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의 노래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6
판쥔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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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는데
 時不利兮騶不逝   때가 불리하여 오추마 달리지 못 하네
 騶不逝兮可奈何   오추마 달리지 않으니 이를 어찌 하나
 虞兮虞兮奈若何   우희여, 우희여, 그대 또한 어찌 할꼬.



 형양성에 고립된 유방을 죽이기는커녕 천하의 전략가 장량의 계교로 숙적과 천하양분의 조약을 맺은 초패왕 항우. 조약을 그대로 믿어 철군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레 사기가 떨어진 초나라 군대를 수십만 대군으로 포위해버린 한신. 해골을 구걸한다는(乞骸骨) 역사상 가장 기막히게 멋있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패왕 곁을 떠난 범증은 이미 이리 비참한 파국이 닥칠 줄 짐작했었겠지. 해하성에서 사랑하는 아내 우희와 마지막 잔을 나눌 때 항우는 알았다. 우희가 목을 찔러 자살을 해버릴지. 사방에서 구슬픈 초나라 노래가 퉁소소리로 들려오고, 오랜 전쟁과 포위된 전황에 사기가 무너진 초군들이 속절없이 탈영하는 걸 본 패왕은 죽기로 한신의 군대를 뚫고 오추마와 함께 오강에 도착한다. 이때 오강에 나타난 나룻배 한 척. 패왕은 “우희여, 우희여, 이를 어찌할꼬.” 노래하고, 보검을 꺼내 자신의 목을 찌른다. (패왕이 노래하는 곳은 사실 오강이 아니라 해하성이다. 그리하여 노래 제목이 해하가垓下歌이기도 하고. 이 책에서도 해하성인데 내가 그냥 이렇게 만들었다. 더 근사하잖아?)
 역사상 패왕 항우는, 천생 군인으로 스스로 총명하며, 총명한 인간들이 가끔 그렇듯, 고집불통이기도 한데다가 성격이 잔인해 남의 사정을 돌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물론 역사는 이긴 자, 살아남은 자, 기록한 자의 것이라 실제보다 훨씬 더 패왕의 성격을 비뚤어지게 그려왔을 수도 있다. 심지어 전한 시대의 역사학자 사마천조차도. 한나라의 시조가 유방이니 그의 숙적을 좋게 기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 ‘팩트’를 보더라도, 진나라 명장 장한章邯 장군 휘하 투항군사 20만 명(중국인들의 위대한 과장법!)을 생매장 했으며, 진을 멸망시킨 후 망한 나라의 황제를 살려둔 유방과 달리 마지막 황제 자영을 참형에 처했으며(유방이 이랬다며. 내 손엔 피 안 묻힌다!), 당시 중국의 막대한 재화와 인력을 쏟아 부어 지은 아방궁을 불태워버렸다. 군대의 장군으로는 그의 용맹을 당할 사람이 없어 일찍이 파부침주破釜沈舟의 전설을 만들어내기도 했으나, 독선과 너무 곧은 군인정신으로 충일한 항우는 애초부터 대륙의 통일제국을 다스릴 그릇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이 책에서 항우는 자신이 군인이고, 시인이며, 사나이라고 선언한다. 즉 극작가 판쥔은 기존의 항우와는 다른 인물을 만들고 싶었던 거다. 진나라의 명재상 (그러나 환관 조고의 모함으로 허리가 잘려 죽는 요참형을 당한) 이사李斯의 아들 이유와 일전을 앞두고 싸우기보다는 투항할 것을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유는 이를 거부한 채 항우의 칼을 잡고 자신의 가슴팍울 스스로 찔러 죽는 것으로 연출했다. (24쪽에 항우가 이유에게 하는 대사에 이런 것이 있다. “나는 자네를 괄목상대해야겠네.” 조금 의아했음. ‘괄목상대’는 항우 죽은 지 500년 쯤 지나 쓰인 진수의 <삼국지>에서 오吳나라 여몽을 보고 노숙이 한 얘기 아니었나?) 당시 초나라에서 왕을 먹고 있던 인물이 패왕 항우가 아니라 회왕懷王(진 멸망 후 ‘의제’라고 호칭하는 인플레현상 벌어짐)이란 좀 어리띨띨한 작자였던 바, 진나라 도읍 함양 공격군의 상장군에 ‘송의’란 게으른 인물을 임명했는데, 이 송의가 전쟁에서도 적극적이지 않아 이웃한 조나라 백성들이 죽어 자빠지는 광경을 보다 못한 차장次將 항우가 상장군 송의를 단칼에 베어 죽인다. 즉, 이유는 스스로 자살을 했고, 송의를 참한 것은 조나라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한 비겁한 장수를 제거했다는 해석. 그 외 패공 유방의 생명을 노린 “홍문의 연회‘, 형양성 전투 등에서 초지일관 계속되는, 정치인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정의로운 길만 가려는 태도들을 보여주고 있다.
