 됨 여사를 소파에 쓰러뜨리는데 성공, 그녀 인생 최초의 깊은 키스를 퍼붓는다. 아, 지금도 삼삼하다. 아리안이 남편 됨 씨와의 부부생활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지루하고, 피곤하고, 난감한 일인지 떠올리는 장면. 상상도 하지 못한 신체의 일부를 사용하는 깊은 키스가 얼마나 이색적이고,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성적이고, 사람을 함몰시키며, 사랑의 행위의 심도를 더 깊게 만들고 싶어지게 하고, 진정한 사랑은 서로 가장 깨끗한 곳을 부딪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지저분한 곳을 맞대는 행위(내가 지금 만든 말이다. 구강은 인간의 몸에서 별의별 세균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란다.)라는 이 모든 느낌을 떠올리는 장면. 정말 알베르 코엔, 읽으면 읽을수록 신기한 작가다.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자기 부하직원의 아내를 꼬여내 매일 밤 아홉 시부터 새벽까지 불타는 밤을 지내온 쏠랄. 이제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아리안의 남편 됨 씨를 진급시켜놓고 유럽 각국, 북아프리카와 중동지방까지 장기 출장을 보내 그동안 실컷 재미 본 쏠랄과 아리안. 그새 쏠랄도 국제연맹에서 쫓겨나고 프랑스에서 국적을 박탈당하느라 며칠 출장을 갔는데, 일정이 길어졌을 뿐만 아니라, 쪽박 깨진 사연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하기도 쪽팔린바 작지 않아 연락도 하지 못해, 그새 사랑의 안달이 난 아리안 여사. 그녀 스스로 고백한다. 쏠. 그대를 만나기 전까지 순결한 처녀였답니다. 그대를 알고 난 다음에야, 그대하고 같이 잔 다음에야 희열을 알았으니까요. 요 지랄을 했건만 잠자리의 희열을 줄 ‘나의 주인의 여자’, ‘주군의 여인’을 이토록 애가 끊어지게 만드시나요. 이 상태에서 쏠랄에게 전보가 온다. 9월 1일 오후 아홉시에 당신 집으로 가겠노라고. 그러나 아내에게 깜짝 선물, 이른바 서프라이즈를 선사하기 위해 아무 연락도 하지 않고 쏠랄보다 딱 2분 먼저 도착하는 남편 됨 씨. 어떻게 되느냐고? 가르쳐드리지. 다음날 새벽, 쏠랄은 그를 추종하는 유대인 <용자들>을 통해 아리안 됨 여사를, 글쎄 이거 뭐라 해야 하나, 납치도 아니고, 유괴도 아니고, 하여간 여사를 모셔오게 해, 그날로 주네브를 떠나버린다.
 이젠 세상에서 딱 둘 만의 우주가 만들어지는 것. 부르주아와 귀족계급의 모든 사람들은 아리안과 쏠랄의 불륜과 도피를 알게 되고, 비난을 퍼붓는데 어찌 또 그들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을까. 마르세유 근방으로 떠난 이들과 우연히 마주친, 예전 같으면 쏠랄이 아는 척도 하지 않았을 미미한 계층의 인간들마저 쏠랄-아리안 커플을 벌레 보듯. 그걸 넘어 우리의 주인공 커플이 얼마나 재수 없고, 불결하고, 건방진지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결국 그들에게 남은 건 사랑이란 이름의 둘 만의 감옥. 사랑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애정이 커지는 만큼 욕정은 줄어들고, 욕정이 줄어드는 것을 여자, 아리안은 사랑의 농도가 흐려지는 것으로 짐작하는 과정, 이른바 권태가 틈입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드디어 그녀가 은밀한 욕망을 털어놓았다! 하루에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지긋지긋한 연인을 벗어나는 것, 매일같이 실내복을 바꿔 입어가며 집안을 돌아다니던 연인이 드디어 밖으로 나가는 것! 사실 그녀가 옳다. 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로를 보는 것, 늘 놀라울 정도로 사랑한다고 서로에게 말하는 것, 모두 진정으로 숨 막히는 일이다.” (2권 481쪽)

 

 위의 인용 마지막에 “진정으로 숨 막히는 일”은 숨 막히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숨 막힘, 즉 공기 내 산소가 부족한 경우 느끼는 감정을 의미한다. 1935년 독일의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된 유럽에서 유대 제사장의 적장자 쏠랄. 사고무친의 부유한 상속녀 아리안. 이들의 사랑은 맺어지는 순간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으며, 아메리카나 아시아로 떠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는 이들의 유럽문화에 의한 예속은 결정적 파국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권태와 질투라는 훌륭한 감미료까지. 이들은 점점 다가오는 검은 화차 앞에서 어떤 사랑의 노래를 부를까.

