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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 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4년 12월
평점 :
벨에포크(Belle Epoque) 시대. 우리말로 하면, 좋은 시절, 네이버 검색해보면 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문화가 넘치고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큰 전쟁도 없던 시대. 딱 이때 활약하던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곤 실레. 만 28년 4개월만 살다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매독 균이 길고 긴 잠복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자 숟가락 놓은 천재화가. 클림트의 영향을 받아 표현주의적인 작품들을 많이 생산했다는데, 구글 검색해서 이 화가의 그림을 구경해보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강렬하다는 것, 사납다는 느낌, 혹은 그걸 초월해 좀 괴기스럽기도 하고 자세가 하나같이 불안정한 것까지 다 합해, 딱 한 마디로 불편하다는 거, 근데 상당히 색다르고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점. 두 번째가, 요새 감상자 수준이 아니라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감상자라면 외설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었을 거 같다는 거. 실레, 또는 쉴레 이전까지 누드화에선 거의 대부분, 물론 그러지 않은 화가도 제법 됐지만 어쨌든 많은 화가들이 여성의 누드를 그릴 때 풍만한 가슴을 자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랫도리엔 털도 나지 않은 이상한 사람을 그린데 반해서, 실레의 여성누드는 매우 불편한 자세에다가 뼈에 살갗을 살짝 도배해 놓은 듯 마른 여성들, 그래서 빈약한 가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엔 제법 삐죽하니 털이 돋아 있는데, 가슴의 발달정도와 털의 숱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소녀, 남자의 경우에도 (거대 남근을 자랑하는)자화상을 제외하면 소년의 누드가 주를 이룬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독특한 선과 색, 모델의 기형적 포즈,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알았는데 엄지손가락을 거의 그리지 않은 독특하게 길쭉한 손가락 등의 개성은 그가 그린 그림이 유독 책 표지에 많은 쓰인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잠깐 생각해보았고, 간단하게 을유문화사하고 민음사에서 낸 세계문학 시리즈의 책표지를 보니, 정말 많이도 썼다. 그림을 한 번 보자. 차례로, 앉아 있는 아가씨 <라이겐>, 예언자 <프랑켄슈타인>, 어린 소년 <필립과 다른 사람들>, 우정 <도둑일기>, 웅크림 <상속자들>, 자화상 <의식>, 토시를 입은 자화상 <피라미드>,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 <인간 실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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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난데없이 에곤 실레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책 속에 갓 열 살이 넘은 폰치토라는 꼬마가 아주 중요한 등장인물인데, 이 폰치토가 에곤 실레를 좋아하고, 도를 넘어 숭배하는 수준을 간단히 능가해 자신이 실레가 환생한 인물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나도 위에서 얘기한 거, 실레가 그림에 유독 엄지손가락을 숨기려했다는 것도 폰치토가 말해줘서 알았다. 에곤의 아버지가 어린 아가씨와 결혼해 신혼여행을 떠났지만 너무 어린 아가씨라서 첫날밤의 구름이 비를 만드는 묘한 조화를 알지 못해 첫날밤은 그냥 잤지만 다음날도 그러는지라 화딱지가 솟구쳐, 그래 너 혼자 자라, 난 나대로 해결하겠다, 해서 곧바로 매독에 걸려, 오랜 잠복기간 동안 아들 딸 낳고 살다가 한 순간에 발병을 해 정신착란으로 죽었다는 가정사도 이 책을 읽고 알았다. 하여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요사스런 일, 뒷담화들 참 많이 안다. 인정한다.
성적 환상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담시.
딱 한 문장으로 쓴다면 위와 같이 이야기하겠다. 이제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해 정수리엔 몇 올 남지 않은 50대 남자 리고베르토씨가 10년 전 갓난 아이 하나 딸린 홀아비 시절에 젊고 포동포동하고 육감적이고 겨드랑이 털을 말끔하게 밀어버려 애초부터 악취를 제거해버린 반면 다리 사이엔 삼각팬티의 양 옆으로는 빼꼼하니 조밀한 털이 삐져나오는 매력적이고 육감적이고, 참 아름다운 여인인 루크레시아와 결혼을 했다. 당시 갓난아기가 이제 열한 살이 조금 넘어 에곤 실레에 푹 빠져 사는 폰치토이며, 폰치토와 새엄마 루크레시아는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미성년자 성추행 아니면 성폭행 비슷한 혐의를 받아 지금은 리고베르토씨와 별거 중이다. 책을 읽어보면 거의 틀림없이 루크레시아의 행동과는 별개로 똑똑하고 되바라지고(가끔 선의로 얘기하는 사람들은 조숙하다고 하는데, 되바라진 건 되바라진 거다!), 정말 귀엽고 아름답고 이런 걸 다 합해 잘생겼으며, 어떻게 보면 예수의 심성이고 어떻게 보면 유다의 심성을 가진 폰치토, 이 아이의 도발로 인해 아동 성추행 또는 성폭행의 죄명을 뒤집어 쓴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정확한 건 알려드릴 수 없다.
