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창비시선 385
문인수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45년생 시인이 2015년에 낸 시집이니 이 한 권으로 칠순잔치 했다 치면 되겠네. 해가 갈수록 나이든 시인들이 좋아진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거염내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으니 우리는 이런 노인들을 일컬어 노추老醜라고 한다. (왜 한글2010에 ‘거염’ 밑에 붉은 줄이 달리지? 부러워서 생기는 시기심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다. 한글2010이 우리말에 약한 모양이다) 시인들? 그들이라고 다를까. 같은 사람인데. 그렇지만 이들은 평생 우리말을 다듬어 자기 생각을 펼치며 살아온 사람들이라 말, 특히 그걸 문자로 기록해놓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충분히 알고 있어서 적어도 자신의 ‘시’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면 사물이나 사람, 사건을 바라보는 눈길이 그렇게도 부드러워진다. 작은 일에 고마워하고, 감격하고, 옛일을 회상하고, 그 작은 일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미소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이런 시들은 아무리 읽어도 물리지 않는다. 시집을 냈을 때가 만 70세면 이제 문인수는 노인이다. 노인의 시. 진짜 시인은 스무 살 때까지 끼적인 낙서를 찢어버리고 상아 장사를 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다고? 진짜 시인은 상아 장사와 무기밀매를 하고 또 하고, 하다가 또 하다가 진절머리가 나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 마루 밑 섬돌 아래 핀 잡초를 보고 자붓하게 웃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시집의 표제,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라는 건 무슨 뜻일까. 표제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오늘도 내뺀다.” 시인은 오랫동안 대구의 동부시외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살았는데 딱히 갈 곳도 없는 채로 동네에서만 살았던 터라 동네라면 골목골목 모르는 곳이 없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문득 “눈에 집히는 대로 아무 행선지를 골라” 버스에 올라탄다. 왜? 쉽다. “아무 데나 가보려고.” 강릉까지 가려고 강릉 가는 차표를 끊고는 훨씬 못 미쳐 묵호에서 내리기도 하고, 근데 묵호가 어딘 줄 아셔? 요즘엔 동해시에 편입되어 묵호동이란 지명을 갖고 있을 뿐이지만 예전에 ‘묵호’라면 큰 항구였다, 울진 가려다가 변덕이 나서 울산 방어진 가는 버스를 타기도 하고 이리저리 막무가내로 돌아다녔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집을 다 읽어보면 이이의 발품은 경상도 해변지역은 물론이고 전국각지, 전라남도 해변까지 국토 전반을 망라하는데, 그래서 표제이자 시의 제목인 ‘이곳’은 자신이 터를 잡고 사는 지역쯤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라는 말은 시인이 현재 이동 중, 혹은 다른 곳에 잠깐 발을 멈춘 상태 정도라고 해석이 된다. 그래 집을 나서 먼 타관에 홀로 있으면 나를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낯선 일별, 선의의 일별들도 빽빽한 것이 단박에 눈이 들어오고 그래서, “나랑 무관해서 편하다.”
 얼마나 좋아. 언제부터 시가 고독과 고통과 죽음과 우울의 늪지대에서 허덕였기에 수많은 시인들이 농도 짙은 절망의 방사능을 가뜩이나 우울한 세상에다 방사하고 있었느냔 말이지. 그런 시들을 읽다가 이렇게 문득 길을 나서서 나하고는 관계없는 사람들 덕택에 편하다고 하는 시를 읽으면 괜히 내 마음까지 편해진다. 게다가 문인수의 시에서는 절대 경박하지 않은 웃음 코드까지 곳곳에 섞여 있어서 여차하면 지뢰 밟듯이 펑펑 터질 거 같지? 그 정도는 아니고 시를 읽다가 가볍게 픽, 웃게 만들어준다. 참 좋다. 뭐든지 과하지 않은 자잘한 즐거움을 주는 시. 비록 뇌리에, 아니면 가슴에 비수처럼 팍 꽂히는 시 한 수가 없다 해도 그게 대수인가. 시 말고도 지금 세상엔 팍팍 꽂히는 날카로움이 너무 많아 몸 사리느라 뼈마디가 녹작지근해마지 않는데 말이지. 예를 들어 <뻰찌>라는 시를 보면, 뻰찌라고 함은 시인의 고향친구 여중환 선생을 말하는 바, 일찍이 전기, 전자공을 다 합해 전공電工이라 일컫는데, 인생동안 뻰찌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왼쪽으로 돌리길 수백만 차례라 손아귀 힘이 가히 장사였던 모양이다. 그러다 어느 날 사기꾼한테 뻰찌가 물려버려 탈탈 탈린 빈손이 돼버렸다지? 이 친구가 오래 전 시인의 어머니 혼자 사는 집에 한사코, 한사코, 진짜 한사코 무료로 전기공사를 해주어 시인이 “고맙다고 손을 내밀었을 때, 그가 덥석 마주 잡았을 때, 아팠다. 손가락이 몽땅 분필 동강 나듯 몹시 아팠다. 그것은 내 불효를 잡죈, 악문 것이었을까. 나는 그때 / '아프다! 씨발놈아 ―'" 했던 거 같단다. 그리고 곧바로 뭐라고 노래하느냐 하면, "뻰찌는 요새 뭘 잡아먹나."
 시인의 나이 70에 나온 시집이니, 시는 60대 후반에 썼겠다. 이 가운데 어떤 시가 있느냐 하면, 조묵단 여사가 시인의 어머니 존함인 모양이다.




