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세기 들어와 아직까진 제일 재미있게 읽은 스릴러 소설. 두 권 800여 쪽의 장편소설임에도 이틀이면 독파가 가능하다. 근데 난 엿새 걸렸다. 오지게 마신 술과 이튿날의 숙취로 이틀 동안 휴가까지 낼 정도로 벌벌 기었고, 오랜만에 토요일, 일요일 또다시 이틀 동안 완벽하고도 보람차게 놀았다. 작은 아이가 깔아준 PC 게임하느라 날 새는 줄 몰랐다. 하여간 요새 남자들은 그놈의 게임 때문에 인생 망칠 위험이 높다. 내 인생에 술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살지는 않을 거라고 후회하듯, 현대의 젊은 청년들 역시 언젠가 후회하게 될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걸 누가 보장하겠는가. 게임의 속성이 대부분 전쟁을 수반한 땅따먹기. 인류가 네 발로 걷던 시절부터 수컷들의 가장 큰 충동을 화면에다 옮겨놓았으니 완전 몰입하는 거 같다. 이래저래 문명이 발달할수록 수컷들의 경쟁력은 날로 내리막길이고, 이 경향은 앞으로 길어야 3만년 안에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아, 이런 장황하고 터무니없는 각설이 또 있을까. 책 얘기하자.
 2001년에 사폰이 써서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책 <바람의 그림자>. 당시엔 완전히 유럽 폭격과 유사했던 모양이다. 아니, 유럽을 필두로 북아메리카, 그리고 브라질을 제외한 대륙의 모든 국가가 스페인 어를 사용하는 라틴 아메리카까지 <바람의 그림자>가 휩쓸어버렸다니 그 바람이 정말 대단하긴 대단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는 2005년에야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번역이 이루어졌는데, 한국에서도 역시 베스트셀러 대열에 섰었다고 봐야겠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일단 순문학, 소위 ‘순수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으로 짐작이 가는데, 그게 뭐. 문학이면 문학이지 순문학, 장르문학, 대중문학을 따진들 무엇 하겠는가. 잘 쓴 스릴러물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안개가 끼고, 바닷가에서 밀려온 습기로 인해 음습한 바르셀로나의 한 골목길에 ‘잊힌 책들의 묘지’라는 창고가 있다. 고서점을 운영하는 홀아버지 손에 이끌려 책들의 묘지에 들어가게 된 열 살짜리 다니엘. 묘지엔 엄격하게 지켜야하는 규칙이 있으니, 처음 묘지에 들어 선택한 책은 일생에 걸쳐 마치 자기 자신인 듯 평생에 걸쳐 책을 보호해야 하는 것. 다니엘이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책 한 권을 뽑아드니 생전 처음 듣는 소설가 ‘훌리언 카락스’라는 인물이 쓴 <바람의 그림자>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 이때 주인공 다니엘의 나이 열 살. 열 살 소년에게 비밀이 있을 수 있을까? 아이는 당연히 책에 관한 자신의 의무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지만 <바람의 그림자>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결코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온갖 동네를 다니며 자신이 희귀본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따발따발 떠들고 다니기에 이른다. 무지하게 돈이 많아 직업인 고서적상은 심심풀이로 하고 있는 돈 구스타보 바르셀로가 거액을 제시하면서 자신에게 팔 것을 제안했으나 단칼에 거절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이고, 열 살 먹은 꼬마가 돈 구스타보의 조카이자 앞을 못 보는 천하의 미인 클라라에게 난생처음 사랑을 느껴 <바람의 그림자>를 줘버리고 말았다는 걸, 이걸 어째.
