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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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9월 11일 아침, 아메리칸 항공과 유나이티드 항공 소속의 민간여객기 두 대가 뉴욕의 랜드마크인 110층의 세계무역회관 쌍둥이 건물을 각각 들이받는 모습은, 그런 화면이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뉴스 시간에 나온다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여객기가 대형건물을 들이 받은 것도 충격적이었고, 이어서 110층 건물이 거의 동시에 그 자리에 가라앉는 것도 내 사고 능력을 초월하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아무리 봐도 도무지 진짜 벌어진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화면을 지금 생각해보면 TV를 통해 한 달 정도 하루도 빼지 않고 연속 상영됐다고 기억한다. 21세기에 접어들자마자, 지구 상 유일한 경찰국가임을 자임해 온 미국 땅에서 타국인이 미국의 재산과 인명을 살상한 가장 큰 사건이 벌어졌던 거다. 인명과 재산은 차치하고, 정말로 여객기가 건물과 부딪히고, 이어서 그렇게 거대한 건물이 폭삭 무너지는 건, 비록 사건 자체는 어마어마한 비극이며 결코 발생해서는 되지 않을 극악한 짓이었지만, 사건 장면을 보는 행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아 내가 언젠가는 이 감정에 대해 벌을 받지), 일종의 쾌감, 물론 적절한 단어는 아니지만 쾌감의 다른 형태였던 것, 아니면 화면을 보는 시각 행위 속에 이런 감정에 비슷한 것이 끼어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비슷한 장면을 하도 숱하게 봐서, 영화를 만든 바로 그 미국 스스로가 피해 당사자가 됐다는 아이러니도 터무니없는 감정의 아주 중요한 매개 또는 이유였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제일 중요한 건 1945년 이후 세계의 모든 방면에 패권을 잡고 아무거나, 아무 나라나 쥐고 흔들어대던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 것 아니었을까. 그러나 누구한테도 테러 장면을 보면서 은근한 쾌감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는 얘기 대신 야, 그거 정말 대단하더라. 말도 나오지 않더라고, 등등의 수사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만큼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남의 불행을 보고 쾌감 운운하는 건 정말 천벌을 받을 일이다. 돌아보면, 내 주위의 많은 또래 한국인들도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면서, 영화에서나 볼 일이 진짜 일어났다거나, 내 말하고 아주 똑같이, 대단하다, 대단하고 또 대단하다, 굉장하다, 라는 수사에서 말을 멈추었던 것으로 보아 그들도 모르긴 모르지만 나하고 비슷한 감정을 가졌으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드러낼 수 없는 참담한 일이었다는데 동의하지 않았을까.
 내가 지금 빌어먹고 사는 직장의 911 테러 당시 미국 본사 회장이 파키스탄 출신 미국인이었다. 파키스탄에서 태어나 (정상적인 남자들은 모두 군대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숱하게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무차별 테러를 경험했(다고 구라를 풀)고, 일찍이 영국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거의 완벽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봐서 파키스탄의 중산층 이상이었던 것 같은데, 이 자가 일찌감치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나 대학을 졸업한 나이가, 놀라지 마시라, 열네 살. 열여섯 살에 회사를 만들어 키워 팔아먹고, 서른다섯 살도 되지 않아 내가 '아직도' 빌어먹고 사는 다국적 기업의 회장 자리에 등극했는바,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책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의 주인공 화자 ‘찬게즈’가 스물한 살에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파키스탄 인이고, 소설의 작가 모신 하미드(비록 소설의 주인공보다 약 열 살 가량 많지만) 역시 열여덟 살 때 프린스턴으로 날아가 <빌러비드>, <재즈>, <술라>를 쓴 노벨 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을 사사했기 때문이다. 작가 또는 책의 화자 찬게즈에 의하면 제삼세계 출신의 유학생이 미국 본토 학생보다 학업성취도가 월등하게 높은 이유는, 정말로 소수 정예만 골라, 골라서 유학을 보내기 때문이라지만, 난 예전의 파키스탄 출신 전ex 회장새끼 때문에 아직도 파키스탄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알면서 영 고쳐지지 않는다.
