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을유세계문학전집 94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혜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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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이런 책을 읽어.
 여태 이리 생각했다. 그래도 이 책을 읽게 된 건, 알파벳 문화권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숱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나날이 궁금증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야.
 이 책의 역자이자 건국대 영어영문학과에 소속되어 있는 이혜수의 작품 해설을 보면,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거의 최초의 서양 소설이며, 심지어 최초의 한글 번역이 1908년 잡지 『소년』에 실렸는바, 번역자가 조선 후기 천재 가운데 한 명이라고 일컬어지고, 11년 후 3·1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이란다. 물론 일어 번역을 중역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당시엔 거의 다 그랬으니까.
 『소년』. 딱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다. 최남선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그건 그렇고, 다른 곳도 아닌 이 잡지에 <걸리버 여행기>가 실렸다는 건, 이후 우리나라에서 110년 동안 <걸리버 여행기>를 우화나 동화쯤으로 여기게 만드는 씨앗이 되지 않았나 싶다. 나도 <걸리버 여행기>는 어려서부터 숱하게 읽어봤는데, 하나같이 소인국, 대인국까지였으며 그저 조금은 우스운 동화, 어른이 되면 읽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쯤으로 치부해왔다.
 이거, 틀린 생각이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1667년생. 잉글랜드 부모를 두었으나 더블린에서 출생한 인물. (어디서 본 조합이라고?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에서 이런 부부가 많이 등장한다. 이 부부가 낳은 아이들이 겪는 고통도.) 아무리 무뚝뚝한 잉글랜드 사람이더라도 물 좋은 아일랜드 와서 살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나보다. 스위프트의 전성시대가, 아이고, 앤 여왕 시대다.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가뿐하게 승리해 프랑스와 스페인의 야망을 차단한 후 스코틀랜드까지 통합해버린, 해가지지 않는 왕국의 여왕님. 소위 대영제국의 전성기다. 세상 곳곳에 영국 상선들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무역과 약탈과 전쟁의 승리로 북유럽의 섬나라에 쏟아져 들어오는 금덩이가 넘쳐나던 시기. 그러나 절정기라는 밝음 속에는 상대적으로 깊은 어둠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 상류사회는 친절과 예의와 기사도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정치적 지위와 부의 축적을 위해 온갖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기에 여념이 없었고, 한 명을 부귀를 위해 천 명의 영국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끝도 없는 노동을 하다 지쳐 사기꾼, 노상강도, 소매치기, 주거침입자, 포주, 익살꾼, 도박꾼, 매춘부, 술고래, 매독보균자 등으로 추락해갔다.
 때는 절대주의 시대. 밖으로, 밖으로 탐험가들을 내보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시절. 이에 발맞추어 일군의 해적, 조직폭력배 등도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미개척지에 상륙해 눈에 띄는 원주민 아무나 도륙을 내고 조그만 나뭇조각이나 판판한 돌 위에 이 땅의 주인은 영광스런 대영제국의 앤 여왕의 식민지로다, 써서 세운 다음, 원주민 수십 명을 배에 태워 잉글랜드로 귀환해 여왕을 배알, 잡아온 원주민을 식민개척의 증거로 제출하기만 하면 해적이나 조직폭력배에서 졸지에 말단의 기사로 임명이 되던 야만의 시절. 벌거벗은 원주민과 최신 무기로 무장한 영국해군이나 해적들 가운데 누가 더 야만의 상태인가. 글쎄, 스위트프가 이런 고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은 주인공이자 선상의사船上醫師인 걸리버가 희한한 네 번의 항해를 하면서 모험지에서 만난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당시 유럽과 영국이 누리던 영광의 이면을 날카롭게 꼬집어 비틀어버린 쓴 것이 바로 <걸리버 여행기>다. 그러니 이 책은 소인국과 대인국을 드나드는 환상동화로 각색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이 신랄한 풍자와 해학을 모르고 지나갔을 수밖에.
 작품에 대해 한 마디는 꼭 해야겠다. 이 책은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초엽에 쓰여 출판했다. 작중에서 걸리버의 입으로 숱하게 얘기하고 있듯이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수사 같은 걸 최소로 사용하고 오직 걸리버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일만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문장이 주는 즐거움도 애초 배제한 글인 것도 맞다.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귀족 세계 전반에 대한 앞 뒤 가리지 않는 스위프트 식 풍자와 해학도 18세기, 19세기까지는 실로 적나라해서 독자에게 통쾌한 동의를 선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지났음에야. 서양 문학을 읽기 위한 기초체력을 함양한다는 의미에서는 읽어봐야 하겠지만 벌써 200년이 흐른 시점에서 작가와 주인공의 의식에 동감하고 말고는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 호머의 <오디세우스>와 소포클레스의 <독재자 외디푸스>는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한 감동을 준다. 왜? 두 작품의 차이점? <걸리버 여행기>는 당대 사회에 대한 풍자이고, 그리스 시대의 두 작품은 기본적으로 스위프트의 것보다 훨씬 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은 아닐까. 사회보다는 개인이 언제나 더 중요한 것이라서.


 영국에 여왕 바로 다음 지위로 ‘총리대신’이 있었나보다. <걸리버 여행기>가 얼마나 신랄한지 예를 드는 의미에서 좀 길지만 인용한다.