 설명의 방식은 항우가 한 면은 검정색, 다른 면은 붉은 색 망토를 입고 출연해, 붉은 색은 살아있는 항우, 검정색은 유령 상태의 패왕으로 나와, 홍문의 연회에서 조카 항장項莊의 칼춤을 꾸짖거나, 유령이 되어 2천년이 지난 연회에서 자신이 왜 그런 태도를 취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젠 세월이 많이 흘러, 항우는 초나라 고위 군인 귀족 명가의 자손으로 명예를 존중한 엄정한 장군이었던 반면 한 여인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하는 로맨티스트 적인 성향도 곁들인 좀 까다로운 인간이었고, 유방은 작은 동네 패군 출신의 농투성이였지만 하라는 농사는 짓지 않고 동네 건달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동서이자 충직한 부하장수였던 번쾌의 직업이 개백정이었던 건 그냥 참조만 하시라) 때를 만나.... 어느 날 재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탈영을 하고 집단을 이뤘는데, 그게 커져 나중에 황제의 위까지 오른 행운아, 풍운아쯤이란 건 다 알고 있다. 판쥔은 이런 거 다 필요 없이, 상장군 혹은 패왕의 자리에 오른 “인간” 항우의 면모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한 위대했던 인물의 인간적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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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엄마 찬양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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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미쳐. 쇼핑 중에 요사의 책이 눈에 들어오면 즉각 장바구니에 넣는 이유가 다 있다. 현대 라틴 아메리카 소설가 가운데 흔한 말로 이미 전설의 반열에 오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이이만큼 다양한 주제로 작품을 쓰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이번에 읽은 <새엄마 찬양>은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의 앞 이야기로 에로티시즘과 외설 사이의 아슬아슬한 간극에서 기막히게 줄을 타고 있다. 독자에 따라서 <새엄마 찬양>을 새엄마와 열 살짜리 의붓아들 사이의 불쾌한 성적 충돌이라 읽을 수도 있겠으나, 이 작품이 <페드르와 이폴리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임을 양해해야 하리라. 초장부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혹시 이 재미있는 책 <새엄마 찬양>에 포르노라는 누명을 씌울까봐 안타깝기 때문이다.
 성적 묘사가 찬란하게 등장한다. 다른 이도 아니고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손모가지를 통해 성애묘사가 씌어졌으니 인공감미료보다 더 감칠맛 나는, 순간순간의 휘황하게 분사하는 리비도야 말 해 무엇 할까. 그런데, 혹시 이 책 읽어보신 분 있으면 뭐 하나 물어보고 싶다. 절묘한 성애 장면, 비록 아름다운 루크레시아 부인의 몸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인간이 리고베르트 씨와 그의 열 살짜리 꼬맹이 아들일지라도, 간질간질한 베드 씬을 읽으면서 성적 흥분을 느끼셨던 분들 계시면 거수. 눈이 빠져라 그 장면을 정독, 숙독하고 있으면서 지루함을 느끼셨던 분들 또한 거수 바람.
 포르노의 가장 큰 맹점은? 언젠가 이야기한 거 같은데, 죽어도 포르노는 문학, 더 크게 말해 예술의 범위에 들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지루하기 때문이다. 이 말 못 믿는 분들, 당장 스마트 폰을 열고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하시라. 그리고 30분짜리 야동을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지 확인하시라. 난 결코 못 본다. 지루해서. 똑같거나 비슷한 내용의 무한 반복을 어떻게 보겠는가. 누가 10만원 주겠다면 모르겠지만. <새엄마 찬양>은 포르노의 범주 가까이에 가지도 않는다. 전혀 지루하지 않다. 지루해? 재미있어 죽는다, 죽어.
 한국 독자 일부에게 이 책이 거부감을 주는 이유가 어린 의붓아들과 새엄마와의 육체관계를 묘사했다는 이유라고 짐작한다. 작가 자신이 10대 후반 시절에 자기 나이보다 근 두 배가량을 더 산 친척 아줌마와 결혼한 적이 있고, 그때 경험을 기반으로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라는 두 권짜리 소설책을 쓴 바도 있어서, <새엄마 찬양>에 서른 살 차이지는 계모와 양아들의 성적 관계를 다루었다고, 나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근사하고 고급스런 에로티시즘이라 여긴다. 문제의 양아들 알폰소. 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알폰소의 외모에 관한 묘사를 인용해보자.