 파키스탄 출신의 똑똑한 영재 하나가 프린스턴을 졸업하고(개츠비하고 동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유망하며 대졸 초임으로 2001년 당시 8만 달러 더하기 성과급을 주는 기업 평가 컨설팅 회사 ‘언더우드샘슨’에 입사를 하며 160쪽의 짧은 소설은 시작한다. 꿈의 직장에 취직을 하고, 여섯 명 입사한 가운데 1등을 차지하여 말 그대로 탄탄대로를 달리는 찬게즈. 거기다가 회사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짐에게 살뜰한 지원을 받고 있는 찬게즈는 언더우드샘슨에 취직하며 먼저 받은 돈으로 그리스 여행을 떠난 프린스턴 멤버 가운데 한 명인 에리카와 사랑에 빠진다. 짧은 소설이라 구체적 상황은 소개하지 않겠는데, 하여간 입사해서 스물두 살짜리가 퍼스트 클래스에 타고 필리핀으로 업무출장을 가는 도중에 911이 터지고, 사랑은 생각대로 되지 않고(생각대로 되면 그게 사랑이냐, 바보같이!), 911 이후 미국에서 이슬람을 믿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은근히 삐딱해지는 거 같고, 그러면서 같은 종교를 믿는 이웃국가 아프가니스탄을 맹렬하게 폭격해 수많은 인명이 죽어가고, 조국 파키스탄 역시 다른 종교를 믿는 인도와 일촉즉발의 핵전쟁 가까이 근접해있는 가운데 미국은 나 몰라라 뒷짐만 지고 있는 걸 깨닳는 찬게즈. 과연 찬게즈는 어떤 장단에 춤을 출까? 미국 내에서도 꿈의 직장에 근무하면서 (내 엑스회장새끼처럼) 승승장구하여 일신 상 영달을 도모하고 아름다운 미국여자를 아내로 맞아 행복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그딴 거 다 때려치우고(1960년대 아랍권과 이스라엘 전쟁당시 전쟁 발발과 동시에 아랍권의 있는 집 아들들이 다 유학길에 오른 것과 대비해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서둘러 조국으로 돌아와 총을 잡은 일과 비교 당하는 것이 수치스러워) 조국과 종교를 위해 군화를 신을 것인가, 이건 직접 알아보시라.
 다만 한 가지. 이보 안드리치의 걸작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예니체리’라는 집단이 등장한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읽다가 뒷부분에서 난데없이 이 ‘예니체리’를 거론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예니체리에 관하여 두산 백과사전은 이렇게 설명해놓았다.
 “오스만투르크 제목에 정복된 유럽 속령 내의 그리스도교도 중에서 장정을 징용하여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 엄격한 훈련을 실실한 다음 술탄의 상비친위군에 편입시켰다. 결혼하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것은 금지시켰으나 고봉(高俸:high salary)을 받고 고위, 고관에 영전하는 등용문이었으므로 자기 자식을 지원시키는 그리스도교도도 있었다.”
 이건 사전적 설명이고, 오스만투르크가 이웃한 그리스,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세르비아 등을 침략해 현지의 소년들을 거의 납치해 혹독한 훈련을 거쳐 자신의 친위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예니체리 출신의 터키 장군이 석조 다리를 드리나 강에 건조하고, 다리를 둘러싼 역사적 사건들을 그린 것이 <드리나 강의 다리>다. 왜 장황하게 이 이야기를 들먹이는가 하면, 미국을 필두로 하고, 일본이 뒤를 이어, 주로 제삼세계 국가 출신의 청년 학생들에게 비교적 수월하게 박사 등의 학위를 수여하고, 정말 인재라 생각하는 재원은 미국 시민권을 주어 미국인으로 살게 하고, 아니면 다시 그들의 고국으로 돌려보내 제삼세계의 핵심 지도부의 성원이 되게 지원한다. 그들은 각기 자기 조국에서 대표적 친미파로 행위 하는데, 이걸 보고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의 작가 모신 하미드는 주인공 찬게즈를 예니체리와 비교하려 했던 것이다.
 책은 모처에서 찬게즈가 건장한 미국인과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고, 음식을 먹고, 미국인이 묶은 호텔까지 데려다 주는 장면까지, 전적으로 찬게즈가 미국인에게 하는 대사로 되어 있다. 따라서 스스로는 자신을 찬게즈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며, 미국이란 말 대신에 ‘당신네 나라’라는 말을 사용한다. 미국의 군사자산에 의지하여 영토를 방위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완전히 동의하기 힘들지만, 미국과 제삼세계, 특히 이슬람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잠깐의 숙고를 요구받을 것임을 알고 책을 선택하시는 편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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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2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로도 있다고 하는데 한 번 보고 싶습니다.

