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과 그 형제들 1 - 야곱 이야기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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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만, 이렇게 이름만 불러 봐도 어쩐지 쉽게 읽히지 않을 듯한 독일인스러운 완고함이 뚝뚝 떨어진다. 맞다. 그나마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는 쉽게 읽혔고, 유작이자 미완성 작품인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은 또 예상 외로 희극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토마스 만, 하면 선뜻 드는 생각이 (지나치게)진지한 작가라는 것. <마의 산>. 나는 그걸 무슨 마음으로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는지 몰라. 삼중당 문고판으로 읽었는데 당시 10대 후반 특유의 기질, 세상 고민은 혼자 다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사회분위기도 그 시절엔 그래야 한다는 듯 은근히 부채질했던 것 같기도 한 “Strum und Drang” 질풍노도를 해야 할 것 같은 꼬임에 휩쓸려 그랬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쥐뿔도 모르면서. 그래도 그게 어디야, 그지?
  토마스 만은 보이는 족족 읽어치웠다. 딱 하나 빼고. 《요셉과 그 형제들》. 이 작품이 번역되어 우리글로 읽을 수 있다는 걸 안 지가 벌써 10년이 넘는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은 쉽게 손에 들 수 없었다. 일단 분량에 기가 넘어갔다. 여섯 권에 3,510쪽. 게다가 구약의 창세기를 기본으로 하는 텍스트를 전혀 기독교적인 환경을 경험해보지 못한 유물론자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 그동안 나는 이 책과는 별개로 구약성서를 순전히 호기심으로 읽어봤으며, 몇 년 후 다시 토마스 만을 검색할 때는, 맞아 이 책이 있었지, 이젠 읽어볼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며, 그리하여 《요셉과 그 형제들》의 첫 번째 <야곱 이야기>의 첫 장을 넘겼고, 넘기자마자 곧바로 고난의 행진이 시작됨을 눈치 챘다. 19년 전 서울대 독문과 교수를 하던 안삼환 선생이 독자로 하여금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게 이 책의 위대성을 언급하고, 이어 역자 장지연이 쓴 ‘옮긴이의 말’ “신화를 읽는다는 일,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본다는 일”이 이어지고 나서야 드디어 첫 번째 책 <야곱 이야기>를 시작한다.
  <야곱 이야기>도 1부가 아닌 “저승 나들이”라는 제목의 ‘서곡’이 달려 있어 저 먼 먼 시대, 하늘이 처음 열렸던 때부터 드디어 천지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다분히 작가의 사색을 통해 설명을 한다. 작가는 애초 천지창조부터 요셉의 시절까지 기독교의 신, 하느님 또는 주님을 아직 발전이 덜 된 신으로 상정한다. 그럼 서곡이나마 어떻게 펼쳐지는지 한 번 보자.
  최초의 인간, 또는 완전한 인간인 아담 카드몬이 있었다. 카드몬은 순수한 빛으로 이루어진 청년으로 인간의 원형이자 총괄개념으로 만들어진 창조물인 바, 처음부터 모든 창조를 위협하는 악에 대항해 싸울 전사로 선발된 자아다. 그러나 안타깝게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급기야 악령의 포로로 떨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신은 두 번째 사자使者를 파견하기에 이르고, 이 피조물은 최초의 인간보다 고귀한 자아를 지니게 만들었다. 세속의 육신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빛의 세계로 돌아가는 숙명의 두 번째 사자는 아직도 이 세상에 존재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최초의 인간다운 존재를 쉽게 “영혼”이라 이야기한다. 영혼은 생명은 있으되 지식이 없는 존재. 평안과 행복이 지배하는 높은 세상을 마다하고 물질에 마음이 기울어 물질과 몸을 섞어 형체를 만들고 싶어 안달을 했다. 그래 정작 형체를 얻고 보니, 즉 사람의 몸을 얻어 최초 이후의 인간이 되어보니, 쾌락을 얻고자 하는 욕구만 커지게 되어, 이 괴로워하는 영혼을 위해 신은 드디어 세상을 창조하기에 이른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면 두 번째 사자는 무엇일까. 신은 자신의 신성을 “정신”으로 만들어 세상의 인간에게 보냄으로써 영혼과 유사하나 영혼 자체는 아닌,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상태로 전환시킨다. 그 결과 이제 영혼만 떠나면 형체의 세계 역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 다분히 문학적인 발상이라서 비록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안도는 된다. 이때 ‘정신’이 두 번째 사자.