 조묵단전(傳)
 나비를 업다



 나 혼자 산소엘 와 넙죽 엎드리는데
 잔디를 짚는 손등에 웬 보랏빛 알락나비 한 마리 날아와 살짝 붙는다. 금세
 날아간다. 어,

 어머니?

 ……

 다만 저 한잎 우화, 저리 사뿐 펴내느라 그렇듯
 한평생 나부대며 고단하게 사셨나.

 절을 다 마치고 한참 동안 앉아 사방 기웃기웃 둘러보는데, 없다. 산을 내려오는데
 참, 너무 가벼워서 무겁다. 등에,
 나비 자국이 싹 트며 아픈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제 내년에 읽을 책들을 구매해야 하는데 이거 참 곤란한 일을 만났습니다. 반갑지만 즐겁지 않은 책들이 몇 권 있네요. 책을 쓴 작가들의 전작이 쉽지 않아 다시 그들의 책을 읽게 된 찬스는 반가우나 정말로 다시 곤욕을 치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즐겁지 못한, 애증의 작품들입니다.

 

 먼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단편집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전에 이이가 쓴 두 권의 책을 읽어본 적이 있으니 <러시아 인형>과 <모렐의 발명>. 카사레스는 일찍이 1930년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어느 카페에서 문제적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나 친구 먹기로 하고 60년간 교류를 했던 라틴 아메리카 고유의 환상문학의 대표선수이긴 한데, 말이 좋아 환상문학이고 환상리얼리즘이지, 제 독서 노트에는 '아몰랑 주의' 소설의 선두주자라고 적혀 있는 골아픈 작가입니다. 그것도 많고 많은 아몰랑 주의 작가들 가운데서도 생과 사, 환상과 실재를 가장 애매하게 넘나드는 작가군의 선두에 서 있는지라 선뜻 읽어볼 생각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안 읽으면 될 것을 왜 엄살이냐 하면, 그렇다고 그냥 패스하고 넘어가기엔 또 과하게 매력적인 작가란 말씀이지요. 근데 이건 적어도 앞으로 반 년 안쪽으로 읽게 될 거 같습니다. 다음 두 권의 책과 비교해서는 그래도 갈등이 덜하기 때문이지요.