 “알렉상드르 뒤마의 책 뒤에서 놀란 아기 예수 같은 조그만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고불거리는 금발은 헝크러져 있었고, 놀란 나머지 입은 반쯤 벌어져 희디흰 치아가 살짝 드러났다. (중략)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쁜 아이였다. 타고난 천사, 그녀의 남편이 사중 자물쇠로 단단히 잠가 숨겨놓은 우아하고 에로틱한 작품에 그려진 궁중 시동 같았다.”  (15쪽).


 이 대목에서 그림 하나 보자.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1548년에 그린 <아모르와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있는 베누스>. 책의 111쪽에 컬러로 실려 있다.

 

(오르가니스트의 눈길이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그건 책 속에 나와 있으니 직접 확인하시압.)


 그림의 제목을 근거로 생각하면, 베누스로 새엄마가 치환될 경우, 사랑의 신 아모르 또는 쿠피도, 또는 에로스가 바로 알폰소가 된다. 열 살배기 알폰소의 성격을 묘사하는 대목을 읽어보면 말 그대로 천의무봉, 아무 거리낌도 없고,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별로 관심도 없으며, 무엇보다 천진하기 이를 데 없다. 알폰소가 생각하고, 바라고, 행위 하는 건 아름다운 여자, 비단 새엄마가 아니라도 별 관계없이 여자와의 접촉으로의 사랑일 뿐이다. 그가 바로 아모르 자신이기 때문에.
 원래 날개 달린 젊은 청년 출신이었던 아모르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점점 어려져 급기야 아이의 모습으로까지 축소되었지만, 요사가 새로 만들어낸 아모르는 날개가 퇴화된 열 살짜리 소년이다. 이것이 책을 읽을 때 제일 중요하게 감안해야하는 핵심. 다분하게 아모르의 형질을 가지고 있는 알폰소는 그리하여 아버지 리고베르토 씨로 하여금 아름다운 두 번째 아내 루크레시아 부인을 쫓아버리게 만들고도, 다음 작품에서 아무 죄의식 없이 루크레시아 부인을 찾아가 다시 잃어버린 사랑을 이을 수 있게 되는 거.
 무척 재미난 작품. 길이도 짧은 게 재미까지 있어 반나절이면 완독이 가능하지만, 요사 표 성애묘사가 진저리나게 간질간질해서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읽기는 조금 부적절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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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27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사스러운 내러티브를 구사하는 요사샘의
글쓰기는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의 정치색깔에는 동의하지 않지만요.

소설의 재미 하나는 정말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자그마치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인데, 고때
만 반짝하고 신작들을 번역하지 않고 있으니
한 숨만 나올 뿐입니다.

번역 좀 해주시죠 출판사 여러분 !

Falstaff 2018-08-27 11:19   좋아요 0 | URL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얼른 번역해주세요!!
 
밤의 화학식 문예중앙시선 45
성윤석 지음 / 문예중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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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시를 읽은 연륜이 짧아, 처음 들어보는 시인이라 검색을 해봤다. 위키백과를 보면, 1966년 생으로 경남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묘지 관리 일을 하다가 1999년부터 서울에서 벤처기업을 운영하다 쫄딱 망했다고 한다. “채널 예스”에 시인 김도언이 이이를 만난 인터뷰가 있는데, 벤처 기업이 화학 실험실로 숱한 화학실험에 미쳐 있었다가, 드디어 ‘실패하는데 성공’하고 만다. 그러다 완전히 가산을 탕진한 2013년 5월, 20대 시절을 지냈으며 처가가 있는 마산으로 내려가 장인장모를 도와 마산 어시장의 잡부로 새벽 세 시부터 하루 14시간 동안 생선 나르는 고된 일과를 계속했다고 한다. 채널 예스는 사업하기 전에 신문사 기자, 시청 공보과 소속 공무원의 이력을 갖고 있다고 한 반면, 위키에선 묘지 관리를 했다는데, 모르겠다, 묘지관리가 시청 공보과 공무원의 일인지. 하여간 다양한 이력의 시인인 건 확실하다. 근데 채널 예스의 인터뷰가 너무 길고 장황해서 다 읽으려면 날을 샐 거 같아 여기까지 읽고 말았다. 시인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것도 시를 제대로, 내 식대로 맛보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핑계를 대고.
 시집은 2016년 8월에 나왔다. 시인이 만 오십 세 되는 해. 물론 시집에 실린 모든 시는 50세 전에 썼겠지만 시인이 발표하기로 결정했으며, 발표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퇴고한 시기가 그의 나이 만 50이란 얘기. 이미 한 시절엔 잘 나가는 벤처 기업에서 각종 물질을 서로 섞어 인간생활에 도움이 될, 사람살이에 도움이 되는 대신 자기한테는 떼돈을 벌게 해줄 신 물질을 발견/발명하기 위해 미쳐있었기도 했고, 정말로 신비의 연금술 공식이 완성되려는 찰라, 투자자와의 의견대립으로 거덜이 나기도 했으며, 눈물을 흩뿌리며 마산 어시장에서 막일을 하지 않을 수 없던 시절을 담았을 수밖에 없었을 터. 뭐 인생이 다 그렇지.
 내가 먼저 주목했던 건 첫 번째 시였다. 당연하지. 시집을 열자마자 나오는 시니까. 한 번 읽어보자.



