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밤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바진이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루쉰, 라오서와 함께 3대 문호로 꼽힌다는 책 소개를 보지 않고, 그냥 붉고, 희고, 분홍색의 장미가 빼곡한 치파오를 입은 여성의 하반신 그림을 사용한 책의 표지와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의 명성만 가지고 골라 일 년이 넘게 책가게 보관함에 넣어놓기만 했다가, 오래 묵혀두는 것이 미안해 이제 그만 읽어보자, 하는 심정에서 사 읽었다. 애초에 장미꽃이 만발한 (옆트임이 시각을 자극하는)치파오에 눈이 어두워진 나는 현대 중국문학에서 자주 읽을 수 있는 불륜과 집안 내 난교 같은 것도 등장할 것이란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중국소설에서 그런 걸 어디 한두 번 보는가. 더구나 부잣집이나 대갓집의 경우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 젊은 계모와 나이 찬 아들 사이의 남녀상열지사가 거의 고정화되어 있지 않느냐는 말이지. 예를 대볼까? 차오위가 쓴 <뇌우>. 또? 관두자. 하여간 그런 건 헛공상이었다. 중국판 리얼리즘 문학이랄까. 굳이 경향을 따지면 그렇다는 말씀.
 무대는 중국의 충칭. 해방이 되기 전까지 5년이 넘게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 상하이에서 살다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충칭으로 피난 와서 살고 있는 왕씨 부부와, 어머니. 이 세 명이 세상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의 푸가를 연주한다. 소설은, 서른네 살 동갑내기 부부와 쉰세 살의 어머니가 초장부터 등장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당시에 벌써 대학교육까지 받았다는 거. 비록 19세기 태생인 어머니는 전족을 했음에도 당시로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교육과정을 마쳤으니 대단한 집안의 따님이었을 것이다. 왕원쉬안과 청수성은 대학시절 열정적인 청년 지식인으로 만나, 결혼이란 제도를 부정한 채 이상적인 학교를 세우는 교육운동의 꿈에 젖었다가, 전쟁 때문에 빈손으로 충칭까지 흘러들어 가난하게 살고 있는 상태. 여기에 가사를 제외한 노동능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한 원쉬안의 어머니는 며느리 청수성이 은행에 다니며 벌어오는 돈으로 살림을 하고, 열세 살 먹은 아들 샤오쉬안도 학비가 비싼 사립 기숙학교에 보내면서도, 며느리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아들의 정부’로 여기며 중국 여자 입장에서는 견디기 힘든 고부간 갈등을 유발한다.
 고부간 갈등이 발생하면 제일 골치 아픈 건, 아들이자 남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왕원쉬안. 이이가 애초에 대가 좀 센 체질이면 중간에서 적절하게 처신하며 중재를 할 수 있었겠지만, 바진이 만든 우리의 주인공은 자기의견 같은 건 어머니 배속에서 아예 가지고 나오지 않았으며,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충돌한 두 여자와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회담을 통해, 당신 말이 맞지만 그래도 좀 참아줘 옛날 양반 아닌가, 어머니 말씀이 백번 옳지만 지금 상황이 그러니까 이해를 좀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껍데기만 살짝 덮어놓는 재주 말고는 없다. 껍질 한 꺼풀만 벗기면 다시 피가 흐를 상처는 치료는커녕 소독 한 번 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이것만 가지고는 소설이 안 된다. 독자로 하여금 머릿속에서 뭔가 재미난 상상을 하게끔 만드는 장치가 적어도 하나는 필요하다. 그래서 설치한 트랩이, 아내 수성이 다니는 은행에 아내를 사랑하는 두 살 연하의 천주임이 등장한다. 그래 이 둘이 점심시간에 비싼 커피 집에서 남자는 블랙커피를, 여자는 우유를 탄 밀크커피를 마시고 있는 현장을 주인공 왕원쉬안이 발견하게끔 유도하는 것. 때는 1940년대 중반. 왕원쉬안 마음 같아서는 오늘 밤 당장 마누라 수성을 작신 두드려 패고 싶지만, 교정쇄 검토하는 일을 하며 박봉에 시달리는 자신보다 월등하게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 (호적에 오르지 않은)아내에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천주임인지 뭔지 하는 어린애 뒤를 따라가, 오히려 자기가 맞아 죽을 거 같아 감히 결투는 신청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다못해 벽돌로 뒤통수라도 한 번 내려 칠 깡다구도 없다. 