 

 

 당신이 이 작품과 궁합이 맞기만 하면, 두 권, 1,300쪽이 넘는 한 편의 장편소설 덕에 적어도 일주일은 흥미진진하게 보낼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조심하시라, 길고 긴 장황한 사설에 나가떨어질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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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7
에벌린 워 지음, 백지민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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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치가 넘치는 영국작가 에벌린 워Evelyn Waugh. 이이의 작품 가운데 한국어로 번역되어 팔리고 있는 것이 같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시리즈로 나와 있는 <한 줌의 먼지>, 딱 하나 더 있다. <한 줌의 먼지>에서 영국의 부르주아 계급 안에서 벌어지는 분탕질을 송곳 같은 해학으로 확 비틀어버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웃음이 비질비질 나오게 만든 바 있어, 이번에 다시 민음사에서 신간이 나오자마자 찾아 읽었다.
 워Waugh가 1903년 태어나 영국인으로 세상을 살면서 특이하게도 스물일곱 살 때인 1930년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다. 거기다가 더 특이하게도 가톨릭으로 개종한 다음에 에벌린은 아내 '에벌린 가드너'와 이혼을 해버리는데 이거 교회법으로 가능한가? (지금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한테 전화해봤다. 가능하단다. 혼배성사를 하지 않은 배우자하고는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다고. 이거 하나 가르쳐주고 술 사라 한다. 가톨릭은 이게 문제다. 세상에 공짜가 없는 거.) 하여간 이렇게 에벌린과 이혼한 에벌린은 위에서 얘기한 <한 줌의 먼지>처럼 주머니 속에 든 송곳 같은 유머 코드를 점점 지워내기 시작한단다. 그래 풍자와 송곳 유머가 절묘하게 섞은 작품을 썼던 시기를 “초기의 에벌린”으로, 가톨릭 개종 후 아마도 1940년대에 들어선 시기부터는 “후기의, 진지한 에벌린 워”라고 일컫는다고 작품해설에 쓰여 있다. 작품해설은 당연히 책을 팔기 위해 좋은 얘기만 해야 하니까 좀 감안해서 읽는다면, 초기와 진지한 에벌린을 구분하는 시점, 또는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 <다시 찾은 브라이드헤드>라고, 이게 진지한 에벌린의 첫 작품 비슷하다는 말을 한다. 그거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아무 상관없다. 독자는 그냥 읽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앞 부분엔 <한 줌의 먼지> 비슷한 풍자 코드가 깔려 있어 그 양반 참 뭘 아는 인간일세, 감탄 돋게 만들지만, 본문만 566쪽의 장편이 뒤로 갈수록 점점 진지 모드로 디크레센토 되면서, 심지어 마지막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바로 “로만 가톨릭 만세!”
 프롤로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향토방위군 중대장 ‘나’가 서른아홉의 나이로 영토 방위훈련을 하던 도중에 브라이즈헤드 성 근처에 도착하는 걸로 시작한다. 이 향토방위군의 장면은 저 뒤에 에필로그에 다시 나와 이제 브라이즈헤드 저택 안으로 직접 들어가 지난날의 회오에 잠기는 것으로 끝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럼 본문은? 작가 에벌린 워와 생년 생월이 같은 ‘나’ 찰스 라이더가 옥스퍼드에 입학하여 참으로 개성 있는 악동친구 서배스천(‘세바스찬’의 멋 부린 국어표현)을 알게 되고, 이 친구의 런던 저택과 더불어 지방에 있는 브라이즈헤드를 방문해 서배스천의 어머니, 형, 두 여동생과 안면을 익히고, 좋은, 좋아도 너무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어느날 서배스천의 어머니로부터 “어쩜 사람이 이렇게 천연덕스레 악랄할 수가 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가.”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구나. 네가 그토록 많은 점에서 그렇게 다정했으면서 그다음에는 어찌 그리 무심하게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라는 말을 들으면서 이 가정과는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문제는 '나'가 서배스천의 음주에 관대한 때문이었다.