 납 Pb



 단단한 네 마음일지라도
 금속피로가 오지 않는 이유는
 늘 피로한 빛을 하고 있어서 그래.
 계속되는 슬픔은 피로해지지 않아.
 등등함마저 버리고
 네가 이 세상의 중심처럼 평형의 추처럼
 떨어져 있는걸.
 어느 날 낚싯바늘을 매달고
 바닷속으로 가라앉을지라도
 숲 그늘에 드러누운 눈밭처럼
 넌 너대로 거기 있으렴.
 어느 계절엔 반짝이지 않는 게
 더 큰 빛이야.   (전문)



 여기서 ‘금속피로’라는 건, 금속재료를 구부렸다 폈다를 자주 가하면 연성延性이 점차 감소해서 결국 잘라지는(파괴되는) 상태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납. 하면 생각나는 건? 내 경우엔 ‘죽음.’ 약실에서 공이가 뇌관을 때리면 화약이 폭발하면서 조그만 납덩이를 빠른 속도로 날아가게 한다. 이 납덩이가 사람의 몸에 박히거나 몸을 관통하면 죽음에 이르는 상처를 남긴다. 총알이 무쇠로 만든 종鍾에 부딪혀 확 퍼져 표면에 들러붙은 모양을 마루야마 겐지는 “납장미”라고 서정적으로 묘사했으나, 죽음의 냄새를 짙게 내포하는 장미였다. 시에서는 ‘세상의 중심처럼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달아놓은 낚시 추를 납의 대표선수로 선발했다. 글쎄, 잘 모르겠다. 흔히 사람한테 미움 받고 멀리하고 싶게 만드는 금속인 납을 시집의 첫 번째 작품으로 올린 건, 혹시 시인이 경제적으로 거덜이 나고, 과거의 사장님이었던 등단시인이 생선 상자를 옮기는 일을 하며, 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권토중래의 뜻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마지막에 그렇게 쓰여 있지 않은가. “넌 그대로 있으렴. / 어느 계절엔 반짝이지 않는 게 / 더 큰 빛이야.”라고.
 전반적으로 시집엔 제목처럼 화학 이야기가 다수를 차지한다. 심지어 <화학적 거세>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좀 맹랑하다.



 화학적 거세



 당신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게 이 텍스트의 목적이다.

 

 시프로테론 아세테이트(향남성 호르몬제) 화학식 구조


 한 무제가 사마천에게 물었다.
 목이 잘릴래,
 돈을 낼래,
 거시기를 잘릴래?


 사마천이 대답했다.
 …… 거시기.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굴욕을 참았다.
 명예로운 죽음은, 웃기는 얘기라며.  (부분)



 사마천의 궁형은 그가 <사기 서>에 들은 명문장 “보임소경서補任小卿書”에서 참담한 심정을 직접 토로하고 있는 바, 같은 서생으로 이렇게 가볍게 노래하기는 무리가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21세기, 존재의 가벼움이야말로 이젠 시대의 특징이 되었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우리가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것 역시 앞에 인용한 <납 Pb>와 유사하다. 사업의 폭망으로 가산 탕진, 처갓집에 빌붙어 사는 처지를 빗댄 건 아닐까.
 이리 삶을 주기율표에 등장하는 원소로 이야기하는 건 참신하다. 그러나 문제는, 시인처럼 잘 나가다가 완전 폭망한 사람들의 노래가 독자들과의 공명을 이루는데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아니, 못한다는 것. 만일 이런 시를, 시인의 상황을 모르는 채 그냥 읽어도 공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지뢰가 깔려있다. 아니, 깔려있을 수 있다. 내가 뭐 시를 안다고 단정을 하겠는가. 내 생각이 그렇다는 얘기지.
 그가 경험한 극과 극의 상황에다 너무 과한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다. 근데 그게 아니라면, 너무 의도적으로 자신, 또는 인류에게 긍정적 메시지를 주려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다. 뭐라? 어림도 없는 얘기라고? 맞다. 당신 말이.
 마지막으로, 마지막 작품으로 실린 시집의 표제작을 감상하며 독후감을 끝낼까 한다.