어때, 그림이 그려지시지? 그래도 언젠가는 중국 교육의 개혁을 위해 이상적인 학교를 짓고 운영해보고자 하는 웅대한 꿈을 꾸었던 몸. 이런 인물이 중일전쟁의 바람 속에서 주머니가 비게 되자마자 이렇게 누추한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 것. 오호 애재라? 여기다가 왕 선생은 폐에 깊은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고 있기까지 한 상태. 당시 폐병이라 불리는 결핵에 걸렸다 하면 거의 죽을병이라 여기던 시절. 왕원쉬안도 예외는 아니라서 하루하루 기운이 빠지고, 기침을 하고, 객혈을 하고, 운신을 못하게 되는 것을, 왕원쉬안과 달리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환자와 그의 어머니란 19세기 여인이 효과적으로 만들어놓은 음울한 집구석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심지어 사회적 성공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호적상 동거녀 청수성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청수성이 자신을 사랑하는 두 살 연하의 천주임을 따라 집을 나가 자기 인생에서 첫 번째 결혼식을 올리고 백년해로를 하느냐, 아니면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시어머니의 구박과 질시를 인내하면서 불쌍하기 그지없이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포복하고 있는 왕원쉬안의 곁을 지키느냐. 수성의 성격을 보면 앞의 것을 선택해야 하지만, 1940년대 중반이라면 뒤의 선택이 정당할 거 같고, 그렇지? 애매하시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에 휩쓸린 작은 개인들의 비극과 나약성. 과연 어떻게 될지는, 안 알려줌.
 만일 누가 나더러 이 책을 선택해서 읽을까, 말까를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읽어보라고 하고 나중에 귀싸대기를 한 대 맞을까, 읽지 말라고 해서 중국현대문학의 세 번째 ‘문호’가 쓴 마지막 장편소설을 읽는 기회를 막아버릴까. 거 고민된다. 그러니 내게 이런 거 묻지 마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트우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7
주나 반스 지음, 이예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유명사 “Djuna”는 ‘주나’로 발음하는 모양이다. 1892년 출생. 이이보다 12년 빠른 1880년 영국에서 레드클리프 홀 여사가 태어나 반스 보다 8년 먼저인 1928년에 <고독의 우물>을 세상에 내놓았고, 그리하여 여성 퀴어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고독의 우물>에서는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가 외동딸에게 스티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남자 아이처럼 교육을 시킴으로 해서 성적 혼동을 초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던 반면, 주나 반스는 어떻게 남녀 동성애자로 결정되었는지에 관해 아무 설명 없이 해당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벌써 동성애 진행 중에 있다고 설정해버린다. 두 작품 공히 동성애적 표현이라고는 여성끼리 입맞춤 외엔 등장하지 않지만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이었던 <고독의 우물>의 경우엔 런던 시장에 의하여 시중에 뿌려진 수많은 책을 전량 회수하여 폐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주나 반스가 <나이트우드>를 썼을 당시엔 8년 전 홀의 경우를 심각하게 복기해서 출판사가 작품을 여러 방향으로 다시 편집, 홀과 같은 무참한 경우를 피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의 원본은 “셰릴 J. 플럼이 편집한 Nightwood: The Original Version and Related Drafts (Djuna Barnes, Dalkey Archive Press, 1995)"가 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건데, 이이가 여성작가라는 걸 알고 좀 놀라기도 했다. 이렇게 생겼더라.

 

 

 주나 반스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다. 그래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열고 읽기 시작하는데, 첫 문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같이 읽어보자.