  그리하여 드디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다. 코세 사람 쿠리갈주가 바벨에서 수메르와 악카르 사람들을 다스렸을 때 자신을 사계의 왕이라 자칭하며 ‘벨-마르둑’이란 신을 섬겼단다. 벨은 히브리어로 ‘바알’, 마르둑은 ‘태양신의 송아지’라는 뜻. 이 때, “어느 남자”가 달 신, 일명 신Sin을 섬기는 ‘우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당시의 강력한 통치자가 님로드의 거대한 탑(바벨탑)을 건설하는 일에 반대하여 식솔을 이끌고 정처 없이 유랑을 떠났다가 북쪽에 있는 달의 도시 하란에 도착해 수 년 동안 머물며 새로운 친인척 관계를 맺었다. 달신 신Sin을 섬기는 곳은 후에 ‘시날’이라는 지명으로 바뀌고 지금은 ‘시나이’라는 산의 이름으로 남게 된다.
  어느 남자는 다시 아내와 가솔, 하란에서 새로 생긴 친척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길을 잡아 가 도착한 곳이 바로 가나안. 처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하티 족이 땅의 주인이었다. 그래 이들은 가나안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이왕 신을 섬기려면 가장 으뜸가는 신을 섬기겠다고 결심하여 “엘로힘”이란 신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엘로힘은 남자에게 “자손이 모래와 별처럼 번창하여 민족을 이루게 하고, 모든 민족에게 축복을 주는 민족이 되리라”고 약속을 한다. 또한 “가나안 땅은 영원히 남자와 후손의 땅이 되리라”고 축복을 해준다. 약속의 내용을 읽은 후에 확실해졌다. 엘로힘이라는 신이 후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로 갈라질 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임이.
  이런 축복을 보는 문학 작가의 눈. 축복? 축복이라고? 정말 축복이란 빌어먹을 것이 있는 거야? 토마스 만은 “단어 뒤에 깔려있는 가치평가”를 한 번 보자고 하면서, 말 그대로의 축복만 받는 경우는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다고 단정한다. 맞다, 맞아. 신에게 들은 은근한 속삭임은 정말 축복이 아니라 나중에 아브람, 이사악,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민족들의 역사를 보더라도 평생에 걸친 축복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축복을 ‘행복’ 또는 그냥 ‘복’이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완전히 맞는 말이다. 이사악은 아버지에 의해 거의 죽었다 억지로 살아났고, 야곱은 야바위보다 더 지독한 사기 행각을 통해 형 대신 아버지에 의하여 축복을 받았지만 결국 축복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독하기 독한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요셉도 비슷한 초년 사주를 타고 났고. 우리네 사는 것도 마찬가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 고통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간혹 짧은 순간 즐겁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 뭐 대단한 게 있다고 행운이니, 행복이니 하는지. 모든 사람은 축복을 받고 태어날 수 있지만 결국 길게 축복을 누리는 인간은 극소수에 그치는 것도 모자라,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축복이지 본인들은 지옥의 유황불 속인지, 그 속을 어떻게 아는가? 이런 형태의 축복, 남자가 엘로힘에게 들은 속삭임을 만은 간단하게 “그건 운명”이라고 퉁 치고 나간다.
  하여튼 우르를 떠난 남자의 후손이 책의 주인공 요셉이 맞긴 맞는데, ‘그 남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 비슷하지만, 천만의 말씀, 이름만 비슷하고 남자와 요셉의 사이엔 최소 20대, 약 600년 터울이 난단다. 그러니 증조부라 볼 수 없다는 것이 토마스 만의 주장. 작가는 창세기를 일종의 연대기로 여기고, 그것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쓴 연대기라서 그들의 조상이 행한 일을 간혹 터무니없이 미화한 측면이 많다는 시각에 입각해 적어도 2미터 이상 거리두기를 유지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라고? 웃기지 말아라. 역사는 기록한 자들의 것이다.
  한 가지 예로 야곱이 장인 라반의 집에서 25년(성서에는 20년)에 걸친 종살이를 끝내고 큰 부를 얻어 다시 가나안으로 향하다가 작은 무역도시 세겜의 옆에 장막을 치고 몇 년을 거주할 때의 일을 들었다. 애초 부유하지만 작은 규모의 도시 세겜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레아가 낳은 맏이 르우벤을 비롯해 시므온과 레위, 빌하의 아들 단, 호리호리하고 날렵한 납달리, 힘은 세지만 우울한 성격의 유다, 이렇게 여섯 아들들이 처음부터 세겜을 치고 약탈을 도모했다가, 아버지한테 심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그래 도시와 계약을 맺고 평화로이 지내기를 4년. 언제나 사이가 좋을 수 있나 어디. 그래 토착민과의 관계가 조금씩 원만해지지 않을 즈음, 까탈스런 성격에 통풍을 앓고 있는 성주 하몰의 방탕한 아들 세겜(성의 이름과 같음)의 눈에 야곱의 유일한 딸 디나가 들어온다. 이 순간, 세겜의 모든 신경은 “예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철 발 벗은” 디나 하나에게만 집중이 되어, 급기야 아버지 하몰이 아픈 몸을 이끌고 야곱의 장막에 가 청혼을 하기에 이른다.