 밤의 화학식



 밤이 온다. 밤이 어둠을 받아 온다.
 당신의 밤엔 무엇이 많은가.
 그러니 모든 이들이여, 대답하라.
 살아 있어야 한다.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겠어.  (전문)



 그림은 시인이 구상한 도식을 화가 장우희가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그림을 보면, 밤이란 개체에 탄소(C), 질소(N), 산소(O), 수소(H) 화합물이 아르곤(Ar) 환경 안에서 서로 유기적 결합을 하고 있다. 아르곤은 불활성不活性 원소로 다른 물질과 여간해 결합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탄소(C)다. 유기결합체치고 탄소가 딱 하나밖에 없는 것이, 진짜로 탄소 하나만 결합한 것인지, 아니면 일반 화학구조식처럼 탄소를 생략하고 그린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질소가 많은 이유도 모르겠고. 그런 거, 독자가 일일이 알아야할 필요는 없다. 한 마디로,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이 잠겨있는 밤이 엉망진창인 미친 지랄이란 뜻. 그래서 여기서 나가겠다는 말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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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L PENDOLO DI FOUCAULT
 by UMBERTO ECO

 

Copyright (C) 1988 Gruppo Editoriale Fabbri,
 Bompiani, Sonzogno, Etas S.p.A.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C) 1990 by The Open Books Co.

 

 <푸코의 진자> 첫 장을 넘기면 위와 같이 쓰여 있다. “Fabbri Editori"라는 회사에서 움베르토 에코가 지은 <푸코의 진자>의 판권을 사 와서, 대한민국의 ”The Open Books Co." 즉 출판사 열린책들이 한국어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1,135 쪽까지 책을 다 읽으면 역자 이윤기가 쓴 “옮긴이의 말”이 나오는데 자신이 번역한 원서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어떤 책을 번역했다는 말을 역자가 왜 하지 않는지 궁금해서 내가 읽은 이윤기의 번역서를 한 번 뒤져봤다.

 

 

 

 

 