 “1880년 초, 하느님에게 선택받았으나 뭇사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저 민족의 영속이 과연 권장할 일인지에 대한 근거 있는 의구심에도 아랑곳 않고, 강장한 기백과 군사적인 아름다움을 겸비한 빈 태생의 여성 헤트비히 폴크바인이, 캐노피가 달리고 휘장에는 합스부르크왕가의 갈래진 나래가 박혔으며 공단 겉감에 폴크바인가家의 문장을 올 굵고 색 바랜 금사로 우뚝 뜬 깃털 침대보가 덮인 휘황한 선홍빛 침대에 몸을 누인 채 마흔다섯 나이에 초산으로 독자를 낳았으니, 이는 의생이 임부의 죽음을 내다본 지 꼭 이레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1) 하느님에게 선택받았으나 뭇사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민족 : 유대인
 2) 폴크바인 가의 문장을 금사로 뜬 깃털 침대보 : 적어도 남작 이상의 귀족
 3) 마흔다섯 나이에 초산 : 귀한 자손의 출생
 4) 의생 : 醫生 ‘옛’ 의술로 질병을 고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 

 이런 모든 것을 합치고, 길고 화려한 문장을 고려해볼 때, 첫 문장부터 확 끼쳐오는 의문점.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나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역자 이예원이, 원래 화려한 문체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일까, 하는 것. 이 책 읽으면서 그래도 우리말 단어 깨나 알고 있다고 자만하던 나는, 적어도 스무 번 이상 사전을 뒤져 정확한 낱말의 뜻을 찾아봐야 했다. 같은 말이라도 현재 쓰고 있는 단어와 다른 표현을 즐기는 것이 역자의 습관일까?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민인에게 유락을 제공하라는 명”이라는 표현. 민인은 ‘인민’과 같은 말이고, 유락은 놀며 즐긴다는 뜻이라 “그리스도인에게 놀며 즐길 거리를 주라는 명”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굳이 이리 쓴 것은 ‘틀림없이’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재미있는 표현 알려드릴까? “구합媾合(책에서 인용한 한문의 ‘구’는 계집녀변이 아니라 책받침이지만 두 단어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아래한글에선 지원이 안 된다)”이 무슨 뜻인 줄 아시나? 나도 한문 좀 알고 산다 했다가 코피 났다. 성교와 같은 뜻이다. 이렇게 화려한 옛 문장체로 번역하는 것도 젊은 역자로서는 쉽지 않을 터. 그럼에도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만 원 건다, 번역해야 하는 원본이 옛 문장체로 쓰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장이 어느 하나 빠짐없이 유려하고 재기가 번득이며 읽는 재미를 듬뿍 주긴 한다. 그래 처음엔 감탄을 해가며 읽어 나가게 되지만, 이런 효용에는 한계가 있는 것.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심정으로 접어든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톤을 유지하는 입심에는 껌뻑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사이비 의사 매슈 오코너의 무한정한 수사가 펼쳐지면, 이이의 장광설이 나오는 장章마다 페이지 수가 늘어갈 정도인데, 그 화려한 변설에 넋을 잃을 정도. 오코너 선생도 스스로 이를 잘 알고 있어서 나중엔 결국 이렇게 절규하게 된다.


 “듣고 싶었던 건 이제 다들 들었을 테니 이만 날 풀어주면 안 되겠어요. 이제 그만 놓아주면? 난 인생을 허투루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인생을 허투루 이야기했어―추잡한 무리의 와중에서, 가증스럽게―알아, 다 끝났다는 거, 모두 끝났어, 한데 날 빼고는 아무도 그걸 모르지―코가 비뚤어져 개가 됐대도―너무 오래 버텼어―” (231쪽)


 그렇다. 헤트비히 폴크바인 남작부인이 마흔다섯의 나이에 사내아이를 낳고 “장려한 몸짓으로 돌아누우며 아이를 펠릭스라 명명”하고 숨은 거둔 다음, 독자는 당연하게도 책을 이끌고 가는 주인공으로 바로 이 아이, 펠릭스라고 생각하게 되게끔 만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펠릭스는 기도(이탈리아계 유대인이니 Guido, ‘귀도’일 것 같긴 하지만)를 낳고, 기도는 끝내 자손을 내지 못하고 쉰아홉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럼 스토리는 어떻게 되고, 또한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어떻게 여성 퀴어 소설이 되느냐고? 좋다. 가르쳐드린다. 펠릭스는 로빈과 결혼해 발육이 부진한 기도를 낳고, 로빈은 집에서 이렇게만 살기엔 도저히 근질근질해 참지 못하고 가출해 미국으로 날라버린다. 거기서 동성의 애인 노라를 만나 좀 살다가, 함께 파리로 건너와 잠깐 지내는 동안, 네 번의 결혼 이력이 있는 영국 과부 제니 페더브리지가 로빈한테 반하게 되는 데, 어느 날 밤, 다섯 명이 탄 마차 안에서 과부 제니가 로빈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어 피를 철철 흘렸음에도, 오히려 노라를 버려둔 채 제니와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도피해 버린다.