  야곱은 뭐 그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아들들이 세겜은 이미 본처가 있는 몸인데 어찌 야곱의 외동딸을 첩으로 보낼 수 있느냐면서 펄펄 뛰며 반대한다. 야곱도 아들들의 마음속에 뭔가 있음을 짐작했지만 아이들 이야기가 틀리지 않아 청을 물리칠 수밖에. 그랬더니 이번엔 세겜 본인이 장막을 방문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으로 사례를 할 터이니 제발 디나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랬더니 어떻게 했느냐고? 약탈했지 뭐. 어느 날 몰래 전방 주시하다가 시계에 디나가 포착되자마자 잽싸게 보쌈해 집어와 할렘에 넣어놓고 그날로 동침해버리고 말았다. 며칠 후, 세겜이 다시 장막을 방문해 여차저차해서 여차저차 됐으니 그저 넓으신 아량을 바란다고 넙죽 엎드리니 이걸 죽여 살려? 이미 디나는 남의 처가 된 후. 이때 아들들이 요구하기를, 지참금을 받기엔 우리도 충분하게 부자인 것은 당신이 보는 바와 같으니 지금부터 사흘째가 되는 날, 우리와 같은 신을 모시겠다는 증표로 성 안의 모든 남자들에게, 늙었거나 젊었거나, 어리거나를 따지지 말고 반드시 돌칼을 써서 할례를 하라고 요구한다.
  생각 짧은 세겜. 이크, 이런 횡재라니. 돈 한 푼 안 들이고 어여쁜(어여쁘지 않다고 책에 수없이 나온다. 레아를 닮으면 예쁠 수 없다고, 그저 자기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다.) 리나를 영원히 얻을 수 있다니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성에 들어가 사흘째가 되자마자 모든 남자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바지 내려!를 외친다. 근데 할례를 하면, 당시엔 항생제도 없지, 소염제도 없어서 더욱 곤란했을 터인데, 움직임이 영 자유롭지 못하다. 어딘지 아시지? 쓸모없는 껍데기 잘라낸 곳이 따갑고 쓰라려서. 그렇게 해놓고 나흘째 되는 날, 야곱의 여섯 아들이 병사들을 몰고 야곱의 딸 리나를 구출하겠다는 명분으로 세겜 성에 쳐들어가 성주(는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 분해 저절로 자연사했고), 성주 아들 세겜, 이집트 파견군 대장 베서-케-바스테트 등 거의 모든 남자들을 도륙내고 온갖 보물을 약탈해 야곱에게 바친다.
  창세기에 나오는 대목하고 큰 그림을 비슷하지만 디테일로 가면 영 다르다. 이런 것이 바로 연대기,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증거. 이 책은 야곱이 아름다운 엄마 리브가의 지시를 핑계로 쌍둥이 형 에사오를 대신해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장면부터 다시 벧엘 언덕에 도착할 때까지를 자신의 해석으로 그리고 있다. 물론 자신은 간혹 연대기라는 말을 쓰지만 문학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시대별로 쓰게 되면 재미가 덜한 법, 토마스 만은 벧엘, 또는 베델의 성스러운 나무 성수에 나신으로 기대 몽상에 빠진 요셉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토마스 만답게 특정한 행위가 뒤에 벌어질 다른 행위에 연결, 즉 인과 관계로 이어지는, 또는 이어지게 하는 장치가 대단히 인상 깊다.
  이거 명작 맞다. 첫 번째 책 <야곱 이야기>만 읽어봐도 알겠다. 그러나 읽기는 그리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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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8-26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이 긴 작품을, 그것도 토마스 만.....(지루한 그;;)의 작품을!