그나저나 모신 하미드의 신간은 언제나 나오려
는지 궁금하네요.

예니체리는 미군에서도 이름만 달리 해서 채택
하고 있는 시스템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Falstaff 2018-03-22 15:13   좋아요 0 | URL
오, 영화로 만들면 정말 재미있을 거 같아요. 개봉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신 아미드는 지금 검색해보니까 ˝모신 하미드˝란 이름으로 문학수첩에서 한 권이 나와 있더군요. 책 소개글 보니 <...근본주의자>와 마찬가지로 2인칭 소설인 모양입니다.

레삭매냐 2018-03-22 15:26   좋아요 0 | URL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도 상당히 재밌게 읽었습니다.

신간은 제목이 <Exit West>네요.

영화 <Reluctant Fundamentalist>는 2012년
에 만들어졌네요. 케이트 헛슨과 리브 슈라
이버 그리고 리즈 아메드가 주연으로 나왔
네요.

Falstaff 2018-03-22 16:10   좋아요 0 | URL
와, 정말 많이 읽고 보셨습니다. @@
 
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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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들어와 아직까진 제일 재미있게 읽은 스릴러 소설. 두 권 800여 쪽의 장편소설임에도 이틀이면 독파가 가능하다. 근데 난 엿새 걸렸다. 오지게 마신 술과 이튿날의 숙취로 이틀 동안 휴가까지 낼 정도로 벌벌 기었고, 오랜만에 토요일, 일요일 또다시 이틀 동안 완벽하고도 보람차게 놀았다. 작은 아이가 깔아준 PC 게임하느라 날 새는 줄 몰랐다. 하여간 요새 남자들은 그놈의 게임 때문에 인생 망칠 위험이 높다. 내 인생에 술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살지는 않을 거라고 후회하듯, 현대의 젊은 청년들 역시 언젠가 후회하게 될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걸 누가 보장하겠는가. 게임의 속성이 대부분 전쟁을 수반한 땅따먹기. 인류가 네 발로 걷던 시절부터 수컷들의 가장 큰 충동을 화면에다 옮겨놓았으니 완전 몰입하는 거 같다. 이래저래 문명이 발달할수록 수컷들의 경쟁력은 날로 내리막길이고, 이 경향은 앞으로 길어야 3만년 안에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아, 이런 장황하고 터무니없는 각설이 또 있을까. 책 얘기하자.
 2001년에 사폰이 써서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책 <바람의 그림자>. 당시엔 완전히 유럽 폭격과 유사했던 모양이다. 아니, 유럽을 필두로 북아메리카, 그리고 브라질을 제외한 대륙의 모든 국가가 스페인 어를 사용하는 라틴 아메리카까지 <바람의 그림자>가 휩쓸어버렸다니 그 바람이 정말 대단하긴 대단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는 2005년에야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번역이 이루어졌는데, 한국에서도 역시 베스트셀러 대열에 섰었다고 봐야겠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일단 순문학, 소위 ‘순수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으로 짐작이 가는데, 그게 뭐. 문학이면 문학이지 순문학, 장르문학, 대중문학을 따진들 무엇 하겠는가. 잘 쓴 스릴러물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안개가 끼고, 바닷가에서 밀려온 습기로 인해 음습한 바르셀로나의 한 골목길에 ‘잊힌 책들의 묘지’라는 창고가 있다. 고서점을 운영하는 홀아버지 손에 이끌려 책들의 묘지에 들어가게 된 열 살짜리 다니엘. 묘지엔 엄격하게 지켜야하는 규칙이 있으니, 처음 묘지에 들어 선택한 책은 일생에 걸쳐 마치 자기 자신인 듯 평생에 걸쳐 책을 보호해야 하는 것. 다니엘이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책 한 권을 뽑아드니 생전 처음 듣는 소설가 ‘훌리언 카락스’라는 인물이 쓴 <바람의 그림자>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 이때 주인공 다니엘의 나이 열 살. 열 살 소년에게 비밀이 있을 수 있을까? 아이는 당연히 책에 관한 자신의 의무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지만 <바람의 그림자>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결코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온갖 동네를 다니며 자신이 희귀본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따발따발 떠들고 다니기에 이른다. 무지하게 돈이 많아 직업인 고서적상은 심심풀이로 하고 있는 돈 구스타보 바르셀로가 거액을 제시하면서 자신에게 팔 것을 제안했으나 단칼에 거절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이고, 열 살 먹은 꼬마가 돈 구스타보의 조카이자 앞을 못 보는 천하의 미인 클라라에게 난생처음 사랑을 느껴 <바람의 그림자>를 줘버리고 말았다는 걸, 이걸 어째.
 다니엘이 훌리안 카락스가 쓴 <바람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의 앞에 등장하는 하이드 씨, 아니, 라인 쿠베르 씨. 심각한 화상으로 얼굴 전체가 뭉개지고, 모든 신체에 끔찍한 경화현상이 벌어진 쿠베르 씨는, 책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왜냐고? 도무지 훌리오 카락스를 참아주지 못할 정도라서 그가 쓴 모든 책을 불살라버리려는 의지 하나 때문이다. 이것을 계기로 다니엘은 <바람의 그림자>를 비롯해 훌리오 카락스에게 진지한 호기심이 생겨 카락스의 생애를 파헤치기로 결심을 하는데, 아뿔싸, 자신을 도와줄 조력자가 한 명도 없다.
