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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과 군상
하인리히 뵐 지음, 사지원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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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에 <여인과 군상>을 발표한 하인리히 뵐은 1972년에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노벨문학상이 특정한 작품을 보고 수상자를 선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작품이 수상에 큰 역할을 미쳤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읽은 우리말 번역서가 1958년생 역자 사지원의 초역, 초판이라고 판권지에 쓰여 있다. 사지원은 하인리히 뵐 재단의 장학생으로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하인리히 뵐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고, 건국대학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지내면서 한국 하인리히 뵐 학회장, 사단법인 생명의 숲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건국대 교수 자리는 정년이 지났으니 명예교수일 터이다. 이이가 번역한 뵐의 작품이 꽤 있다. 뵐 연구로 학위를 받은 사람이니 뵐의 작품은 될 수 있으면 사지원 번역을 찾는 것이 좋을 듯하다. <9시 반의 당구>, <열차는 정확했다>가 눈에 띈다.
<여인과 군상>에서 여인은 레니 그루이텐 파이퍼. 결혼 전 이름이 레니 그루이텐이고 알로이스 파이퍼와 딱 3일 동안 결혼생활을 했다.
작품의 화자는 ‘저자’라고 일컫는 작가 자신. 저자는 레니 파이퍼의 현재 상황을 알기 위하여 레니 주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을 인터뷰해 677페이지에 이르는 보고서를 작성한다. 매체의 기자가 쓴 듯한 리포트 형식의 글은 저자가 만난 사람들에 따라 의견이 서로 같거나 다를 수 있어서 독자가 조금 헛갈릴 수도 있다. 그래도 끝까지 다 읽으면 저절로 정리가 되니 그저 편하게 읽어가면 된다.
레니 파이퍼. 48세 독일여성. 171cm, 평상복 상태로 68.8kg. 검푸른 눈빛과 희끗거리는 숱 많은 머리카락. 32년간 노동의 과정이라 부르는 기이한 과정을 거쳤다. 5년 동안 아버지 사무실에서 훈련받지 않은 보조원으로 일하고, 27년간 전문 훈련을 받지 않은 화원 노동자로 지냈다. 화원? 규모가 큰 꽃집.
레니의 아버지는 손재주가 뛰어난 건축가였다. 건물이나 집을 짓는 건축가가 아니라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어서, 프랑스에 마지노 방벽을 틀림없이 히틀러가 따라할 것이라고 짐작해 참호와 벙커 전문 회사를 차렸다. 독일이 먼저 침략할 계획인데 무슨 벙커가 필요하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건 그거고, 정말로 침략을 감행하기 전까지는 마지노선에 대항할, 아니면 그나마 버틸 수 있는 독일쪽 방어선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던 거였다. 처음에는 회사가 어려웠지만, 아니나 다를까 1930년대 중후반이 되자 회사는 날마다 번창하기 시작해 레니도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레니가 자동차운전면허를 딴 해가 1938년. 이후 자동차 운전을 열정적으로 즐겼지만 1943년에 독일의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 자신의 차 역시 군대에 징발당한 후 다시 차를 가져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사업도 정점에 달한 순간, 상태가 이상해진 아버지는 하지 않아도 지극히 무방한 서류회사를 만들어 사기 사업을 하다 들통이 나 한 방에 거덜이 나버렸다. 미리 자기 재산을 거의 정리해 여러 사람들에게 활수하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하여간 그랬다. 40년간 그루이텐 가의 충실한 가정부로 일한 마르야 판 도른 아주머니 한테도 많은, 많아도 많이 많은 퇴직금을 주어 그 돈으로 고향에 내려가서 땅도 구입하고, 보험연금을 받으며 편하게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을 정도이다. 마르야 판 도른 아주머니는 저자에게 레니에 관한 진술을 많이 해주는 중요한 보고자 가운데 한 명이며, 레니 주변의 가까운 친구 가운데 한 명이다.
레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여성들은 판 도른 아주머니와, 동갑내기 마르그레트 슐레머, 같은 집에서 살기도 한 로테 호이저. 이렇게 세 명이 레니와 거의 평생을 함께 했다. 마르그레트 슐레머도 레니처럼 전쟁과부. 마음이 여려 자신 몸이 특정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그걸 거절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창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정작 돈을 목적으로 계산적인 관계를 가진 유일한 남자는 죽은 남편이 유일했다. 슐레머 집에서 결혼하면 몇 만 마르크인가를 지참금 비슷하게 준다고 해서. 전시에 군인 병원의 간호사로 일했고, 40대 후반 시점에는 독립병동의 병상에서 불치의 성병을 비롯한 온갖 나쁜 병에 걸려 스스로 ‘완전히 죽은 몸’이라 칭한다. 내분비 기관이 완전히 망가졌다.
마르그레트와 함께 레니가 어려울 때마다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를 머뭇거리지 않았던 친구 로테 호이저는 레니보다 아홉 살이 많아 쉰일곱 살. 입이 매섭다. 자기 두 아들을 빼앗은 시아버지 오토 호이저와 아들 35세 베르너와 34세 쿠르트를 악당이라고 부르길 서슴지 않는다. 레니가 비참하게 사는 이유가 그들 탓이란다. 호이저 가가 레니의 아버지 그루이텐 가와 무슨 악연이 있을까?