나중에 더 늙으면 함 읽어볼라고 저희 도서관에 검색해봤더니, <요셉과 그 형제들 3 - 이집트에서의 요셉 (상>까지만 있네요. 사서도 지쳤던가, 아니면 이 책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던 사람도 그냥 거기서 포기한 것인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8-26 20:11   좋아요 0 | URL
대단하긴요 뭘. ㅋㅋㅋㅋ 이걸 쓴 사람도 있는뎁쇼. ^^;;
확실히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다 팔자지요 뭐.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0-08-27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단하시다는 말씀 안드릴 수가 없네요. 성경을 이 책 때문에 읽으신거죠? 멋지십니다.👍

Falstaff 2020-08-27 09:18   좋아요 1 | URL
ㅎㅎㅎ 성경을 이 책 때문에 읽었을까요. 본문에 썼듯이 세월이 지나가면서 별개로 호기심에, 주위에서 꼭 읽어볼 책이라고 하도 그래서 읽은 것이지요. ^^
 
와사등 / 기항지 - 원본비평연구 민족문학사연구소 정본총서 3
김광균 지음, 배선애 엮음 / 소명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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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개성 출생.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열세 살인 1926년에 중외일보에 <가신 누님>을 발표했고, 열일곱 살 땐 동아일보에 <야경차夜警車>를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스물다섯 살, 1938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설야雪夜>가 당선하면서 정식 시인의 칭호를 얻었으니 시에 관해서는 무척 조숙했다. 이어 스물여섯에 첫 번째 시집 《와사등》을, 해방 후인 1947년에 《기항지》를 낸 후 1952년부터는 동생의 사업을 이어받으면서 거의 시단에서 떠나다시피 했다 한다. 이 두 시집의 대표작들을 ‘원본비평연구’한 시집이 오늘 읽은 《와사등/기항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예비고사, 본고사 시험문제로 현대문학에 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아 시 읽기를 소홀히 했을 거 같았지만, 국어 교사들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 나올 확률이 많다고 학생들을 무지하게 때려잡으며 현대시 공부를 시켰는데, 김광균, 김광섭 비슷한 시인들의 작품은 예외였다. 그래서 그냥 이름만 알고, 소위 ‘이미지즘’이란 장르로 기억하고 훅, 넘어갔다. 이런 시인들 가운데 생각나는 사람들이 <논개>의 변영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김춘수, 또 누구누구가 있었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기억나지 않는다.
  일단 시를 읊어보자. 맨 처음에 나오는 시 <오후의 구도(構圖)> 2연.


  천정(天井)에 걸린 시계는 새로 두 시
  하―얀 기적 소리를 남기고
  고독한 나의 오후의 응시(凝視) 속에 잠기어 가는
  북양항로(北洋航路)의 깃발이
  지금 눈부신 호선(弧線)을 긋고 먼 해안 위에 아물거린다.



  이어서 두 번째 시 <해바라기의 감상(感傷)> 2연


  보랏빛 들길 위에 황혼이 굴러 내리면
  시냇가에 늘어선 갈대밭은
  머리를 흩트리고 느껴 울었다.



  천정에 걸린 시계가 새벽 두 시를 시보하고 있는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일까. 새로 두 시가 새벽 두 시, 맞지? 맞을 거다. 댕, 댕, 괘종시계의 시보를 하―얀 기적 소리라고 치고, 그럼 고독한 나의 사색 또는 ‘오후의 응시’가 ‘북양항로의 깃발’, 먼 수평선에서 크게 원호를 이루는 저 먼 먼 선박으로 향한다는 말씀? 아니어도 좋다. 아니면 어떤가. 그냥 뜻 없는 시어들이 모이고 모여 ‘고독한 나’가 방에 누워 사색에 잠긴 이미지 하나만 독자가 읽어주면 시인으로서는 만족할지도 모른다.
  두 번째 시에서는 한없는 은유의 아름다움. 보랏빛 들길 위에 황혼이 글쎄 굴러 내린단다. 이 때를 맞추어 시냇가에선 갈대들인 또 머리를 흩뜨리고 느껴 운다니. 김광균이야 뭐 애초부터 은유와 직유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인인 걸 새삼스럽게 이 정도로 감탄하기는 이르다.
  그런데 나는 소위 ‘이미지즘’이란 것이 시인의 심상의 모습 말고 사물을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딱 찍어 놓은 듯한 회화적 이미지로도 읽었다. 사실 김광균의 시집은 처음 읽는 것이고 이전엔 조카 교과서에서 하나 정도 ‘설핏’ 읽었을 뿐으로 다소 생소했으나 이 시집을 읽으면서 아, 내 스타일, 다리를 치기도 했으니,



  동화(童話)



  내려 퍼붓는 눈발 속에서
  나는 하나의 슬픈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조각난 달빛과 낡은 교회당이 걸려 있는
  작은 산 너머
  엷은 수포(水泡) 같은 저녁별이 스며 오르고
  흘러가는 달빛 속에선 슬픈 뱃노래가 들리는
  낙엽에 쌓인 옛 마을 옛 시절이
  가엾이 눈보라에 얼어붙은 오후.