 유방에게 한신과 장량이 있었고, 항우에겐 범증이, 유비에게 제갈량이, 조조에게 순욱이 있었듯 진정한 주인공한테는 언제나 출중한 조연이 등장한다. 홈즈에게 왓슨이 있었던 것처럼. <바람의 그림자>에서도 비록 뼈만 남은 알량한 체격이지만, 현명하고 깡다구 있고, 다니엘에게 충성스럽고, 불의와 파시즘과 폭력집단에 결연히 저항하는 현인wise man이 등장하니 ‘페르민’. 다니엘이 ‘잊힌 책들의 묘지’에 들른 후 몇 년이 지나 본격적인 사춘기에 접어들어 돈 구스타보의 앞 못 보는 조카딸 클라라에게 홀딱 빠진 것까지는 좋았는데(아, 이 대목에서 이순원이 쓴 <19세>를 읽어보시면 좋겠다), 사춘기의 불타는 갈증, 미인의 피부와 생식기관에 대한 말 못할 화염 같은 충동은 다니엘에게 한밤에 클라라 혼자 있는 저택에 방문하여 그냥 그녀의 냄새라도 한 번 맡아볼 것을 추동했고, 그리하여 <바람의 그림자>를 읽어주며 친해져 이젠 무람없이 클라라의 방에 들락거리던 다니엘이 깊은 밤, 열린 창문을 통해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천상의 클라라의 방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피아노 선생이자 스페인의 유망한 작곡가 아드리안 네리 씨의 벌거벗은 엉덩이를 부여잡고 콧소리를 킁킁내고 있던 것이었는데, 이게 웬 망측한 일이냐고 기분이 엉망이 된 아드리안 네리 선생이 급하게 옷을 대충 추려 입고, 자신보다 훨씬 더 기분을 잡쳐버린 우리의 다니엘의 귀싸대기를 몇 방 후려갈겨 입술을 터뜨리고는 현관 계단에서 내 팽개쳐버렸을 때, 바로 이때, 한 거지발싸개같이 현관 앞에서 밤을 보내고 있던 무숙자homeless 페르민이 등장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얘기할까?
 좋다.
 1. 페르민의 등장은 좀 과하게 설정한 티가 난다. 왜냐하면 페르민은 홈즈의 왓슨과도 비교 불가, 이이에겐 왓슨 따윈 아무것도 아니고 제갈량이나 장량 같은 치밀한 뇌 활동과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 그리고 일찍이 합종설合從說을 주장한 소진처럼 엔진 혹은 발동기를 장착한 세 치 혀를 지니고 있는 슈퍼스타이기 때문이다.
 2. 책의 또 다른 주인공, <바람의 그림자>를 쓴 훌리오 카락스와 그의 친구들이 얽히고설킨 악연이 과하게 유별나지 않나 싶다. 이 정도면 인생불운의 전 지구적 대표선수들만 추슬러 모아놓은 수준이다.
 3. 잘난 척을 좀 하자면, 훌리오 카락스의 책을 모두 찾아내 불태우려는 욕망에 가득 찬 괴기스런 인물 라인 쿠베르 씨의 정체가 처음부터 누구 아닐까, 싶다가 점점 확신에 가까워지는 기분. 즉 획기적인 반전은 아니라는 거.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최고로 즐길 만한 흥미진진한 작품이라는 거. 얼마나 재미있느냐 하면, 난 이 책이 해피 엔드로 끝날지, 아니면 비극적 종말을 고할지, 마저도 절대로 가르쳐드리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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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 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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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에포크(Belle Epoque) 시대. 우리말로 하면, 좋은 시절, 네이버 검색해보면 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문화가 넘치고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큰 전쟁도 없던 시대. 딱 이때 활약하던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곤 실레. 만 28년 4개월만 살다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매독 균이 길고 긴 잠복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자 숟가락 놓은 천재화가. 클림트의 영향을 받아 표현주의적인 작품들을 많이 생산했다는데, 구글 검색해서 이 화가의 그림을 구경해보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강렬하다는 것, 사납다는 느낌, 혹은 그걸 초월해 좀 괴기스럽기도 하고 자세가 하나같이 불안정한 것까지 다 합해, 딱 한 마디로 불편하다는 거, 근데 상당히 색다르고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점. 두 번째가, 요새 감상자 수준이 아니라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감상자라면 외설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었을 거 같다는 거. 실레, 또는 쉴레 이전까지 누드화에선 거의 대부분, 물론 그러지 않은 화가도 제법 됐지만 어쨌든 많은 화가들이 여성의 누드를 그릴 때 풍만한 가슴을 자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랫도리엔 털도 나지 않은 이상한 사람을 그린데 반해서, 실레의 여성누드는 매우 불편한 자세에다가 뼈에 살갗을 살짝 도배해 놓은 듯 마른 여성들, 그래서 빈약한 가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엔 제법 삐죽하니 털이 돋아 있는데, 가슴의 발달정도와 털의 숱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소녀, 남자의 경우에도 (거대 남근을 자랑하는)자화상을 제외하면 소년의 누드가 주를 이룬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독특한 선과 색, 모델의 기형적 포즈,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알았는데 엄지손가락을 거의 그리지 않은 독특하게 길쭉한 손가락 등의 개성은 그가 그린 그림이 유독 책 표지에 많은 쓰인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잠깐 생각해보았고, 간단하게 을유문화사하고 민음사에서 낸 세계문학 시리즈의 책표지를 보니, 정말 많이도 썼다. 그림을 한 번 보자. 차례로, 앉아 있는 아가씨 <라이겐>, 예언자 <프랑켄슈타인>, 어린 소년 <필립과 다른 사람들>, 우정 <도둑일기>, 웅크림 <상속자들>, 자화상 <의식>, 토시를 입은 자화상 <피라미드>,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 <인간 실격>.