 

 

 막스 프리슈, <슈틸러>

 

  막스 프리슈, 혹은 프리쉬의 작품 역시 두 편을 읽어봤습니다. <몬타우크>와 <나를 간텐바인이라고 하자>. 사실 진짜 겁나는 사람은 막스 프리슈라기보다 한시절 그의 애인이었으며 함께 독일의 47그룹 멤버로 눈썹을 휘날리던 잉에보르크 바흐만입니다만 프리쉬도 만만치 않습지요. 물론 누보 로망의 대표선수라고 하는 알랭 로브그리예 만큼은 아니지만 건조한 문장으로 삭막한 인간관계를 그리는 프리슈의, 무엇보다도 두꺼운 책을, 수월하게 읽어낼 수 있을지, 읽는다고 해도 과연 프리슈가 말하고자 하는 걸 알아들을 수 있을지, <슈틸러>의 책 표지만큼 겁납니다. 잠깐 딴 생각하면 맥을 놓쳐버려 앞쪽으로 몇 페이지나 되돌려야 하는 수고를 또 해야 할까 말까, 꽤나 골치 아픈데, 사실 작가가 자기 이름 하나 가지고 그토록 유혹의 그물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겠습니다. 이 책은 하다못해 독자 서평도 하나 달리지 않아 고민은 더 깊어 갑니다.

 

 

헤르만 브로흐, <현혹>

 

 카사레스와 프리슈는 브로흐에 비하면 이도 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몸서리치는데, <몽유병자들>을 읽으면서 그 책을 읽기로 하고 손에 든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요. 아무리 읽어도 진도는 나가지 않지, 문단은 끝나지 않지, 브로흐 선생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지도 도통 모르겠지, 읽는 행위 자체가 악몽이었습니다. 그래 <몽유병자들>을 며칠에 걸쳐 다 읽고나서 내가 이룬 가장 큰 성과는 <몽유병자들>을 완독했다, 한 문장도 빼지 않고 다 읽었다는 사실 하나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책의 내용이 완벽하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고도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을 읽은 건 <몽유병자들>에 데서 어디 이것도 그런지 딱 한 편의 브로흐만 더 읽어보겠다고 결심을 해서였는데, 그건 또 생각외로 편안하게 읽었으며 어떤 내용인지도 훤합니다. 이 책 <현혹>이 <베르길리우스...> 정도만 된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선뜻 사서 읽겠는데, 이 책도 독자 서평 하나 올라오지 않네요. 알라딘 고수님들의 훈수가 딱 필요한 시기입니다. 아무쪼록 도움의 말씀 한 마디 꽝! 올려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만서도.....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크엄마 2019-12-31 0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베르길리우스보다 현혹이 더 잘 읽혔습니다. 물론 장황한 서술이 없지 않지만 훨씬 드라마적 요소가 많아요. ^^

Falstaff 2019-12-31 08:57   좋아요 0 | URL
아, 그렇습니까. 얼른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답글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smellslikeyou 2020-01-06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슈틸러 생각보단 난해하지 않고 볼 만해요.

Falstaff 2020-01-21 17:54   좋아요 0 | URL
앗,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얼른 사서 읽어야겠네요. ^^ 복 받으실 겁니다!!
 