 “총리대신으로 오르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아내나 딸 혹은 누이를 신중하게 처분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선임자를 배신하거나 음해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공개석상에서 분노에 찬 열의로 왕실의 타락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현명한 왕이라면 이 중 마지막을 실행하는 사람을 쓸 것이다. 그런 열성분자들이 결국 주인의 뜻과 감정에 가장 비굴하게 충성한다는 것이 늘 입증되어 왔기 때문이다. 총리대신은 모든 임명권을 지니며, 상원이나 대의회의 다수 위원에게 뇌물을 줌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면책 법령이라 불리는 편법에 의해 퇴임 후 사후 문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국가의 전리품들을 가득 안은 채 공직에서 물러난다.
 총리대신의 공관은 자신과 같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학교다. 시동과 종복, 문지기도 그들의 주인을 따라하는 것으로써 각자 구역의 총리대신이 되며, 오만과 거짓 그리고 뇌물이라는 세 가지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렇게 그들은 최고 지위의 사람들 덕분에 제2의 왕실을 이룬다. 또 가끔 교활함과 뻔뻔함 덕분에 여러 단계를 거쳐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후계자가 되기도 한다.
 총리대신은 보통 타락한 매춘부나 총애하는 하인에게 지배받는다. 이들은 모든 특혜가 전달되는 경로이기에 궁극적으로 왕국의 지배자라고 제대로 불리기도 한다.” (371~372쪽)

 

 

 

 

 

 별점을 깍은 이유.

 나는 잘한 번역인지 오역인지는 모른다. 번역한 한국어 문장만 본다. 역자의 우리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동형과 피동형이 너무 많다. 영어 문장을 직역해서 그럴 거다. 결과는, 우리말이 되게 어색했다.

 오탈자의 교정, 교열? '을유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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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야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6
한사오궁 지음, 심규호 외 옮김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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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에서 가장 잘 팔리는 시리즈, ‘세계문학전집’의 346번째 작품.
 20년 전, 민음 세계문학전집의 발간을 시작하면서 편집위원 김우창, 유종호, 정명환, 안삼환은 이렇게 선언했다.