 여기서 제니와, 특히 노라가 겪는 번민과 사랑이 스토리의 주요 줄기가 되고, 무면허 의사 오코너 선생의 변설이 기막힌 향신료로 작용하는 소설. 이리 내용을 밝히는 건, <나이트우드>라는 작품의 진짜 매력은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그리 자극적이지도 않고, 흥미를 유발하지도 않는 그냥 그런 스토리에 있지 않고, 좋은 소설이 그렇듯이 몇 몇 인간의 심리상태를 찬란한 문장으로 써 내려가는데 있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9-03-2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체가 범접하기 힘든가 봅니다 ~ㅎㅎ

Falstaff 2019-03-21 09:1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우리말에도 동음이의어가 많다는 걸 새삼스레 발견했습니다.
사전을 옆에 두고 읽으시면 더욱 재미나게 즐길 수 있을 거 같더군요.
 
어둠속의 항해 창비세계문학 66
진 리스 지음, 최선령 옮김 / 창비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 리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와 <한밤이여, 안녕>으로 내 혼을 빼놓은 작가. 우리나라에 번역해 나온 작품은 이 두 가지 말고 없었는데 작년에 현대문학사에서 단편집이, 올해 1월에 <어둠속의 항해>가 연이어 나왔다. 1월에 두 권을 사서 가지고 있다가 이제 한 권을 읽었다. 역시 진 리스.
 가끔 황량한 소설을 읽는다. 이런 걸 쓰는 작가들의 가슴 속에도 역시 고통과 고독과 상실이 가득하리라. 어차피 글 쓰는 것도 사람 사는 일이니까. 그러나 독자가 이런 작품을 읽을 때마다 작가나 작가가 쓴 글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걸 임계점이라고 해두자. 작가가 자신의 감정에 입각해서 글을 쓸 경우, 고통, 고독, 상실 등의 추상명사를 어떻게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가 문제일 듯하다. 이런 작품들의 경우 감정의 임계점을 넘는 소설 표현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가 표현한 추상명사들에 동의할 수 있는 한계. 이 한계는 거꾸로 독자의 동의와 공감 수준이 극대화 되는 지점이고 그걸 임계점이라 하자.
 나는 임계점에서 조금 거리를 둔, 임계점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런 작품들이 안전해서. 임계점이 무서운 건, 그 점을 조금이라도 넘으면 폭발해버리기 때문. 독자인 나는 임계점을 넘는 작품들을 읽으면 조금도 봐주지 않고, 때론 매우 모질게 ‘질퍽거린다’느니, ‘통곡의 벽’이라느니, ‘궁상맞다’라고 독후감을 쓴다. 특히 추상명사들이 그대로 문장 속에 들어 있을 경우엔 절대 봐주지 않는 못된 습관이 있다. 그래서 난 진 리스를 좋아한다.