감상 소설
양선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열 개의 단편소설을 실은 단편선. 2014년부터 2017년에 걸쳐 각종 잡지에 실린 작품들을 뽑은 책인데, 작가가 1990년생이니 만 24세부터 27세까지, 가장 혈기왕성하고 의욕적이며 반면에 일생 중 가장 미친 듯하면서도 아직 설익은 상태일 때 썼을 것이다. ‘설익다’는 것은 욕이 아니다. 그만큼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고, 사실 또 남자들이 철이 늦게 드는 편이니.
 양선형. 이 작가의 이름은 기억해두어야겠다. 왜 젊고 젊은 시절에 이런 소설방식을 택해 글을 쓰게 됐을까. 열 편의 작품이 모두 뇌 안에서의 화학작용에 의존하여 쓴 것처럼 보인다. 그래 하나도 빠짐없이, 작품을 이해하고 말고는 다음으로 하고, 읽어가기가 쉽지 않다. 첫 번째 실린 <해변생활자>는 이이의 데뷔작으로 2014년 『문장웹진』에 실렸다고 한다. 그의 나이 24세 때. 주인공은 해변에서 금속탐지기를 백사장에 꽂아 동전이나 시계, 귀금속 등을 찾아 챙기는 회사의 직원이며, 두 번째 작품 <스나크 사냥>은 ‘시설’의 내부에 살고 있는 날짐승과 길짐승을 총칭해 부르는 ‘스나크’들을 사냥해 와 햄버거 등의 패치로 팔아넘기는 것처럼 보이는 스나크 사냥꾼이다. 그런데 진짜로 읽어보면 이들이 정말 동전을 찾고 있거나 스나크를 사냥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그저 작가의 허황한 상상 속의 일인지 독자의 뇌가 마구 헝클어져버리고 마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이런 낯선 글쓰기를 읽는 행위는 첫 작품에서 경보가 울리고, 두 번째 작품에서는 경종소리가 만발한 가운데, 젊은 작가 특유의 아직 세공되지 않은 거칠고 비위생적인 표현이 적나라해서 더 이상은 읽어주지를 못하겠다 싶은 위기상황을 맞다가, 세 번째 단편 <생활과 L의 유령>에 오면 그런 건 작가의 작품에서만 읽을 수 있는 특징으로 인정하면서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단계로 접어든다.
 다시 고개를 드는 의문. 왜 이런 방식으로 소설을 쓰게 됐을까. 지방 대도시 출신의 1990년생이면, 적어도 열 살부터 이들, 특히 남자 아이들의 삶은 컴퓨터/인터넷 게임이란 큰 틀 안에서 이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형화, 디지털 화한 드라이한 성장과정을 거쳤을 것이고, 자연보다는 인공, 직접 체험보다는 허구적이고 폭력적인 상상 체험을 경험했으리라. 그리하여 이들에게는 “비밀은 언제나 사실을 압도”하고, “서술敍述은 자신의 내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확신이란 늘 현상보다 늦게 찾아오는 법”이 된다. 책 전반에 걸쳐 특히 ‘서술’에 관해 작가의 초점이 맞춰지는 일이 많다. 위에 인용한 “서술은 자신의 내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읽으며 나는 상당히 정확한 포착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이제까지의 거의 모든 작가가 주장해왔던 것(서술이 자신의 내면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면 서술을 하는 작가의 실력을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문장일 수도 있으나, 예를 들어 표정이 없는 명함판 사진을 보고 해당인물에 대하여 아무리 현미경적 서술을 시도해봤자 인물이 사진을 찍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기에 나는 양선형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누구나의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이없는 환상이나 허무맹랑한 상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을 작품의 소재로 쓰지 말라는 법도 없다. 오직 상상, 공상, 망상 속에서만 잔혹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해 까마귀가 눈알까지 파먹은 다음인데도 다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몸으로 등장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그걸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뭐 물론 당연히 엽기이긴 하다. 게다가 양선형의 작품 몇 개는 묘사가 위생적으로 말해 더럽거나, 잔혹한 화면이 떠올라 팍 책을 덮을 생각까지 하게 만들기까지 하니 엽기는 엽기고,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것처럼 마음 약한 나는 이런 거 싫어해서 읽기가 퍽 곤란했다.