 “새로 작성할 것은 비단 역사만이 아니다. 번역 문학도 마찬가지다.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두시언해」는 조선조 번역 문학의 빛나는 성과이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시대의 두시 번역이 필요하다.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옙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모두 세 문단으로 되어 있는 선언문 가운데 두 번째 문단이다. 세계문학 가운데 고전이라고 칭할 만한 것들을 다시 번역하겠다는 갸륵한 선언이고, 독자들은 이에 호응하여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를 당대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려놓았다. 나도 이 시리즈를 통해 새롭게 많은 작품들을 읽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선언문의 뜻과 같이 새로운 호소력으로 다시 번역한 작품을 재독하기도 했다.
 오늘 독후감을 쓰는 <일야서>로 돌아와서, 읽는 중에 2012년에 관한 서술이 등장하는 걸 발견하고 얼른 책 뒷날개의 ‘선언문’을 확인했다. 어김없이 이 책에도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면서” 라는 제목의 선언서가 인쇄되어 있다. <일야서>는 2013년에 중국에서 발표 후 상하이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했고, 우리나라엔 2016년 민음사가 최초로 번역, 과감하게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목록에 올려놓았다. 위에 인용한 선언문의 두 번째 문단을 참고하면, 2013년에 최초 발간한 <일야서>, 아직까지는 지구의 다른 지역 독자들과, 무엇보다 시간의 판단을 받지 못한 작품을, 민음사 편집위원들은 두보, 괴테,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아니면 적어도 비슷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다, 라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 역시 1994년에 발표한 작품을 98년이던가 96년에 세계문학 시리즈 134번으로 올린 전력도 있었다. 파묵을 읽은 시점이 2010년대여서 그런가보다 했으나, 시리즈에 어울리는지는 더 숙고해봐야 한다.
 출판을 통해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고(웃기고 있네), 백성의 소리를 올곧게 듣겠노라는 민음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가 그동안 별로 돈이 안 됐는지 슬슬 시리즈를 닫으려 했다가 난데없이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상을 받아 잠깐 돈을 벌었지만, 그래도 모던 클래식을 계속할 생각은 없는 거 같다. 그렇지 않다면 2013년에 발표한 신작을 2016년에 세계문학전집에 끼워 넣을 궁리까지는 안 했을 거 같다. 물론 편집위원들이 판단하기를 두보와 괴테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과 견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읽어보니 한사오궁의 <일야서>가 비록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작품이긴 했지만, 상당히 중요한 판단근거, 시간의 검증을 아직 받지 못한 작품인 것은 확실하다. 혹시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으로 내놓지 않으면, 즉 단행본으로 만들면 팔리지 않을 거 같아, 바짝 쫄아서 궁여지책으로 346번째 자리를 준 거 아냐? 이리 야박하게 이야기 하는 건, 원래도 알았지만 요즘에 와서 출판사와, 저·역자들과 기타 관계자들이 자기들은 책 같지도 않은 걸 설사하듯 찍어내면서 얼마나 독자를 우습게 아는지 실감을 해서 그렇다. 우습게도 민음사한테는 이 비슷한 유감은 없다. 그래 남대문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화풀이 하는 격이지만, (하는 걸 보니) 뭐 여기라고 별다르겠어? 창업한 분이 별세하니 기업의 정신까지 함께 묻힌 것 같다. 안쓰럽다. 출판사 입장에선 이런 평가가 억울하겠지. 그럼 허튼 소리 안 나오게 하시면 된다. 외밭에서 신발 고쳐 신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까지 쓰니, 한사오궁과 그의 작품 <일야서>에게 좀 미안하다. 서두가 너무 길고 거칠어 여차하면 내가 작품 자체에 대해 비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앞에서 잠깐 얘기했지만 이 책, 재미있다. 그렇다고 명작이나 걸작이라 상찬할 만큼은 아니니 오버하지는 않겠다.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은 아니더라도, 현대사에선 상당히 어려웠던 시절, 문화혁명 시기에 도시를 떠나 시골 깡촌으로 내려가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수 년을 지내야 했던 지식인 청년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제는 중국소설도 많이 소개되어 이런 주제를 다룬 작품에도 익숙해 사실 이색적이거나 특징적인 것은 별로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 눈으로 보기엔 더럽고, 야만적이고, 이기적인 중국의 농촌 풍경은 불과 30년 전의 우리나라 농촌 모습보다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소년 시절까지 학생 신분으로 도시에서 삽 한 번 잡아본 적 없이 지내던 고운 손의 지식청년들 가운데 많은 수는 강제로, 적은 수는 분위기에 휩쓸려 자진해 가장 외진 시골로 내려가 갖은 고생을 하는 이야기. 여기까지는 그렇다. 충분히 읽어봤다. 중류계급 이상에서 살던 학생출신이 야생동물이 출몰하고, 60년대에 3년간 지속한 흉작으로 배를 곯아 사람의 해골을 씹어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식권 서른 장을 걸고, 모기와 빈대, 벼룩, 이가 득시글거리며, 뭔가 메스꺼워 한 번 왈칵 토했더니 선충, 쉬운 말로 해서 회충 여러 마리가 뒤엉킨 것이 쑥 튀어나오고, 쥐와 고양이를 잡아먹어야 했던 참경 말이다.
 내가 읽은 이 책의 매력은 이런 개고생하는 장면이 아니다. 그곳에 갔던 지식청년, 이들을 ‘지청’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지청들이 다시 도시로 돌아와 누구는 복학을 하고, 누구는 새로 입학을 하고, 누구는 공기업에 취직을 하고, 누구는 사업을 하고, 누구는 깡패가 되고, 누구는 정치범이 되고, 정치범과 결혼했던 여자는 아이를 고모 부부에게 맡기고 에베레스트를 넘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찾아 떠나고, 등등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당시에 하방당해 시골로 내려가 수년 동안 젊은 시절을 보낸 잃어버린 세대라고 역자 심규호는 해설에서 이야기하는데, 바로 이 로스트 제너레이션들의 다양한 실패의 삶이 나를 매혹시켰다. 한사오궁은 여기에다가 하방 또는 하향해 내려간 농촌 ‘바이마후 호’에서 작업반장 또는 생산대장 등의 뒷이야기까지 포함시키기도 하는 바에야. 사람의 해골까지 씹어 먹는 가난한 깡촌 바이마후, 어째 한국말 발음으로, 가장 비싼 벤츠, ‘마이바흐’와 비슷한 것도 재미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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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10-31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모던클래식 시리즈 없애고 거기 있던 작품들 다 세계문학에 넣은 게 저도 보기 안 좋더라구요. 한사오궁이라는 작가에 급 관심이 생겨 폴스타프님 옛날 글까지 찾아왔네요.