 서인도 제도에서 출생해 열여섯 살에 영국으로 온 진 리스는 외증조모에서 내려온 피부색과 낯선 영어발음으로 매우 어려운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책의 앞날개에 적혀 있는 바에 따르면 영국에 도착한 이후,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왕립연극학교에서도 언어 문제로 중도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 코러스 걸, 마네킹, 누드모델 등의 일을 전전하다가, 부유한 연상의 연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했으며, 10대 후반에 낙태수술을 경험한다. 몸은 영국에 있지만 정처 없는 삶을 산 셈이었다. 그 후 20여 년이 흘러 진 리스는 그의 책 <어둠속의 항해>에 당시 자신이 겪었던 혼란과 소외와 고독과 절망과 가난과 헛된 사랑과 실연과, 무엇보다 낙태의 경험을 온전히, 그러나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결코 임계점을 넘지 않고, 주인공 애나의 입에서 추상명사가 나오지 않으면서도, 때론 절박하게, 때론 아무렇게나, 때로는 무책임하게 행동하고 발언하는 속에서 독자는 런던 속의 어린 이방의 아가씨가 절절하게 빠져있는 혼돈과 절망의 정처를 발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기만의 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0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일 년 반쯤 됐나. 그때까지 나는 한국 페미니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당시 김연의 소설 <그 여름날의 치자와 오디>를 읽으면서 책 안에 등장하는 남자들이 하나같이 개새끼들인 것이 마땅하지 못해 “여자와 남자, 좀 서로 좋아하며 살자.”라고 독후감을 끝맺었다가, 아직 정신 못 차린 ‘개저씨’가 돼버린 일화가 있다. 그때 생각이 나서 해당 포스트를 다시 읽어보니, 지극히 국한된, 어쩌면 고립된 사회생활을 했던/하는 나는 여성계 일부에서 벌이고 있던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에 완전 무식했으며, 당연히 여성주의자들이 남자란 포유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관해서도 무지해 그런 독후감이 나왔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 오해하지 마시라. 그냥 그런 경험이 있다, 하는 수준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니.
 그리하여 같은 이유로 버지니아 울프가 90년 전에 행했던 강연을 기초로 쓴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 관해서, 비겁하고 소심한 나는 독후감 쓰기를 주저한다. 울프는 에세이에서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①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 ② 여성이 쓴 픽션, ③ 여성에 관해 쓴 픽션으로 구분해서 고민을 하며, 여성이 픽션을 제대로 쓸 수 있기 위해서는 연 500 파운드(지금 가치로 한 5천만원 가량?) 정도의 고정된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개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셰익스피어 시절부터 여성이 ‘픽션의 생산’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현상을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궁극적으로 성 해방까지 차분하게 논조를 끌어가고 있다.
 그게 90년 전이다. 아무리 자질이 있어서, 예를 들자면, 셰익스피어의 자질을 능가하는 여동생이 매리(이런 이름이라고 가정하자)가 있었더라도 결코 희곡을 쓰는데 필요한 기초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며, 집에서 야반도주해 런던의 극장과 접촉했더라도 치욕적인 대우만 받았을 것이며, 결과, 한 편의 작품도 쓰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성으로서 신세까지 망쳤을 것이라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울프의 정당한 가정법이다. 여성에게 돈과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백번 옳았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픽션을 생산하는 일 또는 직업에서는 완전히 역전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세계적으로 봐도 다양한 종류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문학상’들의 수상자 면면을 보면 여자가 남자보다 월등하게 많다. 문학상 수상작 말고 아깝게 떨어진 후보작 작가들까지 포함하면 여성작가가 남성작가의 두 배 이상 안 될까? 여성에게 돈과 공간이 주어지자 당장 이런 일이 생겼으니 울프의 선견이 정당했다는 걸 우리나라에서보다 어떻게 더 잘 보여줄 수 있는가 말이지.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건, 내겐 마치 역사책을 읽는 것과 비슷했다. 과거엔 이런 주장까지 할 정도로 어쩌고저쩌고.
 우리나라 문학판에서의 과도한 여초현상에 관해 뭐 할 말이 없지 않지만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하자.
 나의 치명적인 약점은 토론을 지나치게 싫어한다는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도로 가는 길
E.M.포스터 지음, 김동욱 옮김 / 인화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E.M. 포스터의 대표작으로 옵서버 선정 100대 명저, 뉴스위크 선정 100대 소설에 포함되는 작품이며, 데이비드 린 감독이 알렉 기네스를 캐스팅해서 영화로도 만들었다. <전망 좋은 방>을 재미있게 읽었고(갈등을 그렇게 맛나게 비벼놓을 수 있을까!), 작가의 대표작이면서도 이 책을 번역해 출간한 출판사 열린책들에선 품절, 인화에선 절판이라 새 책은 살 수도 없고, 상태가 좋지 않은 헌책 값이 새 책보다 더 비싼지라, 싸게 나온 책이 눈에 뜨이자마자 얼른 주웠다. 포스터가 1912년과 21년에 직접 인도를 여행하고, 24년에 작품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제일 웃기는 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작가가 아닌 역자가 쓰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대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역자는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라면 꼭 한 번은 읽기를 권하는 수작”이라고 수작을 부리면서, 작가가 “두 개의 문화적, 정신적 가치관에 의한 대립과 투쟁이 일어난다면 이해와 관용만이 평화적 화합을 이룰 수 있음을 전달하고자” 했으며, “민족적 대립과 투쟁에는 영국인이 가지고 있는 합리적이며 물질 문명적인 서양의 가치관과, 인도의 비합리적이며 정신적인 면이 강한 동양의 가치관이 서로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 없이는 도저히 화합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별 해괴한 논법을 펼친다. 어째 좀 수상하다.
