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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토니 모리슨. 이이의 <빌러비드: Beloved>. 나로 하여금 아메리카 흑인문학에 매력을 느끼게 만든 작품이다. 그 후 조라 닐 허스턴, 리처드 라이트, 랠프 엘리슨, 엘리스 워커, 글로리아 네일러 등을 찾아 읽었다. 자연스레 모리슨의 다른 작품에도 호기심을 느껴왔는데, 그래서 <재즈>를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인터넷 책방 보관함 목록에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지금, 왜 이 책을 진작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고 보관만 해 놓았었을까, 한탄하고 있는 중이다. 책을 읽은 다음 이런 후회를 하게 만드는 작품을 읽었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책을 읽는 재미, 감동, 만족을 흠뻑 느끼게 해주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작가가 1931년생. 작품의 무대는 1926년. 그러나 1926년을 만들기 위한 흑인 등장인물들의 아픈 과거 배경은 1870년대 생인 남자 주인공 조 트레이스의 탄생 이전 약 20년 전까지, 그러니까 1850년대 까지 내려간다. 열여덟 살이 되기까지 자신이 틀림없이 백인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황금색 피부와 금발의 아름다운 청년 골든 그레이가 열여덟 살이 되어 드디어 독립을 하기 바로 전에,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온 늙은 흑인 하녀로부터, 자신이 도도하고 미모에 눈부신 금발의 어머니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 혼혈임을 알고, 하도 수치스러워 친부를 살해하기 위해 성인으로의 첫 번째 발길을, 흑인 아버지를 향해 가다가 사필귀정이라, 자신마저 스스로 흑인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대목 같은 것이 난데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즉 각 관련 사건이 순차적으로 나열되는 것도 아니고, 독자가 같은 감정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게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모리슨이 대단히 불친절한 작법을 구사했다고 볼 수 있겠으나, 바로 그것이 책 제목을 “재즈”라고 달 수 있는, 애초부터 그리 작정을 하고 글을 쓴 것임을, 누가 알 수 있었을까.
솔직하게 얘기해서 토니 모리슨의 <재즈>는 무대가 뉴올리언스나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아니면 뉴욕이며, 담배연기가 가득한 실내에서 쿵쿵거리는 더블베이스의 낮은 음이 착 깔려있는 청각공간에서 때론 클라리넷이, 때론 색소폰이나 트럼펫 등의 금관악기가, 작은 퍼커션과 함께 거칠 것 없고, 규칙도 없고, 그저 염화시중의 미소 같은 그들만의 소통 속에서, 악사들의 관자놀이에서 뺨을 거쳐 목에 타고 굵은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리는 광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시기가 1926년이잖은가. 스콧 조플린이 죽고 어느덧 10년이 흘러 카운터 베이시, 듀크 엘링턴 등이 찬란한 시기를 예약한 상태이며, 위대한 양대 재즈 아티스트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이 머리통에 쇠똥을 뒤집어쓰고 이제 막 세상 구경을 한 때였다. 음반시장에 블루노트 레이블은 아직 생기지도 않았고 재즈 음반, 이때, ‘음반’이 아니라 요새는 ‘비닐’이라 불리는, ‘레코드 판’은 오케, 블랙스완, 체스, 사보이, 킹, 피코크가 흑인 재즈의 메인 레이블임을 주장하고 있던 시절.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은 즉흥연주, 라고 주장할 수 있겠고, 토니 모리슨도 그의 후기에 밝혔듯이 바로 즉흥적인 연주, 작가에겐 즉흥적인 글쓰기, 예컨대 클래식 협주곡의 카덴차나, 보컬의 경우 스캣 같이 처음부터 작품의 틀을 마련하지 않고 그냥 손목 돌아가는 대로 썼다는 것. 이걸 곧이곧대로 믿으실 분은 믿으시라. 난 인정하고, 일리 있다고 생각하는 한편, 전적으로 손 가는대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 만 원 건다. 물론 꽉 짜인 규격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결과적으로 독자가 쉽사리 술술 읽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사실 재즈도 그렇다. 결코 쉽게 들리지 않는 장르, 웬만큼 도가 트지 않으면 협주/협연이 불가능한 즉흥연주와 마찬가지로 귀 명창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투자가 없으면 즐기기 쉽지 않다. 거기에 각 장章마다 등장하는 인물도 다르고, 심지어 작가 모리슨이 툭툭 등장해 교통정리를 해주기도 하는데 그게 오히려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기도 하는 거.
원문은 모르겠지만 한글로 번역한 <재즈>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음악적 리듬을 타기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대신 참으로 절묘한 문장들과, 문장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진정한 글들이 참으로 많다. 딱 하나만 예를 들어보면, 318쪽에 쉰 살이 넘은 아줌마 바이올렛 트레이스가 이렇게 조언한다.
“바로 그게 문제란다. 만일 네가 삶을 바꾸지 못하면 삶이 너를 바꿔놓을 거야. 그리고 그건 전부 네 잘못이 되지.”
책을 열자마자 상황은 마치 소설의 절정 상태 비슷하게 이르게 만들었다. 쉰 살이 넘은 화장품 외판원 조 트레이스 씨가 열여덟 살 먹은 아가씨 도카스와 바람을 피우다가, 당연히 도카스가 싫증을 느끼면서 청년을 사랑하게 되니 질투에 눈이 먼 조가 파티장에서 도카스의 어깨에 총알을 박아버린다. 총을 맞은 도카스가 끝까지 누가 자신에게 총을 쐈는지 밝히지 않고 죽는 바람에 트레이스 씨는 여전히 자유상태이지만 도카스에 대한 사랑에 이젠 죄의식까지 더해 무척 피폐해져 있다. 그리하여 며칠 후 드디어 도카스의 장례식. 장례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교회에 이제 관을 덮기 바로 전 조 트레이스의 아내 바이올렛 트레이스 여사가 도카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자 접근하더니 칼로 이미 죽은 도카스이 얼굴을 내리 찍었지만, 귀 밑에 약간의 상처만 내고는 젊은 남자들의 손에 들려 교회 밖으로 내팽개쳐진다.
이건 책을 열자마자 불문곡직하고 등장하는 장면이니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려 애쓸 필요가 없을 듯하다. 다만 이 스토리의 시작을 읽는 분이, 장면소개 때문에 책 전체를 엽기, 불륜, 부도덕 등의 색안경을 쓰실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은 꼭 첨가해야겠다. <빌러비드>에서도 그랬듯이 <재즈>에서도 아메리카의 흑인들이 받아온 불평등과 당연시된 차별, 이런 것들만 연속적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이들도 백인, 심지어 동아시아 우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사랑하고, 신뢰하고, 배신하고, 질투하고, 서로 도와주고 그렇게 사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진정한 사랑이 어떻게 공고해지는가 하는 과정이라고 읽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하여간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수많은 흐름 가운데 그래도 괜찮은 길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합당한 물결을 따라 가는 과정을 그렸다고 읽을 수도 있고, 아니다, 아니다,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 살면서 사랑하고 늙어가는 너무나 보편적인, 그래서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진지하게 말해서, 이런 책을 우린 흔히 이렇게 말한다.
필독서.