Falstaff 2024-10-31 15:42   좋아요 0 | URL
이 책 괜찮습니다. 다만 같은 시기를 선택해 하도 많은 중국의 괜찮은 작가들이 작품을 써서 이제 신선도는 좀 떨어지는 거 같습니다. 저도 이 책 읽은 지 좀 되거든요.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1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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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풍아송風雅頌>이란 아름다운 제목 딱 하나만 보고 읽었다가 똥 밟은 책의 저자 옌롄커. 다시는 옌롄커가 쓴 책을 읽지 않겠다고 작심을 했었는데, 문학 전반에 걸쳐 현대 중국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옌롄커, 이미 쓰레기통에 버린 작가의 이름이 꼭 한 두 번은 나오더라는 말씀. (이 사람이 젊은 나이에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는구먼. 놀랠 '노'자여!) 그래 한 권을 더 읽어보고 결론을 내리려 마음을 바꿨고, 이 작자가 일 년에 장편 한 권씩은 써 낼만큼 다작이라서 어떤 책을 읽을지 조금 헤매고 있을 때, 이 책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무지하게 야하다”는 평을 읽고,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결정했다. 게다가 헌책방에서 싼 값에 팔고 있기도 했으니 더 말 해 무엇 하겠는가.
 책을 읽으며, 약 250쪽의 길지 않은 장편인데,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소설이 한 권 있었으니,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명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 아, 고정하시라. 그 책이 생각났다는 것이지 감히 채털리 여사, 뚝심 있는 여성이 삶의 질곡을 걷어 차버리고 혼자 우뚝 서는 결단에까지 감히 비비려고 하는 것까지는 아니다. 왜 로렌스가 생각이 났느냐 하면, 이 책에서는 비록 현역이지만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의 와중에서 생식능력을 상실한 나이 많은 남편과 사는 젊은 아내가 서방질하는 장면을 책의 핵심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 ‘우다왕’은 시골 출신의 사병으로, 장인과 아내의 평생소원인 도시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스스로 입대해 만 5년을 충직하게 복무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농민출신 군인들 역시 거의 모두 충실하게 복무하는 바람에 간부로 진급하지 못하고, 따라서 처자식을 도시로 옮겨주지도 못한 채 빌빌대던 중, 운이 따랐는지 사단장의 관사 당번병으로 들어가, 중국 군대의 당번병도 80년대 초반 한국 군대의 당번병과 마찬가지로 사단장(뿐만 아니라 작은 독립부대장까지) 가족의 삼시 세끼와 (심지어 사모님의 똥인지 뭔지 하여간 뭔가가 묻은 빤쓰를 포함해 무진장한)빨래와, 집안 청소와, 하이고 애새끼들 가정교사까지 몽땅 해야 했나보다. 설마? 하, 내가 거짓말을 할까. 80년대 초에 군역을 치룬 남자들 아무한테나 물어봐라. 내 말이 구란지 아닌지. 다행히 이 책의 사단장은 생식불능으로 아이들은 없었으니 고생은 좀 덜 했을 거다. 대신 사단장 사모님은 늙은 남편이 이미 ‘기쁨을 아는 몸’에 제공해줄 수 없는 기쁨까지 요구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한다.
 쉬운 얘기로 불륜인데, 그게 앞 문단에서 말했듯 서로 ‘기쁨을 아는 몸’(2015년 여름부터 '기쁨을 아는 몸'을 이렇게 거의 일반명사 비슷하게 쓸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경숙아, 고맙다!)을 위로해줄 잠깐씩의 엔조이라면 문제는 덜하겠지만, 어디 몸이란 게 그런가, 불행하게도 우다왕과 사단장 사모님 류렌은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사단장이 전국에 고위 군인들 모이는 회의인지 뭔지에 3개월 예정으로 출장을 떠나는 동안 사건은 벌어진다. 작년에 알베르 꼬엔이 쓴 소설 <주군의 여인> 독후감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사랑이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유폐해버리는 주인공 남녀. 이들이 3개월이란 한정된 시간 안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과 사랑의 확인으로서의 몸의 유희. 그리하여 둘은 점점 더 자극적인 엑스터시를 만들기 위해 날이 갈수록 충격적인 모멘트를 만들려 애를 쓰고, 더 지독한 애무의 기법에 탐닉하다가 까무러치기도 하고, 마오저뚱의 석고상을 깨뜨려버리고, 성서보다 세 배는 더 엄정한 마오 선집을 찢어버리기도 하는 등의 일탈을 저질러버린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내가 아무리 야한 이야기를 좋아하더라도, 이게 장황하게 되면 견디지 못하는 인종이다. 곧바로 지루함을 느끼기 때문에. 위에서 비비려고 했던 건 아니라고 말했던 <채털리 부인의 연인>과 극적인 갈림길에서 안타깝게도 저편으로 가버리고 마는 건, 과도한 분량을 ‘사랑이라는 감옥 속에서의 탐닉’에 할애했기 때문이라고 확실하게 느꼈다. 얼마 만큼이냐 하면, 오직 둘 뿐인 절망스러운 사랑의 감옥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아직 절정에도 오지 않았는데, 아이 씨, 그만 읽기를 때려치울까, 싶었을 정도로. 이렇게 낮이나 밤이나 해대는데, 굳은 살 안 박였을까? 별 걱정이 다 들더라.
 그래, 그래. 13쪽에서 제1장을 시작해 251쪽에서 에필로그를 끝날 때까지 작지 않은 활자로 널럴하게 편집한 짧은 장편임에도 우다왕과 류렌이 서로 엮이고, 만나고, 함께 침상에 오르고, 불타는 몸의 즐거움을 누리고, 남편이 귀가할 때까지 20쪽부터 191쪽까지 할애했으니, 내가 책을 읽으며 지루해 했던 것이 잘못이냐? 물론 주인공들이 침상에서 기쁨을 찾으며 양념으로 당대 중국의 농민, 소시민, 중간층, 고위층 등 각 계급들의 희망사항과 상위 편입 욕망, 연줄 넣기 같은 중국문화에 대해서도 거론을 하고 있지만 문제의식이라고는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우다왕도, 사단장의 젊은 아내 류렌도, ‘놀랄만한 선물’(이게 뭔지 밝힐 수 없다)을 원하지도 않으면서 받게 된 사단장도, 행위의 결과물이나, 행위라는 전환기를 거쳐 새로 변모한 모습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한 번 찌질이는 영원히 찌질이고, 한 번 바람난 여자는 잠깐의 바람기였을 뿐, 저 남쪽 종교의 경전에서처럼 코뿔소의 뿔처럼 뚜벅뚜벅 혼자 걸어가는 건 아예 바라지도 못함. 여기서 등장인물 가운데 아무도 채털리 여사와 비빌 수 없는 차이가 생기며, 옌롄커도 로렌스에 감히 비빌 수 없는 간극이 벌어지는 것.
 이 책은 오직 하나, 사랑 혹은 몸의 즐거움이라는 감옥을 구경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그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이들이 몸의 감옥, 또는 사랑의 감옥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가 아니라, 왜 스스로를 유폐해야 했는지, 그리하여 유폐를 통해 어떤 전망이 생겼는지가 책의 초점이 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서, 이리 주장을 한 번 해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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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18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란 제목이 이중적인 의미인 듯 싶어요~진짜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연인>이 생각나네요 ㅎㅎ팔스타프님께서 나보코프 리뷰 쓰긴 힘들다고 하셨죠? ㅎㅎ