 그리스 사람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이태리 사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와 이번에 읽은 <푸코의 진자>, 서양 책을 읽기 위한 기초체력을 쌓으려면 피할 수 없는 책, 로마 사람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그리고 유고 사람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 거참 신기하다. 고故 이 선생이 만 30세에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초빙 연구원으로 5년 세월을 보내, 이이가 영어를 잘 하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읽은 번역서 가운데 영미 문화권의 작가는 한 명도 없다. 왜 그랬을까. 확실하지 않으면서 이유를 추리하지는 말자. 고인의 이름에 누가 될지도 모르니까. 일찍이 어떤 책을 번역했다고 전혀 밝히지도 않았고, 어떤 회사에 지재권 수수료를 지불하는지 알 수 없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번과 2번, <변신 이야기> 후기에서 선생은 영어 본을 기본으로 하되 일어 본을 참고로 했다고 밝힌 바 있으니, 영어와 일어에 능통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후인 1947년생인데 일본어까지 잘 했다면 언어 습득에 관해서 남다른 수재가 있었나보다. 사실 이이가 쓴 한국어 소설도 문장이 매끄럽고 이해하기 쉬워 좋아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이가 <푸코의 진자>나 <장미의 이름>을 이태리어 원서를 보고 직역했다고 믿지는 않는다. 역자의 말을 들어보면 <장미의 이름>은 일본보다 빨리 한국에서 번역본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럼 이태리어에서 영어로, 영어에서 다시 한국어로 중역한 속도가 일본의 이태리 문학자 다니구치 이사무 교수보다 더 빨랐다는 뜻. 미국, 프랑스, 독일 이렇게 삼국에서는 에코를 전담해 번역하는 에코 전문 번역자가 있으며, 이들이 고령 등의 사유로 은퇴를 하면 후임자는 반드시 오디션을 통해 뽑는 걸 원칙으로 한단다. 에코 전문가들은 복잡하기로 악명이 높은 작품들을 번역하기 위해 수시로 원작자와 의견을 교환해가며 신중하게 번역을 해왔다고 들었다. 그런 복잡하고 지루한 번역 과정을 거쳐 나온 <장미의 이름> 영어 본을 다시 한국어판으로 번역한 이윤기의 역서가, 직역을 시도한 일본의 책보다도 빨리 나왔다면,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대략 난감하다. 왜 <장미의 이름> 타령이냐 하면, 내가 읽은 <푸코의 진자>가 비록 1995년 개정 번역한 것의 후속 판일지언정 둘이 비슷한 수준의 번역이 아니었겠는가 싶어서이다. 배달민족의 독특한 특징을 살려, 빨리빨리, 후딱 번역해 시장에 내놓았을까? 아니면 역자가 이방의 문자, 즉 영어로 번역한 문학을 이해하여 한국말로 다시 번역, 전달하는 수준이 이태리 문학 전공한 일본 교수보다 한 수 위여서 순식간에 작업을 할 수 있었을까. 원래 언어에 수재가 있는 인물인 듯하니 하는 말이다. 하여간 둘 가운데 하나일 터. 결론은 내지 않겠다. 혹시 모른다. 이태리어를 한국어로 직역했는지도(정말?).
 사실 <장미의 이름>도 그렇지만 <푸코의 진자> 역시 내용은 간단하다. 이틀 전 선배 박사 야코포 벨보의 전화를 받은 화자 나, 카소봉. 벨보는 파리의 카페 정도로 유추할 수 있는 번잡한 곳에서 전화를 했는데, 아주 급박한 상황이며 당시만 해도 첨단 기록장치인 PC를 열어보라는 말을 남기고는 비명과 함께 전화가 끊기고 만다. 벨보의 집을 찾아가 어려움 끝에 패스워드를 유추해 PC를 연 카소봉이 벨보가 사실 그동안 함께 연구해왔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 없는 내용인 비밀기사단, 연금술 등에 관한 정보, 벨보의 문학적 잡문 등을 다시 읽어보고 급박하게 파리의 국립 과학연구원에 방문해,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기록하고 있다. 제목은 프랑스 국립 과학연구원에 설치되어 있는 장치로 19세기 중반에 레옹 푸코가 지구의 자전을 증명하기 위해 만든 67미터짜리 진동 추를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슨 문제인가 하면, 이리 간단한 내용이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진짜 직업은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기호학자라서, 벨보,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디오탈레비, 그리고 화자 카소봉, 세 명과 이들의 주위에 포진한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성배를 둘러싼 기사단의 비의를 파헤치는데 온갖 현학적인 주제와 변주를 난사하고 있다는 것. 사실 스토리 라인만 따라가기 위해서는 넉넉잡고 처음부터 50쪽과 뒤에서 200쪽, 합해 250쪽만 읽어도 눈앞이 훤하게 밝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리 쉽게 읽으려면 뭐 하러 에코를 읽겠는가. 당신이 에코를 선택한 순간, 일종의 정신적 고문, 인내심 실험, 감각의 오리무중을 견디겠다는 전제조건이 들어 있지 않았겠는가.
