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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발명가
최우근 지음 / 북극곰 / 2013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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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생 최우근은 연세대 철학과를 다니면서 연대 문과대 연극반 활동으로 연극과 인연을 맺었다고 책 속의 작가 소개에 쓰여 있다. 졸업 후 MBC <경찰청 사람들>을 시작으로 방송작가 생활을 했는데, 내가 제목을 들어본 작품만 들어도 <성공시대>, <파랑새는 있다> 정도. 이외 많은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강력반> 같은 것도 썼다고. 방송작가만 20년 하다가 어떻게 기회가 닿아 다시 연극 무대로 눈을 돌려 처음 써본 희곡이 2008년 5월에 초연한 <이웃집 발명가>였단다. 무대극을 쓰는 것이 꿈이었다는데 그러면 이제 꿈을 이룬 셈이다.
방송작가 생활 20년이 눈에 띈다. 그러니 말이 첫 작품이지 비록 무대극은 아닐지언정 인물의 동선과 대화 표현 같은 것에는 통달한 수준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웃집 발명가>를 관람한 한국연극연출가협회 회장이자 동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인 김성노는 “기발하고 재미있고 세련된 작품”이어서 이것을 쓴 외국 극작가가 누구인지 궁금했다고 “추천사”에서 밝혔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 극장 밖에서 최우근을 만나 “이 작품이 원래 외국 작품인가요?”라고 물었다나? 이렇게 찬탄과 감동으로 격려사를 쓰는데, 이이는 약과다. 제일 허겁스럽게 놀란 추천사는 건국대학 겸임교수이자 연기 코치라는 이동주의 것이다.
“오랫동안 셰익스피어 때문에 영국을 부러워했다. 이제부터 세계인들이 한국을 부러워할 것이다. 한국에 최우근 작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최우근이 어떤 작가이기에 셰익스피어 귀싸대기를 때릴 수 있을 지 궁금하다. 이런 궁금증은 독자를 너무 큰 기대를 품고 책장을 넘기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이게 극작가에게 좋은 영향을 줄지, 그렇지 않은지, 만일 그렇지 않을 것 같다면 추천사를 왜 본문 앞에다 배치했는지, 조금 궁금하다. 하여튼 나도 부푼 기대감을 안고 문제의 <이웃집 발명가>의 첫 장을 넘겼다.
이 책 《이웃집 발명가》는 네 편의 희곡을 실은 희곡집이다. 네 편 다 코미디. 마음에 든다. 진지한 비극을 포함하지 않으면 진정한 희극이 될 수 없는 법. 자꾸 기대치가 위험 게이지에 접근한다. 이 가운데 표제작이자 작가의 데뷔작인 <이웃집 발명가>를 소개한다.
등장인물은 발명가 공동식 박사, 한 동네 사는 미혼의 교사 로즈밀러, 그리고 공동식 박사의 다양한 과학적 처치에 의해 사람의 말을 하고 알아들을 수 있으며 지능 역시 사람 수준으로 발달했지만 공을 보면 달려가 물어오고 싶은 본능까지 없애지 못한 애완견 한 마리. 이렇게 셋이다.
공동식 박사는 한 마디로 천재다. 이이가 인류 최초로 발명한 건 책 속에 나오는 타임머신이 아니라 진짜 타임머신인데 팔뚝시계처럼 팔목에 차고 운전할 수 있는 콤팩트 형이다. 통나무를 투명하게 만들어 그 안에 설치해 보이지 않고 유지 경비도 들지 않는 생화학적 경보장치, 흔히 공중부양 장치라고 일컫는 ‘반중력제어기’, 머리카락 하나만 있어도 반경 5백킬로 내에 있는 생물체를 찾아낼 수 있는 DNA 추적기, 기계 안에 뭐든지 집어넣고 작동시키면 ‘뭐든지’를 분자상태로 바꾸어 사라지게 하는 물질소멸기, 반대로 공기 중 분자를 추출하여 원하는 물체를 만들어내는 물질발생기.
물질 발생기가 모든 물체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삼선짬뽕이 먹고 싶다고 삼선짬뽕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삼선짬뽕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 양송이, 청경채, 죽순, 말린 해삼, 냉동새우, 오징어, 죽순, 양파, 생강, 마늘, 고추기름, 대파 기타 등등을 딱 그것과 같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제공한다. 굳이 삼선짬뽕을 예로 든 이유는 두번째 작품으로 실린 <판다 바이러스>에서 판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자기 먹을 삼선짬뽕 두 그릇을 주문하는데 특별히 삼선짬뽕에서 해삼, 새우, 오징어, 양파, 청경채, 양송이… 심지어 면까지 빼고 달라는 장면이 나온다. 판다 바이러스에 걸려 판다로 몸이 바뀌었거나 바뀌는 도중에 있는 사람은 삼선짬뽕에서 오직 죽순만 먹을 수 있어서. 그럼 눈치 팍 채셨지? <이웃집 발명가>에서는 사람만 한 개dog 블랙이 등장하고, 다른 작품에선 판다로 변신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거. 우린 이런 현상을 읽으면 언제나 카프카의 그레고리 잠자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발명가는 자기가 만든 것이 후세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도 자기가 개발한 원자폭탄이 정말로 사람 사는 도시에 떨어져 숱한 목숨을 해칠 줄은 몰랐다고 하니까. 위에 말한 발명가의 작품 속에서도 물질소멸기를 이용하면 아무런 증거를 남기지 않고 살인 등의 완벽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발명가는 그저 한 현상을 창조한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족속이다. 이렇게 최우근은 주장한다.
