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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평점 :
젊은 시절에 이대 앞 잡탕집(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젊은 술꾼한테 이대 앞 잡탕집 골목, 하면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에서 술 한 잔 마시고 친구가 나한테 책을 한 권 사주고 싶다 해 신촌 사거리 홍익서점까지 기어가 얻은 책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 학원사에서 나온 거. 당시 내 수준이 그랬다. 소주, 막걸리 얻어 마시고 책 한 권 사 읽으면 장땡인줄 알았다. 길 건너 고고장 '우산속'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 돈이면 잡탕이 몇 냄비고 소주가 몇 병인데 어떻게 거길 가?
이 책을, 아직도 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읽으려고 작심을 해 책을 펴보니
조명을 환하게 해놓고 찍어서 그렇지 종이가 완전히 바래 파삭 부서질 거 같았다. 왼쪽 상단, 조금 노란 계열의 색이 비치는데, 실제로 보면 김태희/김연아 커피믹스 색깔이다. 종이 섬유질로 아직 책의 모습을 버티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또 활자 시대의 책이 그렇듯이 글씨 크기가 도저히 내 눈으로 읽히기를 거부하는 수준. 엄두가 나지 않아 민음사 책을 중고로 사서 읽기로 했다.
혹시 조이스가 쓴 <율리시즈> 읽어보셨나? 지금 읽고 계신 서재 친구 한 분은 내가 안다. 그분 빼고 만일 <율리시즈>를 읽고 싶은 분 계시면 그 전에 (<율리시즈> 책이 워낙 비싸니까. 지금 보니 정가가 4만 8천원이다. 으때, 나 친절하지?) 스파링한다는 기분으로 <젊은 날의 초상>을 먼저 읽어보시면 좋을 듯하다. 이 책의 주인공이 '스티븐 디덜러스'. <율리시즈>에서도 주인공이며 거의 분명하게 같은 사람이다. 이 책에 만족한다면 <율리시즈>에 도전하시라.
조이스, 하면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소설 기법이 소위 "의식의 흐름"이다. <젊은....>의 초반부에 이 '의식의 흐름' 기법이 와장창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연대기가 왔다리 갔다리 마구 헷갈리기도 하고, 덩달아 등장하는 인물들도 막 섞여서 갈피를 잡지 못하기도 하는데, 그러면서도 책을 읽어나가며 공통된 '의식'(이라고 해두자. 난 '감정' 또는 '느낌의 고양' 등도 좋을 듯하지만)이 시공간, 인물을 초월해 '흐르는' 걸 감각할 수 있다. <율리시즈> 초반에 벅 멀리건이 면도를 하는 장면부터도,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에서, 오정희의 <바람의 넋>에서도 거의 비슷한 '어떤 느낌이 고양되면서 그게 마치 흐르는 듯한' 감각과 아주 유사한 그런 소설 기법. 독자에게 다른 어떤 소설 기법보다 효과적으로 책 속의, 그리고 스토리 혹은 등장인물의 감정을 전달해주는 대신 정독을 하지 않으면 지금 뭔 얘기를 하고 있는지, 내가 뭘 읽고 있는지 아리송하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아, 이 대목에서 그동안 여러번 얘기한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글 읽고 어디가서 비슷한 얘기하지 마시라. 난 아마추어 독자일 뿐이다. 개망신 당할 확률이 높다.
근데 '의식의 흐름'이란 게 그저 소설 기법의 하나라고 치고, 그거 말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내용을 보면, 스티븐 디덜러스의 소년시절에서 청년시절까지를 그리고 있는 성장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물론 스티븐 디덜러스의 8할은 제임스 조이스 자신임에 분명하다. 시력이 약하고 선병질적인 육체부터 시작해서 생각이나 취미 기타 등등까지. 당대 조이스의 조국 아일랜드는 정치적으로 잉글랜드에 병합되고 1916에 있었던 무장 독립투쟁이 여지없이 박살이 난 뒤 무력증과 증오, 복수심이 잠복되어 있는 상태였고, 종교적으로는 수백년간 아일랜드 인들을 지배했던 가톨릭 교가 시대적, 환경적, 정치적 이유로 슬슬 힘이 빠지고 있던 상태였다. 이렇게 시대적 환경과 당대의 모습도, 그 속에서 조이스 가족이 경제적으로 서서히 몰락해가는 것도 잘 그려져 있다. 다만 역자 이상옥 선생이 40년 전인 1976년에 한 번역을 원본으로 해서 지금 시대 말에 맞게 윤문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쉬울 뿐. 김종건 선생이 다시 번역해놓은 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데(사실은 별 관심도 없긴 하지만) 있다면 그걸 찾아 읽는 편이 좋을 듯하다.
이 책의 317~318 쪽에 조이스는 디덜러스의 입을 통해 소설을 쓰는 미학적 견지를 밝힌다. 인용하겠다.
"예술가가 표현하는 아름다움은 우리들에게 동적인 정서나 순수히 육체적인 감각을 일깨울 수가 없어. 그 아름다움은 미적 정지상태를 일깨우거나 일깨워야 하고 혹은 유발하거나 유발해야 하지. 그 상태는 곧 이상적인 연민이나 이상적인 공포로서, 내가 아름다움의 리듬이라고 부르는 바에 의해 환기되고 지속되며 결국 해소되기도 하는 하나의 정지 상태야."
"리듬은 어떤 미적 전체 속에서 부분과 부분이 갖는 관계라든지, 어떤 미적 전체가 그 한 부분 또는 여러 부분과 갖는 관계라든지, 혹은 한 부분이 그 미적 전체와 갖는 관계같은 최초의 형식적인 미적 관계를 말해."
난 이 인용한 대화가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소설이라는 예술 형식을 창작하는 건 순간 순간 정지해 있는 상태를 계속 일깨워야 하는 것이고, 그걸 다 모은 것을 조이스는 "리듬"이라고 규정한다. '리듬'은 미적 부분들이 서로 수렴을 하거나 발산을 하며 궁극적으로 미적 전체와 관계를 갖는 것으로, 좀 쉽게 얘기하자면 미적 부분을 위해 작가는 과거의 한 부분을 차용해 현재의 상태를 설명하거나 감각을 연장,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식의 흐름 아닐까 싶은데 위에서도 말했듯이 전적으로 아마추어 의견이니 신경쓰실 거 없다. 그냥 한 번 이렇게 주장해보는 것이니. 다만 이 독후감을 읽고 혹시 <젊은....>에 관심을 두어 진짜로 읽어보실 분은 이 주장을 염두에 두고 일독을 해보셔도 좋지 않을까.... 옙! 꿈 깨겠습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