 작품들을 읽어나가면서 조금 걱정이 들었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았거나, 경험은 했으되 그것을 확대 변주하며 오직 뇌 안에서 새로이 담론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도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작품 속에 생활이 들어있지 않은 상태로 작가로서의 생명은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까가 그랬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 2017년 작품 둘, <감상 소설>과 <현상 소설>에 접어들면 당연히 정상적 삶을 노래하지는 않지만 작품의 틀은 상당히 보통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감상 소설>에서는 보위부에 의하여 B급 내란 음모 혐의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퇴락한 교도소에서 출감한 정치범, <현상 소설>에서는 퇴락한 바닷가 펜션에 놀러와 하룻밤 만족스러운 사랑을 나눈 젊은 여자와 남자. 물론 마지막까지도 양선형은 사람, 등장인물들이 진짜로 행위한 내용이 아니라 등장인물 또는 작가의 머릿속에서 만발하게 피어난 상상/환상/환각 속 행위가 주된 내용이긴 하지만. 이렇게 작가는 조금씩 변해가리라. 그리하여 언젠가는 지금보다 훨씬 세련된 한 장르를 만들어내 이이를 추종하는 한 무리의 후배들이 생겨날지 누가 알리. 언젠가는. 어쩌면.
 작가의 나이 이제 서른. 앞으로 무궁한 가능성을 가졌다는 거 하나로도 정말 질투할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걸 작가 본인은 알고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들은 어디로 갔나
서영은 지음 / 해냄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오래 전 이이가 쓴 단편 <먼 그대>를 참 좋게 읽어서 늘 기억하고 있던 작가. 그러다 놀라운 뉴스를 읽게 되는데, 그게 1987년이란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두 번째 결혼을 해 부부가 된 작가 커플 김동리-손소희.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은 바로 그해, 아내를 따라 죽지 못한 김동리가 난데없이 서영은과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탈상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안방에 다른 여인을 들였다는 소식. 당시에 말도 많았다. 이 사건의 주인공 서영은이 사실상 과부가 된 1990년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편소설을 한 권 썼으니 바로 <꽃들은 어디로 갔나>다. 김동리의 사망연도는 1995년. 그가 뇌졸중으로 고목처럼 쓰러진 해가 1990년이라는 뜻.
 그러나 독자들은 조심해야 하리라. 이 글은 엄연히 소설이고, 소설이란 픽션, 즉 거짓말을 다루는 장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작가 스스로도 화자의 이름을 강호순이라고 했고, 자신을 세 번째 아내로 선택하는 서른 살 연상의 남편을 ‘박선생’, 박선생의 전처를 ‘방선생’이라 칭하여 혹시 있을 수 있을 법한 시비거리를 피하고자 했으니, 독자도 이 책의 등장인물을 당시 작가의 직접적 주변인물이라고 구태여 특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
 책은, 재미없다.
 김동리라고 읽는 박선생과 서영은이라고 읽는 강호순의 사랑이 나하고 순영이의 사랑보다 더 고귀하고 감동적일 이유가 하나도 없으며, 더 깊고 애잔할 이유 역시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지저분할 건더기도 없다. 사랑을 하는 모든 이는 늘 쓸쓸하고, 아프고, 기다려야 하고, 질투에 불타고,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부셔버리고 싶고, 아무 할 일이 없어도 옆에 있었으면 싶고, 피부와 피부를 조금이라도 가까이 대고 싶고, 게다가 돈도 들고 심지어 상대를 괴롭히기도 한다. 게다가 ‘노인’이라 칭하는 박선생과 강호순(하필 주인공 이름으로 2006년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의 것을 딴 건 웬 심사였을까?)의 사이는 스무 해가 넘어 이어온 불륜의 관계이고 이들의 관계를 아내 ‘방선생’마저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전제가 깔리니, 다시 말하지만 나하고 순영이와의 사랑보다 고상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예술의 힘이란 이런 것조차 아름답게 채색을 하여 영롱한 빛깔을 내게 만들어, 영식이와 순영이의 사랑은 차마 따라갈 수조차 없는 유일한 사랑을 만드는 것인데,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면, 세상의 모든 사랑이라는 난장판이야말로 제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는 거 아냐? 마치 모든 불행한 가정의 모습이 제각각인 것처럼.