 <푸코의 진자>에서도 에코는 얄짤없이 독자들을 미궁으로 초대한다. 게다가 독자들은 아리아드네의 실 꾸러미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냥 에코가 주장하는 것을 읽고, 기억하고, 그러다가 잊으면 다시 앞으로 넘겨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있었더라, 확인하고, 그러면서 머릿속에 쥐나고, 에잇 이따위 하나 읽으며 메모까지 한 번 해봐야 할까, 마음도 먹다가 치워버리고, 진도 안 나가는 페이지를 함부로 넘기기도 하는 득도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아니라고? 읽어보시면 안다.
 나는 지금 듣기에 따라 조금 엉뚱한 주장을 하고 싶다. 돌아간 분에겐 죄송스러운 이야기지만, <푸코의 진자>는 <장미의 이름>과 더불어 다시 번역해야 한다고. 역자 이윤기가 “역자의 말”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 “역자는 학문으로서의 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서 힘에 부쳤기 때문”에 “에코 문학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기호>, <코드>, <포스트모더니즘>, <인터텍스추얼리티(相互典據性)>, <개방성> 같은 개념을 가지고 이 소설을 해설하기에 역자의 힘은 부쳐도 많이 부”치기 때문이다. 독후감의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소설가 이윤기의 문장도 좋아한다. 그리고 원서를 읽지 못하는 일반 독자로서의 나는 또한 영어를 번역한 이윤기의 한국어 문장도 나쁘지 않게 읽는다. 그러나 스스로의 독백처럼 원작자의 뜻, 특히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에코 문학의 키워드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힘이 많이 부치는 역자의 결과물을, 참으로 아쉽게도 선뜻 인정하게 되지 않는다. 직접 읽어보면 (<장미의 이름>과 비슷하게) 무려 근 900쪽을 할애해 설명해놓은 각 기사단, 프리메이슨, 유대교 등과 기독교의 연관성, 오리엔트 문화의 영향, 흑마법, 악마주의, 연금술, 비의 등을 설명할 때 역자도 이해하기 힘든 전문용어가 마구 쏟아지기 때문에, 이윤기의 문장이 비록 쉽고 잘 읽히기는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비전문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한국말에서 좀 어렵거나 자주 쓰이지 않는 단어를 선택하는 일이 있었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혹시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는 영어 본에 의한 중역이 나와 절찬리에 팔리고 있는데도, 일본에선 그때까지 번역작업이 마무리되지 않고 있었던 거 아닌가 싶기도 했고.
 <푸코의 진자>를 읽으면 그동안 경험했던 세 편의 에코가 다 생각난다. 중세 기독교 내부에서의 이단 논쟁에서 당연히 <장미의 이름>을, 저 높은 기둥 위로 올라가 수도에 전념했던 주상柱上수도사는 <바우돌리노>를, 벨보가 자란 시골집에서 찾은 자잘한 옛 시절의 기념품에서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말씀.
 재미있는 책을 나는 고 이윤기 선생의 번역으로 읽었으나, 내 아이들은 이태리 문학을 전공한 이의 참신한 번역으로 읽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역자가 영어책을 번역한 것이라면 제일 앞에 써놓은 “Copyright (C) 1988 Gruppo Editoriale Fabbri,  Bompiani, Sonzogno, Etas S.p.A.”가 무슨 뻘짓인지 모르겠다. 영어책 번역하고도 이태리 회사 Fabbri Editori에 판매 권수에 따라 지적재산권에 의한 로열티를 지불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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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23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코의 책들은 컬렉션하면서도 절대 읽지
않는 깡다구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장미의 이름>도 다시 읽어야지 하면서도
항상 말로만입니다.