  이 시는 두 편으로 구성된 <향수의 의장(意匠)>의 두 번째 편인데, 시인이 찾고 있던 슬픈 그림자를 낙엽이란 추억에 싸인 옛 시절의 얼어붙은 오후라는 회상 속 사진 또는 그림이라는 이미지에서 찾은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런 그림 또는 사진 한 장은 <외인촌(外人村)>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1연만 인용해보자.


  하이한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김광균의 시를 읽어보니 현대 시인이라면 그다지 즐기지 않을 단어인 ‘고독’, ‘슬픔’, ‘울음’ 같은 것들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고 있는데 그게 전혀 흉하지 않다. 아니다, 내가 읽기에 흉하지 않다. 전문가들의 시선을 모르겠고. 흉하기는커녕 한 컷의 사진, 한 장의 그림의 분위기를 이미 충분히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그런 분위기, 이미지로 애초에 단정하는 단어로 읽히기까지 한다. 시집 《와사등》이라면 대표시가 <와사등>이라 이 작품을 소개해주기 바라시겠지만, 대표시를 소개하면 출판사에게는 여지없이 큰 실례를 하는 것이라 안 되겠고, 이미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그래서 오히려 <와사등>을 젖히고 김광균의 대표 시로 알려져 있는 <추일서정(秋日抒情)> 전문을 읽어보자.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셀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세상에 이렇게 자유롭게 은유와 직유를, 심지어 거칠게 사용할 수 있다니. 뭐 요즘엔 이 시를 쪼개서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며 분석하고, 일률적으로 해석해가며 시험공부를 한다고 하니 학생들은 사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불쌍하다. 그냥 읽으면서 좋으면 좋다, 아니면 아니다, 라고 단순하게 즐길 수 있으면…… 그게 요순시대라고?
  이제 내가 제일 잘 읽었던 시, 가장 공감했던 시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 시가 어떻더라, 라는 말없이 독후감을 끝낸다.



  반가(反歌)


  물결은 어데로 흘러가기에
  아름다운 목숨 싣고 갔느냐.
  먼―훗날 물결은 다시 되돌아오리
  우리 어데서 만나 손목 잡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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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등 / 기항지 - 원본비평연구 민족문학사연구소 정본총서 3
김광균 지음, 배선애 엮음 / 소명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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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단장短章˝ 2연 첫 행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달은 어째 빅톨 씨 같은 얼굴을 하고˝ 여기서 빅톨 씨를 각주 30번으로 하고 설명 하기를, ˝러시아 문학가 빅토르 위고˝ 이거 읽고 웃다가 웃다가 기함을 했습니다. 이 양반이 언제 러시아로 이민 간 거야! 하고요. 별점은 각주와 관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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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탑 : 현진건 장편소설 한국문학을 권하다 21
현진건 지음, 박상률 추천 / 애플북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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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애플북스의 ‘한국문학을 말하다’ 시리즈 스물한 번 째 책으로 시인이자 동화작가, 소설가, 역자 등등 안 하는 거 없는 문학인에다가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이면서 교과서 편찬위원까지 명함에 박고 다니는 58년 개띠 남자, 박상률이 추천한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책마다 누군가가 추천한 사람이 있는데 계용묵의 단편집 《백치 아다다》는 전석순이라고 하는 83년생 소설가, 김동인의 <젊은 그들>은 76년생 소설가 구병모 등등이 추천을 했고, 책 앞 부분에 추천인의 추천사까지 실었다.
  근데 놀랍게도, 하지만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추천인 박상률이 쓴 이 책의 추천사에 단 한 마디도 현진건의 <무영탑>을 이러이러한 이유로 추천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박상률. 시인으로 이름도 얻고, 문창과 교수로 지위와 안정된 수입도 얻고, 교과서 편찬위원으로 명예도 얻은 이 경박스런 문인은 자기 어렸을 적에 읽은 현진건의 단편소설들이 당시엔 요새 말로 19금 정도의 내용이었다고 우스갯소리로 꾸려나가기만 하고 <무영탑>이 왜 좋은 소설인지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이이가 읽어보긴 읽어보고 추천을 한 건가? 왜 그럴까 했더니, 같은 시리즈에 현진건 단편집 《운수좋은 날》이 있고, 거기에 쓴 추천사를 <무영탑> 추천사로, 그대로 복사해 옮긴 거다. 내 박상률의 시집 한 권을 읽자마자 책꽂이에 꽂는 대신 곧바로 쓰레기통에 쑤셔 박은 적이 있는데, <무영탑>을 끝까지 읽어보니까 박상률이라면 이 책을 추천하기에 충분한 양심을 가지고 있고, 추천사로 다른 책의 것을 복사해 올린 것도 능히 할 만한 인물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무영탑無影塔, 그림자 없는 탑은 ‘석가탑’의 다른 이름. 불국사에서 한 시오리 쯤 떨어진 그림자 연못, 영지影池라고 있었는데, 석가탑이 완공이 되면 영지에 탑의 모습이 그림자로 보일 것이라고 한 썩은 중놈이 말한 것을 그대로 믿은 아사녀가 기다리다 지쳐 못에 빠져 죽었고, 큰 공덕으로 다보탑과 석가탑을 다 짓고는 지어미 아사녀가 영지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묘한 석수장인maestro 아사달 역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영지에 빠져죽은 비극적 전설을 가지고 있는 탑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전설은 딱 여기까지다. 일제에 조금도 협력하지 않아 비참한 가난에 시달리다 1943년에 장결핵으로 운명한 소설가 빙허 현진건은 여기에 있지도 않은 당대 최고 귀족, 이찬 벼슬을 하는 유종唯宗의 외동딸 주만珠曼을 등장시켜 지고지순한 부부간의 사랑의 틈을 파고들어 아사달을 죽기 살기로 사랑하게 만든다. 그래야 짧은 전설을 소설이 될 만한 스토리가 엮어질 수 있을 테니.