 이상한 커플이다. 나는 절대로 도덕가가 아니다. 서른 살 연상의 유부남과 벌이는 엽색행각. 엽색행각이라면 작가의 팬들은 기겁을 하겠지만, 나도 서영은을 좋아하는 독자일뿐더러, 엽색행각을 벌이는 당사자들의 마음에 오롯하게 담겨있는 사랑의 진실이 반대편 진영, 예컨대 박선생의 두 번째 아내인 방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엽색행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잖은가. 오히려 남편의 불륜상대가 누군지도 아는데 첫 번째 아내였던 사람이 방선생한테 그랬다 하듯이 강호순이한테 냅다 달려가서 이마빡에 크림통을 던져 피를 철철 흐르게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 이런 엽색행각을 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니까. 살아가던 어느 날 아내보다, 남편보다 더 불같은 사랑의 대상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겠지. 물론 그런 상대는 평생 안 만나거나 못 만나느니 못하지만 말씀이다. 그런데 적어도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배우자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응분의 보상을 한 후에 깨끗하고 신속하게 혼인의 종결을 도모해야지, 혼인은 혼인으로 지속시키고, 할 짓은 저쪽 집에 가서 다 하면 ‘Doing it’에서 소외된 배우자는 도대체 어쩌라는 말이냐고. 책의 주인공인 노인 박선생의 경우에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혹시 이 노랑이 영감탱이가 이혼할 때 줘야 할 위자료가 아까워서 그냥 사는 거 아닌가, 매우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신기한 건, 오래된 연인 혹은 오래 한 연인들의 경우 수십 번 이별을 상상하고, 실행해보기도 하는 게 인지상정이며, 이 책에서도 비련의 여주인공 강호순 역시 결혼 후가 아니라 불륜 시절에 박선생을 떠나볼까 싶어서 짐을 싸들고 속초, 강릉 등지로 한 삼박사일 정도 돌아다니다 돌아온 적이 있단다. 다시 서울에서 만난 나이든 유부남 박선생은 강양의 입을 통해 이별을 해볼까 해 잠깐의 여행을 떠났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주먹으로 무참하게 폭행을 가해 강호순의 코피가 터지고 눈이 붓고(안와골절?) 뭐 이런 행악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도 굳이 쏟아지는 폭행을, 성적인 측면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이이가 나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하면서 받아들인 듯한 서술이 분명히 나오는 걸 보고, 아이고 하느님, 천주님, 예수님(작가가 가톨릭 신자라니까), 세상에 이런 우둔배기가 아직도 있었나이다, 싶었다. 책 뒤에 붙은 하성란의 감상평에선 한 술 더 떠, “코에서 코피가 흘렀다. 그런데 슬프지 않고 기뻤다. 사랑이 아니라 그것은 운명의 확인이었다.”라고 쓰고 있으니 아, 이를 어찌할꼬. 하성란, 얘는 왜 뜬금없이 등장해 이런 악수를 두는지, 참. 노인의 이 정도 행위는 편집증, 그것도 유부남의 비양심적인 편집증 혹은 소유욕과 유사한 신경정신과 증세일 뿐, 사랑은 무슨 사랑이며 운명이라면 개뿔 같은 운명이다. 그렇지 않나?
 이 책을 읽는 유일한 재미는 섬세한 감정을 지닌 작가의 우울한 신혼일기와 연애시절의 회상이 아니라 서른 살 연상의 남편과 젊은 아내가 만들어내는 자잘한 에로티시즘 말고는 없다. 저번에 읽은 오탁번의 시집 《시집보내다》에서 붓글씨로 귀거래사를 쓰고 있는 동리의 뒤에 가서 그의 허리를 얼싸 안으며 서방님, 콧소리를 내니까 동리가, 왜, 하고 싶나? 할까? 이리 물었다는 내용이 이 책에서 따온 거다.
 그냥 사는 일에다 너무 깊은 섬세함을 입혀도 그리 아름답지 않은 결과가 나오더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어쨌든 책을 읽으면 그 속에서 하나는 배운다. 이게 진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이 잠든 동안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편소설 16편이 든 소설집. <제5 도살장>, <고양이 요람>에 이어 세 번째 보니것으로 그의 단편집을 골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든 느낌은, 원서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영어를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 진즉에 영어 공부 좀 더 하지, 라는 후회. 이런 비슷한 감정들. 아마 이해하실 수 있을 듯. 이번엔 번역서를 읽으면서도 재미나 유머를 감각하는 포인트를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았는데 사실 특히 서양 소설을 번역한 단편소설의 경우는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서울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록 밴드의 싱어송 라이터로 활약하기도 하는 역자가 읽기 좋은 한국어 문장으로 다듬어서 더욱 그렇게 느꼈겠지만. 어쨌거나 오랜만에 영미 단편소설을 마치 우리나라 작가가 쓴 것처럼 즐기는 데 별 부담 없이 읽었다.