 

 

 왜 난데없이 에곤 실레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책 속에 갓 열 살이 넘은 폰치토라는 꼬마가 아주 중요한 등장인물인데, 이 폰치토가 에곤 실레를 좋아하고, 도를 넘어 숭배하는 수준을 간단히 능가해 자신이 실레가 환생한 인물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나도 위에서 얘기한 거, 실레가 그림에 유독 엄지손가락을 숨기려했다는 것도 폰치토가 말해줘서 알았다. 에곤의 아버지가 어린 아가씨와 결혼해 신혼여행을 떠났지만 너무 어린 아가씨라서 첫날밤의 구름이 비를 만드는 묘한 조화를 알지 못해 첫날밤은 그냥 잤지만 다음날도 그러는지라 화딱지가 솟구쳐, 그래 너 혼자 자라, 난 나대로 해결하겠다, 해서 곧바로 매독에 걸려, 오랜 잠복기간 동안 아들 딸 낳고 살다가 한 순간에 발병을 해 정신착란으로 죽었다는 가정사도 이 책을 읽고 알았다. 하여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요사스런 일, 뒷담화들 참 많이 안다. 인정한다.
 성적 환상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담시.
 딱 한 문장으로 쓴다면 위와 같이 이야기하겠다. 이제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해 정수리엔 몇 올 남지 않은 50대 남자 리고베르토씨가 10년 전 갓난 아이 하나 딸린 홀아비 시절에 젊고 포동포동하고 육감적이고 겨드랑이 털을 말끔하게 밀어버려 애초부터 악취를 제거해버린 반면 다리 사이엔 삼각팬티의 양 옆으로는 빼꼼하니 조밀한 털이 삐져나오는 매력적이고 육감적이고, 참 아름다운 여인인 루크레시아와 결혼을 했다. 당시 갓난아기가 이제 열한 살이 조금 넘어 에곤 실레에 푹 빠져 사는 폰치토이며, 폰치토와 새엄마 루크레시아는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미성년자 성추행 아니면 성폭행 비슷한 혐의를 받아 지금은 리고베르토씨와 별거 중이다. 책을 읽어보면 거의 틀림없이 루크레시아의 행동과는 별개로 똑똑하고 되바라지고(가끔 선의로 얘기하는 사람들은 조숙하다고 하는데, 되바라진 건 되바라진 거다!), 정말 귀엽고 아름답고 이런 걸 다 합해 잘생겼으며, 어떻게 보면 예수의 심성이고 어떻게 보면 유다의 심성을 가진 폰치토, 이 아이의 도발로 인해 아동 성추행 또는 성폭행의 죄명을 뒤집어 쓴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정확한 건 알려드릴 수 없다.
 하여간 그래서 현재는 별거 상태이며, 루크레시아는 폰치토한테 무지하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소학교에 다니고 있는 폰치토가 오후 수업을 땡땡이치고 새엄마가 사는 집의 벨을 누르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하는데 뭐 별 스토리는 없다. 별 스토리가 없는데 그걸 여기다 쓸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것도 생략.
 그러면, 천하의 설레발꾼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별 얘기도 없는 책으로 무려 두 권 454쪽짜리 책을 썼겠는가. 천만의 말씀이지. 그리하여 내가 애초에 이 책은 성적 환상과 에로티시즘에 관한 담시라고 얘기한 거다.
 젊은 아내의 이름이 루크레시아. 서기전 510년 근방에 로마로 하여금 왕정을 물리치고 공화정이 들어서게 만든 정절녀 겁탈 사건의 피해자 주인공이 루크레시아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여주인공의 이름을 처음 봤을 때 조금 불길한 기운을 숨길 수 없었는데, 그건 괜한 걱정. 처음부터 끝까지 요사의 쉬지 않는 두뇌활동, 손목과 손가락에 의한 타이핑은 독자로 하여금 진짜, 진짜 매력적인 성적 환상, 그리고 진정한 에로티시즘의 세계, 그러나 가끔 허파가 빠지게 웃긴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미친 척하고 아주, 아주 진지하게 그려낸다. 나, 이럴 줄 알았다.
 뭘 보고 그러느냐고?
 리고베르토 선생이 아름다운 루크레시아와 별거하는 1년 동안 루크레시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온갖 환상적인 성적 몽상을, 아들 폰치토의 입을 통해 밝히는 에곤 실레의 그림 속 변태적 성적 취향과 섞어서 껌벅 넘어가게 만들었다.
 루크레시아는 수많은 고양이가 침대 위에서 가르릉대는 가운데 온 몸에 꿀을 바르고 리고베르토씨가 모르는 남자와 믿기지 않는 정사를 벌인 다음, 모든 과정을 남편의 귀에 대고 속살거리기도 하고, 남편의 양해 또는 권유에 따라, 젊은 시절 루크레시아를 짝사랑하다 이루어지지 않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현재 MIT 단과대학장 자리에 오른 남자와 유럽 여행을 동반해 벌어지는 침대 의식 역시 리고베르토씨에게 빠짐없이 이야기함으로써 리고베르토씨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기도 한다. 여행 중 언제나 신사적이고 도덕적인 자세를 유지한 학장 선생에게 믿기지 않는 인내에 대한 선물로 루크레시아는 아래와 같은 그림의 여자와 똑같은 자세를 구경시켜줌으로 보답하기도 하고,

 

앙리 제르벡스, <롤라>

 