  시대는 바야흐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고도 근 한 세기가 흐른 경덕왕 만년. 앗, 경덕왕. 구라 아니고 우리나라의 역사책 <삼국유사>에서 틀림없이 나온 바, 경덕왕의 생식기가 무려 여덟 치. 익숙한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8 * 3.3 = 26.4cm. 30cm 플라스틱 자 한 번 손에 쥐어 보시라. 얼마만한 길이인지. 놀랠 노자. 이게 그거냐? 작대기지. 그러나 이전 지증 마립간이 세운 한반도 최고 기록 한 자 다섯 치, 45cm에 비하면 이도 나지 않기는 했다. 지증 마립간은 참 고생했을 거 같다. 그걸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평생을 달고 다니냐고. 하여간 경덕왕 만년의 사월 초파일부터 한가위 팔월 보름까지 통일 신라의 수도 서라벌의 대찰 불국사에서 벌어진 일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지 백 년이 지났건만 옛 고구려, 백제 땅의 신민들을 우습게 아는 서라벌 사람들의 심리가 밑에 깔려 있어서, 부여 고란사 부근 출신으로 신라 최대의 명찰 불국사에서 탑 쌓는 일을 맡은 젊은 아사달을 우습게 알고, 차별하고 싶어 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까탈을 잡고 싶어 하는 불국사의 중들도 나오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대갓집 따님 주만, 구슬아가씨도 나오고, 구슬아가씨를 얻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쓰는 시중 금지의 아들 금성金城도 나와 하는 일마다 족족 얻어터지는 전형적인 악당을 맡고, 옛 화랑의 기개를 이어받은 헌칠한 기상과 넓은 도량, 높은 무공을 갖춘 금경신도 등장하는데, 물론 이런 조연들은 전부 허구다.
  부여에서도 마찬가지. 아사녀의 아버지이자 아사달의 장인father in law이고 장인maestro이며 스승인 부석과 그의 불량하기 이를 데 없는 다섯 명의 제자들을 등장시켜 기어이 아사녀로 하여금 부여에서 남편을 기다리지 못하고 온갖 억측을 안은 채 거지꼴을 해가면서 서라벌까지 천리 길을 가게 만든다. 그리하여 드디어 도착한 불국사에서 남편도 만나지 못하고 문전에서 쫓겨나 시오리, 약 6km나 떨어진 영지 위에 석가탑의 그림자가 보이리라는 말을 믿을 정도로 아사녀의 머리가 나쁘든지, 서라벌까지 오는 동안에 하도 먹지를 못해 뇌에 영양공급이 안 됐든지, 그래서 미쳤든지, 시절이 지금부터 1,300년 전이니까 전설의 시대라 온갖 미혹을 믿는 습성이 있든지를 정당화 시켜야 했을 것.
  빙허는 전설 속에서 보이지 않는 여러 정황을 타당하게 만들고, 동시에 신문 연재소설이라는 한계 때문이라도 1938년 조선의 독자로 하여금 말초를 자극하게 해야 했을 것이다. 이걸 21세기의 대학 교수이며, 시인이며, 소설가이며, 동화작가이며, 삼국지 번역자(암만해도 나관중의 한문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우리말로 번역한 거 같지만, 이건 엄연히, 확실히, 진짜 그랬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의문이 든다는 뜻이니 관계자 여러분께서는 법에 호소하시는 일이 없기를 바람)이며, 교과서 편찬위원인 박상률이 지난 시절의 우리나라 대표 소설작품이라고 추천을 했는지 그의 뇌 구조를 한 번 보고 싶다. 비록 빙허가 일제에 단 한 번의 협력도 하지 않고, 타협도 있지 않아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이 당대엔 출판 금지 처분을 당했을지언정 <무영탑>은 정확하게 2류 아니냐는 말이지. 다시 한 번 말 하건데, 대학교수이자,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동화작가이자, 한문 번역자이자, 교과서 편찬위원인 추천인 박상률은 정말로 이 작품을 읽어보긴 한 건가?