새로 나오는 책들의 물결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네요...

언급해 주신 대로, 이태리 원서에서 다시 번역
하는 데 찬성합니다. 다만 여러 방면에 다양한
지식을 갖추신 분이 해주시면 더욱 고맙겠죠.

Falstaff 2018-08-23 11:46   좋아요 0 | URL
요즘엔 이태리 문학을 전공한 분들도 많잖아요.
저도 그분들이 재번역한 책들이 나오면 다시 읽어볼 용의가 있습니다.
진짜로, 그리스 문학을 전공한 유재원이란 분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직역해서 시장에 나왔습니다. 그걸 보고 당장 보관함에 집어 넣었습니다. 올해 안에 읽을 예정입니다.
지나가는 얘긴데, 이윤기 쌤이 그랬다면서요. ^^
˝나 죽기 전엔 <그리스인 조르바> 직역하지 말아줘.˝
 
지금이 아니면 언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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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기율표>에 이어 두 번째 읽은 레비. <주기율표>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부속 화학공장에 만난 독일인과 유대인 화학자의 인연을 그린 바 있다. 프리모 레비 자신이 이태리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재원이라 주기율표에 나온 원소 기호를 따 재미있게 한 인생을 그린 매력적인 소설로 기억한다.
 그러나 레비는 소설가. 비록 이이가 45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해 나와 먹고 살기 위해 1977년까지 니스 공장에서 일을 했다하지만, 소설가인 만큼 비슷한 주제로 여러 작품을 우려먹는 건 바람직하지 않을 터. <주기율표>와 아주 다르게, 유대인이 2차 세계대전이란 격랑에서 생존하며, 심지어 항독 전쟁에 참여하는 모습을 그렸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1945년 여름에, 밀라노 난민 지원사무소에서 자원봉사를 한 친구로부터 들은 유격부대원들의 경험한 처참한 고통과, 그럼에도 존엄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당당한 모습을 소설작품으로 만들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소설을 탈고한 것이 1982년. 레비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만다. 그의 마지막 소설에서 유일하게 실존했던 인물은 오직 한 명. 작중 중간 부분에 등장하는 엑스트라 역할의 유대인 여자 비행기 조종사 ‘폴리나.’
 2차 세계대전 당시와 종전 직후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은 두 개의 정부 아래에서 일어난다. 전쟁 직전과 전쟁 중에는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에서. 전쟁직후에는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 연방에서. 모든 계급과 차별을 철폐시킨 공산주의 정권인 소비에트 연방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것은 나도 사실 근래에 알게 됐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원수들, 사랑 이야기>를 통해. 레비의 <지금이 아니면 언제?>를 보면, 20세기에 들어와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증오심이 비등점으로 치닫기 시작해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마자 동부 유럽에서는 나치의 손에 의하여, 나치의 지시에 의하여, 그리고 상당부분 유럽인들의 마음에 딱 맞는 정복 나치군의 방침에 스스로 동조하여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군 점령지에 소련군 패잔병 속에도 유대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터. 이들은 동부유럽 각지에서 모인 패잔병들과 함께 파르티잔 활동을 하거나,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유격부대로 활동을 한다. 간혹 비유대인으로 구성된 유격부대원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스탈린에 의해 유대인 수용소에 강제 입소, 굶주림과 학살의 위협 속에 절망적인 삶을 이어가게 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유격부대는 러시아 사람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유대인들로 구성한 파르티잔으로, 러시아 사람 한 명을 포함한 모두가 시오니즘에 입각해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국가를 세워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짓는 농부의 꿈을 지니고 있다고 설정되어 있다. 러시아, 폴란드, 독일 등에 살고 있던 유대인을 아쉬케나지라고 일컬으며 이디시어를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었는데(아이작 바셰비스 싱어는 작품을 심지어 작품을 이디시어로 쓰기까지 했다), 작품의 주인공들, ‘게달레’를 대장으로 하는 유격대원, 이른바 게달리스트 거의 모두가 이 아쉬케나지들이다. 이들 가운데 늙고 몸이 좋지 않아 전투에 참가할 수 없는 노인 한 명만 고향인 동쪽 시베리아로 귀향을 선택하고, (도중에 전사하는 몇 명을 제외하고)나머지 전부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1943년 7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 유대인에게 가장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 나라라고 하는 이태리의 밀라노에 도달한다. 그러니까 이 긴 여정과 그 동안 벌어진 사건들을 중심으로 520쪽이 넘는 픽션을 만들었다.
 문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예술에서 ‘아이’의 탄생은 밝은 미래를 은유한다. 이 책도 한 유대 어린 아이가 탄생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면서, 비단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국한하지 않고 전 유대인의 열린 미래를 의미하며 대단원을 맞는다. 레비는 이 작품을 통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유대인의 학살, 그것을 당하는 많고 많은 사람들의 무저항적 수동성을 반박하려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 30여 년 전 난민 지원센터에서 자원 봉사한 경험이 있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비록 소련군 패잔병의 신분이지만 유대인에 의한 항독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았을까.
 내게 첫 레비였던 <주기율표>는 발상의 신선함과, 독일인과 유대인 화학자, 두 수재를 등장시켜 독특한 재미를 주었었다. 그러나 이번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읽는 내내 조금 언짢은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수백만이 학살당한 유대인의 슬픈 과거는 충분히 위로받아야 하며, 학살의 가해자는 쉼 없이 반성해야 한다는데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유대인에 의하여 저질러진 팔레스타인에서의 원주민 핍박에는 조금도 동의할 수 없어서인가? 유대인이 과거에 그리 학살당하고, 레비의 주장대로 조직을 이루어 독일군대에 저항해 전투를 벌였으며,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해 시오니즘 국가 건설에 참여했으면, 자신들의 아픔을 반면교사로 현지인들과 더 나은 관계를, 적어도 무력에 의한 다툼으로 귀결하지는 않는 협상을 할 수는 없었을까? 20세기 중반부터 유대인, 이스라엘 국민들은 홀로코스트의 불행한 역사를, 자신들이 주변 민족을 학살할 수 있는 면허증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난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책을 읽는 이틀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화학자 출신의 소설가. 이이가 독자들이 생각하는 만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살아생전 이스라엘에 의하여 저질러진 팔레스타인에서의 원주민 탄압에 대한 작품, 아니면 적어도 반대 입장의 표명 같은 것도 하나 이상 있어야 할 텐데, 과연 있을까? 너무 야박한 발언일 수 있으나 한 마디 하자면, 아우슈비츠 생환이 어쩌면 이이한테 눈부신 훈장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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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17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의 비판은 엘리 위젤 같은 극우
유대계 작가에게 걸맞지 않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출신 프리모 레비가 인류
애를 발휘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갑자기
생겨난 유대인 국가 때문에 현지에서 겪는 고
통을 다루었다면 정말 대단한 작가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면허증 혹은 까방권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우
슈비츠 생존자로서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되살려 후세에 남긴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레비가 열차를 타고 다시
아우슈비츠를 찾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
는데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Falstaff 2018-08-17 09:28   좋아요 0 | URL
저도 레비가 팔레스타인 학살에 동조했다, 이런 의미로 쓴 건 아니고요 ^^; 주로 미국 내의 유대인처럼 홀로코스트 비즈니스에 대한 비평을 좀 했으면 훨씬 좋았을 걸, 뭐 이런 수준의 의견입니다.
레삭매냐 님이 이 독후감에 한 마디 하실 줄 알았었답니다. ^^;; 아우슈비츠 방문을 미리 레삭메냐 님 글에서 읽었거든요. 저도 시간나면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어쨌든 읽는 도중에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냥 느낀대로 쓴 거예요. 그게 독후감이니까요.

생쥐스뜨 2021-07-02 1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레비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댓글을 남깁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가 간행된 1982년 6월 이스라엘군이 PLO의 군사거점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쁘리모 레비 역시 <이스라엘의 레바논에서의 철수요구서>에 서명을 합니다. ˝우리는 우선 민주주의자인 다음에 유대인, 이탈리아인 등 그밖의 존재여야 한다.˝는 그의 발언이 서명을 하게 된 하나의 이유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친이스라엘파, 반이스라엘파 모두에게 비판을 받게 되죠..(이를 둘러싼 사정은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안전한‘ 미국에서 홀로코스트를 ‘비평‘하는 것과,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자신의 체험을 ‘기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