로테 호이저의 시아버지 오토 호이저는 여든다섯 살이다. 이 나이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1차세계대전 참전 군인이었고, 간전기에 그루이텐 씨가 운영하는 건설회사의 경리 책임자로 20년간 빼어난 업무솜씨를 발휘한 능력자였다. 실력은 충분하지만 어렵게 시작한 사람 가운데 일종의 열등감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있다. 그게 개인적 발전의 터보 엔진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 오토 호이저가 그랬다. 다만 그루이텐 씨에게 인정을 받은 능력자였으니, 처음엔 충성을 하다가, 조금씩 나도 그루이텐 씨처럼, 그루이텐 씨 만큼, 이렇게 진행하고, 당현히 그루이텐 씨를 능가하는, 을 거쳐 급기야 그루이텐 씨를 깔아 뭉개는 수준의 부자가 되기로 작심을 하게 됐다. 처음부터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인리히 뵐도 작품을 쓰다가 마지막엔 결국 추하게 늙은 노인을 그리지만, 뭐 그렇다는 거다. 아들 하인리히는 2차 세계대전에 나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죽고, 레니의 집에서 즐겁게 살고 있는 두 손자, 그냥 손자가 아니라 매우 총명해 하나를 가르치면 둘, 셋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똑똑한 두 손자 베르너와 쿠르트를 뺏어와 좋은 교육을 시켜 번호사와 기업가로 만든다.
경제적 개념이 거의 없는 레니가 자기 사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느라 경제적으로 거덜이 날 때 쯤, 오토 호이저가 레니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집을 인플레이션이 왕성하게 진행하고 있던 시기에 사버렸다. 1960년대말 가치로 40만 마르크에 달하는 집을 정확하게 얼마에 사고 팔았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이후 레니가 헐값에 세를 들어 사는 조건이었던 건 맞다. 레니는 이 집에 포르투갈과 독일 부부, 튀르키예 남자 세 명 한테 다시 아주 싼 값에 다시 세를 주어 그 돈으로 생활한다. 포르투갈과 튀르키예에서 온 체류민들의 직업은 도시 청소원. 레니의 아들 레프와 같은 직업이다.
레니의 아들 레프는 어음위조범으로 교도소에 수감중이다. 어음 위조가 네 번. 이 가운데 세 번은 레니와 주변인들 특히 로테 호이저가 나서서 막아주었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세 번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호이저 형제가 네 번째엔 드디어 고소를 해버린 것.
레프? 재미있는 청년이다. 레프의 아버지는 어머니 레니가 유일하게 결혼한 알로이스 파이퍼의 남편이 아니다. 파이퍼가 전사한 후에 연합군의 폭격이 마치 폭풍우처럼 쏟아지던 밤, 공동묘지 묘혈로 대피한 와중에 만나 평생 사랑하는 사이가 된 소련인 보리스 류보비치의 아들이다. 보리스는 전쟁이 거의 끝날 즈음해서 레니와 친구들의 판단착오로 독일군증명서를 소지한 채 피신하던 중 연합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래서 레프 보리소비치는 ‘레프 보리소비치 그루이텐’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호이저 가문이 할아버지 후베르트 그루이텐의 마지막을 생으로 홀딱 떠 먹은 것에 분노한 것 같지만 레프는 기꺼이 시 청소부들과 같은 노동에 만족한 삶을 산다. 일을 조리있고 규모있게 해서 이주 청소 노동자들이 훨씬 많은 휴식 시간을 갖게 하는 효용을 만들어내 독일 시민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의 쉬는 꼴을 배 아파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를 눈여겨 본 관리자들이 레프에게 현장 말고 사무직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지만 그는 기꺼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
모전자전. 엄마 레니 역시 사회의 하층 계급들을 자기 집에 아주 저렴한, 저렴해도 너무 저렴한 가격의 월세만 받고 세를 들였으며, 스스로도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계약서에 쓰인 대로 내버려 둘 호이저 형제가 아니다. 할아버지를 닮아 똑똑하고 영리하지만 현명하지는 않은 천생 자본주의자인 형제들은 할아버지가 일군 거대한 자본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비스킷에 불과할 레니가 사는 집까지 몰수해버리고 싶어 한다. 레프가 교도소에 가 있는 동안.
아무리 돈과 권력이 막강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법. 어떻게 안 되는 일이 있는 지는 안 알려줌.
이 외에도 레니가 사춘기 시절을 보낸 기숙학교 시절에 만난 라엘 수녀와의 관계도 매우 중요한 축이다.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독후감이 길어져 그걸 소개하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레니가 라엘 수녀에게 배운 바가 매우 크다. 훗날 마르그레트의 집에서 작은 파티를 하던 중 변기가 막히는 일이 일어나자, 남자들도 변기를 뚫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시간만 끌고 있을 때, 레니는 변이 잔뜩 들어있는 변기 속으로 맨손을 쑥 넣어 배관을 막고 있는 사과 한 알을 꺼내 시원하게 분뇨를 배출시킨다.
아마도 기꺼이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살기로 결정하게 영향을 끼친 것, 레프 역시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기로 만든 것도 선한 라엘 수녀의 삶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책 전반부는 많은 등장인물의 삶과 에피소드가, 하인리히 뵐 특유의 건조한 문장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읽기가 편하지 않지만, 후반부로 접어들어 스토리가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작품의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먹고 지긋하게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로울 듯하다.
오늘 독후감, 참 못 썼네.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도 모르겠네. 확 지워버리고 다시 쓸까?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지 뭐, 아마추어 주제에. 그냥 냅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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