Falstaff 2019-01-18 10:31   좋아요 1 | URL
나름대로 재미있는 책이더군요. 그런데 하여간 옌롄커는 안 읽으려 작정을... --;;
옙. 나보코프 읽고 독후감 쓰는 건 정말 고역이예요. 대부분 책을 읽고 PC 화면을 앞에다 두면 그저 막막하더라고요. 저야 뭐 그냥 아마추어니까 그렇지만, 카알벨루치 님의 평은 근사하던 걸요. ^^

카알벨루치 2019-01-18 10:33   좋아요 1 | URL
저도 허접한 아마츄어인데 이런 칭찬하시면 아니아니되옵니다 감사해요~팔스타프님 오늘도 좋은날 되세요 ^^
 
내 말 좀 들어봐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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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줄리언 반스가 1946년 생. 올해 일흔셋. 역자 신재실 선생이 1941년 생. 일흔여덟. 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벌써 반스를 공부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나도 줄리언 반스와 존 파울즈의 책은 눈에 띄는 대로 구해 읽으려 하는 편이다. 이 두 작가의 공통점은, 우리말로 번역한 작품의 상당수가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나왔고, 또 상당한 수가 추정하건데 계약기간 만료 등의 이유로 중판을 찍지 못하고 그냥 묵혀두고 있다는 점. 애석한 일이다. 이 책 <내 말 좀 들어봐>도 마찬가지. 제목이 예전 대통령 후보였던 허x영 씨의 노래 제목 같아서 그랬나? 하여튼 웬만하면 <플로베르의 앵무새>나 <10 1/2 장으로 쓴 세계 역사>처럼 세계문학전집으로 찍어도 좋으련만, 앞으로는 모르겠고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나도 이 책은 인터넷 헌책방에서 발견해 사서 읽었다. 헌책의 등급을 ‘최상’으로 해놓았으나 상태는 개떡이었지만 즐겁게, 재미나게 잘 읽었다. 반스가 쓴 여섯 번 째 소설이라고 해설에 나와 있다.
 무대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의 시골 포도농장 근처 작은 촌락. 주요 출연진은 성격이 완전히 다른 죽마고우 스튜어트 휴스와 나이젤 O. 러셀. 나이젤은 학교 다닐 때까지 이 이름을 쓰다가 대학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는 갑자기 정체도 모를 가운데 이름 “O”를 써서 ‘올리버 러셀’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더니, 정말로 은행 예금 통장에도 올리버란 이름으로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스튜어트는 전형적인 완고한 잉글랜드인. 별로 유머 감각도 없고, 나이에 걸맞게 인생에 대한 뜬 구름 같은 선망이나 몽환 또는 개똥철학도 없지만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뚜벅뚜벅 지내며 튼튼한 대영제국의 허리를 이룰 중산층의 일원이 될 소지가 무척 많은 학생이었다. 자기 머리가 그리 특출하지 않음을 일찌감치 스스로 알아 대학진학 대신 은행에 입사해 하루하루 정해진 일과를 똑같이 답습하면서도 별로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재미없지만 확실한 인간. 이에 반해 올리버는 일찌감치 말썽쟁이 면허증을 취득하고, 온갖 화려한 수사로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남발하며, 프랑스어, 이태리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의 외래어를 섞어 풍부한 독서와 음악 감상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현학적 재담을 가진 수재 형 낭만주의자이지만 이런 종류의 집단들이 가끔 그렇듯 대책 없이 인생을 소비하는 반쯤 건달. 감이 딱 잡히시지? 이건 내가 설명을 잘 해서다. 흠흠.
 우리의 바른생활 총각 스튜어트라고 어찌 리비도의 용출이 없을 수 있으랴. 그리하여 25 파운드를 내면 금요일마다 최대 네 번의 소개팅, 아니, 집단 미팅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가입해서 돈을 지불하고 나간 첫 번째 모임, 그곳에 필생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여인을 찾아냈으니, 바로 쥘리언(프랑스 식), 아니 질리언 와이엇. 질리언은 미술 복원사로 기름, 그을음, 먼지, 때, 파리똥 등으로 오염돼 시꺼멓게 변한 고미술품을 각종 화학약품과 면봉에 묻힌 인간 여성의 침으로 싹싹 긁어낸 다음 다시 채색을 해 복원시키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자로, 아버지는 영국인, 어머니는 프랑스인이다. 그렇게 잘 살다가 그녀 나이 열다섯 살 때 학교 교사이던 아버지가 열일곱 살 먹은 여학생하고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여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특이한 집안내력이 있다. 하여간 나중에 둘이, 자신들이 이런 패자부활전에 돈까지 내고 참여했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이야기하지 말자고 약속하는데, 그럴 정도로 가까워졌다는 얘기고, 급기야 우리 그냥 결혼이나 해버릴까, 이 단계까지 급진전한다.