 드디어 마지막 날 밤엔 그동안 밀린 만리장성을 쌓기도 하는데, 진짜로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정중하고 틀림없이 신사인 학장선생은 우렁차게 큰 목소리로 “돌아오라 쏘렌토로”를 노래하기 시작했고, 장안長安에서 시작해 요동반도까지 이어지는 만리장성을 쌓는 내내 이태리 칸쪼네는 물론이고 페루의 유행가와 민요에 이르기까지 온갖 노래를 함으로써, 급기야 호텔 지배인이 조용히 해달라고 전화를 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까지, 얼마나 요절복통을 하게 만드는지, 이건 읽어본 사람만 안다. 그것뿐인가. 루크레시아의 성적 모험은 동성애와, 남편과 더불어 다른 여인까지 참가하는 쓰리 섬까지, 틀림없이 요사가 주장하는 성적 가능성, 포르노가 아닌 에로티시즘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선까지 몽땅 다 그려놓는 바, 작가의 주장이 뭔가 하면, 서로 합의하여 진행하는 둘, 셋 또는 네 명까지, 절대 네 명을 넘어서지 않으며, 결코 혼자서도 아닌 정사행위다.
 야할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유쾌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뿐 절대 외설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침대 위 행위를 수반한 요사의 세계관마저 읽을 수 있는 재미가 아주 진진하다. 예컨대, 애국심이라는 것은 악당의 마지막 피난처라는 등, 지역주의를 비롯한 모든 패거리 문화를 배격하는 세계인으로의 요사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재미있지만 절대 외설적이지 않아서, 난 지금 쓰는 독후감을 마치자마자, 대학졸업 후 지금 본격적으로 백수시대白首時代로 진입한 작은 아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려 한다. 백수생활이 얼마나 힘들겠나. 이거 읽으면서 기운 좀 내라고. 낄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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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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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 모리슨. 이이의 <빌러비드: Beloved>. 나로 하여금 아메리카 흑인문학에 매력을 느끼게 만든 작품이다. 그 후 조라 닐 허스턴, 리처드 라이트, 랠프 엘리슨, 엘리스 워커, 글로리아 네일러 등을 찾아 읽었다. 자연스레 모리슨의 다른 작품에도 호기심을 느껴왔는데, 그래서 <재즈>를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인터넷 책방 보관함 목록에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지금, 왜 이 책을 진작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고 보관만 해 놓았었을까, 한탄하고 있는 중이다. 책을 읽은 다음 이런 후회를 하게 만드는 작품을 읽었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책을 읽는 재미, 감동, 만족을 흠뻑 느끼게 해주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작가가 1931년생. 작품의 무대는 1926년. 그러나 1926년을 만들기 위한 흑인 등장인물들의 아픈 과거 배경은 1870년대 생인 남자 주인공 조 트레이스의 탄생 이전 약 20년 전까지, 그러니까 1850년대 까지 내려간다. 열여덟 살이 되기까지 자신이 틀림없이 백인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황금색 피부와 금발의 아름다운 청년 골든 그레이가 열여덟 살이 되어 드디어 독립을 하기 바로 전에,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온 늙은 흑인 하녀로부터, 자신이 도도하고 미모에 눈부신 금발의 어머니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 혼혈임을 알고, 하도 수치스러워 친부를 살해하기 위해 성인으로의 첫 번째 발길을, 흑인 아버지를 향해 가다가 사필귀정이라, 자신마저 스스로 흑인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대목 같은 것이 난데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즉 각 관련 사건이 순차적으로 나열되는 것도 아니고, 독자가 같은 감정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게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모리슨이 대단히 불친절한 작법을 구사했다고 볼 수 있겠으나, 바로 그것이 책 제목을 “재즈”라고 달 수 있는, 애초부터 그리 작정을 하고 글을 쓴 것임을, 누가 알 수 있었을까.
 솔직하게 얘기해서 토니 모리슨의 <재즈>는 무대가 뉴올리언스나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아니면 뉴욕이며, 담배연기가 가득한 실내에서 쿵쿵거리는 더블베이스의 낮은 음이 착 깔려있는 청각공간에서 때론 클라리넷이, 때론 색소폰이나 트럼펫 등의 금관악기가, 작은 퍼커션과 함께 거칠 것 없고, 규칙도 없고, 그저 염화시중의 미소 같은 그들만의 소통 속에서, 악사들의 관자놀이에서 뺨을 거쳐 목에 타고 굵은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리는 광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시기가 1926년이잖은가. 스콧 조플린이 죽고 어느덧 10년이 흘러 카운터 베이시, 듀크 엘링턴 등이 찬란한 시기를 예약한 상태이며, 위대한 양대 재즈 아티스트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이 머리통에 쇠똥을 뒤집어쓰고 이제 막 세상 구경을 한 때였다. 음반시장에 블루노트 레이블은 아직 생기지도 않았고 재즈 음반, 이때, ‘음반’이 아니라 요새는 ‘비닐’이라 불리는, ‘레코드 판’은 오케, 블랙스완, 체스, 사보이, 킹, 피코크가 흑인 재즈의 메인 레이블임을 주장하고 있던 시절.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은 즉흥연주, 라고 주장할 수 있겠고, 토니 모리슨도 그의 후기에 밝혔듯이 바로 즉흥적인 연주, 작가에겐 즉흥적인 글쓰기, 예컨대 클래식 협주곡의 카덴차나, 보컬의 경우 스캣 같이 처음부터 작품의 틀을 마련하지 않고 그냥 손목 돌아가는 대로 썼다는 것. 이걸 곧이곧대로 믿으실 분은 믿으시라. 난 인정하고, 일리 있다고 생각하는 한편, 전적으로 손 가는대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 만 원 건다. 물론 꽉 짜인 규격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결과적으로 독자가 쉽사리 술술 읽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사실 재즈도 그렇다. 결코 쉽게 들리지 않는 장르, 웬만큼 도가 트지 않으면 협주/협연이 불가능한 즉흥연주와 마찬가지로 귀 명창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투자가 없으면 즐기기 쉽지 않다. 거기에 각 장章마다 등장하는 인물도 다르고, 심지어 작가 모리슨이 툭툭 등장해 교통정리를 해주기도 하는데 그게 오히려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기도 하는 거.
 원문은 모르겠지만 한글로 번역한 <재즈>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음악적 리듬을 타기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대신 참으로 절묘한 문장들과, 문장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진정한 글들이 참으로 많다. 딱 하나만 예를 들어보면, 318쪽에 쉰 살이 넘은 아줌마 바이올렛 트레이스가 이렇게 조언한다.