하여간 그래서 현재는 별거 상태이며, 루크레시아는 폰치토한테 무지하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소학교에 다니고 있는 폰치토가 오후 수업을 땡땡이치고 새엄마가 사는 집의 벨을 누르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하는데 뭐 별 스토리는 없다. 별 스토리가 없는데 그걸 여기다 쓸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것도 생략.
그러면, 천하의 설레발꾼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별 얘기도 없는 책으로 무려 두 권 454쪽짜리 책을 썼겠는가. 천만의 말씀이지. 그리하여 내가 애초에 이 책은 성적 환상과 에로티시즘에 관한 담시라고 얘기한 거다.
젊은 아내의 이름이 루크레시아. 서기전 510년 근방에 로마로 하여금 왕정을 물리치고 공화정이 들어서게 만든 정절녀 겁탈 사건의 피해자 주인공이 루크레시아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여주인공의 이름을 처음 봤을 때 조금 불길한 기운을 숨길 수 없었는데, 그건 괜한 걱정. 처음부터 끝까지 요사의 쉬지 않는 두뇌활동, 손목과 손가락에 의한 타이핑은 독자로 하여금 진짜, 진짜 매력적인 성적 환상, 그리고 진정한 에로티시즘의 세계, 그러나 가끔 허파가 빠지게 웃긴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미친 척하고 아주, 아주 진지하게 그려낸다. 나, 이럴 줄 알았다.
뭘 보고 그러느냐고?
리고베르토 선생이 아름다운 루크레시아와 별거하는 1년 동안 루크레시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온갖 환상적인 성적 몽상을, 아들 폰치토의 입을 통해 밝히는 에곤 실레의 그림 속 변태적 성적 취향과 섞어서 껌벅 넘어가게 만들었다.
루크레시아는 수많은 고양이가 침대 위에서 가르릉대는 가운데 온 몸에 꿀을 바르고 리고베르토씨가 모르는 남자와 믿기지 않는 정사를 벌인 다음, 모든 과정을 남편의 귀에 대고 속살거리기도 하고, 남편의 양해 또는 권유에 따라, 젊은 시절 루크레시아를 짝사랑하다 이루어지지 않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현재 MIT 단과대학장 자리에 오른 남자와 유럽 여행을 동반해 벌어지는 침대 의식 역시 리고베르토씨에게 빠짐없이 이야기함으로써 리고베르토씨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기도 한다. 여행 중 언제나 신사적이고 도덕적인 자세를 유지한 학장 선생에게 믿기지 않는 인내에 대한 선물로 루크레시아는 아래와 같은 그림의 여자와 똑같은 자세를 구경시켜줌으로 보답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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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제르벡스, <롤라>
드디어 마지막 날 밤엔 그동안 밀린 만리장성을 쌓기도 하는데, 진짜로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정중하고 틀림없이 신사인 학장선생은 우렁차게 큰 목소리로 “돌아오라 쏘렌토로”를 노래하기 시작했고, 장안長安에서 시작해 요동반도까지 이어지는 만리장성을 쌓는 내내 이태리 칸쪼네는 물론이고 페루의 유행가와 민요에 이르기까지 온갖 노래를 함으로써, 급기야 호텔 지배인이 조용히 해달라고 전화를 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까지, 얼마나 요절복통을 하게 만드는지, 이건 읽어본 사람만 안다. 그것뿐인가. 루크레시아의 성적 모험은 동성애와, 남편과 더불어 다른 여인까지 참가하는 쓰리 섬까지, 틀림없이 요사가 주장하는 성적 가능성, 포르노가 아닌 에로티시즘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선까지 몽땅 다 그려놓는 바, 작가의 주장이 뭔가 하면, 서로 합의하여 진행하는 둘, 셋 또는 네 명까지, 절대 네 명을 넘어서지 않으며, 결코 혼자서도 아닌 정사행위다.
야할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유쾌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뿐 절대 외설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침대 위 행위를 수반한 요사의 세계관마저 읽을 수 있는 재미가 아주 진진하다. 예컨대, 애국심이라는 것은 악당의 마지막 피난처라는 등, 지역주의를 비롯한 모든 패거리 문화를 배격하는 세계인으로의 요사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재미있지만 절대 외설적이지 않아서, 난 지금 쓰는 독후감을 마치자마자, 대학졸업 후 지금 본격적으로 백수시대白首時代로 진입한 작은 아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려 한다. 백수생활이 얼마나 힘들겠나. 이거 읽으면서 기운 좀 내라고. 낄낄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