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우미인초>에 이어 세번째 읽은 나쓰메 소세키. 처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고 지극한 사소설 경향에 대하여 아주 질린 적이 있었다. 한 작품을 더 읽고 나쓰메를 더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우미인초>. 비록 '와 이거 왔다다', 라고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나쓰메와 결별을 하기엔 너무 이르다 생각하게 만들어 한 작품만 더 읽어보자 싶어서 선택한 것이 또 <그 후>. 결론. '앞으로는 나쓰메를 더 많이 읽어봐야겠다.' 그래서 7월 이후에 읽을 책으로 <행인>을 선택했다. 열혈독자 제위께선 나쓰메를 더 소개해주지 않으시기 바라니, 다른 건 없고 <행인>을 벌써 샀다는 거. 7월 말이나 8월 초에 읽기로 예정해버렸기 때문에. 다른 책을 더 추천해주시면 내년에나 읽을 터인데 너무 늦잖여? 그럼 내가 미안하잖여?

 잠깐, 일본 근대사. 고려시대 무신정권과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막부정권이 탄생한다. 그리고 고려 무신정권이 거덜나는 것과 비슷하게 일본의 막부 역시 작살난다. 어떻게? 몽고가 고려를 침공해 거의 식민지 비슷한 상황을 만들자 무신정권이 종말을 고한다. 즉 외세에 의하지 않고 고려의 왕이 스스로 힘을 키워 무신들을 제거하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다는 말. 마찬가지로 미국,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자 겁대가리 없기로 세상에 유래가 없는 일본 깡패들, 좋은 말로 해서 막부와 칼잡이 사무라이들이 훈도시 하나 걸치고 칼쌈했다가 대포 한 방에 거꾸러지자 자연스럽게 700여년을 이어오던 일본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참 오랜만에 왕정이 복고가 된다. 그때가 1867년. 나쓰메 소세키가 태어난 해다. 심지어 일본 근대화의 랜드 마크인 메이지 유신보다 더 빨리 태어났다. 그러니 요새 말로 나쓰메는 '전설'. 말 돼?

 이 양반이 스물 세살에 영국에 유학을 했는데 워낙 처음부터 영어에 소질이 있었는데다가 현지까지 가서 공부를 했으니 그의 작품에 서양소설의 면면이 아주 흔연하게 배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소위 일본 판 '해외문학파'? 이 책에서도 그럤다. 초반에 주인공 다이스케, 이 친구는 서른 살이 되자 돈이 철철 넘쳐흐르는 아빠한테 얘기해서 도쿄 시내에 집을 하나 얻어(전센지 월센지, 아니면 그냥  샀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독립을 한 작자로, 독립을 하긴 했으되 사상, 예술, 영혼 또는 니미럴 뽕의 순결을 위해 직업을 갖지 않기로 하고 여전히 돈 많은 아빠한테 고마운줄도 모르고 한 달에 한 번 들러 생활비, 유흥비, 문화비, 식비 등을 받아 쓰는 룸펜 부르주아 인텔리겐챠, 한 마디로 쓰레기 중의 쓰레기다. 얘가 책 앞머리 부분에, 책상에 앉아 궁리하는 것이 유럽의 명작 가운데 바람난 유부녀가 많은데 모두 다 아름다운 얘기, 라는 거. 이 부분을 읽어 지나가면, 척, 알 수 있다. 매력적인 소재 '불륜'을 다룬 소설이란 것을. 

 그.러.나. 지금 내가 이 책이 불륜을 다룬 소설이라고 정의를 해버렸는 바, 열린 공간에다가 독후감을 쓰면서 작품의 마지막 쯤에 가야 이 책이 흥미 측면에서 가장 매력적인 '불륜소설'이라는 걸, 중간부터 짐작을 하다가 짐작 수준이 점점 더 깊어지다가, 나중에 가서 이게 '적극적 불륜소설임'을 알 수 있는데 그걸 확 얘기해버려 송구하기 그지 없어서 차마 줄거리에 관해선 더 이상 얘기하지 못하겠다. 양해해주시기를 바란다. (여기까지 얘기한 것도 참 유감스런 일이다)

 독후감을 쓰면서 무수하게 얘기했듯이 내 취향이, 아빠 물총 잘 맞아 생활에 관해선 아무 걱정도 없이 사는 인간들이 펼치는 심적 고민과 소위 '방황'하는 걸 무지하게 혐오하는데 딱 이 책이 그렇다. 조선시대에 (제대로 되지 못한)양반놈들이 노동을 멸시하고 오직 사유적 쾌락과 전혀 쓸데없는 윤리를 과시하고 강요했듯이 이런 건 세계적으로 소위 왕족이나 귀족들의 최대공약수이니만큼 유럽에서도 예술과 문학과 철학 등 인문학을 하는 인간들은 학문과 예술을 위해 직업을 갖거나 노동을 하는 걸 지독히 멸시했다. 내가 뭘 아나, 책을 읽다보니 거기 다 나오니까 짐작하는 것이지. 최근에 읽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장편소설 <늦여름>에서도 그런 말 무지 나온다. 그걸 나쓰메 소세키, 아니 적어도 책의 주인공 다이스케는 굳게 믿고 있다. 불륜의 결과? 한 여자를 새롭게 얻는 일. 그걸 갑부 아빠가 눈 뜨고 봐주겠느냐고. 그러니 이젠 스스로 돈 벌어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로 떨어진 다이스케의 고민은 깊어간다.

 "모든 직업을 다 떠올려본 뒤, 그는 방랑자에서 생각이 멈추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모습을 개와 사람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는 거지들 무리 속에서 발견할 수가 있었다. 생활의 타락은 곧 정신의 자유를 빼앗아간다는 점에서 그가 가장 고통스럽게 여기는 바였다. 그는 자신의 육체에 온갖 추하고 더러운 색을 칠하고 난 뒤에 자신의 정신이 얼마나 타락할까 하고 생각하자 오싹 소름이 끼쳤다." (308쪽)

 여기서 말하는 '생활의 타락'이란 놀랍게도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갖는 일'이다. 그것이 '정신의 자유를 빼앗아' 가서 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다이스케는 고통스러운 처지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다. 일을 하는 게 '자신의 육체에 온갖 추하고 더러운 색을 칠'하는 것이고 이에 따라 자신의 정신이 얼마나 타락할지 가늠할 수도 없는.... 서른살 먹은 코흘리개.

 물론 작가 나쓰메가 다이스케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러면서도 다이스케에게 이런 완벽한 정형을 부여했다는 것, 아직은 도가 덜 통한 독자와 평론가들에게 (사실은 한 마리 철부지 개새끼에 불과한) 다이스케가 급기야 대단한 불행을 맞이하게 됐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다이스케를 동정하게까지 만드는 것. 후드득, 나쓰메 소세키를 계속 읽어봐야겠다고 마음 먹게 만드는, 장.인.의.솜.씨.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7-03-28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 어처구니 없는 다이스케를 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이스케처럼 살 수 있음 좋겠다 싶더라고요. ㅋㅋ 밥벌이를 위해 자존심 팔지 않아도 될 룸펜 부르주아로 ㅎㅎ

Falstaff 2017-03-28 10:06   좋아요 0 | URL
룸펜 부르주아는 만인의 로망 아니겠습니까.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