  현진건의 놀라운 작품들은 단편에 있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박상률도 안다. <빈처>, <운수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술 권하는 사회> 등등. 빙허의 업적은 단편만 가지고도 충분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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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1 1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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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1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1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1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7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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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쉽다. 열흘만 빨리 읽을 것을. 비 내리는 주말 한 여름 밤, 이미 모두 잠 든 밤, 빗소리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만 충일한 시간, 창으로 습한 바람이 훅훅 끼쳐올 때, 혼자 스탠드 불 아래 이 책을 읽고 있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가끔 뇌성벽력을 때려 약하게나마 창틀이 오그르르 우는 밤이면 더욱 어울렸을 것이고.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 책을 읽으면서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지만 도저히 그만 둘 수 없는 유혹적인 호기심. 이젠 마음에 때가 끼어 소스라치거나 오소소 소름이 돋는 일은 없었지만 내내 불길한 몽환 또는 즉물적 현상이 당장이라도 이 한 밤에 벌어질 것 같은 공포감. 하, 이런 느낌은 중학교 시절 영화 <엑소시스트> 보고 한밤의 골목길 걸어 집에 갈 때의 팽팽한 신경줄 이후 처음이다. 저 어둑한, 아니, 옻빛같이 깜깜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골목길의 한 구석에서 무엇인가가 내가 다가갈 때까지 도사리고 있다가 일시에, 순간적으로 확 달려들 것 같은, 결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임은 확신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했던 모종의 공포감, 혹은 두려움. 이 정도면 이해하시겠지.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것은 한 여름 밤을 위한 최고의 선택일 수 있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공포는 첫째가 지하, 두 번째가 죽음, 세 번째가 지구 외의 행성에서 오는 불길한 실제 형상에 관한 이야기의 형태로 표시된다. 나는 아파트 7층에 살고 있는데, 고층의 아파트에 사는 도시인임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러브크래프트의 지하 세계에 관한 집착은 말 그대로 그로테스크하다.
  이이보다 한 세기 앞서 영국의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생체 과학자를 등장시켜 이미 죽은 사람들을 얼기설기 꿰매 한 생명체를 만든 바 있으나, 이 새로운 생명체는 자기 번식 본성 또는 세상에 오직 혼자라는 외로움에 절망해 결국 극지방의 얼음나라로 향하는 운명이었으나, 러브크래프트가 만든 새로운 생명은 이것과 조금 다르다. 모두 열세 작품을 다 소개할 수 없어 <시체를 되살리는 허버트 웨스트>만 예로 하여 <프랑켄슈타인>을 소환했던 바, 이 작가는 죽음의 본질과 죽음을 인위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가설을 세운 한 똑똑한 의과대학생이, 생명이란 근본적으로 기계작용에 의한 현상이란 전제, 즉 대단히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시체를 소생시킬 수 있는 약물 개발을 하는 과정과 결과를 섬뜩하게 묘사하고 있다.
  의과대학생 허버트 웨스트는 “영혼이라는 건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헤겔을 신봉한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생명을 소생시키는 화학물질을 개발하였으며, 대학 3학년 시절부터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생명을 주는 실험을 하기 위해 무수한 실험동물을 학살해 드디어 헌신적인 의사이자 의대 학장인 앨런 할시 박사에 의하여 더 이상의 동물 생체실험을 금지당하고 만다. 화자 ‘나’는 일견 천재성이 돋보이는 웨스트와 동기이지만 기꺼이 그의 조수 노릇을 하여 실험에 참가했던 것인데, 이런 상황에 처하자 웨스트는 곧바로 어떻게든 신선한 인간 시체를 구해서 비밀리에 실험을 지속하고자 언덕 뒤에 버려진 농가에 수술실과 실험실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무 시체나 다 실험에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서양인들이 흔히 하듯 죽은 다음에 방부처리를 한 시신은 결코 소생시킬 수 없으며, 죽은 후 시간이 지나 뇌와 장기에 치명적 상처를 입은 시신 역시 사용할 수 없어 될 수 있는 대로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묻힌 시신을 찾기에 이르러 실험실 역시 공동묘지에 인접한 장소, 인적이 드문 곳으로 물색을 했던 것.
