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은 어디로 갔나
서영은 지음 / 해냄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오래 전 이이가 쓴 단편 <먼 그대>를 참 좋게 읽어서 늘 기억하고 있던 작가. 그러다 놀라운 뉴스를 읽게 되는데, 그게 1987년이란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두 번째 결혼을 해 부부가 된 작가 커플 김동리-손소희.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은 바로 그해, 아내를 따라 죽지 못한 김동리가 난데없이 서영은과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탈상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안방에 다른 여인을 들였다는 소식. 당시에 말도 많았다. 이 사건의 주인공 서영은이 사실상 과부가 된 1990년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편소설을 한 권 썼으니 바로 <꽃들은 어디로 갔나>다. 김동리의 사망연도는 1995년. 그가 뇌졸중으로 고목처럼 쓰러진 해가 1990년이라는 뜻.
 그러나 독자들은 조심해야 하리라. 이 글은 엄연히 소설이고, 소설이란 픽션, 즉 거짓말을 다루는 장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작가 스스로도 화자의 이름을 강호순이라고 했고, 자신을 세 번째 아내로 선택하는 서른 살 연상의 남편을 ‘박선생’, 박선생의 전처를 ‘방선생’이라 칭하여 혹시 있을 수 있을 법한 시비거리를 피하고자 했으니, 독자도 이 책의 등장인물을 당시 작가의 직접적 주변인물이라고 구태여 특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
 책은, 재미없다.
 김동리라고 읽는 박선생과 서영은이라고 읽는 강호순의 사랑이 나하고 순영이의 사랑보다 더 고귀하고 감동적일 이유가 하나도 없으며, 더 깊고 애잔할 이유 역시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지저분할 건더기도 없다. 사랑을 하는 모든 이는 늘 쓸쓸하고, 아프고, 기다려야 하고, 질투에 불타고,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부셔버리고 싶고, 아무 할 일이 없어도 옆에 있었으면 싶고, 피부와 피부를 조금이라도 가까이 대고 싶고, 게다가 돈도 들고 심지어 상대를 괴롭히기도 한다. 게다가 ‘노인’이라 칭하는 박선생과 강호순(하필 주인공 이름으로 2006년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의 것을 딴 건 웬 심사였을까?)의 사이는 스무 해가 넘어 이어온 불륜의 관계이고 이들의 관계를 아내 ‘방선생’마저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전제가 깔리니, 다시 말하지만 나하고 순영이와의 사랑보다 고상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예술의 힘이란 이런 것조차 아름답게 채색을 하여 영롱한 빛깔을 내게 만들어, 영식이와 순영이의 사랑은 차마 따라갈 수조차 없는 유일한 사랑을 만드는 것인데,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면, 세상의 모든 사랑이라는 난장판이야말로 제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는 거 아냐? 마치 모든 불행한 가정의 모습이 제각각인 것처럼.
 이상한 커플이다. 나는 절대로 도덕가가 아니다. 서른 살 연상의 유부남과 벌이는 엽색행각. 엽색행각이라면 작가의 팬들은 기겁을 하겠지만, 나도 서영은을 좋아하는 독자일뿐더러, 엽색행각을 벌이는 당사자들의 마음에 오롯하게 담겨있는 사랑의 진실이 반대편 진영, 예컨대 박선생의 두 번째 아내인 방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엽색행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잖은가. 오히려 남편의 불륜상대가 누군지도 아는데 첫 번째 아내였던 사람이 방선생한테 그랬다 하듯이 강호순이한테 냅다 달려가서 이마빡에 크림통을 던져 피를 철철 흐르게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 이런 엽색행각을 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니까. 살아가던 어느 날 아내보다, 남편보다 더 불같은 사랑의 대상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겠지. 물론 그런 상대는 평생 안 만나거나 못 만나느니 못하지만 말씀이다. 그런데 적어도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배우자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응분의 보상을 한 후에 깨끗하고 신속하게 혼인의 종결을 도모해야지, 혼인은 혼인으로 지속시키고, 할 짓은 저쪽 집에 가서 다 하면 ‘Doing it’에서 소외된 배우자는 도대체 어쩌라는 말이냐고. 책의 주인공인 노인 박선생의 경우에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혹시 이 노랑이 영감탱이가 이혼할 때 줘야 할 위자료가 아까워서 그냥 사는 거 아닌가, 매우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신기한 건, 오래된 연인 혹은 오래 한 연인들의 경우 수십 번 이별을 상상하고, 실행해보기도 하는 게 인지상정이며, 이 책에서도 비련의 여주인공 강호순 역시 결혼 후가 아니라 불륜 시절에 박선생을 떠나볼까 싶어서 짐을 싸들고 속초, 강릉 등지로 한 삼박사일 정도 돌아다니다 돌아온 적이 있단다. 다시 서울에서 만난 나이든 유부남 박선생은 강양의 입을 통해 이별을 해볼까 해 잠깐의 여행을 떠났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주먹으로 무참하게 폭행을 가해 강호순의 코피가 터지고 눈이 붓고(안와골절?) 뭐 이런 행악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도 굳이 쏟아지는 폭행을, 성적인 측면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이이가 나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하면서 받아들인 듯한 서술이 분명히 나오는 걸 보고, 아이고 하느님, 천주님, 예수님(작가가 가톨릭 신자라니까), 세상에 이런 우둔배기가 아직도 있었나이다, 싶었다. 책 뒤에 붙은 하성란의 감상평에선 한 술 더 떠, “코에서 코피가 흘렀다. 그런데 슬프지 않고 기뻤다. 사랑이 아니라 그것은 운명의 확인이었다.”라고 쓰고 있으니 아, 이를 어찌할꼬. 하성란, 얘는 왜 뜬금없이 등장해 이런 악수를 두는지, 참. 노인의 이 정도 행위는 편집증, 그것도 유부남의 비양심적인 편집증 혹은 소유욕과 유사한 신경정신과 증세일 뿐, 사랑은 무슨 사랑이며 운명이라면 개뿔 같은 운명이다. 그렇지 않나?
 이 책을 읽는 유일한 재미는 섬세한 감정을 지닌 작가의 우울한 신혼일기와 연애시절의 회상이 아니라 서른 살 연상의 남편과 젊은 아내가 만들어내는 자잘한 에로티시즘 말고는 없다. 저번에 읽은 오탁번의 시집 《시집보내다》에서 붓글씨로 귀거래사를 쓰고 있는 동리의 뒤에 가서 그의 허리를 얼싸 안으며 서방님, 콧소리를 내니까 동리가, 왜, 하고 싶나? 할까? 이리 물었다는 내용이 이 책에서 따온 거다.
 그냥 사는 일에다 너무 깊은 섬세함을 입혀도 그리 아름답지 않은 결과가 나오더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어쨌든 책을 읽으면 그 속에서 하나는 배운다. 이게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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