 

 “바로 그게 문제란다. 만일 네가 삶을 바꾸지 못하면 삶이 너를 바꿔놓을 거야. 그리고 그건 전부 네 잘못이 되지.”

 

 책을 열자마자 상황은 마치 소설의 절정 상태 비슷하게 이르게 만들었다. 쉰 살이 넘은 화장품 외판원 조 트레이스 씨가 열여덟 살 먹은 아가씨 도카스와 바람을 피우다가, 당연히 도카스가 싫증을 느끼면서 청년을 사랑하게 되니 질투에 눈이 먼 조가 파티장에서 도카스의 어깨에 총알을 박아버린다. 총을 맞은 도카스가 끝까지 누가 자신에게 총을 쐈는지 밝히지 않고 죽는 바람에 트레이스 씨는 여전히 자유상태이지만 도카스에 대한 사랑에 이젠 죄의식까지 더해 무척 피폐해져 있다. 그리하여 며칠 후 드디어 도카스의 장례식. 장례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교회에 이제 관을 덮기 바로 전 조 트레이스의 아내 바이올렛 트레이스 여사가 도카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자 접근하더니 칼로 이미 죽은 도카스이 얼굴을 내리 찍었지만, 귀 밑에 약간의 상처만 내고는 젊은 남자들의 손에 들려 교회 밖으로 내팽개쳐진다.
 이건 책을 열자마자 불문곡직하고 등장하는 장면이니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려 애쓸 필요가 없을 듯하다. 다만 이 스토리의 시작을 읽는 분이, 장면소개 때문에 책 전체를 엽기, 불륜, 부도덕 등의 색안경을 쓰실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은 꼭 첨가해야겠다. <빌러비드>에서도 그랬듯이 <재즈>에서도 아메리카의 흑인들이 받아온 불평등과 당연시된 차별, 이런 것들만 연속적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이들도 백인, 심지어 동아시아 우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사랑하고, 신뢰하고, 배신하고, 질투하고, 서로 도와주고 그렇게 사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진정한 사랑이 어떻게 공고해지는가 하는 과정이라고 읽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하여간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수많은 흐름 가운데 그래도 괜찮은 길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합당한 물결을 따라 가는 과정을 그렸다고 읽을 수도 있고, 아니다, 아니다,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 살면서 사랑하고 늙어가는 너무나 보편적인, 그래서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진지하게 말해서, 이런 책을 우린 흔히 이렇게 말한다.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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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2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빵이시네요 :>

전 지금 <술라> 읽고 있는데 마침 집에
예전에 들녘에서 나온 <재즈>가 있더라구요.

문학동네 버전으로 읽어 보고 싶은데 굳이
새 책을 살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

토니 모리슨의 신간도 나와서 어떤 책부터
먼저 시작해야 하나 고민이네요.

Falstaff 2018-03-22 15:09   좋아요 0 | URL
<술라>도 재미 있을 거 같아서 저도 지금 보관중입니다. 그러니 매냐 님께서도 선빵입니다. ^^
맞아요. 먼저 나온 책이 있는데 굳이 새로 나온 같은 책을 ˝사서˝ 읽을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혹시 모르겠지만요!
 