 다니엘이 훌리안 카락스가 쓴 <바람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의 앞에 등장하는 하이드 씨, 아니, 라인 쿠베르 씨. 심각한 화상으로 얼굴 전체가 뭉개지고, 모든 신체에 끔찍한 경화현상이 벌어진 쿠베르 씨는, 책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왜냐고? 도무지 훌리오 카락스를 참아주지 못할 정도라서 그가 쓴 모든 책을 불살라버리려는 의지 하나 때문이다. 이것을 계기로 다니엘은 <바람의 그림자>를 비롯해 훌리오 카락스에게 진지한 호기심이 생겨 카락스의 생애를 파헤치기로 결심을 하는데, 아뿔싸, 자신을 도와줄 조력자가 한 명도 없다.
 유방에게 한신과 장량이 있었고, 항우에겐 범증이, 유비에게 제갈량이, 조조에게 순욱이 있었듯 진정한 주인공한테는 언제나 출중한 조연이 등장한다. 홈즈에게 왓슨이 있었던 것처럼. <바람의 그림자>에서도 비록 뼈만 남은 알량한 체격이지만, 현명하고 깡다구 있고, 다니엘에게 충성스럽고, 불의와 파시즘과 폭력집단에 결연히 저항하는 현인wise man이 등장하니 ‘페르민’. 다니엘이 ‘잊힌 책들의 묘지’에 들른 후 몇 년이 지나 본격적인 사춘기에 접어들어 돈 구스타보의 앞 못 보는 조카딸 클라라에게 홀딱 빠진 것까지는 좋았는데(아, 이 대목에서 이순원이 쓴 <19세>를 읽어보시면 좋겠다), 사춘기의 불타는 갈증, 미인의 피부와 생식기관에 대한 말 못할 화염 같은 충동은 다니엘에게 한밤에 클라라 혼자 있는 저택에 방문하여 그냥 그녀의 냄새라도 한 번 맡아볼 것을 추동했고, 그리하여 <바람의 그림자>를 읽어주며 친해져 이젠 무람없이 클라라의 방에 들락거리던 다니엘이 깊은 밤, 열린 창문을 통해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천상의 클라라의 방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피아노 선생이자 스페인의 유망한 작곡가 아드리안 네리 씨의 벌거벗은 엉덩이를 부여잡고 콧소리를 킁킁내고 있던 것이었는데, 이게 웬 망측한 일이냐고 기분이 엉망이 된 아드리안 네리 선생이 급하게 옷을 대충 추려 입고, 자신보다 훨씬 더 기분을 잡쳐버린 우리의 다니엘의 귀싸대기를 몇 방 후려갈겨 입술을 터뜨리고는 현관 계단에서 내 팽개쳐버렸을 때, 바로 이때, 한 거지발싸개같이 현관 앞에서 밤을 보내고 있던 무숙자homeless 페르민이 등장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얘기할까?
 좋다.
 1. 페르민의 등장은 좀 과하게 설정한 티가 난다. 왜냐하면 페르민은 홈즈의 왓슨과도 비교 불가, 이이에겐 왓슨 따윈 아무것도 아니고 제갈량이나 장량 같은 치밀한 뇌 활동과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 그리고 일찍이 합종설合從說을 주장한 소진처럼 엔진 혹은 발동기를 장착한 세 치 혀를 지니고 있는 슈퍼스타이기 때문이다.
 2. 책의 또 다른 주인공, <바람의 그림자>를 쓴 훌리오 카락스와 그의 친구들이 얽히고설킨 악연이 과하게 유별나지 않나 싶다. 이 정도면 인생불운의 전 지구적 대표선수들만 추슬러 모아놓은 수준이다.
 3. 잘난 척을 좀 하자면, 훌리오 카락스의 책을 모두 찾아내 불태우려는 욕망에 가득 찬 괴기스런 인물 라인 쿠베르 씨의 정체가 처음부터 누구 아닐까, 싶다가 점점 확신에 가까워지는 기분. 즉 획기적인 반전은 아니라는 거.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최고로 즐길 만한 흥미진진한 작품이라는 거. 얼마나 재미있느냐 하면, 난 이 책이 해피 엔드로 끝날지, 아니면 비극적 종말을 고할지, 마저도 절대로 가르쳐드리지 않을 만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