 그래 이 두 선남선녀는 시청 등기사무소에서 결혼에 이르는데, 문제는 재능 있는 반건달 올리버. 교회에서 혼인을 했다면 들러리가 되겠지만 등기소에서 했기 때문에 증인으로 참석한 올리버, 이 대책 없는 말썽쟁이 영어학원 선생이 그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질리언에게 홀딱 반해버린 것이었다. 이거 말 돼? 말이 되지 왜 안 돼? 근데 말은 되도, 대부분, 모든 인간의 98% 정도는 그냥 가슴만 앓다가,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이 약인 법, 달력이 넘어감에 따라 그냥 흐지부지 잊게 되는 거 아닌가? 당신 속에서도 아직까지 생각날 때마다 심쿵한 첫사랑이 있으나, 역시 시간의 힘에 의해 그저 잔잔하게 쓰림 정도로 간직하는 그런 거, 하나씩은 가지고 있잖아. 없다고? 그럼 당신은 좀 불행하네. 그래서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소설의 주인공이 못 되는 거다. 세상 두 번 사니? 오직 나 하나를 위해 남의 아내가 됐든, 남편이 됐든, 애인이 됐든, 일단 시도는 해보고 죽는 철없는 인간들. 이런 철없는, 진실하게 못된 인간들이 세계문학사를 이끌고 가는 주인공들이다. 이해하시겠지?
 자기 친구가 결혼을 해서 아내와 밀월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스튜어트와 질리언이 뜨거운 밤을 보냈을 거라는 고통 속을 헤매다, 그걸 참지 못해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올리버. 급기야 스튜어트의 집이 바라다 보이는 하숙집에 방을 얻어, 파란색과 흰색의 꽃으로만 한 아름을 들고, 스튜어트가 출근해 질리언 혼자 있는 집의 현관문을 두드리고, 꽃을 건네준 다음 큰 목소리로 한 마디 꽝.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후 오후 여섯시 반과 여섯시 오십분 사이에 집 앞 길에 퇴근하는 스튜어트의 모습이 나타나자마자 스튜어트의 집에 전화를 해, 질리언이 수화기를 드는 순간 또 선언을 하기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처음엔 장난으로 생각한 질리언은 어떻게 대답할 수도 없어서 그냥 조용히 수화기를 놓고 마는데, 수화기를 놓는 순간 현관문을 여는 열쇠소리가 들리고 신혼의 남편 스튜어트가 들어선다. 아, 이걸 어떻게 처리하나. 그냥 다 말을 해버릴까? 아니, 장난인지도 모르잖아. 워낙 장난을 좋아하는 친구니. 이렇게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이주일. 한 달, 두 달, 석 달. 어느새 여섯시 반과 여섯시 오십분 사이에 전화벨이 울리면 득달같이 전화기를 받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는 질리언의 몸에는 성적 흥분에 반응하는 각종 변화가 지극히 높은 단계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이렇게 얘기하니까, 뻔한 스토리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이 작품은 철저한 일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는데, 누구의 시점인가 하면, 스튜어트, 올리버, 질리언, 미시즈 와이엇, 스튜어트 집이 바라다 보이는 하숙집 주인 노파 다이어 부인, 툴루즈 근방에 별 구경거리 없는 농촌마을의 호텔 주인 리브 부인 등, 등장인물 각각의 시점이다. 그래 각 문단이 시작할 때마다 굵은 글씨로, 이번 문단은 누구의 시점인지 밝히고 있다. 이리하여 내가 보는 사건과 사물과 상황이 다른 사람이 보는 사건과 사물과 상황과 전혀 다를 수 있음을 독자는 즉각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어때? 재미나겠지? 그렇다.
 좋다. 이 책이 지금 품절 또는 절판 상태니까 스토리를 조금 더 이야기해보겠다.
 전화벨 소리만으로 모든 성적 반응이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상태가 됐으니 어쩌겠나. 질리언은 스튜어트와 이혼에 성공한다. 당연히 둘은, 겉으로는 쿨한 척하지만 속으론 돌이킬 수 없는 웬수가 되어버리고 만다. 스튜어트는 집 값의 절반을 질리언에게 지불해 런던에서 자기들이 살던 주택의 보유자로 남고, 질리언은 올리버와 재혼해 이번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근데 스튜어트가 생각하기를, 내 결혼식에 올리버가 왔으니, 올리버가 결혼할 때 나도 가야하는 거 아냐? 말은 맞는데 어째 좀 그렇다. 그리하여 평생을 갈 이 세 명의 난장판이 시작된다. 이후 셋은 각자 영국을 떠난다. 스튜어트는 미국에서 돈을 많이 버는 은행가로 성장했으며, 질리언이 툴루즈의 박물관에 복원해야 할 미술품이 많다고 해서 그리로 가는 김에 올리버 역시 동네 학교에서 영어 회화와 작문을 가르치게 된다. 이제 남은 건 세 명의 ‘원수들, 사랑 이야기’를 정리하는 일 하나. 이 책이 아무리 지금 품절이고, 앞으로도 당분간 다시 팔 거 같지 않지만, 어떻게 이 재미난 마의 트라이앵글이 해소되는지는, 다시 한 번 목에 핏대를 올리고 외치노니,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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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스물여덟 살에 쓴 아체베가 연이어 힘을 줘 서른 살에 <더 이상 평안은 없다>를 쓰더니 서른네 살에 <신의 화살>로 이른바 아프리카 삼부작을 완성한다. 이 세 권의 책 전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이후 아체베는 피 식민을 경험한 제3세계 출신 대표선수로 전 지구의 문학 판에 식민, 반식민 논쟁의 불을 붙인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그나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관심을 두었다고 여겨지고 있던 조지프 콘래드조차 아체베의 칼날보다 더 날카롭게 벼른 붓 끝에 의해 거덜이 나고 만다. <암흑의 핵심>, <로드 짐> 같은 것들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식민의식을 기반으로 한 인종차별적 작품이라고 일갈을 해버렸으니.