쌀 (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위화가 1960년 쥐띠, 쑤퉁이 63년 토끼띠. 둘이 처음 만나니까 서로 비슷하게 느낀 것이, 어려서부터 같이 놀던 동네 친구 같았다나? 난 영화 <홍등>, 장이모우 감독에 공리가 주연을 한 이 영화를 참 재미있게 봤는데, 그게 쑤퉁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거란 걸 알고, 그래? 그럼 쑤퉁의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쌀>을 고른 거다. 말인즉 <쌀>이 내가 처음 읽은 쑤퉁이란 말이다. 그리고 거의 틀림없이 마지막으로 읽은 쑤퉁의 작품이 아니겠느냐, 하는 점도 부인하기 힘들다. 참 다행인 것이 알라딘 헌책방에서 사서 그나마 좀 위안이 된다는 거. 조만간에 아파트 단지 도서실에 기증해야겠다.
 용 다섯 마리를 일컫는 이름의 우룽(五龍)이 주인공. 고향 펑양수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유래 없는 대 풍년이 도래할 찰나, 그만 늦장마가 피눈물 나는 폭우로 이어지는 바람에 끝없는 들판에 넘실대던 익은 벼들의 황금물결이 진짜 황토 물에 몽땅 잠겨, 이제 남은 것은 겨울바람 소슬하니 불어오기 전에 굶어죽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지자, 이렇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도시로 향하는 화물열차에 몰래 올라 도시에 도착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우룽은 사흘을 내리 굶다가 부두에서 쌀을 실은 수레를 무작정 따라 상가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시장거리 와장가(瓦匠街)의 싸전 대홍기(大泓記)에 도착해, 싸전 주인 펑사장에게 사정사정을 해 임금 없이 밥만 먹여주는 조건으로 취직을 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낯선 도시에 떨어져 싸전으로 오기 전까지 겪은 더럽고 수치스런 경험은 소개하지 않았다.
 싸전에 딸이 둘 있는데, 큰 것이 쯔윈(織云)이요 작은 것이 치윈(綺云). 쯔윈으로 말하자면 몸매 빵빵하고 얼굴도 동그라니 당시 중국인의 시각에 입각한 전형적인 미인에다가 살집도 적당하니 붙어 사내새끼라면 어떻게 한 번 껄떡거려볼만한 방년 열여덟의 젊디젊은 아가씨요, 작은 치윈으로 말하자면 모든 일을 차갑게 계산적으로 따져서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지만 아버지 펑사장 이상으로 싸전의 경영을 거의 혼자 해나가고 있는 당찬 아가씨다. 쯔윈, 역시 예쁘고, 성격 발랄하고, 오픈되어 있는(까졌다는 얘기) 아가씨가 20세기 초반, 계산해보면 1910년대 중반쯤이라면 태생부터 문제를 갖고 태어난 것이라, 쯔윈 역시 예외가 아니라서 벌써 열다섯 살 때 자진volunteer해서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귀족계급이자 암흑가의 최고 보스인 뤼대감의 정부자리를 꿰찬다. 그리하여 얻는 것이라고는 와장가에서 단연 돋보이는 스캔들과 뤼대감으로부터 얻어내는 수많은 고급 옷들. 쯔윈은 스캔들 따윈 눈도 하나 깜박거리지 않는다. 눈 깜박? 천만의 말씀. 오히려 뤼대감이 자신을 조금 멀리 하는 듯 보이자마자 뤼대감의 암흑가를 대리해왔던 도시의 항구harbor 방면 총대장이자 주인공 우룽의 첫 번째 원수인 아바오를 밤마다 창문을 통해 자기 방에 들이는 놀라운 엽색행각도 서슴지 않는다. 불과 나이 열여덟에.
 아차, 쯔윈이 임신을 해버린다. 아바오가 쯔윈의 창문을 넘나든다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우룽이었는데, 어떻게 도시의 권력자 뤼대감도 연인의 배신을 알아내어, 어느 날 유장하게 황토색 강물이 흐르는 장강 속으로 아바오가 가라앉을 수 있었을까. 하여간 그랬다. 이제 배는 불러오지, 뤼대감으로부터 완전 소박을 맞았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쯔윈의 아버지 펑사장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한 숟가락 가득 겨자를 퍼먹는 심정으로 촌놈 우룽과 쯔윈을 혼인시켜버린다. 난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정상적인 20세기 초반 중국 아니겠는가 싶었다. 근데 혼인 날, 뤼대감이 꼭 첫날밤에 열어보라고 칠기를 한 고급 목합을 선물하는 장면에서 첫 번째로 작가 쑤퉁에게 질려버렸다. 임신한 여자에게 장가든 촌놈 우룽이 자신을 우롱한 아바오와 쯔윈의 밀통을 몰래 뤼대감에게 알려줘 아바오를 죽게 만든 건 그렇다고 쳐도, 썩어가는 아바오의 생식기를 첫날밤에 열어보라고 목합에 담아 선물했다는 설정은, 오버다, 오버. 거기다가 바로 다음날, 먼 곳에 가서 배 두 척의 쌀을 사오라는 장인의 심부름을 가게 된 우룽. 심부름의 목적은 우룽을 죽여 쯔윈으로 하여금 과부 신분으로 만들려는 꼼수였던 것. 이쯤 되면 이후 우룽의 처가에 대한 악행은 일면 당위성을 갖기는 하지만, 엽기 스토리, 정말 해도 너무한다.
 몇 달 후 쯔윈이 아들을 낳음으로 해서 자손 없는 뤼대감의 여섯 번째 첩으로 들어가 거의 하녀 수준으로 살게 되고, 뇌졸중 후유증으로 펑사장이 죽어가며 마지막 남은 힘으로 더럽고, 길고, 노인 특유의 바짝 말라 두껍게 각질이 덮인 손톱으로 우룽의 왼쪽 눈알을 파 애꾸로 만들어 놓고 죽은 다음, 우룽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처제 치윈을 두 번째 아내로 맞아들인다. 이후 우룽이 죽을 때까지 싸전 대홍기와 대홍기를 둘러싼 와장가와 도시 속에서 우룽, 쯔윈 남매, 쯔윈 남매의 후손들이 펼치는 눈뜨고 못 볼 행각들의 나열. 중국인과 정서 차이인줄 모르겠지만 어떻게 이런 작품을 모옌, 위화, 심지어 다이 허우잉과 비견하는 위치로 올릴 수 있는지 정말 난감하다. 그러고 보니 <홍등>마저 내게 인상 깊게 남아있는 건 장이모우 감독의 영상미, 쉽게 얘기해서 필름의 색채감이었지(공리의 미모는 논외로 하자 뭐!), 결코 작품의 스토리 라인은 아니었던 거다.
 하여간 죽고 죽이고, 물고 물리고, 때리고 맞는 순환. 이것이 도시에서 사람이 사는, 또는 1910년대부터 30년대까지 중국에서 사는, 살아내는, 생존하는 방식이었다고 주장하는 거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는지, 난 도통 모르겠다. 당연히 문학이 구름 위의 궁전에서 천상의 노래만 하라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지상의 인간들이 오직 생각으로만 품을 수 있을 거 같은 악행으로만 점철하면서 그걸 보고 사실주의입네, 리얼리즘입네, 함부로 주장하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의미에서 <쌀>은 수준 이하의, 습작 정도의 작품이라고 결론 내는 것이며, 다시는 쑤퉁을 읽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 어, 이 책도 양장본, 반양장본이 있네. 난 반양장본을 읽었다. 새삼 그쪽으로 글을 옮기려고 하니 귀찮다. 그냥 내비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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