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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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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의 칠레. 드디어 피노체트는 자신의 집권연장 여부의 찬반에 관한 국민투표를 시행하겠다고 꼬리를 내린다. 15년간의 통치 동안 숱한 반대자들을 고문 학살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재자들이 그러했듯 그동안 열광적인 지지자들도 무수하게 만들어내 국민투표에서 피노체트의 퇴진은 겨우 54%의 찬성에 불과했지만 어찌됐든 피노체트 독재가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러나 조용히 막 뒤로 사라질 인간이 아니었다. 피노체트는 1998년까지 군통수권자의 권한을 유지하고, 종신 상원의원으로 면책권을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이걸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행정부와 입법부보다 더 권한이 큰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존속시키고 상원의원 47명 가운데 9명을 자신이 지명할 수 있었으며, 70년대 쿠데타 당시 저지른 학살과 고문에 대한 사면법을 제정해 자신과 추종자들에 대해 형사상 기소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1980년대 들어 시민들이 목숨을 걸어가며 이룩한 민주화는 결국 피노체트의 손바닥 위에서 근두운을 타고 세상 끝까지 날아간 원숭이 한 마리의 노력에 불과했다.
1989년 말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기독민주당의 파트리시오 아일윈도 군부독재 시절에 있었던 각종, 각색의 인권탄압 사례를 조사하여 발표했을 뿐, 여전히 남아 있는 군부의 불법적 폭력행위에 관해서는 손을 쓸 수 없었다. 여전히 칠레는 피노체트의 군벌 자식들에 의하여 운영되는 거대 거짓 국가였으며, 이들은 당시 칠레를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행복한 국민으로 치장해 발표하는 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인민은 생각보다 우둔한 법. 많은 사람은 정부 또는 권력기관의 헛소리를 헛소리로 알아들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서 사는 줄 알았다.
작품은 3천킬로미터의 해안선을 가진 칠레의 남부, 파타고니아 아이센 협만에서 시작한다. 칠레 저 위쪽, 산티아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별로 관심 없이 남극을 면한 추운 산악지역에서 가축 절도로 대표하는 지역 범죄 수사에 몰두하고 있는 마푸체족 출신의 시골형사가 주인공이다.
권력이나 높은 학력을 가지고 있거나, 돈이 많은 하이 클래스 사람들이 아니라, 쇠똥이 범벅이 된 가죽부츠를 신고 다니며, 짐승처럼 유별난 후각을 지닌 이 형사처럼 그저 보통 사는 사람 가운데 조금 유별난 이웃을 세풀베다는 즐거이 주인공으로 삼아 작품을 쓴다. 우리 이웃 같지만 아주 단단한 사람. 이 마푸체족 시골 형사가 그렇다. 170 정도의 키에 옹골찬 옹이 같이 단단한 남자. 형제 가운데 1번. 이이의 아버지가 1번에게 붙여준 이름이 조지 워싱턴. 2번은 토마스 제퍼슨. 그래서 주인공은 시골형사 조지 워싱턴 카우카만이다.
카우카만은 지금 가축 절도사건의 범인을 잡으러 가는 것이 이 파나고니아 지방에서의 마지막 활동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애마 팜페로를 타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깊숙한 골짜기의 건초 저장소에 접근했다. 탄알 열네 발이 장전된 레임턴 엽총을 손에 묵직하게 든 형사는 하늘을 향해 먼저 몇 발을 발사하고 힘차게 외쳤다.
“모두 손은 머리 뒤로 얹어!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엉덩이를 날려 버리겠다.”
다 합해 세 명. 두 명은 카우카만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기도 하고, 타고 도망할 말에 안장도 얹지 않은 상태라 고분고분했지만, 한 명이 문제였다. 시골이라도 군부의 막강한 실력자의 친척 끄나풀이 없는 곳이 별로 없다. 파타고니아도 마찬가지라서 산티아고에 사는 칸테라스 장군의 친아들이 이 악당 도둑들을 끌고 가축을 훔쳐냈던 거였다. 키가 크고 야위었지만 꽤 고급스러운 판초를 어깨에 두른 남자. 이 남자가 도둑은 아니다. 결코 비루하게 훔치는 일까지 하지는 않으니까. 그가 판초를 어깨 위로 젖히자 옆구리에 우지 기관총이 보였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러나 남자가 기관총의 총구를 시골형사 쪽으로 돌리기도 전에 형사는 땅에 엎드리면서 레밍턴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남자의 엉덩이에 제대로 박혀 아마도 엉덩이 근육의 절반쯤 날려 버렸을 듯하다.