 

 

 

 물론 전적으로 이런 영향 때문은 아니겠지만, 아체베의 아프리카 삼부작이 나오고 약 10여년이 지난 후에 백낙청이 그의 명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에서 피 식민 문학으로 아체베를 소개하고 있다.

 

 

(이젠 몇 번의 중판을 거쳐 오른 쪽 그림의 두 권으로 판매하고 있다.)

 

 이게 내가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의, 치누아 아체베라는 작가에 관해 처음으로 들은 정보였다. 78년에 나온 백낙청의 저서가 지금도 여전히 책꽂이에 꽂혀 있지만 그거 꺼내 확인하려면 푸닥거리를 한 번 해야 할 만큼 깊숙이 묻혀있어 위에서 한 발언이 정확하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서른여섯 살, 1966년에 또 다른 장편 <민중의 사람>을 쓴 후에는 단편소설과, 시, 아동문학만 집필하다가 1987년에 ‘마지막 장편소설’로 발간한 책이 바로 <사바나의 개미 언덕>이란다.
 아프리카 삼부작에서는 피 식민지 아프리카에서 식민모국인 백인들에 의해 와해되는 원주민들의 문화와 삶과, 영혼의 피폐를 원주민의 삶의 모습과 함께 잘 그려냈다면, <사바나의 개미 언덕>에선 식민 상태가 끝나고 식민모국이 임의대로 그어놓은 경계선에 따라 복잡하게 구성된 서아프리카의 가상 국가 ‘캉안’에서 벌어지는 식민 후유증, 끊임없이 벌어지는 군사 쿠데타와 장기집권, 독재, 부정부패, 경찰국가화 경향에 대해, 그리고 결론으로 아프리카가 나가야 할 화해의 궁극적 방식을 주장하고 있다. 내가 읽어본 한계 안에서 말하자면 그의 역작 아프리카 삼부작과 정말로 잘 어울리는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쉽게 얘기해 우리나라 역시 경험한 식민통치 후 반식민(半植民) 상태의 제3세계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생한 독재와 군사 쿠데타 속 지식인들의 양심적 저항의 모습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씀. 식민 시대의 반식민(反植民) 주제가 식민 후의 반식민(半植民)으로 넘어가는 건 전 지구적으로 자연스럽다는 뜻. 유사한 작품으로 응구기와 티옹오의 <피의 꽃잎들>과 <십자가 위의 악마>, 에스키아 음파렐레의 <2번가에서>, 벤 오크리의 <굶주린 길>, 심지어 라틴 아메리카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쓴 일련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예를 들려면 수도 없이 많다. 사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의 70년대 호스티스 소설 이후 무더기로 쏟아진 작품들도 비슷하니까.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흐르는 걸 막기 위해 다시 언급을 하자면, 식민에 반대하는 반(反)식민 문학을 거친 아체베가 독립 후 절반쯤 식민 상태인 반(半)식민을 넘어 진정한 아프리카의 독립을 모색한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이후 나이지리아에는 특히 주목할 만한 여성 작가가 한 명 혜성같이 등장하는데, 바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에서 출간한 흥미진진한 <아메리카나>의 해설에서, '치누아 아체베의 21세기의 딸'이란 명예스러운 이름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이이의 비빌 언덕은, 이미 대영제국에서 아메리카로 넘어간 다음이다. 21세기로 넘어온 아프리카의 작가들은 이제는 피부색과 빈부의 격차, 지역, 그리고 무엇보다 성적 차별에서의 해방을 외치고 있다. 이들 제3 세계로의 아프리카 문학은 앞으로도 주목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다만 알라 알와스아니를 필두로 하는 사하라 이북 지역의 아프리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떻게 쓰다보니 이렇게 됐는데, 나는 민음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인간이다. 우연히 그 회사 책을 많이 인용하게 됐다.)