이 동네 발명가 공동식 박사는 그러나 자기가 얼마나 천재인지, 얼마나 위대한 것을 발명했는지 사람들이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하나를 만들 때마다 동네사람들 한테 일일이 전화를 해 언제 신제품 발표를 할 터이니 일차 왕림하시어 자리를 빛내 달라고 초청한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처음엔 동네사람들이 기대에 차서 구경하러 왔다가 별 괴상망측한 기계만 들이대는 바람에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동네 학교에 새로 발령받아 로즈마리라는 선생이 전입신고를 해서, 처음이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초청 전화까지 했는데 안 가보면 실례인 것도 같고 해서 발명가의 집을 방문하면서 드라마의 막이 오른다.
이번에 발명한 장치는? 어둠발생기. 발명가의 작업실에는 커튼을 달지 않은 커다란 창문을 통해 한낮의 햇빛이 찬란하게 들어오고 있다. 동네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방문한 로즈마리 혼자 작업실에 있으니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 그리고 개 한 마리. 먼저 방문해주신 것에 심심한 감사를 표한 발명가는 곧이어 장치를 가동시켜 단번에 어둠이 작업실을 완벽하게 덮게 만든다. 갑자기 사물이 보이지 않게 깜깜해지자, 젊은 여성 로즈마리는 당연히 두려움에 휩싸였고, 나중에 알게 되지만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발명가, 우리의 공동식 박사는 비명에 잠깐 중심을 잃어 허우적 대다가 아주 잠깐 로즈마리의 몸에 손끝이 조금 스치기는 했다. 곰탕집 주인의 손이 손님 엉덩이를 스친 것만큼? 그건 모르겠고 하여간 조금 닿기는 했다고 자기 개 블랙에게 고백한다.
오직 발명 생각만 머리에 가득 찬 박사가 얼른 기계 작동을 멈추어 다시 작업실이 환해지자 당연히 로즈마리는 어둠 속의 치한으로 박사를 몰아붙였고, 박사가 적극적으로 변명을 해 그럴 의도가 없었음을 설득한 후, 이제 로즈마리는 박사를 들들 볶기 시작한다. 이 어둠발생기는 백주 대낮을 활보하는 치한들을 위한 기계라고. 그러다 이런 주장이 발전해, “발명가들은 선량한 시민들의 인생에 보탬이 될만한 발명품을 만들어낼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p.47) 사람 살이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어둠발생기 가지고 도대체 인류복지 증진을 위해 뭘 할 수 있겠느냐고.
발명가의 철학과 완전히 다른 로즈마리의 생각. 이들이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각종 말도 안 되는 대사를 하는 것이 극을 코미디로 만드는 과정이다. 로즈마리는 말로 하다가 그걸로 성이 차지 않아 고이 간직하고 있고 가끔이지만 잘 사용하고 있는 장치들을 하나하나 물질소멸기에 집어 던지고 만다. 손목 착용 타임머신을 시작으로 위에 소개한 거의 모든 장치들.
이렇게 갈등은 절정을 향해 뻗어가 급기야 개 같지 않은 개, 블랙의 두뇌를 원위치 시켜 보통 개다운 행복한 삶을 살게 하라고 요구한다. 이 말을 들은 블랙, 다시 진짜 개로 돌아가고 싶을까? 눈치를 보니 강단이 세지 않고 오직 발명에만 신경을 집중해 허약하기 그지없는 공동식 박사가 로즈마리의 강요를 이기지 못해 정말 자기를 진짜 개로 만들 거 같아서 그 길로 박사의 집에서 내뺀다. 이후 어떻게 됐을까? 그건 가르쳐드릴 수 없다. 희극이란 걸 감안하면 대강 계산이 나올 것이니.
재미있다. 그렇다고 셰익스피어의 귀싸대기를 올려 부칠 정도라고 하는 건 오버 중에서도 크게 오버한 거다. 나머지 세 작품도 읽기에 괜찮다. 대인지뢰를 밟아, 발을 떼는 순간 지뢰가 폭발해 죽을 처지에 놓인 남자의 상태로 현대인의 삶을 비틀어버린 <거기에 있는 남자>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내 취향에 대사가 과하게 많다. 정막과 고요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을 선호하는 나는 아무리 희극이라도 너무 번다스러워 마음에 좀 덜 들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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