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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로 가는 길
E.M.포스터 지음, 김동욱 옮김 / 인화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E.M. 포스터의 대표작으로 옵서버 선정 100대 명저, 뉴스위크 선정 100대 소설에 포함되는 작품이며, 데이비드 린 감독이 알렉 기네스를 캐스팅해서 영화로도 만들었다. <전망 좋은 방>을 재미있게 읽었고(갈등을 그렇게 맛나게 비벼놓을 수 있을까!), 작가의 대표작이면서도 이 책을 번역해 출간한 출판사 열린책들에선 품절, 인화에선 절판이라 새 책은 살 수도 없고, 상태가 좋지 않은 헌책 값이 새 책보다 더 비싼지라, 싸게 나온 책이 눈에 뜨이자마자 얼른 주웠다. 포스터가 1912년과 21년에 직접 인도를 여행하고, 24년에 작품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제일 웃기는 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작가가 아닌 역자가 쓰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대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역자는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라면 꼭 한 번은 읽기를 권하는 수작”이라고 수작을 부리면서, 작가가 “두 개의 문화적, 정신적 가치관에 의한 대립과 투쟁이 일어난다면 이해와 관용만이 평화적 화합을 이룰 수 있음을 전달하고자” 했으며, “민족적 대립과 투쟁에는 영국인이 가지고 있는 합리적이며 물질 문명적인 서양의 가치관과, 인도의 비합리적이며 정신적인 면이 강한 동양의 가치관이 서로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 없이는 도저히 화합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별 해괴한 논법을 펼친다. 어째 좀 수상하다.
이렇게 독후감 쓰다가 역자 김동욱한테 고소당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역자가 일본문학을 전공해 학사를 따고 지금 일본 만화 번역에 힘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다시 강조한다, 확실하다는 게 아니라 짐작하건데 그렇다는 말이다, <인도로 가는 길>의 일본어 번역판을 서문과 발문까지 몽땅 다 우리말로 옮겨버린 거 아닌가 싶다. 말도 안 되는 발언. 영국과 인도. 식민 모국과 식민지. 영국에서 기껏해야 중류 계급이었던 것들이 인도로 배 타고 가서 최상류 계급으로 승격해 원주민들을 가축처럼 여기며 사는 인종들의 문화와, 회교와 힌두교를 믿는 유색 원주민이자 이교도이자 야만인들의 문화의 이질성은 서로 이해와 포용으로 아름답게 화합해야 한다고? 어이가 없다. 영국에서 영어로 소설을 쓰는 콜럼비아 계 작가 제이디 스미스의 <하얀 이빨>에 보면 인도에서의 반 영국 전쟁이었던 ‘세포이의 반란’에서 첫 번째로 총을 쏴 반란의 시작을 알린 만갈 판디를 증조할아버지로 둔 인물이 등장하듯이, 식민을 해소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미안하지만 무장투쟁이다(난 3.1 운동이 임시정부를 탄생하게 했다는 의미 외의 것은 별로 찬양하지 않는다). 역자가 썼다고 주장하는 프롤로그, 식민 모국과 피식민지 간 문화의 상이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해, 포용, 관용, 화합을 주장할 수 있는 건 식민지 경영에 직접 참여해봤던 유럽국가 아니면 동아시아의 일본이란 나라의 지식인들 말고는 없고, 있어도 안 된다. 김동욱이 1964년 생. 충분히 알만한 시기에 공부했는데 그걸 몰라서 뚫린 입이라고 이리 주장하나? 이러니 서문마저 일본 애들이 한 말을 그대로 번역했다고 내가 의심하는 거 아닌가. 나 참, 까무러친다. 헌책 샀다는 건 앞에서 얘기했다. 책을 펴면 백지가 나오고 거기에 볼펜 글씨로 “2005. 12. 2, 사랑하는 예지 예은이에게”라고 쓰고 동그랗게 사인을 해놓았다. 이런 책을 딸들, 혹은 조카들에게 선물하는 건 좋다. 다만 책이 주장하는 바를 이 우라질 프롤로그 비슷하게는 설명해주지 않기를 바라면서.
스토리는 벌써 다 얘기했다. 인도에 놀러온 영국인과 영국에서 의사 면허증을 딴 원주민 의사가 중심이 되어 두 문화권 인간들이 충돌을 일으키는 내용이다. 영국에 살 때는 그리 예절 밝고 친절하게 처신하던 중류 인종들이 인도에 와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안면 몰수하고 파렴치하게도 원주민들을 멸시하는 장면들이 먼저 나온다. 이어서 당연한 수순으로 대부분의 영국인들과는 달리 단순히 인도에 와 있는 아들, 연인을 보러 온 선량한 어머니와 애인이 등장하고, 이들이 주인공이자 원주민 의사이자 아들 둘, 딸 하나를 둔 홀아비인 닥터 아지즈와 오해가 생겨 우여곡절을 겪는 내용.
정작 E.M 포스터는 닥터 아지즈의 입을 통해 이렇게 발언한다.
“당신네 모든 사람들은 모조리 물러가야 합니다. (중략) 어서 물러서라구요. 어서 물러서라고 내가 했잖아요. 왜 우리들은 그토록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까? 전에는 우리들도 영국인들을 탓했지만 이제는 매우 현명해져서 우리 자신을 탓합니다. (중략) 영국이 힘든 지경에 빠질 때까지 우리들은 가만 있을 거고, 다음에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 아하, 아하! 그렇게 되면 우리들에게도 독립의 시기가 도래할 겁니다.”
이거 웃기다. 인도의 지식인조차 독립을 위해 자신들이 할 일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다음에 터질 전쟁으로 해가지지 않는 영국이란 나라가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일이란다. 책이 나온 1924년엔 아직 2차 세계대전의 기미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아마 한 이백년 정도 기다리면 노쇠한 영국이 힘이 빠질 수도 있겠지. 아주 정확한 식민 문학의 예 아닐까.
포스터 입장도 적극적 해방을 위한 투쟁을 바라지 않는다. 전형적인 “식민 모국의 지식인”으로 등장하는 필딩은 닥터 아지즈에게 이렇게 대응한다.
“인도인이 우리에게서 벗어나게 되면 그 즉시로 멸망하게 될 거예요. 조지 5세 황제 고등학교를 보세요(1년 만에 없어졌다)! 의학을 잊어버리고 주문으로 치료하는 당신을 보란 말입니다. (중략) 어디 한 번 잘 해보라구, 이 사람아. 먼저 당신의 여자부터 해방을 시키고, 그러면 누가 아메드와 카림과 자밀라(닥터 아지즈의 자식들)의 얼굴을 닦아 줄지 보라구요. 훌륭한 일들이 발생하겠죠!” (위의 인용 모두 378쪽)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배 해서 철도가 놓이고, 몇 개의 항구가 더 생기고, 도로가 확충되었으며 이 모든 것을 통해 야만에서 개명한 사회로 진입했다는 말들은 다 한 번 씩 들어보셨을 것.
결론 1. 이 책을 100대 명저, 100대 소설에 포함시키는 건 식민지 경영을 해보았던 백인들과 일본의 단체 말고는 없을 것 같다. 청소년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하는 건 좋은데, 식민 모국의 편협한 시각을 충분히 설명해주는 일이 필수라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셔야 할 것이다.
결론 2. 출판사 인화. 최근에 간행한 책이 2007년에 나왔다. 망한 거 같다. 그러면 이 책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왜? 오역 여부가 문제가 아니다. 교정, 교열을 회사가 있는 당산동 근방 중학교 2학년에 재학하는 외국인 청소년에게 맡기면 이런 정도의 책을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