 이렇게 독후감 쓰다가 역자 김동욱한테 고소당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역자가 일본문학을 전공해 학사를 따고 지금 일본 만화 번역에 힘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다시 강조한다, 확실하다는 게 아니라 짐작하건데 그렇다는 말이다, <인도로 가는 길>의 일본어 번역판을 서문과 발문까지 몽땅 다 우리말로 옮겨버린 거 아닌가 싶다. 말도 안 되는 발언. 영국과 인도. 식민 모국과 식민지. 영국에서 기껏해야 중류 계급이었던 것들이 인도로 배 타고 가서 최상류 계급으로 승격해 원주민들을 가축처럼 여기며 사는 인종들의 문화와, 회교와 힌두교를 믿는 유색 원주민이자 이교도이자 야만인들의 문화의 이질성은 서로 이해와 포용으로 아름답게 화합해야 한다고? 어이가 없다. 영국에서 영어로 소설을 쓰는 콜럼비아 계 작가 제이디 스미스의 <하얀 이빨>에 보면 인도에서의 반 영국 전쟁이었던 ‘세포이의 반란’에서 첫 번째로 총을 쏴 반란의 시작을 알린 만갈 판디를 증조할아버지로 둔 인물이 등장하듯이, 식민을 해소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미안하지만 무장투쟁이다(난 3.1 운동이 임시정부를 탄생하게 했다는 의미 외의 것은 별로 찬양하지 않는다). 역자가 썼다고 주장하는 프롤로그, 식민 모국과 피식민지 간 문화의 상이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해, 포용, 관용, 화합을 주장할 수 있는 건 식민지 경영에 직접 참여해봤던 유럽국가 아니면 동아시아의 일본이란 나라의 지식인들 말고는 없고, 있어도 안 된다. 김동욱이 1964년 생. 충분히 알만한 시기에 공부했는데 그걸 몰라서 뚫린 입이라고 이리 주장하나? 이러니 서문마저 일본 애들이 한 말을 그대로 번역했다고 내가 의심하는 거 아닌가. 나 참, 까무러친다. 헌책 샀다는 건 앞에서 얘기했다. 책을 펴면 백지가 나오고 거기에 볼펜 글씨로 “2005. 12. 2, 사랑하는 예지 예은이에게”라고 쓰고 동그랗게 사인을 해놓았다. 이런 책을 딸들, 혹은 조카들에게 선물하는 건 좋다. 다만 책이 주장하는 바를 이 우라질 프롤로그 비슷하게는 설명해주지 않기를 바라면서.
 스토리는 벌써 다 얘기했다. 인도에 놀러온 영국인과 영국에서 의사 면허증을 딴 원주민 의사가 중심이 되어 두 문화권 인간들이 충돌을 일으키는 내용이다. 영국에 살 때는 그리 예절 밝고 친절하게 처신하던 중류 인종들이 인도에 와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안면 몰수하고 파렴치하게도 원주민들을 멸시하는 장면들이 먼저 나온다. 이어서 당연한 수순으로 대부분의 영국인들과는 달리 단순히 인도에 와 있는 아들, 연인을 보러 온 선량한 어머니와 애인이 등장하고, 이들이 주인공이자 원주민 의사이자 아들 둘, 딸 하나를 둔 홀아비인 닥터 아지즈와 오해가 생겨 우여곡절을 겪는 내용.
 정작 E.M 포스터는 닥터 아지즈의 입을 통해 이렇게 발언한다.
