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창비시선 385
문인수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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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생 시인이 2015년에 낸 시집이니 이 한 권으로 칠순잔치 했다 치면 되겠네. 해가 갈수록 나이든 시인들이 좋아진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거염내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으니 우리는 이런 노인들을 일컬어 노추老醜라고 한다. (왜 한글2010에 ‘거염’ 밑에 붉은 줄이 달리지? 부러워서 생기는 시기심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다. 한글2010이 우리말에 약한 모양이다) 시인들? 그들이라고 다를까. 같은 사람인데. 그렇지만 이들은 평생 우리말을 다듬어 자기 생각을 펼치며 살아온 사람들이라 말, 특히 그걸 문자로 기록해놓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충분히 알고 있어서 적어도 자신의 ‘시’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면 사물이나 사람, 사건을 바라보는 눈길이 그렇게도 부드러워진다. 작은 일에 고마워하고, 감격하고, 옛일을 회상하고, 그 작은 일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미소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이런 시들은 아무리 읽어도 물리지 않는다. 시집을 냈을 때가 만 70세면 이제 문인수는 노인이다. 노인의 시. 진짜 시인은 스무 살 때까지 끼적인 낙서를 찢어버리고 상아 장사를 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다고? 진짜 시인은 상아 장사와 무기밀매를 하고 또 하고, 하다가 또 하다가 진절머리가 나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 마루 밑 섬돌 아래 핀 잡초를 보고 자붓하게 웃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시집의 표제,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라는 건 무슨 뜻일까. 표제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오늘도 내뺀다.” 시인은 오랫동안 대구의 동부시외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살았는데 딱히 갈 곳도 없는 채로 동네에서만 살았던 터라 동네라면 골목골목 모르는 곳이 없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문득 “눈에 집히는 대로 아무 행선지를 골라” 버스에 올라탄다. 왜? 쉽다. “아무 데나 가보려고.” 강릉까지 가려고 강릉 가는 차표를 끊고는 훨씬 못 미쳐 묵호에서 내리기도 하고, 근데 묵호가 어딘 줄 아셔? 요즘엔 동해시에 편입되어 묵호동이란 지명을 갖고 있을 뿐이지만 예전에 ‘묵호’라면 큰 항구였다, 울진 가려다가 변덕이 나서 울산 방어진 가는 버스를 타기도 하고 이리저리 막무가내로 돌아다녔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집을 다 읽어보면 이이의 발품은 경상도 해변지역은 물론이고 전국각지, 전라남도 해변까지 국토 전반을 망라하는데, 그래서 표제이자 시의 제목인 ‘이곳’은 자신이 터를 잡고 사는 지역쯤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라는 말은 시인이 현재 이동 중, 혹은 다른 곳에 잠깐 발을 멈춘 상태 정도라고 해석이 된다. 그래 집을 나서 먼 타관에 홀로 있으면 나를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낯선 일별, 선의의 일별들도 빽빽한 것이 단박에 눈이 들어오고 그래서, “나랑 무관해서 편하다.”
 얼마나 좋아. 언제부터 시가 고독과 고통과 죽음과 우울의 늪지대에서 허덕였기에 수많은 시인들이 농도 짙은 절망의 방사능을 가뜩이나 우울한 세상에다 방사하고 있었느냔 말이지. 그런 시들을 읽다가 이렇게 문득 길을 나서서 나하고는 관계없는 사람들 덕택에 편하다고 하는 시를 읽으면 괜히 내 마음까지 편해진다. 게다가 문인수의 시에서는 절대 경박하지 않은 웃음 코드까지 곳곳에 섞여 있어서 여차하면 지뢰 밟듯이 펑펑 터질 거 같지? 그 정도는 아니고 시를 읽다가 가볍게 픽, 웃게 만들어준다. 참 좋다. 뭐든지 과하지 않은 자잘한 즐거움을 주는 시. 비록 뇌리에, 아니면 가슴에 비수처럼 팍 꽂히는 시 한 수가 없다 해도 그게 대수인가. 시 말고도 지금 세상엔 팍팍 꽂히는 날카로움이 너무 많아 몸 사리느라 뼈마디가 녹작지근해마지 않는데 말이지. 예를 들어 <뻰찌>라는 시를 보면, 뻰찌라고 함은 시인의 고향친구 여중환 선생을 말하는 바, 일찍이 전기, 전자공을 다 합해 전공電工이라 일컫는데, 인생동안 뻰찌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왼쪽으로 돌리길 수백만 차례라 손아귀 힘이 가히 장사였던 모양이다. 그러다 어느 날 사기꾼한테 뻰찌가 물려버려 탈탈 탈린 빈손이 돼버렸다지? 이 친구가 오래 전 시인의 어머니 혼자 사는 집에 한사코, 한사코, 진짜 한사코 무료로 전기공사를 해주어 시인이 “고맙다고 손을 내밀었을 때, 그가 덥석 마주 잡았을 때, 아팠다. 손가락이 몽땅 분필 동강 나듯 몹시 아팠다. 그것은 내 불효를 잡죈, 악문 것이었을까. 나는 그때 / '아프다! 씨발놈아 ―'" 했던 거 같단다. 그리고 곧바로 뭐라고 노래하느냐 하면, "뻰찌는 요새 뭘 잡아먹나."
 시인의 나이 70에 나온 시집이니, 시는 60대 후반에 썼겠다. 이 가운데 어떤 시가 있느냐 하면, 조묵단 여사가 시인의 어머니 존함인 모양이다.




 조묵단전(傳)
 나비를 업다



 나 혼자 산소엘 와 넙죽 엎드리는데
 잔디를 짚는 손등에 웬 보랏빛 알락나비 한 마리 날아와 살짝 붙는다. 금세
 날아간다. 어,

 어머니?

 ……

 다만 저 한잎 우화, 저리 사뿐 펴내느라 그렇듯
 한평생 나부대며 고단하게 사셨나.

 절을 다 마치고 한참 동안 앉아 사방 기웃기웃 둘러보는데, 없다. 산을 내려오는데
 참, 너무 가벼워서 무겁다. 등에,
 나비 자국이 싹 트며 아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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