  어때, 으스스하시지?
  그러다가 마침내 젊고 건장한 노동자가 연못에서 익사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 건장한 체격의 젊은이는 연고가 없어 시 당국에 의하여 방부처리하지 않고 당일 곧바로 공동묘지에 매장을 하는데, 마침 칠흑 같은 밤중이라 웨스트와 ‘나’는 회색 눈과 갈색 머리카락을 한 젊은 시신을 묘지에서 꺼내 실험실로 운반한 다음, 시신의 팔 정맥에 다량의 시약을 주사 하고나서 주사를 위해 절개한 부분을 깔끔하게 봉합을 한다. 45분이 지나도 반응이 없자 다급한 마음에 옆방으로 가서 또 다른 시약을 조제하고 있을 때, 어두컴컴한 실험실에서 터져 나온, 평생 들어본 적 없는 무시무시하고 귀기 어린 비명이 들려온다. 현세의 생명체들이 느끼는 온갖 초월적 공포와 기괴한 절망을 압축한 듯한 비명, 인간일 리 없고,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닌 끔찍한 비명이 들려, 웨스트와 ‘나’는 갑자기 엄습하는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창문을 뛰어넘어 오두막을 탈출해 시골길을 미친 듯이 내달린다.
  다음날, 학교를 결석하고 하루 종일 잠에 빠져 있다가 오후에 신문기사를 보니, 체프먼 농가에서 원인모를 화재로 농가가 전소되었으며 무연고 묘지의 새 무덤이 손으로 긁은 것처럼 망가져 있더란 기사가 실렸다. 이후 지금은 실종 상태인 웨스트는 17년 동안 누군가 뚜벅뚜벅 자신을 쫓아오는 환청이 들린다며 종종 뒤를 돌아보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16년 전에,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에서 주요 무대가 되는, 아컴 지역 전역에 장티푸스가 창궐해 웨스트와 ‘나’는 미스캐토닉 대학의 여름학기를 수강하다가 장티푸스와의 싸움에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때 가장 영웅적으로 역병과 사투하던 인물이 바로 헌신적인 의사이자 의과대학장인 할시 학장. 하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와중이라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해 시신 한 구를 대학 해부실로 밀반입하는데 성공한 이들은 또다시 시약을 주사했으나 잠깐 눈을 뜨게 만드는 것까지는 성공하고 곧바로 다시 기능을 상실하는 경험을 한다. 이 때 8월 14일, 할시 박사가 갑작스럽게 운명을 하고 15일에 장례를 치룬다. 16일 새벽 두 시에 웨스트의 하숙방에는 또다시 시신의 정맥에 시약을 주사하는 행위가 있었고, 세 시에 극한의 비명과 더불어 웨스트는 폭행을 당해 기절한 상태로 발견이 된다.
  이날부터 두 번째 공포가 시작한다. 크라이스트처치 공동묘지 경비원이 발톱 같은 것으로 살해당해 갈가리 찢겨 죽음을 당했고, 괴물이 등장해 총 여덟 집이 습격을 받아 사납게 찢어진 시신이 17구에 달했는데, 가까스로 살아남은 목격자에 의하면 기형 유인원이나 인간 형상의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고 했다. 셋째 날 경찰이 이끄는 수색대가 기어이 괴물을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급박한 상황이라 발포를 해, 총을 맞았음에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괴물 또는 범인을 세프턴 정신병원에 수용을 하고 이후 16년 동안 완충제로 벽을 둘러싸 자해를 막는 특별 방에 수감시키다가 최근에 병원에서 탈출한 범인 또는 괴물이 하필이면 할시 박사와 비슷한 모습이었다는 것이 관계자의 증언이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냐고? 아니다. 이제 반 정도 왔을 뿐이지만 결론은 안 가르쳐드린다.
  하여튼 공포, 괴기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강력 추천이다. 이런 분들은 정말 한 번 읽어보시라. 지하, 깊고, 깊고 어두운 암흑의 지하,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묻혀있는 곳에서 스며 나오는 불길한 연기와 녹색의 끈적거리는 액체,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부패의 악취. 그 속에 존재하는 또는 존재할 지도 모르는 악령이랄까, 근원적인 죽음의 실체랄까, 그런 것들이 당신의 꿈자리까지 뒤숭숭하게 만들 터인데, 독자에 따라서는 이런 장르를 선호하기도 하니, 이게 바로 사람살이겠지. 하여간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그래 별점 하나 정도는 뺄 것이지만, 여름밤에 읽기에 가히 <구미호> 이야기보다 몇 배 으스스, 오소소 소름 돋는 건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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