 “당신네 모든 사람들은 모조리 물러가야 합니다. (중략) 어서 물러서라구요. 어서 물러서라고 내가 했잖아요. 왜 우리들은 그토록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까? 전에는 우리들도 영국인들을 탓했지만 이제는 매우 현명해져서 우리 자신을 탓합니다. (중략) 영국이 힘든 지경에 빠질 때까지 우리들은 가만 있을 거고, 다음에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 아하, 아하! 그렇게 되면 우리들에게도 독립의 시기가 도래할 겁니다.”
 이거 웃기다. 인도의 지식인조차 독립을 위해 자신들이 할 일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다음에 터질 전쟁으로 해가지지 않는 영국이란 나라가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일이란다. 책이 나온 1924년엔 아직 2차 세계대전의 기미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아마 한 이백년 정도 기다리면 노쇠한 영국이 힘이 빠질 수도 있겠지. 아주 정확한 식민 문학의 예 아닐까.
 포스터 입장도 적극적 해방을 위한 투쟁을 바라지 않는다. 전형적인 “식민 모국의 지식인”으로 등장하는 필딩은 닥터 아지즈에게 이렇게 대응한다.
 “인도인이 우리에게서 벗어나게 되면 그 즉시로 멸망하게 될 거예요. 조지 5세 황제 고등학교를 보세요(1년 만에 없어졌다)! 의학을 잊어버리고 주문으로 치료하는 당신을 보란 말입니다. (중략) 어디 한 번 잘 해보라구, 이 사람아. 먼저 당신의 여자부터 해방을 시키고, 그러면 누가 아메드와 카림과 자밀라(닥터 아지즈의 자식들)의 얼굴을 닦아 줄지 보라구요. 훌륭한 일들이 발생하겠죠!” (위의 인용 모두 378쪽)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배 해서 철도가 놓이고, 몇 개의 항구가 더 생기고, 도로가 확충되었으며 이 모든 것을 통해 야만에서 개명한 사회로 진입했다는 말들은 다 한 번 씩 들어보셨을 것.


 결론 1. 이 책을 100대 명저, 100대 소설에 포함시키는 건 식민지 경영을 해보았던 백인들과 일본의 단체 말고는 없을 것 같다. 청소년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하는 건 좋은데, 식민 모국의 편협한 시각을 충분히 설명해주는 일이 필수라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셔야 할 것이다.
 결론 2. 출판사 인화. 최근에 간행한 책이 2007년에 나왔다. 망한 거 같다. 그러면 이 책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왜? 오역 여부가 문제가 아니다. 교정, 교열을 회사가 있는 당산동 근방 중학교 2학년에 재학하는 외국인 청소년에게 맡기면 이런 정도의 책을 만들 수 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9-03-18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M.포스터 책 가운데 제가 아직 유일하게 안 읽고 있는 책이 <인도로 가는 길>인데요(저는 열린책들 버전으로 갖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읽지 않았으니 섣불리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포스터 대표작은 <인도로 가는 길>이 아니라 <전망 좋은 방>이나 <모리스> 또는 <하워즈 엔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와, 그나저나 지금 검색해보니 정말 포스터 책은 <전망 좋은 방> <하워즈 엔드> 빼고는 거의 다 절판이네요?! 그 모든 책을 갖고 있는 저는 왠지 으쓱으쓱. ㅋㅋㅋㅋ

Falstaff 2019-03-18 10:21   좋아요 0 | URL
ㅋㅋㅋ 대표작이란 표현은 제가 한 말이 아니고요, 영국과 미국의 평론가들이 100대 명저니, 100대 소설이니 하면서 떠드는 거랍니다. 전 이 책 읽으면서 내내 불편하기 짝이 없었어요. 저도 <전망 좋은 방>을 참 재미있게 읽어서 크게 기대했었는데 말입죠.
전집을 다 가지고 계신거네요? ㅎㅎㅎ 으쓱하실 만합니다.

잠자냥 2019-03-18 10:23   좋아요 0 | URL
네네~ 폴스타프 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게 아니라, ㅎㅎ 보통 서양것들 기준으로 포스터 대표작은 꼭 <인도로 가는 길>을 꼽더라고요. 근데 그게 저는 늘 못마땅..... ㅋㅋㅋㅋ 사실 이 작품 아직 안 읽은 이유도 포스터 작품 중에 가장 재미 없어 보여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