 여태 기껏 두 권의 책만 읽었지만 커트 보니것의 작품 속에는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 들어 있어서, 글쎄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작가의 착상을 독자가 쉽게 받아들이면 단박에 그의 팬이 되고, 작가와 코드가 맞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왜 보니것에 열광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행히 보니것의 아이디어가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와 앞서 두 권의 책을 무척 호감을 갖고, 간혹 경탄해가며 읽어 이번에도 그의 책을 선택했지만 누구나 다 나와 비슷할 수 없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엘베 강의 피렌체라 일컫는 드레스덴에 무차별 공습을 퍼붓던 때 피폭격의 중심지 드레스덴의 한 지하 피난처에서도 보니것은 트랄팔마도어 행성의 동물원에서 2년 동안 전시된 적이 있는 남자 배우를 캐스팅한 바 있고, 해병대 장군의 농담 비슷한 요구에 호기심이 동한 과학자의 어처구니없는 발명으로 인해 세상의 거의 모든 물체가 다 얼어버려 드디어 지구별의 멸망을 초래하는 디스토피아를 구현하기도 한다. 작가가 이런 아이디어를 채택에 글을 쓴 시절이 아마 1960년대까지일 걸? 물론 이전에도 이런 공상 과학적 소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보니것은 여기에다 절묘한 유머 코드를 섞어 독특한 잡탕밥을 만들었다는 데 그만의 특징이 있지 않을까.
 첫 번째 실린 단편 <제니>의 타이틀 롤은 원격 조정하는 인공두뇌를 가졌으며 여성의 신체와 비슷한 모습을 한 냉장고 이름이다. 과학이나 산업기술 개발에 관해 가히 천재적 재능을 지닌 연구원이 엉뚱하게도 제니와 더불어 전 미국을 누비고 다니며 영업 또는 영업 촉진을 위한 쇼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가, 결혼 후 6개월 만에 이혼한 전처가 임종의 침상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좋겠다는 소식을 전하는 이야기다. 60년대 초반에 비록 원격 조정이란 한계 안에 있지만 그래도 인공지능이란 개념을 사용해 완전한 사람과 완전한 기계가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들 사이의 삶의 가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장면. 보니것 자신이 기계공학을 전공한 적이 있어서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기도 했겠으나 단편에서는 분량의 속박 때문에 그런지 ‘불완전한 사람들’이나 ‘사랑’ 같은 노골적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물론 ‘불완전한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 중의적 표현에 의해 더욱 강조되기도 하는 건 당연하겠다. 생명보험회사에서 보험금 지급에 관한 규칙을, 가입 2년 후부터는 자살에 대하여도 지급을 하겠다는 약관을 내걸자 미국 전역에서는 아내와 자식 둘 이상을 거느린 가장들이 마치 유행병처럼 스스로 죽음의 선택을 한다는 두 번째 단편 <유행병> 같은 것이 그렇다. 미혼 남자는 결코 죽지 않고, 자식이 없는 가장 역시 죽을 생각이 없으며, 아내와 한 명의 자식이 있는 경우엔 거의 죽지 않지만, 아내와 두 명 이상의 자식을 거느린 남자 가장(시대가 1960년대이니까)은 별로 생각할 여유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거둠으로 해서 가정에 봉사해야 한다는 강박에 싸인 리얼한 블랙 유머를 터뜨리는데, 읽는 독자는 이걸 보며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정답은 쓰게 웃어야 할 것.
 이런 방식으로 열여섯 편의 단편소설이 든 책이다. 굳이 이이의 단편이 갖는 특징을 말해보라면, 마치 콩트를 읽는 것처럼 최후의 촌철살인을 도모하고 쓴 단편 같다는 것. 글쎄. 솔직한 생각은 단편에 꼭 마지막을 장식하는 안짱다리후리기 한판이 필요한 건 아닐 듯한데,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그건 독자의 선택이 아니라 작가가 결정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내용을 노출하는 것보다 미련한 짓은 없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독후감을 여기서 끝내지 못한다면 더욱 미련한 짓일 것이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단편집을 읽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오가 구별될 수 있는 작가고 책이니 선택은 스스로 하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