죽지 않은 남자가 자빠져 내려다보는 카우카만 형사에게 이들 득득 갈며 한 말씀 쾅.
“네 놈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네놈이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맹세하마.”
기관총을 들이대며 위협한 범죄자의 엉덩이를 향해 총을 발사한 시골 형사. 경찰서는 난리가 났다. 다음날 신문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경찰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시민 마누엘 칸테라스가 둔부에 탄피 열네 발을 맞아 크게 다쳤고 오른쪽 엉덩이의 70퍼센트가 떨어져나갔다….”
수사 서류를 포함한 모든 기록에는 “젊은이가 트레스 몬테라스 목장에서 홀스타인 젖소들을 훔쳐 달아난 질 나쁜 가축 도둑들을 지휘했다는 대목은 빠져 있었다. 그리고 우지 기관단총을 우리에게 갈기려 했다는 대목도 빠져 있었다.”고 항변했지만 이제 시골 형사한테 남은 건, ①경찰복을 벗고 초야에 묻혀 칸테라스가 보낸 암살범을 기다리는 것, ②과도한 수사업무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잠깐 헤까닥한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핑계대고 다른 곳으로 전출해 계속 근무하는 것. 두 가지 선택만 남았다.
그리하여 조지 워싱턴 카우카만 형사는 평생 가고 싶지 않았던 부패와 더러움과 대기오염과 쓰레기 냄새가 넘실거리는 대도시 산티아고 경찰서의 성범죄 수사과에서 근무하게 된다.
카우카만이 도착한 산티아고. 칸테라스의 홈그라운드에 제대로 들어온 셈이다. 아무리 형사라도 전직 또는 현직 군인의 무리에 당할 수는 없던 시절. 산티아고에 왔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카우카만의 목숨은 말 그대로 경각에 달려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카우카만 역시 만만한 사내가 아니다. 엘리베이터 앞에 철제 책상을 놓고 그래도 공무원이니 전화와 문방구 같은 것을 비치해주지만, 카우카만이 수사할 사건이 있을 지는 모르겠다. 산티아고 경찰서 내에서도 이미 카우카만의 처리에 대한 모종의 암묵적 지시가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내 말 잘 들어. 이 빌어먹을 인디오. 우리는 마누엘 칸테라스의 친구들이고, 너를 고자로 만들 생각이야.” 근처 음식점에 가 혼자 점심을 먹고 있는데 건장한 놈들이 세 명 몰려와 하나가 맞은편에 앉아 이렇게 중얼거렸다. 카우카만은 자기가 먹던 포크를 번쩍 들더니 눈 깜짝 할 새에 그의 손등을 찍어 버리면서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손으로는 아니야”라고 응수했다. 첫날부터 피곤하게 됐다.
그러나 모두 칸테라스의 친구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파타고니아에서 마누엘의 엉덩이에 총알을 박은 것이 산티아고 신문에도 카우카만의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려, 그는 이미 군벌에 반대하는 옛 반쿠데타 진영에 스타가 되어 있었던 것. 이 가운데 시골 형사와 제일 먼저, 제일 가까워진 사람은 대학 재학 당시 연인과 함께 피노체트 일당에 잡혀 악명높은 비야 그리말디를 다녀온 여성 택시 운전자 아니타 레데스마. 그리고 아니타와 친분이 있는 여성 방송국의 모든 사람들.
마누엘 칸테라스 일당은 카우카만을 없애기 위하여 권총과 기관총을 든 세 명을 아니타의 아파트 앞에 매복을 시켰으나, 밀림에서 생존법을 완벽하게 익힌 카우카만이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과감하고 신속하게 세 명의 암살자를 제압한 카우카만은 드디어 거대한 군부 권력의 찌끄러기 잔재인 마누엘 칸테라스와 정식으로 맞짱을 뜨게 되는데….
재미있게 읽은 폭력, 수사 소설. 정치적 함의가 푹 들어 있어 절대로 가볍지 않은 경장편이랄까 중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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