 어떻게 쓰다 보니 건방지게 아는 척을 너무 많이 한 거 같다. 여태까지 쓴 거 그냥 이것저것 읽으면서 저절로 품게 된 ‘개똥철학’, 아니, '개똥문학' 범주를 넘지 않는 수준이라 괜히 기억하실 필요 없다. 이제 책의 스토리로 넘어가보자.
 해방 후 독립한 서아프리카의 가상 국가 캉안에 쿠데타로 집권해 대통령 자리를 꿰찬 '샘'이란 작자가 이웃국가들의 절대 독재자들, 아민, 보카사, 무가베 등한테 배운 바가 있어 자기도 평생 대통령을 해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 국민투표를 하게 됐는데, 남부 열대우림 지역은 별 거 없는데, 북쪽 건조한 사바나 지역이 조금 문제라, 투표를 앞두고 우물 파는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네마다 낯선 사람들이 몰려와 지금 우두머리가 영원히 통치할 수 있도록 투표하는 데 동의하라고 요구했지만 (우두머리 자신은 영원히 통치하기를 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단 말이요.) 지역 대표 촌로는 그 말에 속임수가 있다는 걸 깨닫고 이리 묻는다.
 “누가 우두머리에 강요합니까?”
 “국민들이요.”
 “국민이라면 우리를 뜻하나요?”
 대답을 못하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만 있던 낯선 이를 보고 간계가 있다는 걸 안 촌로는 그냥 고맙다는 말만 전해 그들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동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두머리는 양식 있는 사람이라 영원히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소. 심지어 남자가 여자와 결혼할 때에도 영원히 결혼하는 건 아닙니다. 언젠가 둘 중 한 명이 죽을 것이고 그러면 결혼 관계는 끝나지요. 그래서 우리 마을 사람들과 난 동의하지 않겠다고 답했습니다.” (216~217쪽 요약해 다시 씀.)
 때는 바야흐로 전 아프리카의 사막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던 초기. 이젠 문제의 사바나 지역 아바존에는 도무지 건기가 끝나지 않는 시절을 맞는다. 때 맞춰 정부는 여태까지 시공하고 있던 우물 굴착을 중도에서 뚝 끊어버려 아바존 지역에선 농사나 목축은커녕 마실 물도 부족한 상태에 이른다. 원래는 이 지역을 방문해 표를 좀 얻어 볼까 했던 대통령도 관계자의 보고를 듣고 방문을 취소해버린다. 당장 우물을 파야 하는 아바존 사람들은, 힘 있는 대통령이 오지 않겠다고 하니 당연히 약자인 지역민들이 우두머리를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 법이라 대표단 여섯 명을 수도로 파견을 하는데, 아마 아무도 몰랐을 거다. 이 파견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에 택시 운전수, 마약공급자, 강도, 깡패, 좀도둑, 실업자, 양아치 등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수 천 명의 아바존 출신자들이 모두 모여 대통령궁 앞에서 알현을 부탁하는 걸 보고, 이들이 지금 나더러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건가, 겁을 덜컥 먹은 대통령이, 이들과 같은 지역 출신이며, 대통령과 중학교, 고등학교 때 친한 동기동창이었고 심지어 영국 유학도 함께한 현재 신문사 편집장으로, 매사에 대통령의 의견을 거스르는 사설만 써재끼는 아켐을 납치, 숙청해버린다. 쥐도 새도 모르게.
 원래부터 가상 국가 캉안에 형제처럼 친한 삼총사가 있었으니, 이들이 나중에 자라 공부 못했던 순서로, 샘은 대통령이 되고, 크리스는 공보처 장관이 됐으며, 하켐이 신문사 편집장 자리에 머물렀는데, 하켐이 야밤에 수갑을 찬 채 끌려가 분명 고문을 받고 죽었다는 걸 알고, 이미 자신에 대한 샘의 우정도 종을 쳤다는 것을 인식한 크리스는, 이제 완전한 독재자가 되기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대통령 샘을 피해 잠수를 타기로 결정한다. 자 어떻게 됐을까. 원래부터 스토리 전부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내가 여기서 크리스가 체포되어 죽기 바로 전에 샘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고 화해하면서 평생 자기가 죽인 하켐을 애도하며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게 사실일까, 거짓말일까.
 이 책의 스토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숨겼다. 하나는 아바존의 촌로가 수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경구. 표범과 거북이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 아무리 졸라도 이 두 가지는, 안 알려줌. 좋은 책이니 직접 읽어보시라고 권하는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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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1-15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헌책방에 가서리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를 찾아 보았는데 없더군요.
영어책으로는 있던데...

<아메리카나>는 그렇게 갠춘하다고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실종되어 버렸
습니다.

벤 오크리의 책도 어렵사리 구해 놓기는
하였으나 역시 읽지는 못했더라는.

<싸바나의 개미 언덕> 왠지 제목이 훈훈
합니다. 시간 내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Falstaff 2019-01-15 12:35   좋아요 0 | URL
옙.
제가 읽기로는 아체베의 ‘아프리카 삼부작‘보다 더 재미 있더라고요.
<아메리카나> 어찌 됐는지는, ㅋㅋㅋ, 안타깝기보다 상황이 웃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