 젊은 서배스천은 천생 자유의 별자리를 타고 세상에 떨쳐졌던 것. 어머니의 가톨릭 적인 엄격과 규율과 기타 등등은 모든 속박으로부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서배스천에게 한도 끝도 없는 술을 들이켜게 만들었다. 일찌감치 알코올중독에 빠져든 것. 서배스천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승리를 거두고, 귀국해서 영광을 누리는 대신 따뜻하고 풍광 좋은 이탈리아에 말뚝을 박아버리고, 말뚝을 박은 김에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성과 살림을 차려버렸다. 아버지는 왜 아내의 주변을 박차고 나와버린 것일까.
 소설은 앞부분에서 옥스퍼드 일, 이학년 학창시절의 젊음과 어쩔 수 없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젊음의 낭비 같은 것으로 시작해 가문의 몰락, 글쎄 몰락이라고 표현하기엔 좀 과격하겠지만 영국특유의 한사상속(한사상속이 무엇인지 궁금하신 분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참고하시압.)이 끝난 첫 세대에서 마치멘 가문이 대가 끊기는 약 20년간을 그리고 있다. 학창시절의 젊음, 청춘이 얼마나 짧고, 얼마나 허망하고, 얼마나 괴로운지 참 공감할 수 있는 유머 코드를 섞어 서술하고 있으며, 이건 결혼제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물론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비록 내가 쥐뿔도 아는 게 없지만) 훌륭한 소설임에는 틀림이 없는 거 같은데, 뒤로 갈수록 특히 한 죽음을 앞에 두고 점점 엄숙, 진지해져가는 것이 (단연코 한 아마추어의 개인적 감상으로는) 안타까웠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역자 백지민으로 말하자면, 이름으로 봐서, 또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운운하는 걸로 봐서 여성 같아서, 요새 시절이 어느 시절이라고 여자 남자를 가리겠느냐만,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주변에 있는 남자한테 감수를 한 번 쯤 받는 것이 좋을 듯싶다. 난데없이 중대장의 “종복”이 나온다. 종복從僕은 남자 종, 즉 노예를 의미하는 바, 참 좋지 않은 단어. 요새는 그런 거 말고 ‘당번병’이라고 쓰고, 군인들끼리는 그냥 ‘따까리’로 호칭한다. 난 번역과 오역을 판정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아 번역의 질 같은 건 건너뛰고, 한국어 문장이 읽기에 아주 좋은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작가 에벌린 워의 문장이 긴 편이라서 그런 듯 보였지만 그래도 역자는 좀 더 한국어 문장에 힘을 써야 할 듯. 네가 뭔데 이따위 지적질이냐 한다면, 난 소비자이자 독자로, 내가 읽기에 역자가 퇴고에 충분한 힘을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그게 참 아쉽다고 말하겠다.
 쓰고 다시 읽어보니 좀 야박하게 쓴 거 같은데, 그리 쓴 것처럼 읽힐 수 있는데, 분명하게 말하노니, 재미있는 소설이며, 이것보다 더 재미있는 작품을 선택하기 쉽지 않을 정도의 품질을 갖추었으며, 역자의 한국말 문장 역시 요새 출간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서는 결코 안 좋은 수준이 아니다.
 작가 연표를 보면 초기에 <모략>, <92일>, <특종> 같은 책이 보인다. 이런 것들도 얼른 번역서가 나왔으면 좋겠다. 에벌린 워. 요새 말로 “흥미 돋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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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11-2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 이 작품은 개인 취향 꽤 탈 작품 같아요. 폴스타프 님 처럼 재미나게 읽으실 분들도 있곘지만 ‘이게 뭐냐!‘ 할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듯합니다. 지나치게 장황항 느낌이었어요. 암튼 저는 이 책 절반쯤 읽다가 끝내 포기하고 도서관에 반납했거든요. (책 샀으면 엄청 후회했을 거 같아서 다른 분들도 참고하라고 댓글 남깁니다....)

Falstaff 2018-11-21 11:06   좋아요 1 | URL
앗, 그러셨습니까.
작품 구조가 서배스천, 줄리아 등의 가족, ‘나‘의 직업과 아내와의 관계, 서배스쳔의 아버지, 이렇게 독립될 수도 있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한 권에 담으려 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저도 장황하다는데는 동의합지요.
이 양반은 초기 작들이 더 매력적이라고 하더군요. 이건 중/후기 정도고요. 본문 마지막에 얘기한 <모략> <92일> <특종>이 전부 초기 작품인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